All Chapters of 명월에 비친 눈물: Chapter 11 - Chapter 20

24 Chapters

제11화

"무엇을 하는 겁니까?"진현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병법도를 감추려 애썼다. 도망칠 곳도, 변명할 틈도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났는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질문이 튀어 나왔다."설마, 남몰래 군사를 모아 역모라도 꾸미려는 것입니까?"진현무는 내게 다가와 서신을 받아 들었다."이미 보았다면 숨길 이유가 없겠군요. 사실 저는 조정의 한 대신이 민간에 심어둔 눈입니다. 각지의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요. 이 서신들은 유씨 가문이 저지르는 불법적인 소행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들의 세력이 워낙 방대하여 조정에 위협이 될까 염려한 그 대신께서, 저에게 은밀히 증거를 모으라 명하셨지요."내 마음속에 불안이 일렁거렸다.“당신이 말하는 그곳이... 설마 진양의 유씨 가문입니까?”“그렇습니다. 삼대 가문 중에서도 가장 안하무인인 자들이지요. 조정의 권력을 등에 업은 것은 모두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한 그 가문의 여식 때문입니다.”진현무는 알지 못했다. 그가 입에 올린 폐하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궁을 떠나게 만든 유시연이라는 사실을.진현무의 해명을 듣고 나니, 유씨 가문의 죄상을 밝히려 했다는 그의 정의감에 일단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줄곧 신분을 숨긴 채 내 곁을 지켜왔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의구심과 거리감이 마음 한구석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왜 진작 제게 말해주지 않았습니까?"그를 바라보는 내 눈빛에는 서운함이 짙게 묻어났다. 진현무는 조심스레 내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당신이 더 깊은 위험에 얽히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유씨 가문의 뒤를 쫓는 일은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태로운 길이니, 혹여 당신이 다칠까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허나 이제 알게 되었으니 더는 숨기지 않겠습니다.”나는 과거의 모든 연을 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내게 진현무는 세상에서 몇 안 되는,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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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 시각, 자죽산을 샅샅이 뒤지던 이형주는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채 가슴을 짓누르는 비통함과 분함에 휩싸였다.결국 무거운 발걸음으로 궁에 돌아온 그는, 궁문에 들어서자마자 매서운 눈빛으로 호위들을 향해 명령했다."쓸모없는 것들! 사람 하나 찾지 못하고, 짐이 너희를 곁에 두어 무엇 하겠느냐!"호위들은 겁에 질린 채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그러나 이형주는 그들을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명월을 향한 걱정과 자책감에 짓눌린 그는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은 사람처럼, 혼몽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한 궁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폐하, 오늘은 단오라 장터가 떠들썩합니다. 잠시 궁 밖으로 나가 구경해보시는 건 어떠하시겠습니까?"술에 취해 눈빛이 흐릿해진 이형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꿈에서 그리던 낯익은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언젠가 명월이도 이처럼 맑은 눈망울로 웃음을 지으며, 내게 궁 밖으로 나가 단오를 즐기자 청했던 적이 있었지...’그는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성큼 다가가 그 궁녀를 품에 꽉 껴안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절한 그리움과 다급함이 묻어났다.“명월아, 이제야 돌아왔구나.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갑작스러운 행동에 궁녀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다."폐... 폐하, 소... 소인은 순이라 하옵니다. 명월 언니가 아니라...""왜 궁을 떠났던 것이냐. 왜 이제야 돌아온 것이냐!"이형주는 궁녀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혼잣말을 이어갔다. 그는 다급한 손길로 궁녀의 옷고름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굶주린 듯한 입맞춤이 궁녀의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궁녀는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며 몸부림쳤다."폐하, 제발, 제발 살려주옵소서!""명월아, 드디어 너를 다시 보게 되었구나."이형주는 여전히 환각에 사로잡힌 채 궁녀를 몰아붙였다. 