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끝난 사랑의 다음 페이지: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동찬의 시선이 서류 상단의 굵은 글자에 꽂혔다.하나는 고용노동청에서 보낸 임금체불 진정 관련 출석요구서였고, 다른 하나는 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접수 통지서였다.접수일은 정확히 6일 전이었다.동찬이 유희의 카드를 전부 정지시킨 바로 그날이었다.“임금체불 진정에... 부당해고 구제신청까지?”동찬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표정이 굳어졌다. 눈이 충혈될 만큼 크게 뜨였고 목소리까지 흔들렸다. “너... 정말...”“최동찬 대표님.” 유희는 차가운 샘물처럼 맑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다음에 볼 때는 법정에서 이야기하시죠.”말을 마친 유희는 시선을 거뒀다. 동찬을 한 번 더 보는 것조차 번거롭다는 태도였다.“유희야! 잠깐만. 우리...”거대한 공포가 동찬의 심장을 붙잡자,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유희를 붙잡으려고 했다.“아... 아... 배가... 너무 아파...”그때 혜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배를 감싸 쥔 채 눈물을 가득 머금었다. “아기... 내 아기... 병원에 데려가 줘...”유희에게 뻗던 동찬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졌다.몇 달 동안 몸에 밴 반응처럼 동찬은 곧바로 혜미 쪽으로 달려갔다.유희는 살짝 웃었다. 너무 익숙한 장면이라 몸이 먼저 역겨움을 기억해 낸 듯했다.더는 머물 이유가 없었다. 유희는 미련 없이 메인홀 안으로 들어갔다.“유희야...”닫힌 문을 바라보는 동찬의 가슴은 무서울 만큼 텅 빈 느낌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상실감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피... 피... 나 피가 나는 것 같아...” 혜미는 눈시울을 붉힌 채 동찬의 옷을 꽉 붙잡았다.동찬은 고통스러워하는 혜미와 굳게 닫힌 회장 문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전에는 느껴 본 적 없는 갈등과 혼란에 빠졌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작은 약봉지를 들고 다급하게 뛰어나온 민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대표님, 본부장님. 혹시 송유희 팀장님 보셨어요? 약을 제 차에 두고 내리셨어요. 허
Read more

제12화

동찬은 혜미를 내려다보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형수님, 전 유희가 언젠가 알아서 받아들이고 그 아이도 인정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이런 식으로 유희를 몰아붙이면 안 됐어요.”“민아 씨, 강혜미 본부장 병원에 모셔다드려.”말을 마친 동찬은 결심을 굳힌 채 메인홀 안으로 향했다.“안 돼요...”혜미는 동찬이 떠나는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의 나약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은 사라졌고, 극심한 원망과 독기로 일그러졌다.임신한 뒤 동찬은 모든 일에서 혜미를 먼저 챙겼다. 유희 때문에 혜미와 아이를 두고 가 버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송유희! 다 송유희 저년 때문이야!’“불쌍한 척하는 게 너만 할 수 있는 줄 알아? 최동찬을 뺏어 가겠다고? 꿈도 꾸지 마!”혜미의 눈에 무서울 만큼 독한 기색이 번졌다....메인홀 안.유희는 한 협력 후보 회사의 대표와 집중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큰 그림자가 앞을 가렸다.동찬이 유희와 상대방 사이를 그대로 막아섰다. 태도는 강압적이었고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었다.“유희야, 얘기 좀 해.”유희는 차갑게 답했다. “너랑 할 얘기 없어.”“우리 둘이 3년 동안 부부로 살았던 얘기를 여기서 하고 싶다면 나도 상관없어. 그냥 여기서 말하지.”‘부부로 살았다’는 말이 나오자 곁에 있던 몇몇 대표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유희는 말없이 동찬을 노려봤다.‘정말 치사하네.’유희는 굳은 표정으로 메인홀 구석의 사람이 없는 곳까지 걸어갔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꺼지고.”“넌 예전에는 나한테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동찬의 잘생긴 얼굴에 상처받은 기색이 떠올랐다. 곧바로 손을 뻗어 유희의 손을 잡았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그날 네가 열이 났던 것도 몰랐고 허리를 다친 것도 몰랐어... 미안해. 네가 제일 힘들 때 내가 돌봐 주지 못했어. 아직 많이 아파?”유희는 질색하며 손을 빼냈다. 비
Read more

