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완벽한 쇼윈도 부부의 은밀한 이중생활 : Chapter 11 - Chapter 20

20 Chapters

제11화. 아내를 미친 여자로 만들다

영상은 새벽에 터졌다.호텔 스위트룸.사 분 십칠 초짜리 조각.이록의 시계, 예라의 웃음, 흐트러진 침대 끝.업로더의 계정은 만들어진 지 하루밖에 안 된 유령이었다.새벽 세 시에 올라온 영상이 아침 일곱 시에 실시간 검색어 일 위가 되려면, 손이 필요하다.돈으로 산 손들이.그리고 정오가 되기 전, 태강 홍보실의 보도자료가 그 위를 덮었다.[권이록 사장 관련 영상은 배우자 온사율 씨가 질투로 조작한 합성물로 확인.온 씨는 현재 정신과 상담 권유를 받은 상태.]질투에 미친 아내.그것이 태강이 내게 입힌 새 옷이었다.옷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사이즈는 내가 정할 수 있었다.본가 앞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나는 화장을 반쯤 지운 얼굴로, 단추 하나가 어긋난 코트를 입고 나갔다.계산된 흐트러짐이었다.어긋난 단추는 세 번째.카메라 프레임 안에 정확히 들어오는 위치였다.거울 앞에서 나는 그 단추를 세 번 확인했다.무너진 여자를 연기하는 데에도 리허설이 필요하다.“온사율 씨! 영상을 직접 조작하셨습니까?”“남편분의 불륜을 의심하신 게 맞습니까?”“정신과 상담을 받고 계시다는 게 사실입니까?”나는 마이크 숲 앞에서 입술을 떨었다.시선을 한 번 떨구고,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카메라는 그 반 박자를 사랑한다.“저는… 제 남편을 믿습니다.”목소리가 갈라졌다.완벽했다.흔들리는 아내.무너지기 직전의 여자.기자들의 셔터가 미친 듯이 터졌다.그 소란 속에서 내 손끝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맨 앞줄, 태강 계열 언론사의 마이크.스펀지 커버 속으로 밀어 넣은 손톱만 한 송신기.그 마이크는 오늘 밤 태강 법무팀 브리핑룸으로 돌아갈 것이다.기자 매수 지시, 여론 조작 시나리오, 전부 그 방에서 나온다.돌아서는 내 등 뒤로 질문이 쏟아졌지만, 나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무너진 여자는 인터뷰를 오래 하지 않는다.그것이 그림의 완성이었다.“사모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집으로 들어서자 예라가 계단 위에서 나를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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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죽은 동생의 약병

약병은 내 침대 밑에서 나왔다.발견한 사람은 가정부였고, 발견하게 만든 사람은 한미라였다.침구 교체는 원래 목요일이었다.오늘은 화요일이었다.시어머니는 온 집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갈색 병을 들어 올렸다.“수면제구나.그것도 처방 용량의 세 배짜리.”“제 것이 아닙니다.”“네 침대 밑에서 나왔는데?”“그러니까요, 어머님.제 침대 밑에서, 제가 사지 않은 약이 나왔네요.목요일도 아닌데 침구를 걷어낸 손도 궁금하고요.”가정부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한미라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사율아. 병원에 가보자.요즘 네가 많이 불안해 보여서 그래.다들 걱정이란다.”품위 있는 목소리로 감금을 예고하는 여자.어젯밤 도청기 너머에서 들은 시나리오가, 오늘 시어머니의 입에서 대사가 되어 나오고 있었다.진료 기록은 이번 주 안에.입원까지 가능한 수준으로.각본은 이미 결재가 끝나 있었다.그 옆에서 예라가 지나가며 내 침대 쪽을 흘끔거렸다.“사모님, 밤에 잠은 잘 주무세요?저는 요즘 아기 때문에 푹 자거든요.”“문예라 씨.”“네?”“그 약병, 만졌어요?”“…제가 왜요?”“만졌으면 큰일이라서요.그거, 증거물이거든요.”예라의 걸음이 반 박자 빨라졌다.결백한 사람은 그 질문에 웃는다.빨라지지 않는다.모두가 나간 뒤, 나는 장갑을 끼고 약병을 돌려 봤다.라벨 하단의 제조 번호.LOT 7-2214.숨이 잠깐 멎었다.일 년 전, 하겸의 방을 정리하다 서랍에서 발견한 약병.동생은 수면제를 먹는 애가 아니었는데, 라고 이상하게 여겼던 그 병.커피도 오후엔 안 마시던 애였다.나는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상자에 넣어 두었었다.동생의 물건은 영수증 한 장도 버릴 수 없었으니까.상자를 열었다.하겸의 약병을 꺼내 라벨을 맞대었다.LOT 7-2214.같은 제조 번호.같은 공급처.같은 손.일 년 전 죽은 내 동생의 방과, 오늘 내 침대 밑에 같은 약이 놓였다.하겸을 불안한 애로 만들려던 손과, 나를 미친 여자로 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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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생방송 전날 밤

