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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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같은 어머니 배 속에서 나와야 진짜 동생이지요.”윤해인의 입꼬리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허공을 향한 눈동자에는 서슬 퍼런 냉기만이 가득했다.“그 애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배신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일 뿐입니다. 저는 평생 그런 걸 동생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습니다.”윤기태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대가 울컥 솟아올랐다.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씩씩거리던 그가, 발작하기 직전 간신히 이성을 붙들었다.탁.거칠게 내려놓은 찻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이윽고 윤기태가 깊은 숨을 토해내며 물었다.“원하는 게 뭐냐?”“은자 백만 냥입니다.”윤해인이 붉은 입술을 매끄럽게 열어 속삭였다.“그리고 제가 시집가고 나면, 송태경을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는 사생아의 호위무사로 붙여주세요.”윤기태의 안색이 하얗게 굳었다.미치광이를 보듯 딸을 쏘아보는 눈빛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네가 정녕 미쳤구나! 은자 백만 냥이면 내 전 재산을 내놓으라는 소리가 아니냐! 게다가 송태경은 네가 목숨처럼 아끼던 호위무사가 아니더냐? 그놈에게 시집가겠다며 온 집안을 뒤흔들어 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혼인을 하면서 그놈을 두고 가겠다는 게냐?”“그저 수락하실 건지 말 건지만 말씀해 주시지요.”윤해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몸을 돌리는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쾅!“좋다!”윤기태가 탁자를 사정없이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네가 서북으로 떠나는 날, 약조한 두 가지는 즉시 이행해 주마.”윤기태에게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이 골치 아픈 혼사를 하루라도 빨리 매듭짓고 싶을 뿐이었다.과거 조씨 가문의 외아들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절, 윤기태는 서둘러 정혼을 맺었다. 본래는 아끼는 작은딸 윤채원을 그곳으로 시집보내 탄탄대로를 걷게 할 요량이었다.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조씨 가문의 외아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의원은 그가 스물다섯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할 것이라 단언했다.곱게 키운 윤채원이 평생 수절하며 고생하는 꼴을 눈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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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송태경이 고개를 드는 순간, 윤해인은 그의 눈동자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을 마주하게 되었다.본래 고귀한 신분이라서일까.이토록 은밀하고 음사한 짓을 들켰음에도, 송태경의 안색에는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그는 침착한 태도로 초상화를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길고 곧은 손가락이 느긋하게 허리띠를 매만졌다.불과 몇 초 사이, 송태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고 금욕적인 태도로 돌아와 있었다.방금 전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던 사내의 모습이 한낱 환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윤해인은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싸늘하게 비웃었다.“끝까지 풀지도 못하고 집어넣다니, 답답해서 병이라도 나지 않겠어? 원하면 내가 도와줄까?”송태경은 여전히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그저 몸을 슬그머니 뒤로 물려 윤해인과의 거리를 벌릴 뿐이었다.“큰아가씨, 무슨 용건이 있으십니까?”늘 이런 식이었다.윤채원의 초상화만 보고도 짐승처럼 욕망을 불태우면서, 윤해인 앞에서는 세상 모든 번뇌를 끊어낸 성인군자라도 되는 양 굴었다.윤해인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머릿속에 윤채원의 밋밋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몸매도, 이목구비도 나보다 한참은 떨어지는 년이거늘.’세상 사내들은 왜 그 가증스러운 순진한 척에 속아 넘어가지 못해 안달인지 모를 일이었다.하지만 상관없었다.윤해인은 수려한 미모도, 넘쳐나는 재력도, 그리고 관능적인 몸매도 지니고 있었으니까.오늘부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가차 없이 내버릴 생각이었다.“내일 진보각(珍寶閣)에 진품들이 새로 들어온다니 같이 가보자.”윤해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할 말만 툭 던지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뒤에 서 있던 송태경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소인이 기억하기로 이번 이틀간은 공무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날이옵니다.”“윤채원도 온다더구나.”윤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마디 내뱉었다.뒤편에서 숨 막히는 침묵이 일었다.