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 끝에 남은 것은 서늘한 바람: Chapter 1 - Chapter 10

14 Chapters

제1화

아들의 말이 떨어지자 강도윤과 나는 동시에 얼어붙고 말았다.강도윤의 마음이 더 이상 우리 가정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지난 28일 동안, 그가 백서윤 때문에 나와 아들을 내팽개칠 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그를 ‘아저씨’라 부르게 했다.이제 그만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 상처받지 말자고, 나와 아이 스스로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였다.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이제 고작 일곱 살. 한창 아빠를 의지할 나이였다.그동안 아이는 내가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시킬 때마다 늘 한참을 주저하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었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막힘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마음속으로 수백 번도 넘게 연습했던 단어를 뱉어내듯이 말이다.우리가 할 말을 잃고 서 있자 아들은 먼저 내 손을 꼭 쥐며 강도윤을 향해 말했다.“아저씨, 바쁘시면 가보세요.”그러더니 다시 나를 올려다보았다.“엄마, 우리 빨리 가자. 예약 시간 다 돼가.”아이는 내 손을 이끌고 묵묵히 사진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이 가족사진 촬영은 강도윤이 아들의 학부모 모임에 불참했던 일을 만회하겠다며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아들은 그 약속 하나를 무려 보름이나 손꼽아 기다려 왔었다.나는 아이에게 이끌려 뻣뻣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슴 위에 무거운 돌덩이라도 얹힌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강도윤의 외도를 알아챈 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그가 백서윤 아들의 생일을 챙겨주고 돌아온 날, 코트 주머니에 미처 버리지 못한 영수증 하나가 남아 있었다.유니버설 스튜디오 3인 가족 입장권.아들은 여섯 번째 생일날, 가족이 다 함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가서 제일 좋아하는 미니언즈를 보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었다.하지만 강도윤은 유치하다며 단칼에 거절했었다.그래 놓고 며칠 뒤, 남의 자식을 데리고 그곳에 간 것이다.나는 강도윤의 휴대폰을 몰래 뒤져 백서윤의 SNS를 확인했다.[꿈만 같은 곳이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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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게 아니면, 나는 이 30일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의 마음에서 강도윤을 완전히 떼어낼 생각이었다.그리고 오늘이 바로 28일째 되는 날이었다.아들이 마침내 제 입으로 강도윤을 ‘아저씨’라고 불렀다.작게 떨리는 아들의 몸을 품에 안으며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찔린 듯 아릿했다. 그 어디에도 기쁨 따위는 없었다.길을 건너갈 무렵, 강도윤은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몇 걸음 쫓아왔다. 아이가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지 물어보려던 참이었지만 때마침 백서윤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로 여전히 애교 섞인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도윤 씨, 어디까지 왔어? 민준이가 아빠 보고 싶다고 계속 울어서. 아무리 달래도 그치질 않네.”강도윤의 발걸음이 딱 멈춰 섰다. 그는 손에 전화기를 쥔 채 나와 아들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응수했다.“응, 알았어. 금방 갈게.”통화를 마친 그는 나에게 저녁에 이야기하자는 문자 한 통을 툭 던져놓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요란한 자동차 엔진 소리가 울리더니 점점 멀어져 갔다.아들이 걸음을 멈추고 내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운 눈물이 내 옷깃을 적셨다.“엄마, 우리... 이제 아빠 없어도 살 수 있지?”...가족사진은 결국 찍지 못했고 나는 아들을 데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해성에 있는 친정으로 갈 비행기표를 예매하는데 백서윤이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시내에서 제일 잘나가는 스튜디오였다.강도윤과 백서윤은 시밀러룩을 차려입고 다섯 살배기 아이를 안은 채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영상 끝자락에는 어김없이 나를 향한 백서윤의 도발이 적혀 있었다.[가족사진이 별건가? 도윤 씨랑 나는 언제든 찍을 수 있는데.]예전 같았으면 이런 도발을 보자마자 곧바로 받아치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하지만 방구석에서 얌전히 장난감을 정리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만사가 부질없게 느껴졌다.나는 대화창을 끄고 모레 해성으로 떠나는 비행기표 두 장을 예매했다.결제를 마치자마자 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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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맹세하는데 서윤이한테는 진짜 동정심뿐이야. 홀몸으로 애 키우는 게 안쓰러워서 마음 쓰인 것뿐이라고.”그는 내 손을 끌어당겨 제 가슴 위에 얹었다.