제13화

“최동찬 대표님, 나 진짜 바쁘니까... 이런 의미 없는 헛소리에 더 쓸 시간 없으니까 비켜주면 안 돼?”유희는 그대로 동찬을 돌아 나와서 단호한 걸음으로 떠났다.동찬은 분노로 굳은 채 이를 악물었다. “정말 협력 계약을 남한테 넘길 거야? 유희야, 화풀이도 정도가 있어!”유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토머스와 최종 협력사 대표에게 곧장 다가갔다. 일행은 표정이 굳은 동찬이 없는 사람처럼 지나쳐서 포럼 메인홀을 떠났다.동찬의 비서가 절망한 얼굴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대표님... 벨루그룹이 이담그룹하고 계약했습니다.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이번 계약을 위해 FS그룹은 꼬박 3년을 쏟아부었다.동찬이 이 계약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전 직원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희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이렇게 쉽게 다른 회사에 넘겨 버렸다고 비서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예전엔 그렇게 사이가 좋았는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틀어진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동찬의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유희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는 눈에는 엄청난 후회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뒤엉켜 있었다.동찬은 이를 악물고 명령했다. “따라가. 어디 가는지 놓치지 말고 지켜봐.”...벨루그룹 차량 안.창밖 풍경이 빠르게 뒤로 흘러갔다.유희는 뒷좌석에 기대 오성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집사님, 어떻게 됐어요?”비상계단으로 끌려갔을 때 유희는 일부러 힘이 빠진 척했다. 납치범 김민이 방심하자 바로 반격해서 제압했고,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두었다.유희는 심문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뒤처리는 오성재에게 부탁했다.전화 너머 오성재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온화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이자가 입이 꽤 무겁습니다. 아직 제대로 진술을 받아 내지는 못했습니다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쿵!전화 너머에서 둔탁한 충격음이 들렸다.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떨어진 듯한 소리였다.유희가 조금 의아해했다. “무슨 소리예요?”오성재는 2초쯤 침묵했
Read more

제14화

벨루그룹 차량 안.토머스는 유희 옆에 앉아 손목의 상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센터장님, 다치신 겁니까?”“가벼운 상처예요. 괜찮아요.”“회장님께서도 몇 번이나 당부하셨습니다. 센터장님의 건강과 안전이 벨루그룹에서는 최우선입니다. 계약 일정은 얼마든지 미뤄도 됩니다.”토머스는 망설임 없이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 “차 돌리세요. 시립병원으로 갑니다.”유희는 창밖으로 빠르게 바뀌는 길을 보면서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일주일 사이 벌써 세 번째 병원행이었다. ‘사람을 잘못 골라 결혼한 대가가 이런 건가?’...같은 시각, 동찬에게 비서의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송유희 팀장님이 탄 차가 갑자기 방향을 바꿨습니다. 계약 장소로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정말이야?!”팽팽하게 굳어 있던 동찬의 긴장이 풀렸다. 커다란 안도감이 가슴을 채웠다.‘역시 유희는 아직 나를 마음에 두고 있어.’‘벨루그룹 계약을 정말 다른 회사에 넘길 수는 없는 거야.’‘나를 기다리는 거야.’‘내가 먼저 숙이고 달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동찬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근처에 있던 꽃집으로 들어가 가장 크고 싱싱한 장미 꽃다발을 신중하게 골랐다.꽃다발을 조수석에 조심스럽게 올려놓는 동안, 동찬의 머릿속에는 이미 장미를 안고 오랜만에 자신에게 웃어 보이는 유희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따르릉-전화벨이 울리며 그 상상을 깨뜨렸다.동찬이 전화를 받자 유정란의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동찬아, 큰일 났어! 혜미가 조산했어!]“뭐라고요?”동찬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느 병원이에요? 지금 바로 갈게요!”동찬은 급히 차를 돌려 시립병원으로 향했다.방향을 너무 거칠게 트는 바람에 조수석의 꽃다발이 옆으로 넘어졌다. 탐스럽던 장미들이 차 문에 부딪히며 꽃잎이 떨어졌다.그 모습을 흘끗 본 동찬의 가슴이 이유 없이 조여들었다. 설명하기 힘든 불길함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지금 유희를 붙잡으러 가지 않으면, 다
Read more