문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유시연은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꽉 쥔 주먹 사이로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손바닥에는 초승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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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단오의 장터는 예상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화려한 등불이 밤하늘을 수놓았고, 끊이지 않는 사람들의 발길로 거리는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하지만 이형주의 시선은 줄곧 허공을 떠돌 뿐이었다. 여전히 명월을 향한 그리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탓이었다.이형주는 꽃등 하나를 사서 조용히 물 위에 띄웠다. 강물을 따라 천천히 멀어지는 꽃등을 바라보는 동안, 그의 마음도 오래전 기억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지난날 명월과 함께 이 거리를 거닐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명월의 웃음소리는 오늘 밤 거리를 수놓은 그 어떤 등불보다도 눈부셨다.그 순간, 거리를 가득 메운 왁자지껄한 소리가 이형주의 상념을 깨뜨렸다. 길거리 놀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어린 소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그는 무엇에 홀린 듯 걸음을 옮겨 그쪽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눈매가 명월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형주는 넋을 잃은 채,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그 찰나의 몽롱함에 빠져 있던 순간, 인파 사이로 검은 그림자 몇 개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칼날이 이형주를 향해 들이닥쳤다.곁을 지키던 호위들은 바로 반응하며 이형주를 에워쌌고, 곧이어 자객들과 격렬한 혈투를 벌였다.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굉음과 비명이 사방에서 난무했으나, 이형주의 시선은 여전히 그 어린 소녀에게 머물러 있었다.머릿속이 온통 명월의 잔상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육조차 마치 남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그때 자객 하나가 호위들의 방어선을 뚫고 이형주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이형주는 살기가 코앞에 닥쳐서야 정신을 번뜩 차렸다.그는 치명적인 일격을 비껴낸 뒤, 곧장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이형주의 검법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검끝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섬뜩한 살기가 번뜩였다.허나 그토록 치열한 싸움 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었다.격전이 끝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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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명심해라. 이 약을 순이의 식사에 섞어 넣되, 반드시 그 아이가 남김없이 먹게 해야 한다.”유시연의 눈빛은 뱀처럼 음흉했다.궁녀는 공포에 질려 온몸을 떨며 약봉지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간청했다.“이... 이는 사람을 해치는 일입니다. 소인은... 소인은 감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유시연은 냉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게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 줄 방도는 얼마든지 있단다. 궁 밖에 있는 네 가족들의 안위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들에게 불행이 닥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처신하거라.”궁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유시연의 악독한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분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다음 날, 순이는 아침 식사를 마친 뒤부터 극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이형주는 타는 듯한 초조함에 곧장 어의를 불러들였다.“폐하, 이는 미첩산에 중독된 증세로 보입니다.”“아무 일 없던 아이가 어찌 갑자기 독에 중독된단 말이냐.”이형주는 차가운 시선으로 바닥에 엎드려 몸을 떠는 궁녀를 내려다보았다.“여봐라. 저 천한 계집을 당장 끌고 가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멀게 한 뒤 짐승 우리에 처박아라!”궁녀는 사색이 되어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울부짖었다.“폐하, 살려 주시옵소서! 이는 모두 마마께서 시킨 일입니다!”이형주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호위들에게 명했다.“당장 유시연을 끌고 오라.”전각으로 들어선 유시연의 얼굴에는 조금의 당황함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외려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폐하, 어찌 미천한 궁녀의 말 한마디만 믿고 저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순순히 실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제가 결코 하지 않은 일이라 말씀드린다면... 폐하께서는 제 말을 믿어주시겠습니까?”