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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By:  삼심귀일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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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했어요. 제가...조씨네 그 단명할 인간한테 시집갈게요.” 대청 아래에 선 윤해인의 붉은 입술 끝이 비틀려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순간, 윤기태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이윽고 그가 의자를 박차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탐욕으로 가득 찬 눈가의 주름이 단숨에 활짝 펴졌다. “해인아, 드디어 마음을 굳힌 게냐? 잘 생각했다! 조씨 가문 쪽에서 혼사를 서두르고 있으니 보름 안에는 서북으로 떠나야 할 게야. 필요한 게 있다면 이 아비가 즉시 사람을 시켜 준비해 주마...” “겨우 그뿐인가요?” 윤해인이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아버지가 그렇게 애지중지하시는 그 사생아 년 대신 시집을 가 주는 건데, 고작 그게 끝이냐는 말이에요. 적당한 성의 표시라도 하셔야죠.” 순식간에 대청 안의 공기가 얼어붙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윤기태의 안색 역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말버릇이 그게 무엇이냐! 사생아 년이라니, 엄연히 네 친동생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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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장

“같은 어머니 배 속에서 나와야 진짜 동생이지요.”

윤해인의 입꼬리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허공을 향한 눈동자에는 서슬 퍼런 냉기만이 가득했다.

“그 애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배신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일 뿐입니다. 저는 평생 그런 걸 동생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윤기태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대가 울컥 솟아올랐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씩씩거리던 그가, 발작하기 직전 간신히 이성을 붙들었다.

탁.

거칠게 내려놓은 찻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윽고 윤기태가 깊은 숨을 토해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냐?”

“은자 백만 냥입니다.”

윤해인이 붉은 입술을 매끄럽게 열어 속삭였다.

“그리고 제가 시집가고 나면, 송태경을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는 사생아의 호위무사로 붙여주세요.”

윤기태의 안색이 하얗게 굳었다.

미치광이를 보듯 딸을 쏘아보는 눈빛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네가 정녕 미쳤구나! 은자 백만 냥이면 내 전 재산을 내놓으라는 소리가 아니냐! 게다가 송태경은 네가 목숨처럼 아끼던 호위무사가 아니더냐? 그놈에게 시집가겠다며 온 집안을 뒤흔들어 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혼인을 하면서 그놈을 두고 가겠다는 게냐?”

“그저 수락하실 건지 말 건지만 말씀해 주시지요.”

윤해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몸을 돌리는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쾅!

“좋다!”

윤기태가 탁자를 사정없이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네가 서북으로 떠나는 날, 약조한 두 가지는 즉시 이행해 주마.”

윤기태에게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이 골치 아픈 혼사를 하루라도 빨리 매듭짓고 싶을 뿐이었다.

과거 조씨 가문의 외아들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절, 윤기태는 서둘러 정혼을 맺었다. 본래는 아끼는 작은딸 윤채원을 그곳으로 시집보내 탄탄대로를 걷게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조씨 가문의 외아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의원은 그가 스물다섯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할 것이라 단언했다.

곱게 키운 윤채원이 평생 수절하며 고생하는 꼴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윤기태는, 그제야 윤해인 역시 제 딸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었다.

윤해인은 대답 대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등줄기는 베일 듯이 곧게 뻗어 있었다. 평생을 오만하게 살아온 그녀는 단 한 번도 남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문지방을 넘어서려던 찰나, 등 뒤에서 윤기태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와 꽂혔다.

“재물을 탐하는 것은 이해한다만... 너는 송태경을 가장 아끼지 않았느냐? 어찌 그를 선뜻 채원이에게 내주겠다는 게냐?”

윤해인의 손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송태경.

그 이름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심장 가장 깊고 부드러운 곳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윤해인은 애써 발을 내디뎌 문지방을 넘어섰다. 그러곤 윤기태와 그의 질을 통째로 밀어내듯 문을 닫아걸었다.

처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칠흑 같은 밤이었다.

송태경의 처소 앞을 지나치던 순간이었다.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억눌린 신음이 발길을 붙잡았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안쪽의 광경이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송태경은 침상 머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그 발치에는 초상화 한 장이 걸려 있었다.

그가 두 눈을 감은 채 목젖을 들썩였다. 낮고 거친 숨결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관능적이었다.

“채원아... 내 사랑... 착하지...”

