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한때 너를 위해 스스로를 가뒀다: Chapter 11 - Chapter 19

19 Chapters

제11화

나는 마침내 자동차 여행을 시작했다.차창 밖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고, 새파란 하늘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 내려앉아 있었다.전망대 옆에 차를 세우고 카메라를 들었다.찰칵하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이렇게 카메라를 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한때 나는 이희연을 위해 커리어도 꿈도 포기했고, 심지어 나 자신까지 포기했다.하지만 다시 이곳에 서고 나서야 깨달았다.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한 번도 진짜로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그래도 아버지가 이제 곁에 안 계시는 건 조금 아쉬웠고,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앞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검은색 오토바이 한 대가 비스듬히 멈춰 있었고, 주인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엔진을 살펴보고 있었다.아무래도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처음에는 굳이 참견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 옆을 지나가려는 순간 그 사람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거기 잘생긴 오빠!”여자가 나를 향해 웃었다.“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그 소리에 내 발걸음이 멈췄다.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말 예쁜 얼굴이었으니까.젊고 화사한 데다가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분위기까지 풍겼다.마치 한여름의 가장 뜨거운 햇살 같았다.“뭘 도와주면 되는데요?”“차 좀 얻어 타면 안 될까요?”양희영은 완전히 고장 난 오토바이를 툭툭 두드렸다. “얘가 파업했거든요.”그러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요?”“나쁜 사람요?”양희영이 눈을 깜빡였다.“그렇게 잘생겼는데 어떻게 나쁜 사람이겠어요?”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말은 참 번지르르하게 잘하네.’그래도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미워하기가 쉽지 않았다.30분 뒤 양희영의 오토바이는 견인차에 실려 갔고, 내 차에는 사람이 한 명 늘었다.“양희영이에요.”양희영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앞으로 며칠 동안 임시 동행이네요.”나는 예의상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고도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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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이희연을 다시 만난 건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며칠 전 최민환에게 전화했을 때 이희연의 목소리를 들었다.그때 이희연이라면 어떻게든 나를 찾아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알아요.”나는 이희연을 바라보며 양희영에게 담담하게 대답했다.“전처예요.”양희영은 안도한 듯했지만, 그와 달리 이희연의 미간은 더욱 깊게 일그러졌다.이희연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나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여보, 우리 얘기 좀 하자.”오랜 세월 함께한 사이인 만큼 제대로 마무리할 필요는 있었기에, 그 요청에 나도 동의했다.우리는 함께 숙소 밖 전망대로 올라갔다. 긴 강처럼 이어진 침묵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한참이 지나서야 이희연이 입을 열었고,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여보, 내가 미안해.”나는 조금 비꼬듯 웃었다.“뭐가?”이희연은 멈칫했다. 아마도 내 질문에 말문이 막힌 듯했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유한천과 너무 가깝게 지내서 당신 힘들게 한 거,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나는 말없이 이희연을 바라봤다.저녁 바람이 이희연의 고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문득 오래전, 주머니에 늘 내 위장약을 챙겨 다니던 이희연이 떠올랐다.하지만 그때의 이희연은 이미 없어졌다.눈앞의 이 사람은 나를 외면했고 나의 마음을 저버렸다. 그리고 내가 건넨 진심을 무참하게 짓밟았다.나는 이희연 때문에 방황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하기도 했다.“이희연.”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고, 목소리는 바람 소리 때문에 더 낮았다.“뭐가 제일 우스운지 알아?”“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나는 죽을힘을 다해 스스로에게 네 탓을 하면 안 된다고 되뇌었어. 너한테는 너만의 원칙이 있으니까.”“그런데 나중에야 알았어. 넌 그냥 나를 위해서는 예외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야.”“유한천이 말 한마디만 해도 넌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갔잖아.”이희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아버님이 돌아가신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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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그 말을 듣자 어이가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그래서 나는 이희연의 손을 뿌리치고 되물었다.“이희연,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네가 남자 동료랑 애매한 관계로 지내도, 나는 죽어라 네 곁에 붙어 있으면서 계속 네 뒷바라지나 해야 해?”이희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여자는 원래 자존심이 강했다.