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한때 너를 위해 스스로를 가뒀다: Chapter 1 - Chapter 10

19 Chapters

제1화

오늘 꽃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정말 기뻤다.이희연이 드디어 눈치라는 게 생겨 결혼기념일 깜짝선물을 준비한 줄 알았다.하지만 꽃 사이에 꽂힌 카드를 펼쳐 본 순간,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선배, 일부러 오셔서 저희 이모 수술 집도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저희 가족 모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 꽃은 제가 선배를 위해 특별히 고른 거예요.][우리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선배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유한천.]그 카드를 보자 난 손이 떨렸고 꽃다발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3년 전 아버지가 위독하실 때, 의사는 최대한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하지만 고향의 의료 기술은 낙후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장거리 전원을 버텨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그래서 나는 이희연에게 고향으로 내려와서 아버지의 수술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근데 그때 이희연이 뭐라고 했더라?“병원에서는 외부 출장 수술을 금지하고 있어. 일은 일이야. 사적인 관계 때문에 규칙을 어길 수는 없어.”결국 아버지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 가던 구급차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그 일은 평생 나에게 남은 가장 큰 한이 되었다.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때, 나는 일부러 검은 만다라를 골랐다.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꽃말 때문이었다.예측할 수 없는 죽음과 사랑.하지만 알고 보니 애초에 예측할 수 없는 일 같은 건 없었다.수없이 많은 밤, 꿈에서 깨어나 임종을 앞둔 아버지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몰래 눈물을 흘렸다.그리고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희연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되뇌었다.사람마다 마음속에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 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깨달았다.규칙은 깰 수 있었고, 원칙도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단지 나, 고도겸은 이희연에게 있어서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었다.최민환과의 통화를 끝낸 뒤, 나는 미리 꾸며 놓았던 리본과 풍선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넣었다.그러고 검색창을 열고 단어를 몇 개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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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막 전화를 끊었을 때, 레스토랑 입구 쪽에서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교수님, 예약하신 자리 준비됐어요. 이쪽으로 오시죠.”나는 ‘이 교수님’이라는 호칭에 유난히 예민했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그런데 정말 이희연이었다.그 옆에는 유한천이 있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안으로 들어왔다.이희연은 흰 가운을 벗고 사복을 입고 있었다.흰 셔츠 소매는 팔뚝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고, 눈가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유한천은 이희연의 옆에서 걸으면서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그리고 유한천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이희연이 피식 웃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가운데가 뭔가에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예전에는 이희연이 퇴근해 집에 오면, 나는 늘 붙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하루 동안 보고 들은 새로운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주고 싶어 했지만, 이희연의 반응은 늘 시큰둥했다.웃는 건 고사하고 응하고 한마디만 해 줘도 다행일 정도였다.나는 그런 이희연 대신 변명까지 만들어 줬다.일이 너무 힘들어서 내 이야기에 반응해 줄 기운조차 없는 거라고.근데 이제야 알았다.이희연이 피곤해도 웃을 줄 알지만, 단지 내 앞에서 웃지 않았을 뿐이었다는 사실을.“어? 도겸 씨?”나를 먼저 발견한 건 유한천이었다.유한천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적당히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여기 어떻게 계세요?”내가 대답하지 않자 유한천은 혼자서 설명을 이어 갔다.“오늘 큰 교통사고가 나서 부상자가 정말 많았어요.”“저랑 선배가 오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바빴거든요. 