윤채원의 초상화였다.

그녀의 성인식 생일 잔치 때 그린 그림이었다. 소매가 넓은 상의와 주름이 아름답게 잡힌 치마를 입은 윤채원은 청순하고도 순진무구하게 웃고 있었다.

지이익.

윤해인의 손톱이 비단 자수 손수건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속으로 윤기태가 던졌던 질문의 답을 내렸다.

‘그 사람 역시 아버지와 똑같으니까요. 오직 윤채원만을 갈망하니까요.’

그 쓰라린 자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요동치며 오장육부를 불길로 짓눌렀다.

삼 년 전, 송태경을 처음 만난 건 호위무사를 선발하던 날이었다.

기골이 장대한 사내들이 늘어선 연무장에서 윤해인의 시선은 단박에 그에게 꽂혔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의 외모가 가장 눈부셨으니까.

팔 척에 달하는 훤칠한 키,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 게다가 칼로 깎아지른 듯한 이목구비까지. 특히나 얼음을 갈아 넣은 듯 서늘한 칠흑빛 눈동자가 압도적이었다.

윤해인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탓에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못했다. 매사 규율을 우습게 여기며 제멋대로 자란 그녀였기에 고지식할 정도로 법도를 지키는 그를 골려주고 싶다는 장난기가 발동했었다.

하지만 지난 삼 년 동안, 송태경은 그야말로 요지부동이었다.

일부러 취한 척 그의 가슴팍으로 쓰러지면,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고양이처럼 침상 위에 던져두었다.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비단 옷만 걸친 채 한밤중에 그의 방문을 두드리면, 넓은 망토로 그녀의 몸을 빈틈없이 감싸 정중하게 방으로 돌려보냈다. 심지어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척 연기를 했을 때조차, 그는 거침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그녀를 구하면서도 허리께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아무리 유혹하고 흔들어대도 그는 철벽처럼 예의를 갖추며 그녀를 큰아가씨라 불렀다.

하지만 윤해인은 그런 그에게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감정이 시작되었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외로웠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일곱 살 되던 해, 윤기태는 밖에서 사생아를 데려왔다.

그 사생아의 이름은 윤채원.

윤해인보다 고작 석 달 늦게 태어난 아이였다.

즉 윤기태는, 어머니 이보화와 혼인한 십 년이란 세월 중 무려 구 년 동안이나 밖에서 첩을 거느리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날, 윤해인이 굳게 믿었던 평온한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당시 어머니의 뱃속에는 윤기태의 둘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출산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윤기태를 지독히도 사랑했던 이보화는 이성을 잃고 악을 쓰며 울부짖었고, 결국 그날 밤 극심한 충격으로 태기가 가라앉고 말았다. 의원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어머니와 태중의 아이, 두 목숨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날 이후로 윤해인은 윤기태를 뼈저리게 증오하게 되었고, 윤채원 역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윤해인은 본가에서 나와 홀로 공부를 했고, 홀로 밥을 먹으며 외롭게 자라났다. 세월이 흘러 수려한 미모를 자랑하게 된 윤해인이 외출할 때마다 한량들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자, 그녀는 그제야 호위무사를 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만난 첫 번째 호위무사가 바로 송태경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나 송태경이 그림자처럼 곁을 지켰으니까.

가벼운 호기심과 도발에서 시작된 감정은 어느덧 깊은 연정으로 번져갔다. 하지만 삼 년이라는 그 수많은 밤낮 동안, 송태경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천성이 무심하고 차가운 사내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날, 송태경이 윤채원의 초상화를 붙들고 추잡한 짓을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이윽고 그가 마친 직후, 그림자 하나가 창문으로 뛰어드는 것까지 지켜보게 되었다.

“전하, 이 호위무사 노릇은 대체 언제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전하께서는 존귀하신 몸이거늘, 천하에 탐나는 여인이 누군들 없겠습니까? 윤채원에게 첫눈에 반하셨다면 당장 폐하께 혼인 교지를 내려달라 청하시면 그만인 것을, 어찌 그리 순정을 바치십니까. 그 언니 밑에서 호위무사 노릇을 하며 겨우 얼굴이나 보시겠다니요.”

송태경이 냉담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조사해 보니 채원이는 사생아라 어릴 때부터 모진 고생을 하며 자라 마음이 유약하다더군. 갑작스러운 혼인은 아이를 겁먹게 만들 뿐이다. 더군다나 워낙 순수한 아이라 나의 지위로 억누르고 싶지 않다. 차근차근 다가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게 만들 생각이다.”