아니면 오랜 세월 이어진 내 사랑과 양보가 이희연을 계속해서 버릇없게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이희연은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고 시선은 양희영에게 향했다.그 눈빛에는 짙은 적대감이 억눌려 있었다.“일단 말해 봐. 이 여자랑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어?”나는 스스로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너랑 상관없어. 우린 이미 이혼했어.”“이혼! 이혼! 이혼!”이희연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언제 당신이랑 이혼하겠다고 했는데?”나는 차분하게 말했다.“네가 직접 사인했잖아. 내가 기억이라도 되살려 줘야 해?”이희연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난 그게 이혼 합의서인지 전혀 몰랐어! 난 단 한 번도 이혼을 원한 적 없어!”“네가 원했든 아니든, 이혼한 건 사실이야.”“여보!”이희연이 다시 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양희영이 옆으로 끼어들어 막았다.“이제 우리 오빠 좀 그만 괴롭히면 안 돼요? 오빠가 엄청 귀찮아하는 거 안 보여요?”이희연의 얼굴이 굳었다.“입만 열면 오빠, 오빠! 여우처럼 구는데, 그렇게 군다고 진짜 귀여운 줄 알아요?”“그리고 난 내 남편이랑 얘기하고 있어요.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요.”양희영이 코웃음을 쳤다.“아니, 이것 보세요, 전처분. 이 사람은 그쪽의 전남편이지 남편이 아니거든요?”‘전처분’이라는 호칭이 이희연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그러자 이희연의 눈빛이 사나워지더니, 갑자기 양희영의 옷깃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그래도 난 이 사람이랑 5년이나 부부로 살았어요. 그러는 당신은 대체 뭐죠?”옷깃을 붙잡힌 양희영은 눈썹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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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그 후 며칠 동안 내가 어디를 가든 이희연은 따라왔다.같은 호텔에 묵고 같은 관광지를 찾았으며, 심지어 밥까지 같은 식당에서 먹었다.무시하는 게 가장 좋은 대응이라는 걸 알기에, 아예 이희연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풍경을 보고 싶으면 풍경을 봤고, 사진을 찍고 싶으면 사진을 찍었다.하지만 양희영은 더 이상 참지 못했는지 식당에서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쏘아붙였다.“전처 분, 혹시 스토커 기질 있어요?”이희연은 눈꺼풀조차 들지 않고 그저 느긋하게 닭날개 하나를 집더니, 식탁을 가로질러 내 그릇에 올려놓았다.예전과 다를 바 없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마치 우리의 결혼생활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내가 내 남편이랑 같이 여행하는 게 어떻게 스토킹이죠?”양희영은 생글생글 웃었지만 눈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다시 한번 정정해 드릴게요. 전남편이에요. 남편이 아니라.”두 사람 사이에는 금방이라도 불꽃이 튈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러자 나는 머리가 지끈거려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둘 다 좀 조용히 하면 안 돼?”그러자 두 사람은 입을 다물더니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이희연의 눈빛에는 고집과 서운함이 어려 있었다.반면 양희영의 눈빛에는 대놓고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저 여자 편들기만 해 봐요.’참으로 기묘한 광경이었다.아이 둘을 데리고 외출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나는 더 이상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오후에는 전망대에 도착했는데, 멀리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펼쳐져 있었다.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졌고, 발아래로는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마치 하늘과 땅 사이에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 듯했고, 그 속에서 사람은 가장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한 것만 같았다.나는 카메라를 꺼내 들고 렌즈를 천천히 먼 곳으로 향했다.그 순간, 왜 수많은 사람들이 차 한 대를 몰고 세상 곳곳을 여행하는 꿈을 꾸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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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전화를 받은 나는 밤새 차를 몰아 고향으로 돌아갔다.병원 복도에서는 어머니가 여전히 응급처치를 받고 있었고, 의사의 표정은 무거웠다.“환자 상태가 매우 위중해요. 당장 수술해야 해야 하지만 이 병원에서는 수술이 어려워요. 지금 큰 병원으로 전원하는 게 좋아요.”온몸이 차갑게 식었고 마치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있었을 때도 의사는 내게 똑같은 말을 했다.그때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그러면 이번에는 어머니까지 잃게 되는 걸까?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고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바로 그때, 이희연이 도착했다.“제가 할게요.”그러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는데, 다행히 의사가 이희연을 알아봤다.“혹시 이희연 교수님이신가요?”이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차트 좀 보여 주세요.”불과 몇 분 만에 상태를 확인한 이희연이 판단을 내렸다.“수술할 수 있어요. 최대한 빨리 준비해 주세요. 제가 직접 집도할게요.”수술은 꼬박 8시간 동안 이어졌고,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마침내 수술실 불이 꺼졌다.수술실에서 나온 이희연의 얼굴은 놀랄 만큼 창백했고, 이마에는 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어.”밤새 졸이고 있던 마음을 그제야 놓을 수 있었다.