“내일 밤 아홉 시.전부 공개하겠습니다.”기자 간담회에서 나는 그렇게 선언했다.남편의 불륜 영상 원본.조작이 아니라는 증거.태강이 감춘 진실.세상이 뒤집혔다.포털 실시간 검색어가 온통 내 이름이었다.태강 법무팀은 방송금지 가처분을 냈고, 방송국은 시청률 앞에서 그것을 씹어 삼켰다.저녁 무렵에는 광고 단가가 세 배로 뛰었다는 기사까지 나왔다.세상은 남의 결혼이 무너지는 것을 돈을 내고 보고 싶어 했다.간담회 직후, 한미라에게서 전화가 왔었다.—사율아.지금이라도 멈추면, 조용히 내보내주마.“내보내주신다는 말씀, 감사하네요.그런데 어머님.”—뭐냐.“내일 방송, 어머님도 꼭 보세요.아홉 시예요.”전화는 그쪽에서 끊겼다.그날 밤, 예라가 이록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나는 복도 끝에서 들었다.“사장님.저예요.”문이 열렸다.예라는 잠옷 위에 얇은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복도의 벽등이 그녀의 맨발을 비췄다.계산된 무방비였다.“내일 그 영상이 나가면, 사장님도 끝이에요.우리 둘 다요.”“그래서?”“막아야죠.사모님을 막든가, 방송을 막든가.아니면…”예라의 손이 이록의 팔을 잡았다.“차라리 우리가 먼저 손잡든가요.사장님, 저 버리실 거예요?이 아이도요?”이록은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내려다보지도 않았다.그저 문틀에 기댄 채, 온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문예라 씨.지금 당신이 잡은 건 내 팔이 아니야.”“…그럼요?”“지푸라기지.그리고 나는, 가라앉는 배에서 지푸라기 노릇 해줄 만큼 한가하지 않아.”“사장님!”“들어가.임산부가 밤바람 쐬는 거 아니야.”문이 닫혔다.예라는 닫힌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복도 끝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그녀는 웃으려다 실패했다.그 실패한 웃음이, 내가 본 그녀의 표정 중 가장 진짜였다.“사모님은 좋으시겠어요.”지나치며 그녀가 낮게 말했다.“버려져도, 돌아갈 이름은 있잖아요.”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말은 도발이 아니라 자백이었다.문예라에게는 돌아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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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불륜 영상 대신 살인 영상