제15화

“혜미는 남편을 잃었고, 아이는 남들 눈에는 아버지 없는 자식이나 다름없어. 최씨 집안에서 그 모자가 믿고 기댈 사람이라고는 네 양심 하나뿐이었다는 말이야.”“하지만 이제 나도 그 알량한 양심에 내 동생과 조카의 인생을 더는 맡기지 않을 거야.”“우리 집으로 돌아간 뒤에 혜미에게 새 인연을 찾아 줄 생각이야.” “혜미가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남자, 아이가 어디서든 당당하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내가 직접 골라 줄 거야.”동찬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졌다.“그건 절대 안 됩니다.”“왜 안 되지? 혜미는 남편과 사별했어. 이제 최씨 집안 며느리라는 이유로 붙잡아 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아이를 데리고 새출발을 하겠다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막겠다는 거지?”혜성은 한 치도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동찬의 안색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혜미의 아이는 자기 아들이었다. 혜성이 데려가서 다른 남자를 아버지로 만들게 둘 수는 없었다.한동안 말이 없던 동찬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아이가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나오면 공식 발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이 아이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가족관계등록부에도 제 아들로 올리겠습니다.”“FS그룹 지분 20%도 아이에게 증여하고, 앞으로 그룹의 경영권 승계 역시 이 아이를 중심으로 진행하겠다고 공표하겠습니다.”혜성은 철저한 사업가였다.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말이 아닌 확실한 보장이었다.그제야 혜성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어 있던 표정도 한결 누그러졌다.“혜미가 사람 보는 눈은 있었던 모양이군. 적어도 제 자식에게 책임질 줄은 아니까.”동찬은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곧장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유리창 너머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누워 있는 작은 아기를 보는 순간, 차갑게 굳어 있던 동찬의 마음이 서서히 풀렸다.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아들이었다.‘유희가 이 아이만 받아들여 준다면... 모든 게 완벽해질 텐데.’...동찬은 혜미와 아이 곁에 오래 머물렀다. 업무 전
Read more

제16화

유희가 스카이힐로 돌아왔을 때 오성재가 현관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성재는 밀봉된 서류봉투를 내밀며 공손하게 웃었다. “사모님, 김민이 입을 열었습니다. 예상하신 대로 강혜미가 시킨 일이 맞습니다. 직접 인정한 녹음 파일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추가로 확인한 게 있습니다. 김민과 강혜미는 단순한 지인이라고 보기 어려운 사이였습니다. 부적절한 관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핸드폰 데이터는 지금 복구 중인데, 그 작업이 끝나면 확실한 증거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이거 봐라. 단순한 사이가 아니라고?’‘정말 남녀 관계였다면 최동찬과 내 전 시어머니가 받을 충격이 얼마나 클까?’‘벌써부터 기대되네.’유희는 차가운 서류봉투를 손끝으로 쓸었다. 눈빛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고생했어요, 집사님.”“제가 고생한 건 아닙니다. 사실은...”오성재는 말을 하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이고, 이 입이 방정이지. 하마터면 회장님을 여기서 팔 뻔했네.’‘한마디라도 잘못 흘렸다간 내 목이 먼저 날아가겠어.’“으흠. 그보다 사모님, 5일 뒤가 최태산 어르신의 칠순입니다. 칠순 연회에 참석하실 수 있겠습니까?”최씨 집안의 총수 최태산, 지금도 집안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쥐고 있는 가장이었다.바로 동찬과 세호의 할아버지였다.예전에도 유희는 해마다 최태산의 생신 자리에 빠지지 않았다. 그때는 동찬의 아내라는 자격이었다. 이제는 세호의 아내가 되어 같은 자리에 서야 했다.너무 높은 신분 변화였다. 최씨 집안 전체의 체면과 권위를 건드리는 일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유희도 최태산이 자신을 좋게 볼 리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유희는 내키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가지 않고 싶었지만, 현재 신분을 생각하면 빠질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오성재가 말을 이었다. “저희 회장님께서 사모님 명의로 드릴 선물을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고미술계에서 오랫동안 전설처럼 거론되던 「고산독학도」 진품입니다.”“태산 어르신께서 몇 년 전부터 고서화 수집에 푹
Read more