마지막 수술도 방금 끝났고, 너무 배가 고파서 쓰러질 지경이었어요.”“그런데 선배가 갑자기 여기 남편분이 좋아하시는 해산물 요리가 있다는 생각이 나셨대요.”“저를 데리고 와서 먹고, 남편분 것도 하나 포장해 가겠다고 하셨어요.”말을 마친 유한천은 이희연을 돌아보며 얌전하게 웃었다.“선배가 남편분을 정말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뭘 하고 있든 계속 생각하시는 걸 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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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나는 묵묵히 짐을 정리했다.계속 몸을 움직여야만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한 통증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날이 밝아 올 무렵 창고에서 몇 년째 먼지만 쌓여 있던 촬영 장비를 겨우 찾아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화면이 켜졌다.그 순간, 코끝이 몹시 시큰해졌다.‘다행이다. 아직 고장 나지 않았어. 아직 늦지 않았어.’카메라를 품에 안고 거실로 돌아오자 휴대폰이 울렸다.휴대폰 화면을 확인해 보니 부동산 중개인이었다.[고도겸 씨, 지난주에 두 분께서 보셨던 그 집 말인데요. 집주인과 이야기가 다 됐어요. 문제가 없으시면 다음 주말에 계약하시면 돼요.]그 말에 난 멈칫하면서 몸이 굳어버렸다.‘하마터면 잊을 뻔했네.’얼마 전 이희연이 승진하면서 월급이 올랐고, 지금 집이 너무 작으니 더 큰 집으로 옮기자고 했다.먼저 말을 꺼낸 건 이희연이었다.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집을 보러 다니면서 집을 고르고, 부동산에 연락하고 구조를 비교하고, 대출금을 계산한 건 전부 나 혼자였다.이희연이 나와 함께 집을 보러 간 건 딱 한 번뿐이었다.그날 난 신이 나서 이희연을 침실로 데려가 우리가 쓸 방을 보여 주며, 어떤 인테리어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물었다.그러나 이희연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다 괜찮아. 당신이 정해.”나는 이희연이 보고 있던 채팅 상대가 유한천인 것을 똑똑히 보았다.또한 집을 다 둘러보기도 전에 이희연은 유한천의 연락을 받고 떠났다.그때를 떠올리며 나는 차분하게 중개인에게 말했다.“그 집, 계약 안 해요.”[네? 왜요? 아내분도 꽤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요?]나는 손에 든 카메라를 바라보며 웃었다.“이혼할 거라서요.”전화기 너머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짐을 다 정리하고 나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나는 이혼 합의서를 챙겨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5년의 결혼생활도 겨우 얇은 종이 몇 장이면 바로 끝낼 수 있었다.이혼 합의서를 손에 들고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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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검사 결과지를 꽉 움켜쥐자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왜 정관수술을 했냐고?’난 헛웃음이 나왔다.‘이희연 때문이지, 누구 때문이겠어...’이희연은 일에 대한 욕심이 강한 데다 통증도 무서워했다.임신하면 자신의 인생 전체를 희생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아이 없이 살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나는 그런 이희연이 안쓰러웠다.그래서 아이를 좋아하면서도 이희연의 뜻을 받아들였다.결혼 후 우리는 줄곧 피임했다.그런데 얼마 전, 이희연이 인터넷에서 한 사례를 보게 됐다.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부부가 있었다.남편은 중년이 된 뒤 아이를 갖고 싶어졌지만, 아내는 이미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결국 남편은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그리고 이희연은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렵다고 했다.그래서 이희연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나는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 날 정관수술을 받았다.원래는 결혼 5주년 기념일에 이 사실을 알려 주려고 했다.앞으로는 이희연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이희연은 내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다행히 간호사의 말로는 정관수술을 받은 지 오래되지 않았고 정관 상태도 양호해서, 복원수술을 받으면 생식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수술받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던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렸다.이희연이 들어온 것이다.손에는 점심때 유한천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했던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고,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곧 이희연이 서류봉투를 내 몸 위에 던지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서류에 사인했어. 집을 사는 건 사적인 일이잖아. 앞으로는 이런 걸 병원까지 가져오지 마. 