밤 아홉 시.생방송.스튜디오 조명 아래, 나는 검은 정장을 입고 앉아 있었다.장신구는 결혼반지 하나만 남겼다.오늘 밤 화면에 잡혀야 할 것은 보석이 아니라 증거였다.진행자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마이크에 잡혔다.방송 십 분 전, 대기실 모니터로 본가 쪽 소식이 들어왔다.권태겸이 저녁 일정을 전부 비우고 서재에 있다고 했다.그도 아홉 시를 기다리고 있었다.좋았다.관객석 맨 앞줄은 원래 그의 자리였다.“온사율 씨. 예고하신 영상, 지금 공개하시겠습니까?”“네.”전국의 화면이 어두워졌다.사람들은 호텔 방을 기다렸다.침대를, 두 남녀를, 태강가의 추문을.화면에 뜬 것은 병원 복도였다.[태강재단병원 7층. 작년 3월 11일. 22시 09분.]자막이 박혔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내렸다.파일 봉투를 품에 안은, 스물다섯의 온하겸.동생은 걸음이 빨랐다.두 번, 뒤를 돌아봤다.쫓기는 사람의 걸음이었다.그리고 십 초 뒤, 같은 엘리베이터 옆 비상구에서 검은 양복의 남자가 나와 동생의 뒤를 따랐다.스튜디오가 얼어붙었다.진행자의 손에서 큐카드가 미끄러졌다.“이 여성은 제 동생 온하겸입니다.”“이 영상이 찍히고 두 시간 뒤, 병원에서 삼 킬로미터 떨어진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단독 사고로 종결됐죠.”“그, 그런데 이 영상이 왜…”“이 영상은 사고 당일 밤 태강재단병원 서버에서 삭제됐습니다.”“삭제 시각 23시 51분.”“삭제 명령 계정은 병원 최고 관리자.”“저는 묻고 싶습니다.”“단독 사고로 죽은 여자의 마지막 동선을, 누가, 왜, 그 애가 아직 병원 영안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웠습니까?”카메라가 나를 정면으로 잡았다.나는 렌즈 너머의 한 사람을 향해 말을 이었다.“그리고 하나 더.”“제 동생이 그날 밤 품에 안고 있던 파일 봉투는, 유품 목록에 없었습니다.”“시신과 함께 발견된 소지품 어디에도요.”“봉투는 어디로 갔습니까?”부조정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태강 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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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이혼 못 하는 이유

방송 다음 날, 서재로 서류 봉투가 배달됐다.이혼 합의서.발신인은 태강 법무팀.위자료 란에 적힌 숫자는 평생 쓰고도 남을 금액이었다.숫자 뒤의 영이 몇 개인지 세다가, 나는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저 숫자는 내 값이 아니라, 그들이 느낀 공포의 값이었다.권태겸식 해고 통지서였다.며느리 자리에서 잘라내면, 나는 태강 내부 자료에 접근할 법적 지위를 전부 잃는다.주주총회 방청도, 재단 이사회 기록 열람도, 본가 출입도.혼인 관계는 내 무기고의 열쇠였다.낮에는 한미라가 직접 서재로 왔다.노크 없이.그녀는 봉투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현명한 여자는 나갈 때를 알지.”“어머님은 아세요? 나갈 때를.”“…뭐라고?”“저 서류에 적힌 금액이면, 어머님 오 년 전 진단서 조작 건의 형량도 대충 계산이 되거든요.”“태강 법무팀이 제 침묵에 매긴 값이, 곧 어머님 죄의 값이라는 뜻이에요.”한미라는 문을 소리 나게 닫고 나갔다.품위가 문틈에 끼어 찢어지는 소리였다.봉투 안에는 항공권도 들어 있었다.편도.출발일은 이 주 뒤였다.목적지까지 정해주는 친절한 추방이었다.합의서 마지막 장에는 부속 조항이 붙어 있었다.향후 태강그룹 및 태강재단병원 관련 일체의 발언·출판·인터뷰 금지.위반 시 위자료 전액 반환.그들이 사는 것은 내 퇴장이 아니라 내 침묵이었다.침묵의 가격치고는 후했다.그만큼 감출 것이 크다는 뜻이었다.밤에 이록이 서재로 왔다.그는 합의서를 훑어보더니 옆에 앉았다.“금액은 후하네.”“당신 아버지가 겁먹었다는 뜻이죠.”“부속 조항까지 봤어?”“봤어요.”“저 조항이 본문이고, 위자료가 부속이죠.”“사율아.”그가 나를 불렀다.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였다.“이혼하자고 하면, 보내줄게.”“……”“방송까지 했으니 네 목적의 절반은 이뤘어.”“여기서 나가면 최소한 몸은 안전해.”“태강은 이제 너를 며느리가 아니라 적으로 대할 거야.”“이 집 안에서 적이 어떻게 되는지, 너도 봤잖아.”“그래서요. 지금 나 걱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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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역고소와 여론전

