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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달빛 아래 묻은 마음: Chapter 11 - Chapter 19

19 Chapters

제11화

사흘째가 되어서야 한소희는 열이 내려 겨우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금란은 한소희를 부축해 집 밖을 한 바퀴 돌았다. 집 앞에는 평평하게 다져진 넓은 흙마당이 있었고, 젊은 남녀 몇 명이 칼을 수련하며 날카로운 칼날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금란을 본 이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그러다 하나같이 궁금한 눈치로 한소희를 바라보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한소희는 처마 아래에 서서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소희가 한참을 꼼짝 않고 서 있자, 금란은 힘에 부친 줄 알고 방으로 데려가려 했다.그때 한소희가 문득 입을 열었다. “금란아.” “예?” “나도 무예를 배우고 싶구나.” 금란의 잠시 멈칫하더니 한참 뒤에야 고개를 돌려 한소희를 찬찬히 살폈다. 햇빛 아래 드러난 한소희의 얼굴은 투명해 보일 만큼 창백했고, 손목은 한 손에 감길 정도로 가늘었으며, 손바닥을 감싼 무명천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아씨.” 금란이 말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씨, 지금은 몸이 너무 쇠하셨습니다. 이런 몸으로 무예를 익히기 시작하셨다가는 도리어 몸을 더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나도 안다.” 한소희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여전히 칼을 수련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허나 언제까지고 이대로 살 수는 없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흔들림이 없었다. “북삭에서 삼 년, 황궁에서 일 년을 지내는 동안 나는 날마다 누군가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말 뒤에 묶여 끌려갈 때도 기다렸고, 법당에 갇혔을 때도 기다렸으며, 장춘궁 전각 문 앞에 무릎 꿇었을 때도 기다렸지.” 한소희는 고개를 돌려 금란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구나.” 금란은 잠시 침묵했다. 햇살이 한소희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몹시 야윈 탓에 두 눈만 유난히 또렷해 보였는데, 그 눈빛만큼은 예전 마님과 꼭 닮아 있었다.“좋습니다.” 금란이 말했다. “허나 먼저 저와 함께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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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고승훈은 잠시 한소희를 응시한 뒤 약장으로 향해, 빼곡한 서랍에서 약재 몇 가지를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약재를 덜어 내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저울도 없이 손끝의 감각만으로 약재를 하나씩 집어 약절구에 넣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무예를 익히려면 치료법부터 바꿔야 하오. 매일 인시(寅時)마다 지룡분(地龍粉) 석 돈을 탄 약을 한 사발씩 마시게. 허면 반 시진은 배가 뒤틀릴 듯 아플 테지만, 그래야 몸속에 맺힌 어혈이 풀릴 것이오. 밤마다 약탕에도 한 시진씩 몸을 담가야 하네.”그는 투박한 질그릇 단지 하나를 꺼내 한소희 앞으로 밀어 놓았다.“내가 손수 지은 고약이오. 밤마다 무릎에 바르고 석 달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마시오. 다만 상한 뼈마디가 다시 성해질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소.”말을 마친 고승훈은 약장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이 방법을 택하면 석 달 내내 하루하루 고통을 견뎌야 하오. 그동안은 몸조리를 하며 기본 자세를 다지는 수련밖에 할 수 없소.”“미리 분명히 말해 두겠소. 나 고승훈은 도중에 포기할 사람은 치료하지 않소.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지금 돌아가시오.”마당 안에는 산바람이 약장을 스치는 소리만 남았다. 한소희는 손을 뻗어 투박한 질그릇을 집어 들고 단단히 움켜쥐었다. “약은 언제 다 달여집니까?”고승훈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약재를 골랐다.금란은 한소희를 부축해 밖으로 향하며 나직이 일렀다.“아씨, 고 의원님은 말씀이 다소 거칠지만 너무 마음에 두지는 마십시오. 그분의 스승님께서도 한때 이 산에서 이름난 명의셨는데, 두 분의 성미가 꼭 닮았습니다. 그래도 아씨를 위해 고약까지 따로 지어 주신 걸 보면, 꽤 마음을 쓰고 계신 겁니다.”한소희는 더 묻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희 낭자.”한소희가 돌아보았다. 마당 문 앞에 선 고승훈은 아까보다 한층 진지한 얼굴이었다. “소희 낭자가 초연 아주머니의 딸이라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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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그날도 자세 수련을 마쳤지만, 한소희는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마당 한쪽의 돌받침에 걸터앉아, 약재 선반 앞에 쪼그려 앉아 약초를 뒤집어 말리고 있는 고승훈을 바라보았다.“고 의원님.”한소희가 문득 불렀다.고승훈은 돌아보지도 않았고, 손도 멈추지 않았다.“우리 어머니에 대해서...”한소희가 잠시 말을 멈췄다.“얼마나 알고 있습니까?”약초를 뒤적이던 고승훈의 손이 아주 잠깐 멎었다.그러나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반쯤 마른 잎을 다시 뒤집었다.“많이는 모르오.”그가 담담히 말했다.“그대 어머니가 내 스승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고, 내 스승도 그대 어머니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소. 