한천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그 말에 난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이희연은 이게 새집 구매 관련 서류인 줄 알고, 내용은 보지도 않고 그대로 사인한 것이다.‘잘됐네. 덕분에 말다툼할 일 하나는 줄었어.’나는 이혼 합의서를 가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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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수술은 내일 오전으로 잡혀서 나는 먼저 집에 다녀왔다.저녁노을이 비치는 테라스에는 꽃들이 한창 예쁘게 피어 있었다.치자꽃, 장미, 다육이, 수국까지.모두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하나하나 정성껏 키운 것들이었다.이희연은 나와 함께할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꽃과 풀을 가꾸며 마음을 달랬다.내가 떠나고 나면 이 꽃들을 돌볼 사람도 없을 테고, 그대로 시들어 버리면 아까울 것 같았다.그래서 사진을 찍어 아파트 주민 단체 채팅방에 올렸다.[이사하게 돼서 꽃을 무료 나눔해요. 먼저 오시는 분부터 드릴게요.]이웃들은 흔쾌히 가져가 주었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테라스의 절반 이상이 비었다.마지막 수국 화분까지 보낸 뒤 나는 텅 빈 테라스에 서 있었다.놓아주는 일은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는 않았다.정리를 끝내고 곧 몸을 돌려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유리장 안에는 시계가 가득했다. 대부분 이희연이 선물한 것이었다.예전에는 선물을 받을 때마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시계를 건네던 이희연의 성의 없는 표정이 떠올랐고, 심지어 똑같은 모델을 두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그걸 떠올리자 생각할수록 우스웠다.내가 사랑했던 건 줄곧 내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이희연이었고, 환상이 깨지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그렇게까지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사진을 찍어 중고 거래 플랫폼에 올리자, 하룻밤 사이 7, 8개가 팔렸다.가득 차 있던 장식장은 마치 내 마음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확 비었다.밤 10시, 현관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희연이 돌아온 것이었다.관자놀이 쪽은 피부가 까져 있었다.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는 데다가 오른팔에는 두꺼운 붕대까지 감고 있었다.그리고 이희연을 부축하고 있는 사람은 유한천이었다.눈가가 새빨간 걸 보니 조금 전까지 울었던 것 같았다.“오늘 환자 보호자가 난동을 부렸어요. 선배가 저를 대신해서 나섰다가 다친 거예요. 그러니 꼭 잘 챙겨 주세요.”나는 유한천을 한번 바라보고 차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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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유한천을 알아본 순간, 온몸이 굳었다.“수간호사 바꿔 주세요.”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의사가 나를 눌렀다.“왜 이러시죠? 우리 유한천 수간호사님은 우리 병원에서 가장 뛰어난 수간호사예요.”“다른 환자들은 유한천 수간호사님에게 부탁하고 싶어도 대기줄이 길어서 안 되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그런 분이 직접 들어온다고 하잖아요. 운이 좋은 줄 아세요.”나는 다시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미 마취과 의사가 옆에 다가왔다.“긴장 푸세요. 한숨 자고 나면 끝나 있을 거예요.”차가운 약물이 혈관을 타고 들어오자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수술등 아래에 선 유한천이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얼마나 지났을까?통증 때문에 눈을 떴다.아랫배를 무딘 칼로 계속 헤집는 것처럼 아팠고 숨을 쉴 때마다 상처가 당겼다.눈을 뜨자 병실은 텅 비어 있었고, 유한천만 간호 기록을 작성하고 있었다.“좀 아픈데요?”유한천이 다가와 한번 살펴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정상적인 증상이에요. 수술 후에는 다 그래요. 쉬시면 돼요.”그 말을 끝으로 다시 고개를 숙여 기록을 작성했지만 아랫배의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졌고, 모니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곧 나는 힘겹게 손을 들었다.“수간호사님.”그러자 유한천은 고개를 들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긴장하지 마세요. 수술 후라 몸이 약해진 거예요. 조금 더 지켜볼게요.”유한천은 몸을 돌려 나갔고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누군가 뛰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고도겸!”최민환이었다.이미 말을 할 수 없게 된 나는 그저 최민환의 손을 붙잡았다.최민환은 침대 시트를 내려다보더니 그 자리에서 소리쳤다.“의사 불러요! 빨리 의사 불러요! 수술 후 출혈이잖아요!”곧 병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혈압 떨어져요!”“빨리 지혈하세요!”“수혈 준비하세요!”귓가에는 시끄러운 발소리와 의료 기구가 부딪치는 소리만 가득했다.완전히 의식을 잃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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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내가 어디를 가겠어?”