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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송태경이 윤채원을 응석받이로 받드는 행태는 가히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지경이었다.호위무사로서 송태경은 오직 윤채원만을 위해 움직였다.함께 저잣거리를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봄나들이를 떠났다. 윤채원이 그저 흘리듯 성서 쪽 노포의 다과가 먹고 싶다고 한마디만 해도, 송태경은 새벽부터 줄을 서서 그것을 손에 넣었다.윤채원이 저잣거리를 걷다 지치면, 송태경은 다른 이들의 경악 어린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길 한복판에서 기꺼이 한쪽 무릎을 꿇고 정성스럽게 그녀의 발목을 주물러 주었다.신분이 고귀한 영왕으로 돌아온 뒤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윤채원이 비단을 좋아한다고 하자, 송태경은 사람을 보내 시중의 비단을 통째로 사들여 바쳤다.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난옥을 갖고 싶다 하자, 수천 명의 사람을 사방으로 풀어 그것을 찾아냈다.심지어 윤채원이 누군가가 눈에 거슬린다고 한마디만 하면, 이튿날 그 사람은 경성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영왕 송태경을 아는 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전하께서 완전히 미치셨다고. 윤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 윤채원에게 단단히 빠져버렸다고.그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그날도 윤채원이 떼를 써서 함께 산으로 꽃구경을 가던 길이었다.상상도 못 한 산적 무리의 습격이 이어졌다.쿠우웅!마차가 들이받혀 사정없이 뒤집혔고, 송태경의 등이 마차 문에 거세게 처박혔다.날카로운 나뭇조각들이 살점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붉은 피가 옷을 흥건히 적셨다.그 격렬한 고통 속에서도 송태경의 두 팔은 품 안의 윤채원을 단단히 감싸 안고 있었다. 덕분에 윤채원은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태경 오라버니!”윤채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잘게 떨리는 손이 송태경의 피 묻은 얼굴을 더듬었다.“오, 오라버니... 피, 피가 나요...”송태경은 괜찮다며 달래려 했으나, 입을 열자마자 목구멍에서 붉은 핏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의식이 아득해지며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직전, 귓가에 윤채원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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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송태경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의원이 몇 번이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으나, 송태경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그는 오직 윤채원만을 위해 창원에 천 개의 모란을 준비했다.윤채원이 가장 사랑하는 꽃이 모란이었기에, 꽃송이 하나까지 송태경이 직접 고르고 살폈다.올라갈 음식 역시 직접 검수했다. 전부 윤채원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혹여 입맛에 맞지 않을까 기어이 먼저 맛을 보기까지 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밤하늘을 수놓을 찬란한 불꽃놀이까지 준비했다. 하늘 위로 그녀의 이름이 아름답게 피어나도록 특별히 고안한 불꽃이었다.절친한 벗인 고태영이 그 정성을 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전하, 남들이 보면 당장이라도 보위에 오르실 준비를 하시는 줄 알겠습니다.”송태경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할 뿐이었다.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반 시진이 남아 있었다.하지만 반 시진이 지나고 한 시진이 더 흘러도 윤채원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송태경은 꽃으로 둘러싸인 정자에 선 채, 무의식적으로 상자 속 옥을 매만졌다.그가 윤채원에게 십여 차례나 전갈을 보냈으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송태경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즉시 수하들을 움직였다.“윤채원의 오늘 행적을 조사하거라.”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가 올라왔다.“윤채원 아가씨께서는 현재 부운각에 계십니다. 오늘 진보각에서 새 장신구를 사신 뒤, 향운루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지금은 부운각에서 새로 나온 연지를 고르고 계십니다.”송태경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굳어졌다.'연지를 고르고 있다고?''시간을 잊은 걸까? 하지만 어제 분명 내가 직접 귀띔까지 해주었는데...'송태경은 옥이 든 상자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장 말을 몰아 부운각으로 향했다.부운각은 주로 여인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송태경이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점원이 당황하며 그를 가로막았다.“나리, 이곳은 남정네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비켜라!”그때,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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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그날의 진실을 알아내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쯤은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일각이 여삼추라 했던가.시간이 흐를수록 송태경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쿵, 쿵, 쿵.불안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송태경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어둠이 내린 마당을 노려보았다.그때, 삭풍을 가르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그림자 속에서 암위가 모습을 드러내자, 송태경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알아냈느냐?”급박한 부름에도 암위는 입을 여는 대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전하, 폐하께서 지금 당장 입궁하라 하십니다.”송태경의 미간이 좁혀졌다.“형님의 옥체에 문제라도 생기신 게냐?““전갈을 가져온 내관께서는 다른 말씀은 없으셨지만 아주 다급해 보였습니다.”황궁은 대낮처럼 밝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송태경이 양심전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파스스스!