강호라는 데가 원래 그렇지. 한 번 은혜를 입고, 또 한 번 갚다 보면 나중에는 누가 누구에게 얼마나 빚졌는지도 모르게 되거든.”고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약재 선반에 놓인 대나무 채반 하나를 꺼냈다.그리고 막 뒤집어 놓은 약초를 한 잎씩 골라 그 위에 펼쳤다.“예전에 역병이 크게 돈 적이 있었소. 그때 그대의 어머니가 남쪽에서 약재를 수레 세 대나 구해다가 산을 두 고개나 넘어 직접 실어 왔소.”“그때 스승님께서 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러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더군.”고승훈의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만큼은 평생 병치레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고.”한소희의 숨이 순간 멎는 듯했다.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어머니는 어린 그녀를 곁에 앉혀 놓고 약초 하나하나를 가르쳐 주곤 했다.잎사귀 하나를 손끝으로 집어 코앞에 내밀며 웃었다.“소희야, 한번 맡아 보렴. 이게 박하란다. 머리를 맑게 해 주지.”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너무 어렸다.그저 어머니 품속으로 파고들 줄만 알았다.약 냄새가 쓰다고 투정하고, 햇볕이 뜨겁다고 칭얼대고, 약초 잎이 손을 찌른다고 싫어했다.“허니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게.”고승훈의 목소리에 한소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그는 채반을 들고 부엌 쪽으로 걸어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우선 몸부터 제대로 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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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그날 밤 이후, 한소희는 더욱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동이 트기도 전부터 달이 중천에 걸릴 때까지 칼을 휘둘렀고, 그러는 동안 부러뜨린 목검만 세 자루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는 딱지가 앉았다가 다시 터지기를 거듭한 끝에 거칠고 단단한 굳은살이 박혔다. 한밤중에 금란이 약을 갈아 주려고 붕대를 풀자 땀에 불어 하얗게 변한 상처 가장자리로 여린 붉은 살이 벌어져 있었다. 약을 바르던 금란의 손길이 잠시 멎더니,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씨, 고 의원님께서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대로 계속 무리하시면 묵은 상처가 낫기도 전에 새 상처부터 덧나서, 머지않아 몸을 상하게 될 거라 하셨습니다.”한소희는 아무 대꾸 없이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도록 내버려 둔 채, 창밖에 드리운 캄캄한 밤하늘만 바라보았다. 사흘째 해 질 무렵, 마지막 베기 동작을 끝낸 한소희는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새로 깎은 목검을 품에 안고 곁에 서 있던 금란은 한소희가 몸을 일으켜 다시 칼을 받으려 하자 끝내 입을 열었다. “아씨,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시지요.” 목검을 향해 뻗던 한소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금란은 더 캐묻지 않고 그저 목검을 건네며 말했다. “칼로 적은 벨 수 있어도 마음속 응어리까지 벨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제게 털어놓으십시오. 혹 말씀하고 싶지 않으시면, 소인이 곁에서 함께 수련하겠습니다.”한소희는 목검을 받아 들고 손가락에 힘을 주더니, 한참 뒤에야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금란아, 나는 참 쓸모없는 사람이지?” 금란은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한소희의 어깨를 힘주어 두드렸다. “아씨,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침착하게 살길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고비는 이미 넘으셨으니, 남은 것은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해 나가시면 됩니다.” 한소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목검을 움켜쥐고 다시 나무 말뚝 앞으로 다가갔다. 고승훈이 수련장을 지나갈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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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아셨다 해도 저를 조금 일찍 궁 밖으로 내보내셨을 뿐이겠지요. 폐하와 한홍난의 혼사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짐은 단 한 번도 너를 걸림돌이라 여긴 적이 없다.”이건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목울대가 한 차례 크게 움직였다.“예, 그러셨지요.”한소희는 그의 손아귀에서 제 손목을 천천히 빼냈다.“폐하께서는 제 불같은 성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폐하의 짝이 될 자격이 없다고 여기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계략을 꾸미고 거짓 연극까지 벌여 저를 북삭으로 보내 삼 년을 살게 하셨지요. 돌아온 뒤에는 제 이복동생의 시녀가 되어 전각 문 앞에 무릎 꿇고 그 아이가 해산하는 소리까지 듣게 하셨고요.”“처음부터 끝까지 폐하께서는 저를 걸림돌이라 여기신 적이 없으셨겠지요. 애초에 폐하의 마음속에서 저는 그만한 의미조차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이건의 눈동자가 순간 가늘어졌다.“아니다.”그는 이를 악물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짐이 너를 찾아온 것은...”“무엇 때문입니까?”