나는 이희연의 지친 눈을 바라보고는 잠시 침묵하다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이희연은 그 말에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놀라더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내가 해야 할 일이었어.”어머니가 병실로 옮겨진 뒤에야 나는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몇 가지 선물을 준비해 이희연이 묵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이번에는 이희연이 어머니를 살려준 건 사실이었다.그랬기에 그 점은 진심으로 고마웠다.이희연은 내가 준비한 선물 상자를 바라보더니 눈빛이 조금씩 흐려졌다.“여보, 내가 당신한테 빚진 게 많아. 아버님 일은 평생 가도 갚을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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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수술은 성공적이었어요. 원래대로라면 갑자기 상태가 악화될 이유가 없는데요?”의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다만, 강한 충격을 받았다면 얘기가 달라지죠.”그러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충격이요?”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수술 후에는 환자의 감정이 크게 동요해서는 안 돼요. 특히 심장과 혈압 수치가 원래부터 불안정했으니까요. 오늘 특별한 일이 없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특별한 일?’어머니는 막 수술을 마친 상태였다.의료진과 우리 가족 몇 명을 제외하면, 어머니를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잠깐...’나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CCTV 확인해 주세요.”30분 뒤, CCTV실에서 당시 영상이 재생됐다.병실 앞 복도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고, 간호사들은 트레이를 들고 병실을 드나들었다.그러다 오후 3시 20분, 한 사람이 화면에 나타났는데 바로 유한천이었다.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하면서 나는 본능적으로 이희연을 바라봤다.이희연은 내 뒤에 서 있었다.모니터에서 흘러나온 빛이 이희연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여자의 턱 근육은 팽팽하게 굳어져 있었다.CCTV에는 소리가 없어서 화면만 확인할 수 있었다.병실 문을 열고 들어간 유한천이 침대 옆으로 다가가더니 몸을 숙이고 뭔가를 말했다.처음에는 어머니도 대답하는 듯했다.하지만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의 움직임이 갑자기 격해졌다.손으로 몇 번이고 침대 난간을 두드렸고, 모니터의 파형도 거칠게 요동쳤다.유한천은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입술을 움직여서 또 뭔가를 말했다.어머니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가 잿빛으로 변하고 나서야, 유한천은 느긋하게 손을 뻗어 호출 버튼을 눌렀다.그리고 여기에서 영상이 멈췄다. CCTV를 확인하는 보안통제실에는 기계가 돌아가는 낮은 소리만 남았다.“유한천을 만나야겠어.”나는 몸을 돌려서 곧장 나갔다.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가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 같았고 난 증오심에 치가 떨렸다.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차역에서 떠나려던 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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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내가 경찰에 신고하자, 유한천은 곧바로 경찰에 연행됐다.수술 직후의 환자를 고의로 자극해 상태를 악화시킨 일에 더해서, 앞서 발생한 수술 후 출혈 사건의 조사 결과까지 더해져 함께 책임을 묻게 됐다.유한천을 기다리는 건 단순한 해고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이제 유한천이 어떤 결말을 맞든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어머니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됐고, 중환자실 밖에서 의사는 몇 번이고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나는 꼬박 이틀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다.유리창 너머로 온몸에 수많은 관을 꽂은 채 누워 있는 어머니를 바라봤다.모니터 위의 숫자가 한 번씩 바뀔 때마다, 무딘 칼날이 신경을 조금씩 베어 내는 것 같았다.며칠 동안 이희연도 계속 병원을 지켰다.나보다 잠을 더 적게 잤는지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하지만 그런 이희연을 바라봐도 고마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떨쳐 낼 수 없는 혐오감만 남아 있었다.이희연이 몇 번이고 유한천을 감싸면서 제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두지만 않았어도, 어머니에게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여보.”이희연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나한테 한번 맡겨 봐.”나는 차갑게 눈을 들었다.“뭘?”“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의료진에게 연락해서 치료 계획을 다시 세울게. 내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믿어 줘.”나는 눈을 감았다. “내 눈앞에서 좀 사라져 주면 안 돼? 지금 내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너야.”하지만 이희연은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으면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지금 나 말고 당신이 의지할 사람이 누가 있어?”반박하고 싶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지금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이희연뿐이었다.나는 힘없이 이희연이 내 어깨에 기대도록 내버려둔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다.