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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달빛 아래 묻은 마음: Chapter 1 - Chapter 10

19 Chapters

제1화

대전 아래에서는 신하들의 수군거럼이 끊이지 않았다.“황후 자리에 오른들 무슨 소용인가. 폐하께서 애지중지하시는 이는 한 귀비라는 걸 모르는 이가 있는가? 입궁한 지 불과 이 년 만에 귀비가 되고 황자까지 낳았지 않소. 봉인(鳳印)마저 손에 쥐었으니, 후궁에서 누가 감히 그 자리를 넘보겠는가.”“내 말이 그 말일세. 폐하께서 황후 마마를 구할 마음이 있으셨다면 진작에 군사를 보내셨겠지. 즉위하신 지 두 해가 지나도록 모른 척하시다가 이제 와 황후로 책봉하신 걸 보면, 결국 세간의 입을 막으려고 명분만 챙겨 준 셈이지.”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쨍그랑 소리와 함께 한소희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전각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사람들은 한소희가 끝내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렸다고 생각했다.아무래도 예전의 한소희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한 번은 가을 사냥 때, 영국공(榮國公)의 세자가 한소희를 두고 이건에게 목매는 꼴이 우습다고 비웃었다가, 그녀가 휘두른 채찍에 관끈이 단번에 잘려 나간 적이 있었다.또 한 번은 연회 때, 태부(太傅)의 여식이 이건의 주변을 맴돌았다는 이유로 술 한 병을 그대로 그녀의 머리 위에 들이붓기도 했다.그런 한소희였으니, 사람들은 이번에도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거라 여겼다.그런데 뜻밖에도 다음 순간, 한소희는 황급히 고개부터 들었다. “송구하옵니다... 제가 여러분의 흥을 깨뜨린 것은 아닌지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그러자 이건이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았다.”그런데도 한소희의 목소리는 한층 더 작아졌다.“허면 신첩, 잠시 물러가 의복을 갈아입고 와도 되겠습니까? 치맛자락이 더러워져서... 폐하의 체면에 누가 될까 염려되옵니다.”이건은 한동안 말없이 한소희를 바라보다가, 미간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이내 그는 곁을 지키던 태감을 향해 명했다.“황후께서 의복을 갈아입도록 편전으로 모시거라.”곧바로 한소희는 태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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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한소희는 문을 열려던 손을 그대로 멈췄다.이건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잠시 뒤, 그가 말을 이었다.“예전에 짐이 위기에 빠졌을 때, 어린 소녀 하나가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뒤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후부의 여식이라 하기에 짐은 그 아이가 소희인 줄 알았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이건의 목소리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허나 뒤늦게 알고 보니, 그때 짐을 구한 아이는 홍난이었다.”한소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방금 들은 말이 사실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한때 그녀는 온 도성을 제 집 안마당처럼 휘젓고 다녔다.어느 집 공자를 채찍질하고, 또 어느 집 도련님을 두들겨 패어 온 도성을 발칵 뒤집어 놓아도 상관없었다.마지막에는 늘 이건이 나서서 뒷수습을 해 주었으니까.그런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그토록 자신에게 쏟아졌던 총애도, 무슨 짓을 해도 눈감아 주던 너그러움도, 애초부터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그저 사람을 잘못 알고 베푼 마음이었을 뿐이었다.“허나 홍난이는 서출이다.”이때 문틈 너머로 이건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짐이 하루아침에 혼약을 파하고 홍난이을 맞아들인다면, 조정 안팎에서 비난이 끊이지 않을 것이네. 그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오. 더구나 소희의 성정을 생각하면...”이건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소 난처한 기색을 담아 말을 이었다. “소희가 진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금란전(金鑾殿)까지 쳐들어와 난리를 피울 게 뻔하네. 온 도성이 들썩일 만큼 일을 키우고도 성이 차지 않겠지. 그리되면 홍난이가 온갖 구설을 떠안게 될 터인데, 짐은 그 아이를 그런 처지에 놓이게 할 수 없네.”이때 한석주가 곧장 말을 받았다.“폐하께서 깊이 헤아려 내리신 결정이옵니다. 소희도 북삭에서 몇 해 지내다 보면 그 드센 성정 또한 한결 누그러지겠지요. 소희에게도, 홍난이에게도 그편이 가장 나을 것입니다.”이건은 그 말을 듣고 짧게 답했다.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한결 가벼워졌다.“북삭이 비록 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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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 뒤 며칠 동안 이건은 아침 조회가 끝나기 무섭게 봉의궁을 찾았다.