한소희는 이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한홍난의 본모습이 드러나고 나서야 폐하만 바라보던 한소희라는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르셨습니까?”“그런 것이 아니다.”이건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주먹을 움켜쥐었다.“소희야, 지난날에는 짐이 너에게 몹쓸 짓을 했다. 짐이 눈이 멀어 사람을 잘못 보았고,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허니 짐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다오.”“필요 없습니다.”한소희는 약초 광주리를 어깨 위로 추켜메고 몸을 비껴 이건의 곁을 지나쳤다.“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왕이시니, 누구에게도 사과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두어 걸음 옮기자 암위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길을 막았지만, 한소희는 돌아보지 않았다.“폐하께서는 오랫동안 사람을 풀어 저를 찾으셨고, 도성에서부터 이 장터까지 쫓아오셨지요. 허나 폐하께서는 제가 북삭에 있는 삼 년 동안, 어떤 곳에서 살았는지,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 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돌아왔는지를 아십니까?”등 뒤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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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아씨.”한소희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금란이 다시 불렀다.“떠나지 않겠다.”한소희가 말을 끊자 금란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아씨...”“금란아.”한소희는 산비탈 아래에 자리한 푸른 기와와 흰 담의 집들을 바라보았다.“이 사람들은 창령산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지?”금란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마님 때부터 함께해 온 이들도 있고, 가장 늦게 들어온 이들조차 이곳에 터를 잡은 지 십여 년은 되었습니다.” “십수 년을 살아온 터전인데, 어찌 나 하나 때문에 하루아침에 떠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가벼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금란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산 남쪽의 약초밭은 고 의원의 스승님이 일구신 곳이다. 거의 이십 년 동안 약초를 심고 가꾸어 이제야 제대로 된 밭이 되었지.”“네 수련장도 삼 년 동안 흙을 거듭 다진 끝에야 이토록 단단해졌다. 오복이를 비롯한 몇몇에게는 이 산이 조상 대대로 묘를 써 온 곳이기도 하고.”한소희는 한 곳씩 손으로 가리키다가 마지막으로 산허리의 울창한 숲을 가리켰다.“내 어머니의 의관총(衣冠塚)도 이곳에 있다.”금란은 한동안 한소희를 바라보다 나직이 웃었다.“방금 하신 말씀은 마님께서 예전에 하셨던 말씀과 꼭 같으십니다.”금란은 고개를 젓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떠나지 않으시려면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수련장 주변의 초소를 삼 리 밖까지 넓히고, 밤에는 보초를 두 배로 세우겠습니다. 앞으로 다시 그자를 마주치시더라도 절대 혼자 만나셔서는 안 됩니다.”한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금란이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야기는 다 끝났소?”돌아보니 고승훈이 약초 광주리 곁에 서서, 그 안에서 골라낸 약재 몇 가지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몇 번 뒤집어 보던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지어 둔 약을 팔아 오라고 했더니 약은 그대로 가져오고, 골칫거리만 한 무더기 달고 왔구려. 읍내 약방에서는 이 약들을 한 할이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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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한소희는 목검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식혀 둔 차를 주전자에 담아 오던 금란은 그 말을 듣자 미간을 찌푸리며 한소희를 돌아보았다.“아씨, 제가 가서 돌려보내겠습니다.”“그럴 필요 없다.”한소희는 목검을 칼걸이에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무릎을 꿇고 싶다면 그대로 두어라.”한소희는 금란이 건넨 질그릇 사발을 받아, 식혀 둔 차를 천천히 한 모금씩 마셨다.“계속한다.”곧 목검이 나무 말뚝을 내리치는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아까보다 묵직해진 타격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두 차례의 베기 수련을 마칠 무렵,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동쪽에서 밀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낮은 천둥이 산등성이를 울리는 가운데, 흙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수련장으로 거세게 들이쳤다.콩알만 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한소희는 마침 마지막 일격을 끝낸 참이었다.한소희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처마 아래에 선 채, 수건으로 목검에 맺힌 빗물을 닦았다.그때 오늘 밤 보초를 맡은 젊은이가 산 입구 쪽에서 다급히 달려오더니,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아씨, 그자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빗줄기는 갈수록 굵어졌고, 기왓장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금란은 한소희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아씨, 비가 너무 많이 내립니다. 