“누가 오빠한테 교수님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대요?”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양희영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그 뒤에는 금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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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어머니는 결국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해외 전문가팀이 치료 계획을 다시 조정했고, 일주일 뒤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무사히 옮겨졌다.그 소식을 들은 날, 나는 병실 밖 의자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그동안 쌓여 있던 모든 두려움과 초조함,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오빠.”양희영이 휴지를 내밀며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서툴러 하는 기색이 목소리에 묻어났다.“어머님도 이제 괜찮아지셨는데 왜 울어요?”나는 휴지를 받아 눈가를 닦았다.그래도 눈시울은 여전히 붉었다.“고마워요. 희영 씨. 희영 씨는 정말 착한 사람이네요.”양희영이 없었다면, 지난 며칠을 어떻게 버텼을지 정말 알 수 없었다.그러자 양희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 쑥스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사실 제가 이렇게까지 한 게 전부 착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내가 멈칫하며 양희영을 바라보자, 여자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맑고 솔직한 눈빛이었다.“오빠를 좋아하니까요.”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졌고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랐다.양희영의 눈빛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고,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맑았다.“사실 그때 길에서부터 오빠를 눈여겨봤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며칠이나 따라다니다가 겨우 가까워질 기회를 잡은 거예요.”“오빠가 정말 멋있었어요. 혼자 차를 몰고 많은 곳을 누비는 모습이 자유롭고 거침없어서... 그게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그때 오빠 차에 타고 있으면서, 그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오빠 곁에 있을 수 있게요.”양희영의 고백을 다 듣고도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희영 씨,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문가들을 이렇게 쉽게 부를 수 있을 정도면 희영 씨 집안도 상당히 좋을 것 같거든요?”“희영 씨처럼 예쁘고 착한 집안의 귀한 딸이라면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어요.”“나는 이혼도 했고 정관수술도 받았어요. 나중에 복원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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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부터.”나는 이희연을 바라봤고 목소리는 깊은 물처럼 고요했다.“우리에겐 애초에 그다음이 있어서는 안 됐어.”이희연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한참 뒤 이희연이 피식 웃었다. 씁쓸하면서도 처연한 웃음이었다.마치 손에 쥐고 있던 패를 마침내 전부 잃어버린 도박꾼 같았다.“알겠어.”이희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앞으로는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게.”말을 마친 이희연은 몸을 돌려 떠났다.걸음은 느렸지만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나는 그 자리에 서서 이희연이 한 걸음씩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봤다.마침내 복도 끝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바라봤다.홀가분하지도 슬프지도 않았고, 마음속에는 그저 아주 옅고 잔잔한 평온함만 남아 있었다.마치 한 권의 책이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펼친 것처럼 느껴졌다.5년 후.F국 P시.나는 최민환과 강변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5년이라는 시간은 최민환을 더욱 날카롭고 노련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이제 최민환은 업계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스타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몸짓 하나, 눈빛 하나에도 빈틈없이 정확하고 단호한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나 역시 다시 촬영 스튜디오를 차렸다.지난 몇 년 동안 세계 곳곳을 누비며 수많은 풍경과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고, 출품하는 작품마다 각종 상을 휩쓸다시피 했다.이번에 P시에 온 것도 국제사진예술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최민환이 내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치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그런데 너 희연 씨 요즘 어떻게 사는지 알아?”나는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노란 술이 조명 아래에서 천천히 일렁였다.“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최민환은 내 태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말을 이어 갔다.목소리에는 조금 고소하다는 기색까지 묻어 있었다.“유한천은 실형까지 받았어. 직장도 잃었고. 완전히 끝난 거지.”“그런데 제일 웃긴 게 뭔지 알아? 그 사람 부모가 매일 희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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