유시연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각의 문이 열리며 호위가 다급히 들어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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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이형주는 순이의 침전에서 그녀의 손을 꼭 쥐여주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순이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순아, 부디 버텨다오. 짐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살릴 것이다. 서영군이 이미 천년 설호를 찾으러 극북으로 떠났으니, 너는 괜찮아질 것이다...”순이의 의식은 점점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형주의 온기를 느낀 그녀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 목소리를 짜냈다.“폐하... 저 같은 것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지 마옵소서...”이형주는 식은땀으로 젖은 그녀의 이마를 살살 어루만졌다.“아니다. 짐은 너를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제 짐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 반드시 너를 구해낼 것이다.”그 시각, 서영군은 군사들을 통솔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극북의 땅을 향해 질주했다. 마침내 도착한 설산은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과 허벅지까지 빠지는 깊은 눈으로 가득했다. 천년 설호를 찾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험난했지만 어명을 받든 그들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설호의 발자취를 쫓았다.며칠간의 고된 수색 끝에, 한 병사가 은밀한 동굴 인근에서 설호의 선명한 발자국을 발견했다. 서영군은 즉시 동굴 주위를 포위했다. 영물의 맹렬한 저항에 맞서 격렬한 사투를 벌인 끝에, 그들은 마침내 천년 설호를 상처 하나 없이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그 길로 서둘러 진양으로 돌아온 서영군은 설호를 이형주에게 바쳤다. 어의는 지체 없이 설호의 심혈을 채취해 해독제를 만들었고, 이를 순이의 입에 흘려 넣었다.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적막 속에서, 순이의 하얗게 바랬던 얼굴에 조금씩 생기 어린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가빠지던 숨결이 점차 안정을 찾자, 이형주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한편, 독살을 모의했던 유시연은 이 일로 두 달간의 근신 처분을 받고 처소에 유폐되었다....나와 진현무는 여전히 유씨 가문의 죄상을 쫓고 있었다.어느 날, 진현무에게 익명의 서신 한 통이 도착했다. 유씨 가문이 인적 드문 산골짜기에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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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보름이 지나자 진현무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다.그간 유씨 가문의 죄증을 수집하느라 진현무는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늘 위태로운 긴장 속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교외로 나가 배를 띄우며 마음을 달래보자고 제안했다. 진현무는 내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이윽고 도착한 연못가는 고요하고 맑았다. 산들바람을 타고 은은한 연꽃 향이 코끝을 스치자, 그동안 가슴 깊이 쌓여 있던 무거움이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나는 진현무와 함께 작은 나룻배에 올라 연못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그의 노 젓는 손길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안정적이었다.나는 배 앞머리에 몸을 기대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오랫동안 마음을 짓누르던 긴장과 피로가 잔잔한 물결을 따라 서서히 멀어지는 듯했다.“저기를 보십시오.”진현무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맑은 물속을 무리 지어 노니는 비단잉어들이 있었다. 생기 가득한 풍경에 나도 모르게 화사한 웃음이 피어났다.그 순간, 나를 바라보는 진현무의 눈동자에 한없이 부드러운 빛이 어렸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참으로 곱습니다.”그 말에 두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나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마치 작은 사슴 한 마리가 뛰어다니는 듯, 심장 소리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어느덧 해는 서서히 저물어 가고 푸르던 하늘은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우리는 함께 배에서 내려, 저녁빛이 내려앉은 연못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주변이 점차 고요해지자, 세상에는 오직 두 사람의 나란한 발걸음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풀벌레 울음만이 남은 듯했다.“이 모든 날 동안 당신이 제 곁에 있어 주어, 정말 다행입니다.”