두꺼운 종이 뭉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송태경의 가슴을 사정없이 때렸다.이윽고 바닥으로 서신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네놈이 저지른 이 황당무계한 짓거리를 보아라!”황제의 안색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영왕의 신분으로 고작 저딴 여자를 위해 다른 사람의 호위무사 노릇을 하고 다녔단 말이냐?”송태경은 묵묵히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서신들을 주워 올렸다.내용을 훑어내려 가던 송태경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잘게 떨렸다.밀서에 적힌 내용은 전부 윤채원에 관한 것들이었다.윤채원이 과거 대감댁의 공자와 함께 용호에서 뱃놀이를 즐긴 지 사흘 만에 그 공자가 기존의 혼약을 파기했다는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돌연 승상가의 공자와 함께 절을 찾아 향을 피웠고, 그 일로 승상가 공자가 조강지처를 내쫓으려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는 폭로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승상가의 안주인이 보통 성깔이 아니었던 탓에 두 집안은 지금까지도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너는 그년이 진흙 속에서 피어난 티 없이 맑은 백합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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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영왕의 생신 연회는 혀를 내두를 만큼 사치스럽고 성대했다.경성의 내로라하는 명문가 인물들이 남김없이 몰려들었다.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신비로운 영왕의 실체를 단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함이었다.송태경은 높은 누각 위에서 어두운 눈빛으로 왕부의 입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먼지투성이가 된 고태영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송태경은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다.”고태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가득했다.“궁녀와 태감 수십 명을 이 잡듯 뒤져 물어봤다. 그날, 윤채원은 단 한 번도 어화원에 간 적이 없었다.”송태경의 눈빛이 얼어붙었다.심장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꽉 움켜쥐인 듯 숨이 턱 막혔다.모든 것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가장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던 것이다.그는 사람을 잘못 알고 있었다.같은 시각, 왕부의 입구.윤채원은 명문가 영애들에게 둘러싸인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세상에,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하다! 역시 영왕 전하셔!”한 영애가 호들갑을 떨며 감탄했다.“그럼, 당연하지.”다른 영애가 냉큼 맞장구를 치며 윤채원의 안색을 살폈다.“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진보각의 그 귀한 보물들을 우리 채원이를 위해 통째로 사주셨겠어? 이번 생일에도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선물을 보내셨잖아.”윤채원은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올렸다.주변에서 쏟아지는 아부와 시기 어린 시선이 온몸을 짜릿하게 적셨다.윤기태 역시 안면 가득 희색을 띠며 관원들의 아첨에 둘러싸여 있었다.경성에서 완전히 몰락해가던 윤씨 가문이 언제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의기양양해진 윤기태는 은근히 뼈 있는 말을 흘렸다.“허허, 자네들이 짐작한 것이 맞네. 최근 영왕 전하께서 우리 채원이를 무척이나 아끼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모양이야. 어쩌면 오늘, 아주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영왕 전하 납시오!”그때, 하인의 우렁찬 목소리가 연회장을 꿰뚫었다.순간, 장내의 모든 시선이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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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연회장이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윤채원의 얼굴에서 미소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무, 무슨 둘째 외삼촌이요? 태경 오라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지팡이를 짚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한 명이 집사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 주름 가득한 얼굴의 노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윤채원을 바라보았다.“이 아이가 내 새색시가 될 아이란 말인가? 좋군, 아주 좋아.”“이쪽은 내 둘째 외삼촌이시다.”송태경이 덤덤하게 소개했다.“부인과 사별하신 지 오래되어 줄곧 새 장가를 들고 싶어 하셨지.”윤채원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말도 안 돼요! 태경 오라버니, 이런 농은 조금도 재미없단 말이에요!”그녀의 눈에 절망과 분노가 차올랐다.“태경 오라버니, 장난하시는 거지요? 저 사람은 제 할아버지뻘이라고요!”“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영왕 전하의 함자를 함부로 입에 올리느냐!”짝!호위무사가 윤채원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가 돌아간 윤채원의 한쪽 뺨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기태가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전하, 무슨 오해가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전하께서는 분명 우리 채원이를...”“대감.”송태경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목소리는 서리가 내린 듯 차가웠다.“둘째 외삼촌께서 영애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대감께서 이 혼사를 허락하신다면, 저 역시 윤씨 가문을 박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침 윤씨 가문에서 올린 세자 책봉 상소문이 조정에 꽤 오래 묶여있지 않습니까?”윤기태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일단 세자 책봉이 성사되면 윤씨 가문은 작위를 한 대 더 세습할 유망한 발판을 얻게 되니, 이야말로 가세를 일으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아버지!”윤채원은 공포에 질려 윤기태의 소매를 움켜쥐었다.“동의하시는 건 아니죠? 제 나이는 고작 열여섯이란 말이에요!”