산길에 고인 물이 벌써 발목을 넘었으니, 반 시진만 더 내리면 계곡물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날 겁니다.”한소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때 뒤에서 고승훈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대로 폭우가 쏟아지면 언제 계곡물이 들이닥칠지 모르오. 하필 그자가 무릎을 꿇은 곳이 물길이 지나는 자리요.”금란의 안색이 달라졌다.“아씨, 제가 가서 당장 떠나라고 하겠습니다.”“네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한소희는 목검을 칼걸이에 돌려놓았다.“한번 마음먹은 일은 누가 말려도 듣지 않는 자다.”빗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그 순간 하늘을 가른 번개가 수련장 전체를 섬뜩하리만큼 하얗게 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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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이건은 떠났다.빗속으로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가 이내 거센 빗소리에 삼켜졌고, 산문 밖에 선 한소희는 일행이 어두운 빗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마당으로 돌아오자 금란이 생강차 한 사발을 들고 처마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갔습니까?”“갔다.”생강차를 모두 마신 한소희는 빈 사발을 처마 아래 돌 탁자에 내려놓았다.“금란아, 도성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아직 연락이 닿느냐?”금란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연락할 수 있습니다.”“그쪽 움직임을 철저히 살피라고 해라. 한홍난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다. 감히 역모를 일으켰다면, 아버지가 쥔 병권만 믿고 나선 것은 아닐 테니, 배후에 반드시 누군가 더 있을 것이다.”금란은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아씨, 혹시... 폐하가 걱정되시는 겁니까?”“나는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다.”한소희는 흐트러진 겉옷을 여몄다.“그저 그 부녀가 뜻을 이루게 두고 싶지 않을 뿐이다.”금란은 한동안 한소희를 바라보았으나 더는 묻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홀로 돌아가던 한소희는 비가 그친 뒤의 맑고 서늘한 산 공기를 들이마시며 몇 걸음 옮기다가, 갑자기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에 길가의 나무를 짚고 허리를 숙여 두어 번 기침했다.“비를 맞지 말라 했건만, 말은 도통 듣지 않는군.”산길 모퉁이에는 바람막이 등불을 든 고승훈이 서 있었다.그는 곧장 다가와 다짜고짜 두 손가락으로 한소희의 손목을 짚더니, 이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냉기가 또 한 겹 깊이 스며들었소.”고승훈은 맥을 짚던 손을 거두며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지난 석 달 동안 치료한 보람이 하나도 없구려.”한소희가 허리를 곧게 폈다.“그렇게 심하지는 않습니다.”“심한지 아닌지는 그대가 정할 일이 아니오.”고승훈은 잠시 한소희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함께 내 처소로 가시게. 오늘 밤은 약을 한 첩 더 써야겠소.”“고 의원님.”한소희가 부르자 그는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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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창령산에는 유난히 일찍 봄이 찾아왔다.쌓였던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산허리의 늙은 복숭아나무에는 연분홍빛 꽃이 가지마다 앞다투어 피어났다.약초밭 가에 쪼그려 앉은 한소희는 고승훈을 따라 새로 돋은 약초 싹을 한 포기씩 옮겨 심느라 손톱 밑까지 온통 흙투성이였다.곁에 쪼그려 앉은 고승훈은 능숙한 손길로 모종을 옮기면서도 잔소리를 잊지 않았다.“그 줄은 모종 사이가 너무 좁소. 더 자라면 뿌리끼리 엉킬 것이오.”한소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잘못되면 고 의원님 책임입니다.”“내 책임이라니?”고승훈은 코웃음을 쳤다.“여기에 있는 약초들은 하나같이 귀한 것들이라네.”말은 그렇게 하나, 손으로는 이미 한소희가 삐뚤빼뚤 심어 놓은 모종의 자리를 하나씩 바로잡고 있었다.그렇게 지낸 지도 어느덧 이 년이 가까워졌다.한소희의 몸에 남아 있던 옛 상처는 모두 나았고, 칼솜씨도 금란이 이제야 봐 줄 만하다고 할 정도로 늘었다.이듬해 춘분(春分), 산 아래 장터에 다녀온 금란이 도성에서 온 서신 한 통을 가져왔다도성에 남아 있던 옛 부하들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보낸 서신에는 짤막한 글 몇 줄만 적혀 있었다.서신을 다 읽은 한소희는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뜰 한쪽의 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마침 부엌에서 약재를 넣은 국을 끓이던 고승훈이 고개를 내밀어 한소희의 안색을 살폈다.“무슨 일이오?”“이건이 황실 종친 가운데 다섯 살짜리 아이를 양자로 들여 태자로 세웠습니다. 며칠 전에는 황위를 물려주고 출가하겠다고 천하에 알렸고요.”국자를 든 고승훈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다시 솥 안의 국물을 저었다.“그렇구려.”무심히 대꾸했던 그는 잠시 뒤 한마디를 덧붙였다.“그러다 속세로 돌아오거든 나를 찾아오라 하시오. 대머리에 쓰는 약이 있으니.”한소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허리를 숙일 만큼 소리 내어 웃었다.고승훈은 웃음을 터뜨린 한소희를 말없이 바라보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는, 몸을 돌려 약재를 넣고 끓이던 냄비를 화덕에서 들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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