이윽고 송태경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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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장내가 순간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가, 이내 거대한 소란으로 뒤덮였다.“저기, 도련님. 그러니까 그 말씀은...”진보각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심스레 물었다.그때, 사내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나는 영왕(寧王) 전하의 호위무사다. 전하께서 이르시기를, 오늘 윤채원 아가씨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보물은 그 값이 얼마든 전부 영왕부에서 치르겠다고 하셨다.”그 순간, 진보각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영왕 전하라고?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막내 아우이자, 조정에는 발도 들이지 않으면서도 경성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그 영왕 전하?”“여색을 돌 보듯 하신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어찌 윤채원 아가씨에게 이토록 아낌없이 쏟아부으신단 말인가!”“이거 참... 윤채원 아가씨가 하루아침에 봉황이 되어 날아오르겠군.”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한편, 윤채원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경악으로 물들었던 낯빛은 이내 감출 수 없는 희열로, 그리고 터져 나오는 기세등등한 미소로 번졌다.“저기... 영왕 전하는 어디 계신가요? 제가 직접 뵙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윤채원이 볼을 붉히며 수줍게 물었다.“전하께서는 지금 당장 모습을 드러내기 곤란하십니다. 때가 되면 자연스레 아가씨를 찾아오실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호위무사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답했다.그제야 윤채원은 윤해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두 눈에는 잔인할 정도의 승리감이 넘실거리고 있었다.“언니, 더 원하실 거예요?”윤채원은 일부러 양손으로 볼을 감싸며 천진난만한 척 덧붙였다.“아, 제가 깜빡했네요. 영왕 전하께서 절 위해 여기 있는 보물을 다 사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언니가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전 재산을 다 털어야 할 텐데... 이 경성에서 영왕 전하보다 돈이 많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윤해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윤해인은 반사적으로 송태경을 돌아보았다.하지만 그의 시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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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운향루 안.윤해인은 이미 술을 반 병이나 비운 뒤였다.도화주(桃花釀)가 목구멍을 타는 듯 적셔 내렸지만, 가슴속 깊이 응어리진 울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송태경은 윤채원에게 음식을 덜어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시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발라내는 것이 어찌나 지극정성인지, 마치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듯했다.명색이 윤해인의 호위무사였다.그러나 지금 송태경은 한시도 윤채원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윤채원이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며 바짝 다가갔다.순간, 그녀의 입술이 송태경의 귓가에 닿을 듯 스쳐 지나갔다.윤해인을 대할 때는 언제나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하던 사내였다.그런 사내의 귓가가 이윽고 미세하게 붉게 물들었다.윤해인은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몸을 돌려 피하려던 찰나, 한 무리의 한량들이 윤해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아가씨, 저희와 술 한잔 같이하시는 게 어떻습니까?”“이리 와서 같이 한판 노시지요.”“예전부터 아가씨를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이 고운 얼굴은 역시 소문대로군요.”구석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거절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몰려드는 사내들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급기야 한 사내의 무례한 손길이 윤해인의 허리에 닿았다.“송태경!”참다못한 윤해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듯, 송태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왔다.차갑게 가라앉은 매서운 눈빛 하나에 몰려들던 한량들은 툴툴거리며 뒤로 물러섰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네가 저 애의 호위무사인 줄 알겠다.”윤해인은 싸늘하게 비웃으며 쇄골에 튄 술자국을 닦아냈다.송태경은 시선을 내리깔았다.“죄송합니다, 큰아가씨. 방금은 보지 못했습니다.”“보지 못했다고?”윤해인이 송태경의 턱밑으로 바짝 다가섰다. 붉은 입술이 그의 턱선에 닿을 듯 스쳤다.“그게 아니고 아예 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숨결에 송태경의 목젖이 크게 흔들렸다.