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겸이 봉투에 넣어 보낸 것은 이혼 합의서가 아니었다.추방 명령이었다.위자료 란에는 평생 써도 남을 숫자가 적혀 있었다.뒤에 붙은 영을 세다가 그만두었다. 내 값이 아니라,어젯밤 생방송이 권태겸에게 남긴 공포의 액수였다.합의서 아래에는 편도 항공권이 깔려 있었다.출발일은 2주 뒤. 목적지까지 정해준 친절한 유배였다.마지막 장의 부속 조항이 진짜 본문이었다.태강그룹과 태강재단병원에 관한 발언, 출판, 인터뷰 금지.위반 시 위자료 전액 반환과 손해배상.서명 즉시 본가 출입권과 재단 자료 열람 권한도 소멸.그들이 사려는 것은 이혼이 아니었다.내 입과, 태강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휴대폰이 울렸다. 태강 법무팀이었다.—오늘 정오까지 서명하시면 모든 절차를 비공개로 진행하겠습니다.“서명하지 않으면요?”—어제 방송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겁니다. 불법 취득 자료 유포, 명예훼손, 주가 하락에 따른 손해배상까지요.“그렇게 자신 있으시면 왜 돈부터 주시죠?”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회장님께 전하세요. 법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침묵을 사는 데 평생 쓸 돈을 걸지 않는다고.”전화를 끊고 합의서를 다시 펼쳤다.서명란 옆에는 정오까지라는 붉은 표시가 찍혀 있었다.세 시간 안에 아내도, 며느리도, 태강의 내부자도 그만두라는 뜻이었다.권태겸은 사람의 인생에도 결재 시한을 붙였다.혼인이 끝나는 순간 나는 태강 내부로 들어갈 명분을 잃는다.재단 이사회 기록, 주주총회, 본가와 병원 출입 권한까지.이 결혼은 사랑의 증명이 아니었다.내 무기고의 열쇠였다.정오가 되기 전, 한미라가 서재로 들어왔다. 노크는 없었다.그녀는 합의서에 서명이 없는 것을 보고서야 얼굴을 굳혔다.“현명한 여자는 나갈 때를 안다.”“어머님은요?”“…뭐?”“나갈 때를 아세요?”한미라의 시선이 서류 위를 훑었다.“저 돈이면 어디서든 새로 시작할 수 있어.”“저를 걱정해주시는 것처럼 들리네요.”“네가 이 집에 남아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Last Updated : 2026-07-09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