“아이고, 황실에 어찌 이토록 지독한 정을 쏟아붓는 분이 태어나셨을꼬. 저는 윤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매일같이 유혹하길래 조금이라도 흔들리신 줄 알았습니다. 그분은 경성에서도 소문난 절세가인 아닙니까? 내로라하는 명문가 자제들 중 그녀를 마음에 품지 않은 자가 없거늘...”

송태경이 나직하게 비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윤해인을 영겁의 빙하 속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했다.

“그래 보았자 내 알 바 아니다. 그 계집은 채원이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따라가지 못하니까.”

한 자, 한 자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심장에 박혔다.

그 순간, 윤해인의 마음속에서 송태경에 대한 마지막 연정마저 흔적 없이 사그라졌다.

방 안의 열기가 얼마나 이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오늘 밤의 송태경은 좀처럼 절정에 도달하지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윤해인은 입꼬리를 차갑게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세차게 문을 밀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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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어머니 배 속에서 나와야 진짜 동생이지요.”윤해인의 입꼬리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허공을 향한 눈동자에는 서슬 퍼런 냉기만이 가득했다.“그 애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배신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일 뿐입니다. 저는 평생 그런 걸 동생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습니다.”윤기태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대가 울컥 솟아올랐다.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씩씩거리던 그가, 발작하기 직전 간신히 이성을 붙들었다.탁.거칠게 내려놓은 찻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이윽고 윤기태가 깊은 숨을 토해내며 물었다.“원하는 게 뭐냐?”“은자 백만 냥입니다.”윤해인이 붉은 입술을 매끄럽게 열어 속삭였다.“그리고 제가 시집가고 나면, 송태경을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는 사생아의 호위무사로 붙여주세요.”윤기태의 안색이 하얗게 굳었다.미치광이를 보듯 딸을 쏘아보는 눈빛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네가 정녕 미쳤구나! 은자 백만 냥이면 내 전 재산을 내놓으라는 소리가 아니냐! 게다가 송태경은 네가 목숨처럼 아끼던 호위무사가 아니더냐? 그놈에게 시집가겠다며 온 집안을 뒤흔들어 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혼인을 하면서 그놈을 두고 가겠다는 게냐?”“그저 수락하실 건지 말 건지만 말씀해 주시지요.”윤해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몸을 돌리는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쾅!“좋다!”윤기태가 탁자를 사정없이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네가 서북으로 떠나는 날, 약조한 두 가지는 즉시 이행해 주마.”윤기태에게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이 골치 아픈 혼사를 하루라도 빨리 매듭짓고 싶을 뿐이었다.과거 조씨 가문의 외아들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절, 윤기태는 서둘러 정혼을 맺었다. 본래는 아끼는 작은딸 윤채원을 그곳으로 시집보내 탄탄대로를 걷게 할 요량이었다.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조씨 가문의 외아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의원은 그가 스물다섯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할 것이라 단언했다.곱게 키운 윤채원이 평생 수절하며 고생하는 꼴을 눈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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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사흘 뒤.윤해인은 홀로 침소 안에서 혼례복을 입어보고 있었다.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밤이었다.방문을 열고 막 나선 순간, 누군가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나타나 그녀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큭!코를 찌르는 독한 약 냄새가 순식간에 밀려들었다.윤해인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으나, 얼마 못 가 온몸의 힘이 풀리며 깊은 암흑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는 온통 암전 상태였다.안대로 눈이 가려진 채, 두 손은 의자 뒤로 단단히 묶여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쫘악!첫 번째 채찍이 사정없이 날아와 내리치자, 윤해인은 등 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허리를 활처럼 꺾었다.거친 밧줄이 손목을 파고들어 살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시야를 가로막은 칠흑 같은 천 때문에 공포는 배가 되었다. 윤해인은 입술을 짓씹어 피를 흘리며 신음을 꾹 삼켰다.“감히 거슬러서는 안 될 사람의 눈 밖에 난 죄다.”형을 집행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아득한 나락에서 들려오는 듯했다.쫘악! 쫘악! 쫘악!채찍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살점이 처참하게 뜯겨 나가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윤해인은 이빨이 으스러질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며 이를 악물었다. 결코 저들에게 비명조차 들려주지 않겠다는 비장함이었다.‘대체 누구지?’