“나한테 시간 조금만 더 줘. 서윤이를 깔끔하게 정리할 테니까. 너랑 우리 도하 절대로 상처받는 일 없게 할게.”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이렇게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게 대체 얼마 만이었던가.아마 우리의 결혼식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순백의 성당에서 그는 내 손가락을 꼭 쥔 채 평생 나 하나만을 아끼고 사랑하겠다고 선서했다.아니면 아들이 태어나던 날이었거나. 분만실 안에서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안아 들고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하던 그때.“지아야, 앞으로 너랑 우리 도하 절대 서운하게 안 할게. 눈에 흙이 들어가도 상처 주는 일 없게 할게.”까마득한 옛일을 떠올리며 나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이혼 합의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사실은...”“참, 지난번에 애 사준 한정판 레고 어디 뒀지? 서재에 있나? 서윤이가 그러는데 요즘 민준이도 레고 좋아한다더라고. 며칠 가져가서 놀게 해주려고.”말을 마치기 무섭게 강도윤은 서재로 들어가 레고 상자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차 키를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강도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다.나는 닫힌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긴 정적 끝에, 끝내 맺지 못했던 말을 나지막이 읊조렸다.“사실... 나와 도하는 이미 당신을 버렸어.”우리가 떠나기까지 이제 겨우 이틀 남았다....새벽 12시, 마침내 모든 짐 정리를 마친 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누였다.폰 화면이 반짝였다. 강도윤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레고 민준이가 너무 좋아하네. 밤새 같이 놀아줬어. 서윤이가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달라네.]새벽 12시, 내 남편은 딴여자를 대신해 나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화를 낼 기운조차 아까웠다. 어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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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 말을 내뱉는 강도윤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아들이 굳어 버렸다. 눈가에 감돌던 기대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아... 그렇구나.”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하지만 강도윤은 그것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지껄였다.“서윤이가 부탁한 건 그거 하나뿐인데 뭐 어때. 별 영향 없잖아. 이번에만 안 찍는 거야, 다음에 찍으면 되지. 응? 그렇지, 도하야?”그는 몰랐다. 내일이면 나와 아들이 떠난다는 것을.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나와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그래, 알았어.”강도윤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입꼬리를 올리더니 가슴을 쓸어내렸다.“그럼 나 지금 서윤이한테 말하고 올게. 오후 3시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보자.”말을 마친 그가 돌아서 나가려다가 현관문 앞에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여보, 도하야. 내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아서 우리가 가족이 될 수 있었지? 너무 좋다.”나와 아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가 나가자마자 아들은 침대에서 내려와 옷장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가방을 꺼냈다.“엄마. 나 이제 그 아저씨 얼굴 안 보고 싶어. 우리 그냥 지금 가면 안 돼?”...나는 곧바로 비행기표를 오늘 오후 3시로 변경했다. 예약 정보를 확인하자마자 떠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오전 9시, 이 집에서 만드는 마지막 아침을 차렸다.강도윤이 어젯밤 사 온 딸기 케이크가 냉장고에 남아 있었다. 아들은 그걸 꺼내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오전 10시, 변호사에게서 강도윤의 도장이 찍힌 이혼 합의서를 전달받았다.맨 첫 줄에 적힌 것은 바로 아이의 친권과 양육권이 나에게 있다는 조항이었다.그사이 백서윤의 SNS에 새 글이 올라왔다.[드디어 나온 가족사진! 민준이도 그이도 너무 좋아해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둬야지.]옆에서 종이비행기를 접던 아들은 그 글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저 나를 재촉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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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한 시간 전.백서윤이 처량하게 눈물을 흘리며 강도윤의 소매를 꼭 쥐었다.“도윤 씨, 어떡해? 민준이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나 봐. 피가 너무 많이 나... 나 진짜 너무 무서워.”이마에 휴지를 붙인 백서윤의 아들 민준이는 헐떡거리며 울어댔다.강도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아이를 품에 안고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가 연결되자마자 그는 내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급하게 입을 열었다.