고소장은 세 장이 한꺼번에 날아왔다.불법 촬영.명예훼손.사생활 침해.태강 법무팀의 반격이었다.세 장 모두 같은 날짜, 같은 법무법인, 같은 폰트.정성이 아니라 물량으로 찍어낸 서류였다.그리고 그 뒤에 예라가 섰다.기자회견장.검은 원피스에 부른 배를 감싼 예라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그 손수건이 하겸의 것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고, 나는 화면을 계속 봤다.“저도… 피해자예요.”“사모님이 저를 고용해서, 사장님께 접근하라고 시켰어요.”“저는 돈이 필요했고, 그게 이렇게 큰일이 될 줄 몰랐어요.”“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상간녀라고, 제 아이까지 모욕하고…”피해자 코스프레.각본은 태강 홍보실, 연기는 문예라.여론이 다시 출렁였다.어제까지 나를 응원하던 댓글창에 ’알고 보니 조종한 건 아내’라는 문장이 상단으로 올라왔다.절반은 사실이었다.그래서 더 위험한 공격이었다.거짓말은 반박하면 되지만, 반쪽짜리 진실은 반박하는 순간 나머지 반쪽을 캐물어온다.“반박 회견 잡을까요?”도겸이 물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물러날 거예요.”“…물러난다고요?”“여론전은 태강의 홈그라운드예요.”“저쪽은 기자를 사고, 우리는 진실을 파는데, 시장에서는 늘 산 물건이 먼저 팔리죠.”“그 판에서는 안 싸워요.”“그럼 어디서 싸웁니까.”“법정 밖에서요.”“도겸 씨, 명단 하나 만들어줘요.”“최근 십 년간 태강재단병원 상대로 의료소송을 냈다가 취하한 사람들.”“합의금 받고 입 닫은 사람들.”“그 사람들 전부요.”“…피해자들을 모으시려는 겁니까.”“고소장이 날아올 때마다 우리는 서명을 모으는 거예요.”“저쪽이 종이로 때리면, 우리는 사람으로 받아치고.”“시간이 걸립니다.”“입을 연다는 건, 합의금을 토해낼 각오를 한다는 뜻이라.”“그래서 먼저 보여줄 거예요.”“입을 열어도 죽지 않는 사람을.”“제가 그 견본이 될 거고요.”“견본이 부서지면요.”“부서진 견본은 더 잘 팔려요.”“세상은 무사한 고발자보다 다친 고발자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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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하겸의 마지막 영상

복원 파일이 도착한 것은 새벽 세 시였다.하겸의 노트북 하드에서 건져 올린, 삭제된 동영상.촬영 일자는 죽기 사흘 전.파일명은 숫자 여덟 자리.동생의 생일도, 내 생일도 아닌 날짜였다.나는 서재 문을 잠그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에 동생이 있었다.살아 있는 하겸이.헝클어진 머리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언니.—이 영상을 언니가 보게 된다면, 나는 아마 실패한 거야.심장이 조여들었다.—병원에서 이상한 걸 봤어.—언니 이름으로 보관된 파일이 있어.—언니는 모르는 파일이야.—배아 보관실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 코드가… S-01이…하겸이 뒤를 돌아봤다.문 쪽에서 소리가 난 모양이었다.다시 카메라를 향한 동생의 눈에 물기가 차 있었다.—언니, 미안해.—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게…—언니가 다칠까 봐 무서웠어.—언니 몸에서 없어진 게 뭔지 알면, 언니가 무너질까 봐.—꼭 찾아.—그건 언니 거야.영상이 끊겼다.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손등을 물었다.소용없었다.일 년을 눌러둔 것이 한꺼번에 터졌다.어깨가 흔들렸고, 시야가 무너졌고, 동생의 이름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장례식에서도 이렇게 울지 못했다.그때는 몰랐으니까.단독 사고라는 네 글자를 믿었으니까.동생이 마지막 사흘을 어떤 무게로 살았는지,그 무게를 혼자 들고 언니한테는 들키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오늘에야 알았으니까.문 잠그는 것을 잊었던 모양이다.인기척에 고개를 드니 이록이 문가에 서 있었다.그는 다가왔다.손을 뻗었다.그 손이 내 어깨에 닿기 직전—멈췄다.“…만지지 마요.”“안 만져.”“보지도 마요.”“그건 못 해.”그는 뻗었던 손을 거두고, 대신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내가 우는 동안, 벽처럼.문처럼.아무 말도 없이.십 분이 지났다.어쩌면 삼십 분.그는 시계를 보지 않았고, 나는 시간을 세지 않았다.이 집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감시받지 않는 울음이었다.지켜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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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조작된 친자 확인서