그는 본능적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아가씨, 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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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쨍그랑!바닥에 떨어진 찻잔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그 날카로운 파열음이 송태경의 말을 가로막았다.윤채원이 깜짝 놀란 토끼처럼 송태경의 품에서 허둥지둥 물러섰다.‘언니, 정신이 들어요?”침상 앞으로 허겁지겁 달려온 윤채원이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어떡해요, 몸은 좀 어때요? 아직도 많이 아파요? 다 저 때문에...”윤해인은 핏기 없는 입술을 비틀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네가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가 있겠느냐?”윤채원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마치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죄인이라도 된 양, 눈물이 쉬지 않고 툭툭 떨어졌다.입술을 지그시 깨문 윤채원은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송태경을 슬쩍 바라보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한편, 송태경의 몸이 움찔거렸다.무의식적으로 그 뒤를 쫓으려던 다리가 윤해인의 시선을 의식한 듯 단단히 굳어버렸다.송태경이 고개를 돌려 윤해인을 응시했다. “아가씨. 당시에는 상황이 워낙 긴박하여, 미처 대응할 겨를이 없었습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윤해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메마른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구차한 변명 따위, 단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꼬박 사흘 동안 송태경은 충직한 그림자처럼 침소 문 앞을 지켰다.하지만 윤해인은 그 사흘 내내 송태경에게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침상에서 일어나 간신히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된 것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윤해인은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은 다리를 이끌고 서재로 곧장 향했다.자단목 서랍을 열자, 검고 윤기가 흐르는 채찍이 모습을 드러냈다.벌을 줄 때 쓰는 물건이었다.단 한 대만 스쳐도 살점이 터져 나가고 뼈가 보일 정도로 매서운 채찍.“송태경을 서재로 들여보내거라.”윤해인이 차갑게 명령했다.송태경이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윤해인은 느긋하고 차분하게 채찍을 닦아내고 있었다.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윤해인의 긴 속눈썹 아래로 어두운 음영을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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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사흘 뒤.윤해인은 홀로 침소 안에서 혼례복을 입어보고 있었다.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밤이었다.방문을 열고 막 나선 순간, 누군가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나타나 그녀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큭!코를 찌르는 독한 약 냄새가 순식간에 밀려들었다.윤해인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으나, 얼마 못 가 온몸의 힘이 풀리며 깊은 암흑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는 온통 암전 상태였다.안대로 눈이 가려진 채, 두 손은 의자 뒤로 단단히 묶여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쫘악!첫 번째 채찍이 사정없이 날아와 내리치자, 윤해인은 등 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허리를 활처럼 꺾었다.거친 밧줄이 손목을 파고들어 살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시야를 가로막은 칠흑 같은 천 때문에 공포는 배가 되었다. 윤해인은 입술을 짓씹어 피를 흘리며 신음을 꾹 삼켰다.“감히 거슬러서는 안 될 사람의 눈 밖에 난 죄다.”형을 집행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아득한 나락에서 들려오는 듯했다.쫘악! 쫘악! 쫘악!채찍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살점이 처참하게 뜯겨 나가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윤해인은 이빨이 으스러질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며 이를 악물었다. 결코 저들에게 비명조차 들려주지 않겠다는 비장함이었다.‘대체 누구지?’‘누가 나한테 이런 짓을 하도록 지시한 걸까.’가혹한 형벌은 의식이 하얗게 지워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정신이 혼미해진 그때, 머리 위로 낯익은 목소리가 떨어졌다.“전하, 분부하신 일을 모두 마쳤습니다.”사내가 극진히 아뢰었다.그리고 이어지는 대답은 윤해인의 온 신경을 난도질하기에 충분했다.“음. 데려다 놓아라.”단 한 마디였다.그 순간, 온몸에서 흐르던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송태경이었다.윤채원에게 가볍게 채찍을 휘둘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려 아흔아홉 대의 매질로 되돌려준 것이었다.등 뒤를 짓누르는 극심한 고통과 심장을 헤집는 배신감이 온몸을 덮쳐왔다.