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발렌타인데이를 하루 앞둔 날. 나는 약혼자이자 회사 대표인 박성준에게 휴가 신청서를 내밀었다. 다음 날,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박성준은 신청서를 대충 훑어본 뒤 책상 위에 내려놓을 뿐, 끝내 서명은 하지 않았다. “지영이가 이미 서연시행 비행기편 티켓까지 예약했고, 호텔도 환불이 안 돼. 며칠만 네가 대신 맡아줘.” “어차피 나도 거래처 미팅 때문에 서연시에 갈 예정이니까, 가 있는 동안은 내가 지영이도 잘 챙길게.” 박성준은 마치 당연한 결정이라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결혼식은 내가 돌아와서 하면 되잖아. 며칠 늦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곁에 서 있던 강지영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영미 씨. 두 분에게 그렇게 중요한 날인 줄은 몰랐어요. 대표님이 영미 씨라면 이해해 줄 거라고 했거든요. 영미 씨는 언제나 무엇보다 회사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사무실은 조용했다. 동료들은 모두 모니터만 바라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으로 항공편을 확인하느라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박성준을 가만히 바라봤다. 박성준은 끝내 알지 못했다. 우리가 약속한 발렌타인데이가, 안씨 집안이 내게 준 마지막 기한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2월이 끝나기 전까지 결혼하지 못하면, 나는 가문으로 돌아가 안씨 집안에서 정해 놓은 정략결혼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더 이상 박성준을 붙잡지 않았다. 사원증을 벗어 내려놓고 사직서에 서명한 뒤, 곧바로 할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 “이제 포기할게요.” “가문에서 정해 주신 결혼, 받아들이겠습니다.”
Voir plus그로부터 4개월이 흘렀다. 나는 저택 테라스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하준수가 아몬드 쿠키가 담긴 접시와 아침 신문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아가씨, 오늘 신문은 보셨습니까?”나는 신문을 집어 들어1면을 확인했다.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박성준에 관한 기사였다.‘기업가 박성준 파산... 대규모 투자 사기 정황 드러나.’회사가 무너진 뒤 수사 과정에서 박성준이 회사를 연명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투자 사기를 벌여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박성준은 존재하지도 않는 프로젝트를 내세워 소액 투자자들에게 투자금을 모았고, 새로 들어온 투자금으로 기존 손실을 메우는 방식으로 회사를 유지해 왔다.피해 규모는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컸다. 기사에 실린 사진 속 박성준은 검은 정장을 입은 수사관 두 명에게 이끌려 가고 있었다.얼굴에는 생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회사의 파산이 사기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그저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진실이 세상 밖으로 드러났을 뿐이었다.사람들은 말했다.“자업자득이네.”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저 지경까지 가진 않았을 텐데.”할아버지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다 읽었느냐? 기분이 어떠냐? 후련하냐? 아니면 아직도 안쓰럽냐?”나는 잠시 생각한 뒤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무렇지도 않아요.”4개월 전이었다면 여러 복잡한 감정에 마음이 심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신문 속 박성준은 두꺼운 유리 벽 너머에 있는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분명 박성준이 눈에 보였지만, 내 마음은 더 이상 아무런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하준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강지영 씨가 도시를 떠났습니다. 회사를 그만둔 뒤에는 어느 곳에서도 채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얼마 전 서부행 편도 항공권을 구입하는 모습이 목격됐습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랬군요.”하준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오늘 아침 박성준 씨 측
결혼식이 끝나자, 하객들이 모두 떠난 예식장에는 빈 잔과 다 타버린 촛불만 남은 긴 테이블이 적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나는 라운지 소파에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이민혁이 직원들을 모두 내보낸 뒤 문을 닫고 내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민혁이 입을 열었다.“언젠가는 꼭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이민혁을 바라봤다.“처음 아가씨를 본 건 8년 전이었습니다. 회장님 생신날이었죠.”이민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옛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그날 회장님께서는 뒤뜰에서 새 장비를 시험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아가씨만 남아 계셨죠. 혼자 정원에서 활을 들고 연습을 하고 계셨습니다.”“장난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화살을 하나씩 시위에 걸고 쏘기를 반복하셨죠. 연습을 마친 뒤에는 활을 내려놓고 손을 털면서 회장님 서재 쪽을 한 번 바라보셨습니다.”나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그때의 일이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 시절 내 머릿속에는 늘 박성준뿐이었기 때문에 저택에 오래 머무는 일은 거의 없었다.이민혁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그러고는 곧바로 뛰어나가셨죠. ‘남자친구가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하면서요. 회장님께서는 서재 창가에서 아가씨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계셨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잠시 말을 멈춘 이민혁이 조용히 웃었다.“그날 저는 거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창밖으로 아가씨가 밖에 서 있는 차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봤죠.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카락까지도 아직 기억합니다. 그 순간... 저는 아가씨를 좋아하게 됐습니다.”이민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 이후에도 저는 여러 번 이 저택을 찾았습니다. 회장님은 아가씨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가끔 함께 일을 처리하다 보면 한 번씩 말씀하셨죠.”이민혁이 잠시 숨을 골랐다.“그 후에 회