예라는 서류를 부채처럼 흔들며 들어왔다.“사모님도 보셔야죠. 가족이 되실 뻔한 사이니까.”유전자 검사 결과지.검사 대상: 태아.대조군: 권이록.결과: 친자 관계 성립 확률 99.98%.“보이세요? 구십구 점 구팔. 이 아이, 권이록 사장님 아이예요.이제 저를 상간녀라고 부르실 수 있는 사람, 이 집엔 없을걸요.”한미라가 그 옆에서 흡족하게 웃었다.“예라야, 몸 무거운데 서 있지 말고 앉으렴. 이제 네가 이 집 후계자의 엄마다.”후계자의 엄마.시어머니는 어제까지 상간녀라 부르던 여자에게 그 왕관을 씌웠다.아이 못 낳는 며느리 앞에서.왕관의 무게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여자에게.“사율아, 너도 이제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핏줄 앞에서는 서류가 다 소용없는 법이란다.”“어머님 말씀이 맞아요.”“…뭐?”“핏줄 앞에서는 서류가 소용없죠. 그런데 이 집은 반대잖아요. 서류로 핏줄을 만드니까.”한미라의 웃음이 반쯤 걷혔다.알아듣지 못한 얼굴과, 알아듣기 직전의 얼굴 사이에서.나는 결과지를 받아 들었다.숫자보다 먼저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발급 기관: 태강재단병원 유전체분석센터.용지 하단의 병원 마크.잉크가 살짝 번진 각도까지,5년 전 내 불임 진단서와 같은 프린터에서 나온 인쇄물이었다.오 년 동안 같은 프린터로 사람의 운명을 출력해온 집안이었다.“왜요, 사모님. 숫자가 안 믿기세요?”“아니요. 아주 믿음직한 서류네요.”“…네?”“태강재단병원이 만든 서류잖아요.그 병원이 서류를 얼마나 정성 들여 만드는지, 제가 제일 잘 알거든요.”예라의 눈썹이 흔들렸다.알아듣지 못했지만,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아는 얼굴.“그리고 문예라 씨. 검사일이 지난주 화요일이네요.”“그게 왜요.”“지난주 화요일에 이록 씨는 해외에 있었어요.대조군 검체는 언제, 어떻게 채취했을까요?”“그, 그건 병원이 알아서...”“네. 병원이 알아서 했겠죠. 늘 그랬듯이.”예라의 손이 결과지를 도로 채갔다.승리의 증서를 쥔 손치고는, 너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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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사라진 유족 명단