윤해인은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별채 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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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호위무사들이 줄을 지어 연회장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들이 들고 있는 상자 안에는 눈이 멀 것만 같은 귀한 보물들이 가득했다.값비싼 서화, 진귀한 보석, 그리고 온천 장원의 토지 문서까지.그때, 연회장이 발칵 뒤집혔다.“이, 이게 전부 영왕 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이라고?”“지난번 진보각을 통째로 빌려 윤채원 아가씨에게 선물했다더니, 정말이었나 보군. 이제 완전히 날개를 달았어.”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빗발쳤다.사람들의 시선이 은근슬쩍 윤해인에게로 쏠렸다. 동정과 비웃음이 섞인 눈빛이었다.외모도, 고귀한 적녀라는 신분도 분명 윤해인이 한참 앞서 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의 눈에 윤해인은 그저 비참한 패배자일 뿐이었다.윤해인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선상 밖으로 걸어 나갔다.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깊이 숨을 들이쉬려는데, 등 뒤에서 윤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왜 혼자 여기 있어?”주변에 빈객도, 윤기태도 보이지 않자 윤채원은 가차 없이 가식을 벗어던졌다.“그거 알아? 아버지가 그러는데, 언니가 그 단명할 녀석한테 시집가게 될 거래.”윤채원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달콤하고 잔인하게 웃었다.“가엾기도 해라. 언니 어머니가 우리 엄마한테 밀렸던 것처럼, 언니도 결국 나한테 다 뺏기네.”윤해인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다시 말해 봐.”“그러니까 내 말은.”윤채원이 한 걸음 다가와 차가운 숨결을 뱉어냈다.“언니 엄마는 난산으로 죽어 마땅했다는 거야. 그 여자는...”짝!고요한 어둠을 가르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하지만 손을 휘두른 것은 윤해인이 아니었다.윤채원이 제 손으로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 것이었다.찰나의 순간, 윤채원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윤채원은 때마침 허겁지겁 달려온 송태경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언니가 그런 게 아니에요...”윤채원은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고 가련하게 흐느꼈다.“제가 언니의 심기를 건드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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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시종이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송태경을 말렸다.“전하, 폐하께서 아시면 크게 노하실 겁니다...”“새겨라.”송태경은 그저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바늘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붉은 핏방울이 송글송글 배어 나왔다.바늘 한 땀 한 땀이 마치 윤해인의 심장에 구멍을 뚫는 것처럼 가슴을 아프게 헤집었다.두 시진 뒤.송태경은 피로 젖어 드는 가슴팍을 움켜쥐었다.안색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섰다.“달맞이 벼랑으로 간다.”“안 됩니다! 그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방금 가슴에 글씨를 새기셨는데 어떻게...”“지금 당장 갈 것이다.”창밖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해인은 문득 윤채원이 말했던 신랑감의 조건이 떠올랐다.‘내 가슴에 자기 이름을 새겨 주는 사내.’‘달맞이 벼랑에 피어난 꽃을... 내게 꺾어다 주는 사내.’윤해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실소 끝에 끝내 참지 못한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다음 날, 윤채원의 머리에 흰 모란 한 송이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이윽고 송태경이 돌아왔다.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오른팔은 부러진 상태였지만, 그의 입꼬리는 살짝 위로 들린 채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그 다음 날, 윤해인이 막 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마침 송태경 역시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창백한 낯빛에 오른팔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고, 깃은 미처 여미지 못해 살짝 벌어져 있었다.“아가씨.”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 뜻밖의 사고를 당해 며칠 더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당분간은 호위해 드리기 어려울 듯합니다.”‘뜻밖의 사고?’달맞이 벼랑에서 굴러떨어진 게 뻔했다.윤해인은 굳이 그의 거짓말을 들추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겼다.“그래.”오늘은 절친한 벗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날이었다.운향루의 고즈넉한 별채.“자, 오늘 밤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시는 거야!”벗인 임도희가 윤해인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우리 해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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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벗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 사람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들으면 뭐 어때?”