진현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서서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당신이 없었다면 이 험난한 일들을 혼자 어떻게 감당했을지 모르겠습니다.”나는 터져 나오려는 부끄러움을 애써 누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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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다음 날 약속된 시간이 되어 자죽림으로 향하니, 저 멀리 익숙한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유시연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그녀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이 못된 년! 네가 사라진 뒤 폐하께서 네 대역을 세워 두고 밤낮으로 끼고 도는 것을 알고 있느냐?”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폐하의 마음속에 내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단 말인가?’내가 충격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그녀는 또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우리 아버지께서 네가 몰래 우리 유씨 가문을 조사하고 다닌다지? 그래, 대체 무엇을 알아내고 싶어 그리 쥐새끼처럼 다니느냐?”비밀리에 진행하던 일을 그녀가 어찌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숨을 고르고, 유시연을 똑바로 응시했다.“마마, 대체 무슨 속셈이십니까?”그 질문에 유시연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내게 천천히 다가오며 원한과 분노가 가득 서린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너를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 밀어 넣을 것이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지옥을 너도 똑같이 맛보아야지! 네가 떠난 뒤 폐하께서는 내게 더욱 냉담해지셨다. 네 대역인 순이 따위가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단 말이다! 내가 너를 가만둘 것 같으냐?”나는 마음속의 동요를 꾹꾹 누르며 답했다.“마마께서 이토록 광기에 사로잡히신 것은, 결국 단 한 번도 폐하의 마음을 온전히 얻지 못하셨기 때문이겠지요.”그 순간 이성을 잃은 유시연은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조롱은 집어치워라! 제 발로 이곳을 기어들어 왔으니, 순순히 살아서 나갈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유씨 가문의 죄증을 모으고 싶다고? 내가 네년만큼은 결코 살려 보내지 않으마!”말을 마친 유시연은 나를 확 밀쳐냈다. 하필 내 등 뒤로는 낭떠러지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중심을 잃고 벼랑 끝으로 추락하려던 절체절명의 순간, 옆에서 억센 팔 하나가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그 손은 내 팔을 낚아채듯 붙잡아 단숨에 벼랑 위로 끌어올렸다.놀란 가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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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궁 안, 순이는 유시연의 자리를 완벽하게 대신했다.그녀는 과거 명월의 곁에 한동안 머물렀던 적이 있어, 명월의 사소한 습관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순이는 명월의 몸짓과 걸음걸이 하나하나를 철저히 흉내 내기 시작했다.명월이 밤마다 이형주를 위해 정성껏 탕을 끓여 올리던 것을 기억해 낸 그녀는, 매일 밤 주방에 나가 탕을 달이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명월이 자수에 능하여 이형주에게 수많은 손수건을 선물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밤을 새워 자수를 배웠다. 명월이 평소 즐겨 입던 초록색 치마를 처소에 수십 벌이나 준비해 두는 치밀함도 보였다.그렇게 순이는 명월의 그림자를 제 몸에 입힌 채, 이형주의 마음속으로 잠식해갔다.그러던 어느 날, 순이가 홀로 식사를 하고 있던 처소에 유시연이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순이의 손에 들려 있던 젓가락이 겉잡을 수 없이 크게 떨리며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경계심을 드리웠다.“순이, 네년의 수단은 참으로 대단하구나. 그 짧은 시간 안에 폐하를 이토록 홀려놓다니.”순이는 태연한 척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천천히 대답했다.“마마,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는 그저 폐하를 곁에서 정성껏 보필했을 뿐입니다.”유시연이 코웃음을 쳤다.“정성껏 보필해? 웃기지 마라! 그저 명월과 닮은 그 천한 얼굴을 앞세운 것뿐이면서! 폐하의 마음속에서 내 자리를 빼앗으려는 비열한 수작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유시연은 손을 뻗어 순이의 멱살을 낚아챘다. 날카롭게 세운 그녀의 손톱이 순이의 연약한 살갗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똑똑히 들어라. 과거에 내 손가락 하나면 폐하께서 명월을 혐오하게 만들 수 있었다. 지금의 너 따위는 그때보다 더 쉽게 짓밟을 수 있다는 뜻이야.”바로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처소의 열리며 이형주가 들이닥쳤다. 분노로 눈이 뒤집힌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유시연의 뺨을 후려쳤다.