“명단이 비어 있습니다.”도겸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하겸 사고 당시,같은 시기 태강재단병원 관련 사망 사건 유족들에게 지급된 위로금 내역.그 수령인 명단을 추적하던 중이었다.서류는 존재했다.지급 총액도 존재했다.12년간 400억.병원 하나가 조용히 지운 목숨들의 가격표였다.그런데 수령인 칸만, 전부 검게 지워져 있었다.“한 명만 빼고요.”“누구죠.”“지워지다 만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문, 자로 시작합니다.그리고 당시 주소지가… 사율 씨, 이거 문예라 씨 옛날 주소랑 같은 동네입니다.”문예라의 과거와, 태강의 위로금 명단.나는 예라의 신상 조사 파일을 다시 꺼냈다.내가 그녀를 고를 때 봤던 서류.부모 없음.보육원 출신.22살까지 반지하.그 반지하의 주소가, 위로금 명단의 주소와 같은 골목이었다.우연이 아니었다.나는 미모와 절박함으로 그녀를 골랐다고 믿었다.석 달을 들여 골랐다고.그런데 그 절박함의 뿌리에, 이미 태강이 있었다면.내 선택지에 그녀가 올라온 경로부터, 누군가의 손을 탔다면.내가 판을 깐 게 아니라, 깔린 판 위에서 패를 고른 것이라면.예라를 옥상 정원으로 불렀다.“문예라 씨.8년 전, 그 골목에서 누가 죽었어요?”예라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연기가 벗겨졌다.“…그걸 사모님이 어떻게.”“태강 위로금 명단에 당신 성씨가 있어요.지워지다 만 채로.”“조사하지 마세요.”“대답해요.”“조사하지 말라고요!”예라가 소리쳤다.임신한 배를 한 손으로 감싼 채, 다른 손은 주먹을 쥐고.도발도, 교태도 아닌 진실의 목소리였다.“…언니였어요.”“……”“우리 언니. 그 병원에서 죽었어요. 수술 잘못돼서.병원은 돈 주고 입 막았고, 나는 그 돈으로 언니 장례 치르고 반지하에서 나왔어요.됐어요? 이제 만족하세요?”“수술명은요.”“…그게 왜요.”“기억 안 나요?”“난소… 뭐라고 했어요. 어려운 말이라 기억 안 나요.스물몇 살짜리가 그런 수술로 죽는 게 말이 되냐고 물었더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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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아버지의 빚

권태겸의 반격은 신문 1면으로 왔다.[단독: 온사율 부친, 태강에 300억 채무… ’복수극’의 실체는 빚 청산용 기획결혼?]기사에는 차용증 사본까지 실렸다.아버지의 서명.태강 계열 금융사의 직인.300억.죽은 아버지가 진 적 없는 빚이, 죽은 뒤에 만들어져 있었다.아침 식탁에서 한미라가 그 신문을 내 앞으로 밀었다.“몰랐구나, 얘.네 아버지가 우리 집에 그런 빚을 지고 있었는지.”“저도 놀랐어요, 어머님.”“이제라도 알았으니...”“돌아가신 분이 새 서류에 서명을 하시다니.이 집 사람들은 죽음도 결재 사항인가 봐요.”한미라의 손이 커피잔 손잡이 위에서 멎었다.나는 신문을 반듯하게 접어 돌려드렸다.“기사 스크랩은 제가 할게요. 증거물은 원래 원본이 좋거든요.”“내 복수를 돈 문제로 바꾸겠다는 거네요.”사무실로 온 도겸에게 신문을 건네며 말했다.“동기를 오염시키는 겁니다.살인 은폐를 추적하는 여자를, 빚 때문에 시댁을 물어뜯는 여자로.”도겸이 차용증 사본을 스캔하며 말했다.그리고 30분 뒤, 그가 모니터에서 고개를 들었다.“서명, 위조입니다.”“확실해요?”“부친 생전 서류 열두 건과 대조했습니다. 획순이 다릅니다.아버님은 ‘온’ 자의 이응을 시계 방향으로 그리셨는데, 차용증은 반시계입니다.그리고 이 차용증 날짜… 사율 씨, 이거 부친 사망 두 달 뒤 서식입니다.금융사 로고가 그해 하반기에 바뀐 신형이에요.”죽은 사람에게 빚을 지우는 집안.죽은 하겸의 이름으로 동의서를 만들던 그 손이었다.이 집의 위조는 필체만 훔치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의 시간까지 훔쳤다.그리고 시간은, 훔친 쪽이 반드시 들키는 물건이었다.“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도겸이 다른 파일을 열었다.“차용증을 위조하려면 부친 서명 원본이 필요합니다.그래서 태강이 어떤 서류에서 서명을 따왔는지 역추적했는데… 하겸 씨 관련입니다.”“하겸이요?”“하겸 씨가 사망 전, 태강재단병원 임상시험 피해자 유족들을 인터뷰하고 다녔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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