윤채원은 코웃음을 쳤다.“사내놈들이란 원래 다 그래. 달콤한 것 좀 쥐여주면 알아서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안달복달하거든.”모퉁이의 어두운 그늘 뒤.윤해인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문득 송태경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몹시 궁금해졌다.천하의 고귀한 영왕이, 자신이 한낱 장난감처럼 취급당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송태경, 이게 바로 네가 목숨 바쳐 사랑한 여자의 실체야.'윤해인의 입가에 비틀린 조소가 번졌다.그녀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방 안의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운향루를 나선 윤해인은 곧장 천불사로 향했다.그녀의 어머니, 이보화가 천불사 뒷산에 잠들어 있었다.윤해인은 차가운 비석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손끝으로 묘비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어머니, 저 시집가요. 조씨 가문의 그 단명할 사내에게로요... 차라리 잘되었어요. 적어도 그 사람은 밖에 첩을 두고 자식을 기르지는 않을 테니까요.”묘비 앞을 지키는 들풀 새로 쓸쓸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대답 없는 위로 같았다.“걱정 마세요. 전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윤해인의 손가락이 차가운 석비에 닿았다.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손끝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었다.“누군가를 제 목숨보다 사랑하는 그런 미련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너무 어리석으니까요. 저는 제 삶을 아주 잘 살아낼 거예요. 아주 행복하게, 보란 듯이.”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을 때쯤, 윤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머니의 묘비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그녀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처소로 돌아온 윤해인은 밤새도록 짐을 정리했다.의복, 장신구, 서책들.물건 하나하나를 손수 챙기는 그녀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경성 땅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완벽한 작별이었다.새벽녘, 윤기태가 심복을 시켜 백만 냥의 은자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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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송태경은 명주원에 서 있었다. 손에 들린 종이봉투는 갓 구워낸 군밤의 열기로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어지럽혔다.송태경은 가슴팍을 슬그머니 내리눌렀다. 윤채원의 이름을 새겨 넣은 자리가 욱신거렸다. 바늘 자국이 채 아물지 않아 숨을 쉴 때마다 가느다란 통증이 뻗어 나갔다.이상한 일이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쿵쾅거렸다. 마치 날카로운 갈고리가 혈맥을 짓이겨 놓는 것처럼 지독한 일렁임이었다.송태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곧 윤채원을 만나게 된다는 설렘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애써 심장의 기이한 떨림을 억눌렀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마당 한가운데에 선 윤기태가 난감한 얼굴로 누군가를 달래고 있었다.그 앞에 등을 돌리고 선 윤채원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분노를 참지 못하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백만 냥이라고요? 아버지, 정말 미치셨어요?”윤기태가 주변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훗날을 도모해야지! 착한 내 딸아, 아비인들 방법이 있었겠느냐. 조씨 가문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내 어떻게든 딸 하나는 시집을 보내야만 했어. 아비는 네가 그 진흙탕에 발을 들이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윤해인을 택한 게야. 하지만 그 백만 냥은 윤해인이 내건 조건이었다. 생각해 보아라, 네가 직접 그곳으로 시집을 갈 테냐, 아니면 이 백만 냥을 줄 테냐?”윤채원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참 만에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당연히 제가 갈 수는 없죠! 오늘내일하는 단명할 녀석에게 시집을 가라니요? 가자마자 평생 수절하며 살란 말씀이세요? 더군다나 전 지금 영왕 전하의 눈에 들어서...”말을 내뱉던 윤채원의 곁눈질에 송태경의 그림자가 걸렸다.윤채원은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꾸었다. 송태경을 향해 몸을 돌린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한없이 사랑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태경 오라버니, 오셨어요?”송태경은 두 사람의 대화를 미처 다 듣지 못했다. 그저 나직하게 대답하며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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