“네년이 대체 명월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그 아이가 궁을 떠난 뒤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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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나와 진현무는 마을에 머물던 중, 유씨 가문이 무려 삼천 명에 달하는 병사를 은밀히 이동시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들이 현재 진을 치고 머무는 곳은 자죽산이라 했다.그 소식을 들은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죽산은 지세가 워낙 험준하여 공격하기는 어렵고 방어하기에는 더없이 유리한 곳이었다. 유씨 가문이 병력을 그곳으로 옮겼다는 것은, 이미 반역을 위한 치밀한 대비를 끝마쳤다는 뜻이다.하지만 이는 우리가 유씨 가문을 단번에 몰락시킬 결정적인 반역의 죄증을 찾아낼 수도 있다는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이번 길은 필시 죽음을 넘나드는 험난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유씨 가문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피땀을 착취해 온 유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짐을 나눌 수만 있다면, 저는 지옥 끝까지라도 함께하겠습니다.”우리는 행장을 꾸려 즉시 자죽산을 향해 떠났다. 가파른 산길은 험악했고 숲은 칼날처럼 우거져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우리의 마음속에 품은 신념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마침내 자죽산 깊은 자락에 도착했을 때, 사방에는 유씨 가문의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숲 곳곳을 촘촘히 오가는 병사들의 모습에, 우리는 숨을 죽인 채 풀숲에 몸을 웅크리고 틈을 엿보았다.이윽고 짙은 밤의 장막이 산천을 뒤덮자, 우리는 샛길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그때, 저 멀리 앞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진현무는 재빨리 내 어깨를 끌어당겨 우거진 덤불 뒤로 숨겼다.횃불을 든 병사 무리가 우리가 숨은 덤불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자네도 들었나? 유씨 가문이 이번에 큰 곤경에 빠진 모양이 걸세. 결정적인 증거를 누군가에게 잡히는 바람에, 대감께서 요새 밤낮으로 안절부절못하신다더군.”“쯧쯧, 우리 같은 일개 병사들이야 알 바 아니지. 위에서 목숨 걸고 지키라 하니 지킬 뿐, 괜히 헛소문 퍼뜨리다 목이나 날아가지 말게나.”나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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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눈앞의 절경에 취해 있던 찰나, 진현무가 갑자기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조심하십시오. 근처에 누군가 있습니다."그 말에 나는 진현무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때 웅성거리는 덤불 속에서 소복을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기운이 정정했고, 눈빛에는 깊은 지혜가 서려 있었다. 노인은 우리를 가만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두 젊은이,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해를 끼치려는게 아닙니다."진현무는 나를 등 뒤로 감싸안으며 물었다."어르신은 누구십니까? 어찌하여 이런 깊은 산중에 계신 겁니까?"노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저는 이 산에 은거한 지 수십 년이 된 사람입니다. 오늘 두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것을 보고 나와 보았는데, 기색을 보아하니 보통 풍파를 겪은 것이 아닌 듯싶군요.”나와 진현무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잠시 망설인 끝에, 우리는 유씨 가문의 악행과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급한 상황을 간략히 털어놓았다.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노인의 안색이 서서히 굳어졌다."유씨 가문의 작태는 실로 이 나라의 기둥을 갉아먹는 좀벌레와 같지요. 정의를 위해 그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 그대들의 용기가 참으로 가륵합니다."말을 마친 노인은 품 안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빛바랜 고서 한 권을 꺼내 진현무에게 건넸다.“이것은 제가 오래전 우연히 얻은 책입니다. 군사를 운용하는 법과 진법, 그리고 정교한 병기를 만드는 방법까지 기록되어 있지요. 유씨 가문이 군세를 키우며 병력을 훈련시키고 있다 하니, 필시 그와 관련된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을 것입니다. 부디 이 책이 유씨 가문의 악행을 밝혀내고, 그들을 무너뜨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진현무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고서를 받아들며 고개를 숙였다."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노인과 작별한 후, 나와 진현무는 서둘러 하산길에 올랐다. 길을 재촉하는 와중에 틈틈이 고서를 살펴보니, 그 안에 담긴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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