첫날에는 갓 수확한 여지 한 광주리를 가져왔다.영남에서 역마를 재촉해 급히 올려 보낸 것이라며, 그가 손수 껍질까지 벗겨 한소희의 입가에 내밀었다.이튿날에는 옥으로 만든 바둑판을 들여왔다.전왕조 때부터 내려온 귀한 물건이라며, 흑돌을 한소희 앞으로 밀어 놓고는 예전에 그녀가 틈만 나면 바둑을 두자고 자신을 졸라 대던 이야기를 꺼냈다.하지만 그때마다 이건이 자리에 앉은 지 차 한 잔 마실 새도 되지 않아 장춘궁(長春宮)의 태감이 황급히 달려와, 귀비마마께서 아침부터 속이 메슥거리고 구토가 심하니 폐하께서 가서 살펴 주십사 아뢰었다.이건은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두어 걸음을 옮기던 그가 문득 멈춰 서서 한소희를 돌아보았다.“소희야, 홍난이가 아이를 가진 몸이라 짐이...”한편 한소희는 바둑판에 남은 백돌 몇 알을 가지런히 모아 바둑통에 담았다.“황실의 후사가 중하니, 폐하께서는 다녀오십시오. 신첩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이건은 한동안 말없이 한소희를 바라보았다.너무도 잔잔한 그 눈빛을 마주하자 도리어 가슴이 꽉 막히는 듯 답답해졌다.무언가 말하려던 이건은 결국 한마디만 남겼다.“금방 다녀오마.”그리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전각을 나섰다.한소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금방 다녀오마.예전에도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그때마다 그녀는 곧이곧대로 믿었다.하지만 이제는 그 말을 들어도 마음 한구석조차 흔들리지 않았다.그때였다.푸드덕.창밖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잿빛 매 한 마리가 창틀에 내려앉았다.다리에는 손가락만 한 대나무 통이 매달려 있었다.한소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나무 통을 풀어 안에 든 쪽지를 꺼냈다.어머니의 옛 수하들이 보내온 답신이었다.짤막한 한 줄뿐이었다.[준비를 마쳤습니다. 보름 뒤 자시, 서화문에서 모시겠습니다.]한소희는 한동안 쪽지를 내려다보다 촛불에 가져다 댔다.불길이 종이를 삼키고 재만 남겼다.앞으로 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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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건이 손목을 세게 움켜쥔 탓에 뼈마디가 저릴 만큼 아팠지만, 한소희는 그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드릴 말씀이 없다?”이건이 싸늘하게 비웃었다.“북삭의 장군이라는 자가 네 허리 뒤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훤히 알고 있는데, 헌데도 짐에게 할 말이 없다는 것이냐?”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돌아온 뒤로 짐이 손끝 하나 대는 것조차 그리도 질색하더니... 북삭에서 남들에게 실컷 보이고 만져진 탓이었나 보구나.”그 말을 듣고 한소희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입술이 가늘게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건은 손을 뻗어 한소희의 머리에 꽂힌 봉황 비녀를 뽑아냈다.눈에는 차가운 조소만 가득했다.“한 나라의 국모가 될 몸이라고?”그는 비녀를 내려다보다 비웃듯 덧붙였다.“네가 가당키나 하느냐?”이건은 손에 들고 있던 봉황 비녀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밖을 지키던 태감이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깊이 숙였다.이건은 등을 돌린 채 차갑게 명했다.“짐의 명을 전하라. 황후가 몸이 편찮으니 봉의궁에 머물며 몸을 돌볼 것이다. 또한 짐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궁문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게 하라.”궁궐 안의 사람들은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데 누구보다 빨랐다.이건의 명이 내려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봉의궁의 궁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그림자조차 보기 힘들어졌다.올라오는 음식도 날이 갈수록 형편없었다.처음 며칠은 그래도 따뜻한 죽과 찬반 몇 가지가 올라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식어 빠진 죽에 쉰 냄새 나는 만두가 전부였다.그릇 가장자리에는 제대로 닦지도 않은 기름때까지 눌어붙어 있었다.밤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한여름에 얼음 공급까지 끊기니 묵은 상처가 땀에 젖어 가렵고 아리기를 거듭했다.한소희는 밤새 몸을 뒤척이다 결국 차가운 돗자리 위에 옆으로 누워 뜬눈으로 날을 새우곤 했다.불과 며칠 사이 몸이 눈에 띄게 야위었다.그러던 어느 날, 굳게 닫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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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한소희는 상궁이 자신을 법당 안으로 끌고 가는 동안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마마께서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릴 뜻이 없으시다면, 부처님 앞에 무릎 꿇고 지난 일을 곰곰이 돌아보시지요. 마음을 돌리실 때까지 일어나실 수 없습니다.”쾅!문이 닫히고 곧이어 자물쇠까지 채워졌다.그렇게 한소희는 그 자리에서 꼬박 하루 동안 무릎을 꿇었다.