3월 15일. 안씨 가문 저택.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똑- 똑- 똑-세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하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시간이 다 됐습니다.”나는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문을 열었다. 복도 끝에는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나를 보는 순간 할아버지의 눈가가 붉어졌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한 번 하셨다.“나와 함께 가자꾸나. 우리 손녀.”내가 말없이 할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걸음을 옮기자, 예식장 문이 천천히 열렸다.양옆으로 길게 놓인 테이블, 왼편에는 이씨 집안, 오른편에는 안씨 집안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중앙에는 짙은 붉은 카펫이 길게 깔려 있었고, 통로를 따라 촛불이 하나씩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공기 중에는 시가 향과 오래된 나무 향이 뒤섞여 있었다.통로 끝.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이민혁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곧게 맨 넥타이, 흔들림 없는 눈빛, 나를 발견한 순간 이민혁이 움직임을 멈췄다.나는 천천히 이민혁을 향해 걸어갔다. 예식을 집례하는 신부가 서약을 낭독하자, 하객들 사이에서 잔잔한 박수가 흘러나왔다.그때.예식장 옆문 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구겨진 회색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검은 제복을 입은 경호원 두 명에게 붙잡혀 있었다.정장을 입은 남자가 억지로 몸을 뿌리치더니 몇 걸음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주변의 경호원들이 일제히 달려들며 제압하려 했다.“들여보내요.”내가 담담하게 말하자, 경호원들은 이민혁을 바라봤다. 이민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경호원들이 한 걸음 물러섰다.붉은 카펫 한가운데 박성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불과 한 달 전보다 훨씬 초췌해 보였다.눈 밑은 짙게 꺼져 있었고 턱에는 손질하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정장 재킷도 여행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었다가 꺼내 입은 것처럼 구겨져서 엉망이었다.박성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영미야... 영미 네가... 안씨 집안의 후계자였어?”내가 아
서연시. 호텔 스위트룸.박성준은 가장 중요한 거래처에 20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매번 통화 중이라는 기계음뿐이었다.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던 세 곳의 거래처 담당자 역시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 비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장기 거래처들이 계약 해지 통보를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현재까지 총 20곳입니다. 작년에 체결한 연간 계약 세 건도 포함됐습니다. 위약금은 모두 부담하겠지만, 앞으로 더 이상 거래는 이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박성준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이유는?”“없습니다. 전부 단순한 사업 조정이라고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회사가 같은 날, 같은 이유로 계약을 정리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전화를 끊은 박성준은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핸드폰이 울렸다.이번에는 부두 관리자의 전화였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대표님! 컨테이너가 사라졌습니다. 부두에 불이 났습니다. 안에 있던 장비만 해도 거의 700만 달러어치의 물건들입니다.”“운송회사에서도 계약 위반으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변호사 말로는... 우리로선 감당하기 어려울 거랍니다.”박성준은 핸드폰을 든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컨테이너도, 거래처도 사라진 채, 법적 제제조치까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우연일 리 없었다. 그때 강지영이 물기를 머금은 머리에 가운만 걸친 채 수영장 쪽에서 급히 달려왔다.“대표님, 대체 무슨...”“나 좀 내버려둬.”박성준은 강지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강지영은 두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입을 벌린 채 박성준을 바라봤지만 끝내 따라가지는 못했다. 그 순간 핸드폰에 속보 알림이 떴다.[이씨 집안과 안씨 집안, 3월 15일 결혼식 발표.]박성준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추며, 바로 식장 위치를 확인했다.앞으로 20년을 더 살면서 벌어도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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