“지아야, 너한테 부탁 좀 할게. 도하한테 미안하다고 좀 전해줘. 민준이가 다쳐서 병원에 좀 가봐야 할 것 같아. 3시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기다리다 지치면 먼저 집에 들어가 있어. 도하한테 미안하다고 꼭 말해줘!”그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나온 수많은 날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변명은 나에게 던져놓고 상처와 실망은 전부 도하의 몫으로 남겨두었다.우리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기다려 줄 거라 믿었던 모양이다.‘미안하다’라는 짧은 한마디면 아들의 꺾인 마음을 다시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의사는 금방 아이의 진찰을 마쳤다.아이는 무릎과 팔꿈치가 살짝 까진 정도였고 이마 역시 가볍게 부딪쳤을 뿐 뇌진탕 증세는 전혀 없었다.간호사가 상처를 소독해 주자 아이는 칭얼거리더니 이내 울음을 그쳤다.의사가 진료 기록을 강도윤에게 건넸다.“별문제 없습니다. 약 좀 바르고 경과만 살피신 뒤 귀가하시면 됩니다.”강도윤은 그제야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그는 가만히 핸드폰 화면을 내다보았다.2시 27분, 약속한 3시까지는 아직 33분이 남아 있었다. 지금 곧바로 달리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그가 몸을 돌리려던 찰나, 백서윤이 덥석 그의 팔을 붙잡았다.“도윤 씨, 어디 가려고?”강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나 지아랑 도하한테 약속했어. 오늘 유니버설 스튜디오 데려가기로.”백서윤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하지만 우리 민준이가 아직 이렇게 울고 있잖아.”“의사 선생님도 아무 이상 없다고 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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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는 백서윤의 손을 뿌리쳤다.“서윤아, 민준이 곁엔 네가 있잖아. 하지만 도하는 오늘도 나 기다리고 있어.”백서윤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 멈췄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도윤 씨, 예전에는 안 이랬잖아. 지아 씨는 전에도 몇 번이고 기다렸지만 늘 군말 없었어. 도윤 씨를 너무 사랑하고 이해심도 깊은 여자니까. 이번 한 번 더 기다린다고 무슨 문제라도 생겨?”강도윤의 얼굴이 굳어졌다.그제야 백서윤의 말이 지독하게 귀를 찔렀다.그동안 백서윤의 눈에 나와 도하의 기다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내가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고 상처받지 않는 게 아니었고, 도하가 떼를 쓰지 않는다고 서운하지 않은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강도윤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약속했어. 이번만큼은 안 돼.”백서윤이 다시 그를 가로막으려 했지만 강도윤은 이미 차 키를 챙겨 든 뒤였다. 그는 허리를 숙여 아이의 머리를 대충 다독였다.“착하지,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내일 아저씨가 다시 올게.”아이가 울먹이며 팔을 뻗었고, 백서윤 역시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불렀다.“도윤 씨!”하지만 강도윤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성큼성큼 병원을 빠져나갔다.뒤에 남겨진 백서윤의 얼굴에서 온기가 완전히 사라졌다....병원을 나오자마자 강도윤은 운전대를 잡고 곧장 유니버설 스튜디오로 차를 몰았다.하필 그날따라 도로가 지독하게 막혔다.끝이 보이지 않는 차량 행렬은 거대한 강물처럼 빽빽했다.운전대를 쥔 그 힘센 손에 축축한 땀이 배어 나왔다.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첫 번째 전화는 신호음만 울릴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두 번째 전화도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세 번째 전화는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툭 끊겨 버렸다.그는 내가 그저 화가 난 줄로만 알고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지아야, 민준이 다 괜찮아졌어. 나 지금 가고 있어.][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줘, 금방 도착해.][나 이번에는 약속 안 어겼어. 진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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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회전목마, 기념품 숍까지. 도하가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곳이란 곳은 모조리 훑었다급기야 그는 미니언즈 인형 앞에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여섯 살 생일날, 그림책을 품에 안은 도하가 소원을 빌던 곳이었다.‘아빠, 나 유니버설 스튜디오 가서 미니언즈 보고 싶어요.’그때 그가 뭐라고 답했던가.“유치하게 그게 뭐야. 사람 많고 귀찮아. 좀 더 크면 가.”그래 놓고 정작 돌아서서는 백서윤과 민준이를 데리고 이곳을 찾았었다. 사진까지 남겨 가면서 말이다.사진 속 그는 민준이를 품에 안은 채 정말 다정한 아빠처럼 웃고 있었다.강도윤이 털썩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파묻었다.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세상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무뎌지는 상처 따위는 없다는 걸.그가 남긴 상처는 빠짐없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대가로 되돌아오고 있었다.