‘누가 나한테 이런 짓을 하도록 지시한 걸까.’가혹한 형벌은 의식이 하얗게 지워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정신이 혼미해진 그때, 머리 위로 낯익은 목소리가 떨어졌다.“전하, 분부하신 일을 모두 마쳤습니다.”사내가 극진히 아뢰었다.그리고 이어지는 대답은 윤해인의 온 신경을 난도질하기에 충분했다.“음. 데려다 놓아라.”단 한 마디였다.그 순간, 온몸에서 흐르던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송태경이었다.윤채원에게 가볍게 채찍을 휘둘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려 아흔아홉 대의 매질로 되돌려준 것이었다.등 뒤를 짓누르는 극심한 고통과 심장을 헤집는 배신감이 온몸을 덮쳐왔다.윤해인은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별채 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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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호위무사들이 줄을 지어 연회장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들이 들고 있는 상자 안에는 눈이 멀 것만 같은 귀한 보물들이 가득했다.값비싼 서화, 진귀한 보석, 그리고 온천 장원의 토지 문서까지.그때, 연회장이 발칵 뒤집혔다.“이, 이게 전부 영왕 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이라고?”“지난번 진보각을 통째로 빌려 윤채원 아가씨에게 선물했다더니, 정말이었나 보군. 이제 완전히 날개를 달았어.”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빗발쳤다.사람들의 시선이 은근슬쩍 윤해인에게로 쏠렸다. 동정과 비웃음이 섞인 눈빛이었다.외모도, 고귀한 적녀라는 신분도 분명 윤해인이 한참 앞서 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의 눈에 윤해인은 그저 비참한 패배자일 뿐이었다.윤해인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선상 밖으로 걸어 나갔다.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깊이 숨을 들이쉬려는데, 등 뒤에서 윤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왜 혼자 여기 있어?”주변에 빈객도, 윤기태도 보이지 않자 윤채원은 가차 없이 가식을 벗어던졌다.“그거 알아? 아버지가 그러는데, 언니가 그 단명할 녀석한테 시집가게 될 거래.”윤채원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달콤하고 잔인하게 웃었다.“가엾기도 해라. 언니 어머니가 우리 엄마한테 밀렸던 것처럼, 언니도 결국 나한테 다 뺏기네.”윤해인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다시 말해 봐.”“그러니까 내 말은.”윤채원이 한 걸음 다가와 차가운 숨결을 뱉어냈다.“언니 엄마는 난산으로 죽어 마땅했다는 거야. 그 여자는...”짝!고요한 어둠을 가르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하지만 손을 휘두른 것은 윤해인이 아니었다.윤채원이 제 손으로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 것이었다.찰나의 순간, 윤채원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윤채원은 때마침 허겁지겁 달려온 송태경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언니가 그런 게 아니에요...”윤채원은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고 가련하게 흐느꼈다.“제가 언니의 심기를 건드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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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시종이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송태경을 말렸다.“전하, 폐하께서 아시면 크게 노하실 겁니다...”“새겨라.”송태경은 그저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바늘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붉은 핏방울이 송글송글 배어 나왔다.바늘 한 땀 한 땀이 마치 윤해인의 심장에 구멍을 뚫는 것처럼 가슴을 아프게 헤집었다.두 시진 뒤.송태경은 피로 젖어 드는 가슴팍을 움켜쥐었다.안색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섰다.“달맞이 벼랑으로 간다.”“안 됩니다! 그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방금 가슴에 글씨를 새기셨는데 어떻게...”“지금 당장 갈 것이다.”창밖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해인은 문득 윤채원이 말했던 신랑감의 조건이 떠올랐다.‘내 가슴에 자기 이름을 새겨 주는 사내.’‘달맞이 벼랑에 피어난 꽃을... 내게 꺾어다 주는 사내.’윤해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실소 끝에 끝내 참지 못한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다음 날, 윤채원의 머리에 흰 모란 한 송이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이윽고 송태경이 돌아왔다.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오른팔은 부러진 상태였지만, 그의 입꼬리는 살짝 위로 들린 채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그 다음 날, 윤해인이 막 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마침 송태경 역시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창백한 낯빛에 오른팔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고, 깃은 미처 여미지 못해 살짝 벌어져 있었다.“아가씨.”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 뜻밖의 사고를 당해 며칠 더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당분간은 호위해 드리기 어려울 듯합니다.”‘뜻밖의 사고?’달맞이 벼랑에서 굴러떨어진 게 뻔했다.윤해인은 굳이 그의 거짓말을 들추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겼다.“그래.”오늘은 절친한 벗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날이었다.