윤기태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윤채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영왕 전하의 외가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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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서북왕부.거울 속에 비친 화려한 혼례복 차림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니 윤해인은 여전히 꿈을 꾸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평생 병상에 누워 있는 산송장 같은 사내에게 시집가 독수공방하며 살 줄 알았다.하지만 운명은 지독한 장난을 걸어왔다.조씨 가문에 발을 들인 첫날, 조도진이 눈을 뜬 것이다.그날 윤해인은 침상 곁에 서서 그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수년간 잠들어 있던 사내.창백한 얼굴 위로 깊은 음영을 드리운 뚜렷한 이목구비와 긴 속눈썹은 마치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 같았다.'이렇게 잠들어 있지만 않았어도 천하를 뒤흔들었을 텐데.'그렇게 나직한 한숨을 내쉬던 찰나였다.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조도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윤해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치는 사이, 조도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칠흑처럼 어둡고 짙은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꿰뚫었다.시선이 얽힌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여, 여봐라! 이분이 깨어나셨다!”바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방 안을 찢었다.그 이후의 일들은 마치 주마등처럼 정신없이 흘러갔다.의원들이 구름처럼 밀려와 맥을 짚고, 조씨 가문의 어른들이 눈물을 흘리며 방 안을 가득 메웠다.윤해인은 그 난리통 속에서 구석에 멍하니 선 채, 조도진이 서서히 의식을 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조도진이 완전히 깨어난 것을 확인한, 그의 어머니 유미령은 그 자리에서 무릎까지 꿇었다. 그녀는 윤해인의 두 손을 다급하게 움켜쥐며 오열했다.“해인아, 네가 우리 왕부의 복덩이로구나!”얼마 후, 조도진이 윤해인을 단독으로 대면하기를 청했다.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내 윤해인은 파혼을 통보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두 가문의 혼사는 줄곧 윤씨 가문이 조씨 가문에 과분하게 매달리는 형국이었으니까.애초에 왜 이 혼사를 허락했는지조차 의문이었는데, 조도진이 깨어났으니 이제 이 억지스러운 인연을 이어갈 이유도 없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윤해인이 먼저 입을 열기도 전에 조도진이 먼저 선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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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장내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저분, 영왕 전하 아니야?”“방금 뭐라고 하신 거지? 결혼하지 말라고? 설마 신부를 가로채려는 건가?”“세상에. 세자 저하께서 이제 막 깨어나셨는데, 혼례식에 이게 무슨 난리람...”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윤해인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송태경.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맺혔다. 오랫동안 잠 한숨 자지 못한 듯, 송태경의 눈가에는 붉은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그에게 시집가지 마라.”송태경이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읊조렸다.윤해인은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끝을 감추며 억지로 이성을 붙잡았다.“송태경,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냐?”목소리에서 지독할 정도의 한기가 배어 나왔다.“네가 그토록 아끼는 윤채원이 질투할까 봐 두렵지도 않은가 보네.”송태경의 숨이 턱 막혔다.눈동자 너머로 짙은 회한과 고통이 사정없이 소용돌이쳤다.“내가... 사람을 착각했다.”그가 수많은 감정을 억누르며 낮게 속삭였다.“해인아, 삼 년 전 내가 첫눈에 반했던 사람은 윤채원이 아니라 너였다. 지난 세월 동안 내가 눈이 멀어 널 몰라보고 엉뚱한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다.”송태경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삼 년 전 봄날의 잔치에서, 네가 나무 위에 올라가 새둥지를 구했던 날을 기억하느냐? 그날 난 네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네 뒷모습만 보고, 그게 윤채원인 줄로만 착각했었지.”윤해인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 있을까.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던 새둥지를 구하려 나무 위로 올라갔던 그 봄날을.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저 멀리 나무 그늘 뒤에 우뚝 서 있던 사내를 어렴풋이 보았었다. 그저 지나가는 행인이라 생각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는데.'설마… 그때 그 사내가 송태경이었단 말이야?'침묵하는 윤해인을 보며 송태경은 조바심이 났는지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이미 다 조사해서 알아냈다. 윤채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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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장내가 순식간에 술렁였다.영왕부의 재력은 가히 나라의 재정과 맞먹을 정도였다. 순간, 윤해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녀는 조도진이 오랜 세월 관직에 몸담았기에, 이 거래를 거절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바로 그때, 조도진의 입술 틈새로 서늘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그럴 필요 없습니다.”이윽고 조씨 가문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유미령은 거침없이 걸어와 윤해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해인이는 조씨 가문의 어엿한 세자빈이지 결코 거래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윤해인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왈칵 뜨거운 온기가 차올랐다.송태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시선을 돌려 윤해인을 응시했다. “해인아... 제발, 나와 같이 가자. 응? 내 평생을 바쳐서라도 속죄하겠다.”비참할 정도로 처절한 애원이었다.