이미 쇠약해진 몸으로 밤늦도록 버티던 그녀는 한밤중이 훌쩍 지나서야 몸이 휘청하더니 그대로 방석 옆에 쓰러지고 말았다.얼마나 지났을까.몽롱한 정신 사이로 매캐한 탄내가 스며들었다.한소희는 번쩍 눈을 떴다.뒤편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들보의 단청은 이미 검게 그을렸고, 불티가 후두둑 떨어졌다.한소희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하지만 하루 종일 꿇고 있던 무릎은 말을 듣지 않았다.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불이야...!”연기에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외치자, 그제야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다급한 발소리와 비명이 뒤엉켰다.잠시 뒤 태감 둘이 불에 뒤틀린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두 사람은 한소희의 양팔을 붙잡아 거의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바닥에 내려놓이자 한소희는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쏟아냈다.그때 겉옷만 급히 걸친 태후가 황급히 모습을 드러냈다.이건도 여러 궁인을 거느리고 성큼성큼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불길이 완전히 잡혔을 무렵에는 법당의 절반이 이미 무너져 내린 뒤였다.태후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었다.“멀쩡하던 법당에 어찌 불이 났단 말이냐?”태후는 마당 아래 엎드려 있는 궁인들을 차갑게 훑어보았다.“샅샅이 조사하라.”태후 곁을 모시는 태감은 이미 넋이 반쯤 나간 얼굴이었다.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안팎을 모조리 뒤졌다.한참 뒤, 태감 둘이 어린 궁녀 하나를 끌고 와 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쳤다.궁녀는 땅에 엎드리자마자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태후마마, 살려 주시옵소서! 폐하, 살려 주시옵소서! 소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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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이튿날,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상궁이 한소희를 딱딱한 침상에서 잡아끌어 일으켰다. “아직도 스스로 마마인 줄 아느냐? 서두르게, 귀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네.”한소희가 장춘궁에 들어서자, 한홍난은 부드러운 평상에 기대어 한가로이 인삼탕을 마시고 있었다.그녀는 사발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꼬리를 천천히 훔쳤다. “방 안에만 있으니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언니가 마당에 나가 부채질이나 좀 해 주시게.”칠월의 뙤약볕은 살갗을 태울 듯 작열했다.한소희는 잠깐 서 있었을 뿐인데 등허리의 옷자락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부채를 든 팔에는 점점 힘이 빠지고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으며, 다리마저 후들거렸다.한홍난은 처마 밑의 긴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 앉아 말했다.“언니, 부채질을 멈추면 아니 되지요. 부채질이 그치면 금세 더워지잖아요.”그러고는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었다.“예전 후부에서는 언니가 적녀였고, 나는 서출에 불과했지요. 명절만 되면 언니 눈치부터 살피기 바빴는데... 헌데 세상일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언니가 내게 부채질을 해 주고 있네요.”한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바싹 마른 입술은 핏기마저 가셔 하얗게 질려 있었다.하지만 한홍난은 개의치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언니 어머니께서 저승에서 지금의 언니를 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딸을 낳은 걸 후회하시려나?”한소희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아, 참.”한홍난은 비단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나직이 웃었다. “내가 잊었네.”“언니의 어머니는 원래 강호를 떠돌던, 출신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여인이었지. 살아생전에도 이름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더니, 죽어서조차 번듯한 위패 하나 남기지 못했다면서? 허나 내 어머니는 다르잖아요. 지금은 어엿한 후부의 정실부인인 데다 조정에서 품계까지 받은 몸이지 않습니까. 밖에만 나서면 누구 하나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깍듯이 예를 갖추잖아요.”이어지는 목소리는 한없이 가벼웠다. “어미 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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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장춘궁은 온통 경사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이건은 갓 태어난 황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늘 냉랭하고 굳어 있던 눈매에도 보기 드문 웃음이 번져 있었다. “짐의 뜻을 전하라. 