나는 담담하게 되물었다.[오늘 도시가스 회사에서 점검하러 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어서 나한테 전화가 왔어. 왜 집에 없어?]이희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랬구나.’나는 이희연이 드디어 내 이상함을 알아차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걸 알게 되자 소리 없이 웃었다.아직도 그런 허황된 기대를 품고 있던 내가 우스웠다.“내가 왜 꼭 집에 있어야 해? 나는 외출하면 안 돼? 내 취미생활이라도 즐기면 안 돼? 여행이라도 가면 안 되는 거야?”이희연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당신 요즘 대체 왜 그래? 밥도 안 하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걸핏하면 성질이나 부리고. 이제는 혼자 여행까지 가? 진짜 미쳤어?]나는 창밖의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안 미쳤어. 그냥 정신을 차린 거야.”전화기 너머가 순식간에 조용해지더니, 한참 뒤 이희연이 차갑게 웃었다.[그래. 계속 그렇게 해. 당신이 집에 안 들어오겠다면 나도 안 들어갈 거야. 누가 더 오래 버티나 한번 보자고.]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화가 난 최민환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집어던질 뻔했다.“희연 씨 미친 거 아니야? 교수씩이나 되는 사람이 조금만 알아보면 네가 입원한 걸 알 텐데, 조금도 신경을 안 쓰잖아!”화를 내던 최민환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도겸아, 울고 싶으면 울어. 참지 말고.”나는 최민환의 어깨에 기대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이제 눈물도 안 나.”남자는 함부로 눈물을 보이지 않는 법이다.게다가 가치도 없는 사람을 위해 우는 건 더더욱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사흘 뒤 몸이 거의 회복되자, 퇴원 수속을 하고 짐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잠시 멈칫했다. 뜻밖에도 이희연이 집에 있었다.시선이 마주치자 몇 초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다.그러나 먼저 입을 연 건 이희연이었다.“왔어? 어디 놀러 갔다 왔어?”나는 대답하지 않고 곧장 침실로 들어가서 서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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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저녁 무렵, 이희연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꽃집을 나섰다.꽃다발 한가운데에는 자동차 열쇠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이렇게 먼저 고개를 숙이면, 고도겸의 비위를 너무 맞춰 주는 건 아닐까 싶었다.하지만 꽃을 받고 기뻐할 고도겸의 표정을 떠올리자,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집 문을 열고 이희연이 나지막이 불렀다.“여보.”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집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사람의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이희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꺼내 고도겸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그 음성에 이희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곧 이희연은 테라스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으나 역시 텅 비어 있었다.고도겸이 5년 동안 정성껏 가꿔 온 꽃들이 모두 사라졌었다.텅 빈 화분 받침대 몇 개만 덩그러니 남아서 쓸쓸함을 더했다.이희연은 순간 멍하니 굳어지면서, 마음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빠른 걸음으로 드레스룸에 가서 문을 열고, 이희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자신이 고도겸에게 선물했던 물건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손목시계도, 넥타이도, 옷도 모두 없었다.이희연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다시 전화를 걸었다.연결이 안 된다고 했지만 몇 번이고 다시 걸었다.안내음이 여전히 똑같자, 이건 분명 차단당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불안감이 점점 커지면서 이희연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고도겸...”이희연은 나지막이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빠른 걸음으로 침실을 향했다.고도겸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었다.마치 처음부터 이희연의 삶에 존재한 적조차 없었던 사람처럼 말이다.문득 시야 끝에 침대 옆의 탁자가 들어왔는데, 그 위에는 서류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장이 거세게 뛰면서 이희연은 홀린 듯이 그쪽으로 다가갔다.맨 위에 놓인 서류 표지에는 선명하게 몇 글자가 적혀 있었다.[이혼 합의서]숨이 턱 막히면서, 이희연은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장을 펼쳤다.