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휴가는 쓰지 않고, 그냥 사직하겠습니다.”순간 사무실은 공기의 흐름이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박성준은 서류에 사인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마치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의심을 이제야 확신하게 된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진심이야?”박성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내 앞에 섰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나를 위로하려는 기색이 담겨 있었지만, 그보다는 은근히 생색내면서도 답답해했다.“영미야,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 한 거야? 지영이가 예매한 비행기표는 몇 주 전부터 예약해 둔 거라 환불도 안 되고. 게다가 나도 거래처 미팅 때문에 어차피 서연시에 가야 하잖아.”“그냥 같이 한 비행기 타고 가는 것뿐이라고. 고작 며칠인데, 왜 그걸 내가 너보다 강지영을 더 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박성준은 화를 내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저 상대에게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설명할 뿐이었다. 오히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예전의 넌 늘 ‘다녀와요. 여긴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했었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이해해주지 않는 거야?”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성준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넌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회사가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부터 내 곁을 지켜준 것도 너였고, 지금의 회사를 함께 일궈온 사람도 너야.”박성준이 말을 멈췄다. 내가 예전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말을 순순히 의심 없이 받아들이길, 늘 그랬던 예전의 안영미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듯했다.“한 번만 더 날 믿어줄 수 없어?”나는 말없이 박성준을 바라봤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에 무언가가 완전히 멈춰버렸다.나는 안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내가 살아온 세상의 모든 관계는 이해관계와 거래 위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나는 평생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정략결혼도, 가문의 이름도 없이 오롯이 내 이름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처음 박성준을 만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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