귀비 한씨는 황자를 낳아 종사에 큰 공을 세웠으니, 황금 천 냥과 비단 백 필, 동주 열 섬을 내리도록 하라.”이내 이건은 고개를 숙여 강보 속 아이를 바라보았다.쭈글쭈글한 작은 얼굴을 보는 순간, 목소리마저 저도 모르게 한결 누그러졌다.“또한 황자에게는 장수를 기원하는 금 자물쇠 한 쌍과 순금 목걸이 하나, 옥여의 하나를 내리도록 하라.”전각 안의 궁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곳곳에서 축하를 올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한홍난은 푹신한 베개에 기대어 누워 있었다.안색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아직도 가느다란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그녀는 살며시 이건의 소매 끝을 잡았다.“폐하... 신첩은 이번에 아이를 낳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였사옵니다.”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언니가 신첩에게 달려드는 것을 그 자리에 있던 궁인들이 모두 보았습니다.”“언니가 신첩의 목을 조르는 바람에 숨조차 쉴 수 없었고, 그때부터 배가 찢어질 듯 아파 왔사옵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신첩과 황자 모두 다시는 폐하를 뵙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이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는 아이를 곁에 있던 유모에게 넘기고 한홍난의 손을 감싸 쥐었다.“네가 큰 고초를 겪었다는 것은 짐도 안다.”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짐이 약조하마. 반드시 그에 합당한 처분을 내려 네 억울함을 풀어 주마.”곧바로 이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짐의 뜻을 전하라.”“황후 한소희는 덕을 잃고 귀비와 황실의 후사를 해하려 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싸늘한 목소리가 전각을 울렸다.“오늘부로 황후의 봉호를 거두어 서인으로 강등하고 냉궁에 유폐하라. 또한 누구도 함부로 찾아보지 못하게 하라.”이건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귀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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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폐하께 아뢰옵니다. 냉궁 쪽이...”태감 총관이 말을 더듬었다.“소인이 며칠 전 겨울옷을 들여보내려 사람을 보냈사온데, 아무리 불러도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하옵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금군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이미 며칠째 아무도 없었던 듯하옵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이건이 홱 몸을 돌렸다.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태감 총관을 향했다.“아무도 없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태감 총관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냉궁은 워낙 외진 곳이라 평소에도 끼니를 가져다주는 궁녀 외에는 발길이 닿는 이가 거의 없사옵니다.”“헌데 그 궁녀마저 일을 게을리하여 식합만 문 앞에 놓고 돌아갔다고 하옵니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도록 식합이 그대로인 것을 보고서야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그제야 냉궁을 지키던 금군에게 알렸다 하옵니다... 소인이 그들을 모조리 불러 추궁해 보았사오나, 마마께서 언제부터 자취를 감추셨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옵니다.”“모른다?”이건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사람 하나가 궁 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그 누구도 아는 자가 없다는 말이냐?”태감 총관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이건은 소매 안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한참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사람을 보내 찾아라. 도성 안팎을 모조리 살피고, 집집마다 확인하라.”그날부터 며칠 동안 도성의 성문마다 검문이 한층 삼엄해졌다.그럼에도 한소희의 행방은 묘연했다.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었던 사람처럼, 어디에도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어서방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색 결과를 아뢰는 이들이 드나들었다.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신이 무능하여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였사옵니다.”하지만 이건은 화를 내지 않았다.