윤해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드러난 눈동자에는 오직 시린 결연함만이 고여 있었다.“싫다.”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집례관을 바라보았다.“혼례를 마저 진행해 주세요.”송태경의 눈에 서렸던 고통이 찰나의 순간, 번뜩이는 광기로 뒤바뀌었다.“누가 감히!”송태경의 포효가 식장을 찢어발겼다.그때, 호위무사 하나가 신속하게 다가와 송태경의 귀에 대고 나직이 아뢰었다.“영왕 전하, 바깥은 모두 준비되었습니다.”윤해인의 심장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그녀는 송태경을 매섭게 쏘아보았다.“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송태경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서늘한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밖에 암위들을 깔아 두었다. 네가 나와 함께 가겠다고 약조하지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순식간에 대전 안이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잠겼다.윤해인의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너 미쳤어?”“그래, 미쳤다.”송태경은 윤해인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한 글자씩 씹어 뱉었다.“네가 다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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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윤해인은 송태경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보상이라니.이미 뼈와 살에 깊숙이 박혀 버린 흉터들을 대체 어떻게 보상한단 말인가.윤해인은 차갑게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문을 거칠게 닫아걸었다.송태경이 문을 두드리며 저녁을 먹으라고 나직하게 부르기 전까지, 그녀는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문을 열고 나섰을 때, 윤해인은 순간 멈칫했다.송태경은 수수한 무명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단단하고 선이 굵은 팔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전부 윤해인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네가 한 거야?”윤해인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응.”송태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다른 사람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윤해인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윤채원을 위해서 배운 요리 솜씨인가 보지?”송태경의 손가락이 굳어졌다.그의 짙은 눈동자 위로 처참한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해인아, 제발... 그 애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줘.”하지만 윤해인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식탁에 마주 앉은 순간부터 윤해인은 가시 돋친 칼날을 거침없이 들이밀었다.“윤채원이 단 음식을 좋아하잖아. 예전엔 그 애한테 매일 이런 걸 만들어 줬어?”“그 애에게 줄 꽃을 꺾으려 벼랑을 타다 떨어질 뻔했을 땐, 정말 목숨 아까운 줄 몰랐나 봐?”“가슴 팍에 자기 이름을 새긴 걸 보고 윤채원이 감격해서 울기라도 하던가?”비수가 되어 날아간 말들이 송태경의 심장을 사정없이 헤집었다.그는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견디듯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나중에는 그저 마비된 사람처럼 멍하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변명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윤해인은 그 처참한 꼴을 보며 지독한 쾌감을 느꼈다.이윽고 식사가 끝났다.윤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송태경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해인아.”그는 윤해인의 앞으로 가죽 채찍을 내밀었다.순간, 윤해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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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송태경은 꿈을 꾸었다.꿈속의 봄날, 어화원을 비추는 햇살은 더없이 따스했다.그는 다른 사람을 따라 자리를 뜨지 않았다.그저 나무 아래에 서서, 하얀 치마를 입은 소녀가 조심스럽게 새둥지를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가볍게 바닥으로 뛰어내린 그녀가 치맛자락의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이윽고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이 송태경의 눈동자와 똑바로 맞부딪쳤다.송태경은 성큼 앞으로 다가갔다.이윽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안녕. 내 이름은 송태경이다. 너한테 관심이 생겼느니라.”소녀는 눈을 깜빡이더니, 새침하게 턱을 치켜올렸다.“어라? 왜?”“예쁘니까.”송태경이 나직하게 웃었다.소녀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귓가에는 이미 붉은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그렇게까지 내가 좋다면, 특별히 이 귀한 몸과 아는 사이가 될 기회를 주도록 하지.”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던 송태경은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꿈속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열렬한 구애 끝에 그녀가 마지못한 척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아끼며 품에 안았고, 그녀는 그의 품에 기대어 온갖 어리광을 피웠다.마침내 혼례식을 올렸다.수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식을 마친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붉어진 얼굴로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태경아, 평생 나한테 잘해줘야 해.”“그럴게.”송태경이 미소를 지었다.“평생토록.”“영왕 전하! 영왕 전하!”호위무사의 다급한 부름이 송태경을 꿈속에서 강제로 끌어냈다.송태경은 번쩍 눈을 떴다.이윽고 텅 빈 처소가 눈에 들어왔다. 등 뒤와 가슴팍에서 밀려오는 극심한 통증이 잔인한 현실을 사정없이 일깨웠다.혼례도, 서로를 향한 사랑도 없었다.남은 것은 오직 피폐하게 찢겨 나간 상처뿐이었다.“해인이는... 윤해인은 어디 있느냐?”송태경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정원에 계십니다.”의원이 공손히 답했다.송태경은 만류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억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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