제17화

“그럼 뭐 때문인데? 우리 아버님 칠순에는 온 집안 사람이 빠짐없이 참석해야 해. 안 나타나면 최씨 집안 안에서 네 자리는 더는 없는 거야.”“그래도 아직 머리는 있나 보네.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이런 집안 행사는 와야 한다는 건 알았으니까.”유정란은 새로 한 손톱을 과시하듯 손을 휘저었다. “됐어. 오늘은 아버님 칠순이라 너랑 말씨름할 시간 없어. 연회 끝나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서 혜미 미역국이랑 산후 보양식이나 챙겨.” “혜미가 젖이 잘 안 돈다잖아. 내 귀한 손자가 배곯게 생겼어.”그때 입구 쪽에서 동찬이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혜미는 가냘픈 모습으로 동찬 곁에 기대듯 붙어 있었다. 세 사람만 놓고 보면 다정한 가족사진과 다를 게 없었다.“혜미야, 네가 왜 왔어? 집에서 쉬라고 했잖아. 산후조리도 다 안 끝났는데 이러다 몸 상하면 어떡하려고?”유정란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혜미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부축했다.혜미의 안색은 아직 창백했지만 억지로 씩씩한 척 미소 지었다.“어머님, 오늘은 할아버님 칠순이잖아요. 이렇게 중요한 날 손주며느리가 빠질 수는 없죠. 아기도 데리고 와서 할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첫 증손자도 직접 보여 드리고요. 아기가 일찍 태어나서 몸이 약하긴 해도 이런 날 마음까지 빠뜨릴 수는 없잖아요.”“역시 우리 혜미가 제일 속도 깊고 효심도 깊다.”유정란은 흐뭇해하며 동찬을 돌아봤다. “동찬아, 혜미 아직 산후조리 중이야. 몸이 약하니까 네가 옆에서 잘...”말을 끝내기도 전에 동찬은 이미 큰 걸음으로 유희 쪽을 향하고 있었다.동찬은 유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반가움이 눈에 그대로 드러났다.장손 공식 발표 날까지 기다려야 유희가 고개를 숙이고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먼저 모습을 보였다.‘역시 아직 나를 신경 쓰고 있어.’“유희야, 와 줘서 기뻐.”동찬은 품 안에서 잠든 아기의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봐. 내 아들이야. 최씨 집안의 첫 장손이고. 나랑 닮았
Read more

제18화

혜미는 유희의 싸늘한 미소를 보자 몸을 움찔했다. FS그룹에서 맞았던 따가운 손바닥이 떠올랐다.요즘 유희는 예전과 달랐다. 화가 나면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지금 말은 분명한 경고였다.유희가 정말 아기를 받아 안으면, 사람들은 오히려 유희가 너그럽고 철이 들었다며 칭찬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자연스럽게 유희의 아들처럼 굳어질 수 있었다.목숨을 걸다시피 낳은 아들을 어떻게 유희에게 내줄 수 있을까?혜미는 서둘러 동찬의 품에서 아기를 받아 안았다. 품에 꼭 끌어안는 자세에서는 소유욕이 그대로 묻어났다. “아기가 아직 낯을 많이 가리니까... 칠순 연회에서 울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다음에 안아 보는 게 좋겠어.”유희는 의미심장하게 두 손을 펼쳐 보였다. ‘봐요. 내가 싫다고 한 게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는 듯했다.조금 전까지 유희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친척들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보이지 않는 손에 뺨이라도 맞은 듯했다.몇몇은 불쾌한 얼굴로 혜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말은 참 좋게 하더니, 혜미도 생각만큼 마음이 넓은 사람은 아닌가 보네.”“저 집안은 앞으로 조용할 날 없겠어.”“아무래도 자기가 낳은 아들이니까 남한테 맡기는 건 쉽지 않겠지.”“...”낮게 오가는 수군거림이 그대로 들려왔다.동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시선으로 혜미를 봤다.혜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속으로는 유희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겉으로는 더 억울하고 순한 표정을 만들었다. 눈가까지 붉히며 변명하려 했다. “저는 그냥 아기가 걱정돼서요...”“태산 어르신 들어오십니다!”집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홀 안을 울리자, 시끄럽던 말소리가 한꺼번에 가라앉았다.잘 재단된 짙은 색 정장을 입고 향나무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은빛 머리는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반듯하게 넘겨져 있었다.최태산의 위압감은 말이 없어도 홀 전체를 눌렀다. 날카로운 눈빛이 사람들을 훑자 모든 시선이 자
Read more