그저 잠자코 손을 들어 나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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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암위 수장은 사흘 만에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밝혀냈다.그는 어안 앞에 서서 진술서 한 묶음을 두 손으로 받들어 올렸다.“폐하, 유 상궁이 모두 실토하였사옵니다. 유모가 먹을 탕약에 독을 넣었으며, 그 독약 또한 귀비마마께서 직접 건네주셨고,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까지 일러 주셨다고 하옵니다.”진술서를 펼쳐 훑어볼수록 이건의 얼굴빛은 점점 어두워졌다.암위 수장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인 채 목소리를 낮췄다.“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귀비마마께서 해산하시던 날, 그 자리에 있던 궁인들은 처음에는 두려워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유 상궁의 죄가 드러나자 그제야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날 귀비마마께서 상궁을 시켜 황후마마의 입에 억지로 부은 것은 평범한 탕약이 아니었습니다.”“허면 무엇이냐?”“돌아가신 황후마마 어머니의 유골 가루였습니다.”어서방 안에 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어좌에 앉은 이건은 진술서를 세게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손가락 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한참 동안 침묵하던 이건이 마침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물러가거라.”암위 수장은 그제야 살았다는 듯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흔들리는 등불이 이건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술서 뭉치를 움켜쥔 채 빠른 성큼성큼 장춘궁으로 향했다.한편 장춘궁 안에서.한홍난이 푹신한 침상에 기대 앉아 어린 황자를 어르고 있었다.이건의 굳은 얼굴을 본 한홍난은 아이를 유모에게 건넨 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폐하께서 이 시각에는 어인 일이십니까? 미리 기별이라도 주셨으면, 신첩이 차를 준비했을 텐데...”“모두 물러가거라.”그 말을 듣고 궁인들이 줄지어 나가고, 유모도 어린 황자를 품에 안은 채 서둘러 물러났다.전각 문이 닫히고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혹 조정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짐이 귀비께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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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마차는 꼬박 엿새 동안 험한 산길을 달렸다.한소희는 내내 정신이 들었다 흐려지기를 반복했다.누군가가 입에 물과 미음을 떠 넣어 주고,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었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났다.그 외에는 무엇 하나 또렷하지 않았다.한소희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는 희고 소박한 침상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보니, 손바닥과 무릎에는 정성스럽게 붕대가 감겨 있었고, 시원한 기운이 도는 고약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몸에는 깨끗하고 보송한 속적삼이 입혀져 있었으며, 궁을 나올 때 입었던 더럽고 찢어진 옷은 보이지 않았다.“정신이 드십니까?”마흔 남짓 되어 보이는 여인이 뜨거운 죽 한 사발을 들고 문을 열어 들어왔다.마른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고 귀밑머리도 희끗했지만, 허리에는 단도 두 자루를 차고 있었으며 걸음걸이는 흔들림 없이 단정했다.“저는 금란이라 합니다. 예전에 마님 곁을 지키던 호위였습니다.”금란은 침상 곁에 앉아 죽을 한 숟갈 떠서 한소희의 입가로 가져갔다.“아씨, 우선 이것부터 조금 드십시오. 의원님께서 아씨의 몸이 너무 쇠한 데다 오랫동안 속을 비워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들이면 탈이 날 수 있다 하셨습니다. 하여 당분간은 묽은 죽으로 속부터 달래셔야 합니다.”한소희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여기는 어디인가?”“창령산(蒼嶺山) 남쪽 기슭입니다.”금란은 죽을 한 숟갈 더 떠서 건넸다.“아씨, 염려 마십시오. 관병들은 이곳까지 찾아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한소희는 더 묻지 않았다.죽그릇이 비자 금란도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한소희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앉아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살림은 소박했고 창밖으로는 푸른 산자락이 희미하게 보였으며, 이따금 방 안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휘장을 가볍게 흔들었다.삼 년 만에 처음으로 발소리를 듣고도 등을 굳힐 필요가 없었다.또한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 때문에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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