그곳에는 놀랍게도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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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고도겸이 떠난 다음 날, 이희연은 병원에 출근하지 않았다.커튼은 빈틈없이 닫혀 있었고 집 안은 한밤중처럼 어두컴컴했다.이희연은 술 한 병을 더 따서 거칠게 한 모금 들이켰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따갑게 태웠지만, 가슴속에서 들끓는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고도겸은 그렇게 단호하게 이혼을 결심했고, 또 그렇게 단호하게 정관복원수술까지 받았다.그런데 단 한 가지도 이희연과 상의하지 않았다.그럼 이희연은 대체 뭐였을까?두 사람이 함께한 5년의 결혼생활은 또 뭐였을까?그때 문이 밖에서 열리더니 유한천이 보온 도시락통을 들고 들어왔다.엉망이 된 집 안을 본 순간, 유한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선배.”유한천은 빠르게 다가왔다.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거예요?”이희연은 소파에 기대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마치 유한천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유한천은 쪼그리고 앉아서 보온도시락을 열었다.“선배 드시라고 국 끓여 왔어요. 조금이라도 드세요.”이희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하지만 유한천의 마음속에는 서서히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고도겸은 떠났고, 이제 이희연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유한천은 이희연의 옆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선배, 사실 이렇게 떠나 버린 건 그분이 너무하신 거예요.”“선배가 그동안 그 분한테 얼마나 잘했는데요? 그 분은 여자인 선배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전혀 몰라요.”이희연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이에 유한천은 점점 용기를 냈다.“저라면 절대 선배한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그제야 이희연은 고개를 들더니 시선이 유한천의 얼굴로 향했다. 유한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드디어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유한천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선배, 저 대학 때부터 선배를 좋아했어요. 지금까지 계속 선배만 좋아했어요.”“선배 남편은 선배를 버렸지만 저는 안 그래요. 앞으로 제가 선배 곁에 있을게요.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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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멱살을 잡힌 유한천은 목이 졸리는 바람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래도 간신히 입을 열었다.“선배, 믿어 주세요. 저는 정말 해치지 않았어요.”이희연은 갑자기 손을 놓았지만 두 눈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나가.”유한천의 온몸이 떨렸다.“선배.”“나가라고 했어! 집 비밀번호도 바꿀 거야. 앞으로 또 멋대로 우리 집에 들어오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유한천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눈에는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했다.이희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더 이상 유한천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다음 날, 유한천은 넋이 나간 채 병원에 출근했다가 법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자신에게 소송 통지서가 있다는 내용이었다.유한천의 머릿속에서 윙 소리가 나면서 나지막이 물었다.“무슨 소송이죠?”[의료 과실에 관한 분쟁이에요. 원고는 고도겸 씨고요.]유한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30분도 지나지 않아 인터넷에 장문의 글이 올라왔다.글은 논리정연했고 증거도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유한천이 지난 몇 년 동안 저지른 여러 문제도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기혼 여의사의 연구팀 팀원임을 이용해 논문을 발표했고, 실제 기여도는 부족한데도 제1 저자 자리를 차지한 일도 있었다.계속해서 파격 승진을 거듭하며, 젊은 나이에 수간호사 자리에 오른 일도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으로 환자에게 보복하기 위해, 수술 후 대량 출혈이 발생했는데도 제때 치료받지 못하게 해서 죽을 뻔하게 만든 일까지 일일이 나열됐다.그러자 댓글창은 완전히 초토화가 됐다.[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미남계를 썼다는 건가? 미인계를 쓴다는 여자는 들어봤는데 남자는 처음 보네!][어쩐지 승진이 너무 빠르더라.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었네.][이건 반드시 조사해야 해! 대중에게 제대로 해명하도록 하라!]불과 몇 시간 만에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그날 병원 경영진은 긴급회의를 열었고 결과는 금세 나왔다.유한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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