운향루의 고즈넉한 별채.“자, 오늘 밤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시는 거야!”벗인 임도희가 윤해인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우리 해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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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벗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 사람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들으면 뭐 어때?”윤채원은 코웃음을 쳤다.“사내놈들이란 원래 다 그래. 달콤한 것 좀 쥐여주면 알아서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안달복달하거든.”모퉁이의 어두운 그늘 뒤.윤해인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문득 송태경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몹시 궁금해졌다.천하의 고귀한 영왕이, 자신이 한낱 장난감처럼 취급당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송태경, 이게 바로 네가 목숨 바쳐 사랑한 여자의 실체야.'윤해인의 입가에 비틀린 조소가 번졌다.그녀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방 안의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운향루를 나선 윤해인은 곧장 천불사로 향했다.그녀의 어머니, 이보화가 천불사 뒷산에 잠들어 있었다.윤해인은 차가운 비석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손끝으로 묘비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어머니, 저 시집가요. 조씨 가문의 그 단명할 사내에게로요... 차라리 잘되었어요. 적어도 그 사람은 밖에 첩을 두고 자식을 기르지는 않을 테니까요.”묘비 앞을 지키는 들풀 새로 쓸쓸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대답 없는 위로 같았다.“걱정 마세요. 전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윤해인의 손가락이 차가운 석비에 닿았다.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손끝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었다.“누군가를 제 목숨보다 사랑하는 그런 미련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너무 어리석으니까요. 저는 제 삶을 아주 잘 살아낼 거예요. 아주 행복하게, 보란 듯이.”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을 때쯤, 윤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머니의 묘비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그녀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처소로 돌아온 윤해인은 밤새도록 짐을 정리했다.의복, 장신구, 서책들.물건 하나하나를 손수 챙기는 그녀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경성 땅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완벽한 작별이었다.새벽녘, 윤기태가 심복을 시켜 백만 냥의 은자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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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송태경은 명주원에 서 있었다. 손에 들린 종이봉투는 갓 구워낸 군밤의 열기로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어지럽혔다.송태경은 가슴팍을 슬그머니 내리눌렀다. 윤채원의 이름을 새겨 넣은 자리가 욱신거렸다. 바늘 자국이 채 아물지 않아 숨을 쉴 때마다 가느다란 통증이 뻗어 나갔다.이상한 일이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쿵쾅거렸다. 마치 날카로운 갈고리가 혈맥을 짓이겨 놓는 것처럼 지독한 일렁임이었다.송태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곧 윤채원을 만나게 된다는 설렘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애써 심장의 기이한 떨림을 억눌렀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마당 한가운데에 선 윤기태가 난감한 얼굴로 누군가를 달래고 있었다.그 앞에 등을 돌리고 선 윤채원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분노를 참지 못하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백만 냥이라고요? 아버지, 정말 미치셨어요?”윤기태가 주변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훗날을 도모해야지! 착한 내 딸아, 아비인들 방법이 있었겠느냐. 조씨 가문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내 어떻게든 딸 하나는 시집을 보내야만 했어. 아비는 네가 그 진흙탕에 발을 들이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윤해인을 택한 게야. 하지만 그 백만 냥은 윤해인이 내건 조건이었다. 생각해 보아라, 네가 직접 그곳으로 시집을 갈 테냐, 아니면 이 백만 냥을 줄 테냐?”윤채원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참 만에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당연히 제가 갈 수는 없죠! 오늘내일하는 단명할 녀석에게 시집을 가라니요? 가자마자 평생 수절하며 살란 말씀이세요? 더군다나 전 지금 영왕 전하의 눈에 들어서...”말을 내뱉던 윤채원의 곁눈질에 송태경의 그림자가 걸렸다.윤채원은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꾸었다. 송태경을 향해 몸을 돌린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한없이 사랑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태경 오라버니, 오셨어요?”송태경은 두 사람의 대화를 미처 다 듣지 못했다. 그저 나직하게 대답하며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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