제19화

유희는 동찬이 내민 화려한 선물 상자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두 손으로 자신의 고서화 상자를 안정되게 받쳐 든 채, 주변의 시선을 모두 무시하고 상석에 앉은 최태산 앞으로 걸어갔다.“송유희!”동찬은 유희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백발이 성성한 최태산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사람을 압도했다. 눈꺼풀을 천천히 들며 앞에 선 유희를 깊게 바라봤다.유희는 허리를 곧게 펴고 최태산의 평가하듯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상자를 열어 안에 든 두루마리 그림을 꺼냈다.“할아버님, 칠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오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유희가 그림을 펼치려던 바로 그때 한 손이 위에서 눌러 동작을 막았다.동찬이 굳은 표정으로 유희 옆에 섰다. 최태산에게는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대신 사과했다.“할아버지, 유희가 아직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일부러 이런... 격에 맞지 않는 물건을 가져와 실례하려던 건 아닙니다. 저희가 따로 제대로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격에 맞지 않는 물건?”유희는 동찬의 독단을 차갑게 끊었다. 비웃음이 입가에 더 선명해졌다. “최동찬, 격에 안 맞는 건 네 쪽 같은데?”유희가 손을 움직이자 사르륵 소리를 내며 그림이 완전히 펼쳐졌다.세월이 밴 먹빛과 힘 있는 필선이 살아 있는 고화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 낀 먼 산 아래 홀로 선 학 한 마리. 넓은 여백과 깊은 먹색만으로도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듯한 고요와 쓸쓸함이 느껴졌다.“「고산독학도」잖아?!”“이 먹색이랑 붓놀림... 진품이 맞아! 어떻게 저걸 구했지?”“아버님이 10년 넘게 찾으셨던 작품이잖아. 수집가들이 한 번만 시장에 나오길 기다리던 유일한 작품인데!”“...”홀 안이 술렁였다. 감탄과 놀란 목소리가 곳곳에서 이어졌다.최태산의 흐릿하던 눈이 또렷하게 빛났다.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면서 그림을 향한 손끝마저 미
Read more

제20화

유희는 시선을 내리고 입술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허... 이런 날도 다 오는군.”최태산은 유희를 오래 바라보다 조용히 웃었다. 모든 사정을 짐작한 사람 같은 웃음에 묘한 감회가 섞여 있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사는 세호도 인정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일이 생기긴 하는구나.”최태산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곁에 놓인, 오래된 목함을 열자, 대대로 집안의 며느리에게 물려주던 옥가락지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유희의 손을 잡고 가락지를 손가락에 직접 끼워 주었다.“최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물건이다.”최태산의 시선이 투명하게 빛나는 팔찌에 머물렀다. 깊은 눈동자 안쪽에 아련한 슬픔과 그리움이 스쳤다. “세호의 어미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지. 오늘은 내가 그 아이 어미 대신 너한테 이걸 주마.”서늘한 옥의 감촉이 손가락에 닿자, 유희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최태산이 세호를 유난히 아낀다는 소문이 괜한 말은 아니었다. 세호가 선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촌동생과 사실혼처럼 지냈던 여자를 아내로 맞는 파격적인 일도 받아들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직접 인정하고 보호하기까지 했다.‘정말 엄청난 우산 아래로 들어오긴 했네.’전날 밤 내내 조였던 유희도 이제야 확실하게 마음을 놓았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세상에,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아버님이 집안의 옥가락지를 유희한테 직접 끼워 주셨어!”“이 정도면 뜻을 확실히 밝히신 거잖아. 아이를 낳지 못하더라도 유희를 최씨 집안의 며느리로 인정하겠다는 뜻이지.”“얼른 가서 축하해 줘. 우리가 유희를 단단히 잘못 봤네.”“...”조금 전까지 유희를 깎아내리던 친척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몰려들었다. 앞다퉈 칭찬하고 비위를 맞췄다.혜미 주변에 붙어 있던 사람들도 어느새 하나둘 빠져나가서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혜미는 아이를 안은 채 사람들 바깥에 홀로 서게 됐다.모든 관심을 받는 유희, 유희에게 자석처럼 붙어 떨어질 줄
Read more
PREV
12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