저녁 무렵, 레스토랑 입구에서 엄마와 아이의 뒷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흰 셔츠를 입은 여자와 파란색 가방을 멘 아이, 나와 도하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강도윤의 눈빛이 순간 번쩍여 그쪽으로 사정없이 달려갔다.“지아야! 도하야!”돌아선 얼굴은 전혀 모르는 타인이었다. 강도윤은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여자는 깜짝 놀라 아이를 감싸 안으며 뒤로 물러섰고 그는 제 목소리 같지도 않은 갈라진 쇳소리로 겨우 쥐어짰다.“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네요.”그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캄캄한 밤이 올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테마파크의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하늘 위로 화려한 불꽃놀이가 터져 올랐다. 환호하는 아이들 한가운데에서 강도윤은 구겨진 티켓 세 장을 손에 쥔 채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도하가 그를 기다리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가 우리를 너무 여러 번 저버렸기에 이제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밤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한 강도윤은 도어록을 누르면서도 마지막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어쩌면 내가 도하를 데리고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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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나는 이미 그에게 기회를 줬다. 그 기회를 걷어찬 건 그 자신이었다.종이 아래에는 얇은 수첩 한 권이 더 있었다.표지에는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기록]강도윤이 첫 장을 펼쳤다. 익숙한 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1일 차. 도하가 39.6도까지 열이 났다. 강도윤은 백서윤의 전화를 받고 병원을 나갔다. 도하는 17분 동안 울면서 아빠가 자기를 싫어하냐고 물었다.][그날 밤, 나는 도하에게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했다. 도하는 43초 동안 망설였다.]두 번째 장.[6일 차. 도하 학교에서 부모 참관 수업이 있었다. 강도윤은 같이 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백서윤이 민준이는 아빠가 없으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 거라고 했고 강도윤은 결국 오지 않았다. 도하는 교실 앞에서 38분 동안 기다렸다.][도하는 아저씨라고 부르기까지 31초를 망설였다.]세 번째 장.[12일 차. 강도윤이 민준을 데리고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갔다. SNS에 올라온 사진은 전부 캡처해 뒀다. 도하는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이불 속에 숨어 새벽 한 시까지 울었다.][도하는 아저씨라고 부르기까지 19초를 망설였다.]네 번째 장.[19일 차. 학부모 참관수업 날. 강도윤은 중간에 자리를 떴다. 도하는 단체 채팅방에서 ‘아저씨’ 대신 결석 사유를 대신 전달했다.][도하는 아저씨라고 부르기까지 8초를 망설였다.]다섯 번째 장.[28일 차. 가족사진을 찍는 날, 강도윤은 또다시 자리를 떴다. 도하가 먼저 아저씨라고 불렀다.][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강도윤은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겼다. 페이지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시간, 장소, 통화 기록, 사진 번호까지.나는 그 모든 상처를 하나하나 기록해 두었다.그를 탓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다시는 내가 마음 약해지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증거를 남겨 둔 것이었다.강도윤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그제야 알 것 같았다.“난 그저 백서윤이 불쌍해서 그랬을 뿐이야.”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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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를 짓씹으며 내뱉는 강도윤의 목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았다.백서윤의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들고 있던 망고가 손에서 떨어졌고 샛노란 과육이 바닥으로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당황한 기색은 겨우 1초, 그녀는 순식간에 눈물을 쥐어짜냈다.“도윤 씨, 내 말 좀 들어봐. 다 오해야...”강도윤이 다가가 그녀가 쥐고 있던 남은 망고까지 빼앗아 바닥에 내던졌다.“오해? 알레르기 있는 거 알면서 작정하고 먹여? 민준이는 네 친자식이야! 알레르기 심해지면 민준이 죽는 거 몰라? 너 제정신이야?”벼락같은 불호령에 백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침대에 누워 있던 민준이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소란에 간호사가 황급히 달려왔다.“보호자분, 여기서 소란 피우시면 안 돼요! 아이 상태 안 좋습니다!”강도윤은 백서윤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그 순간, 그 눈빛 어디에도 예전의 애정이나 동정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지독한 혐오뿐이었다.더 이상 눈물 작전이 통하지 않자 백서윤은 뻔뻔하게 울음을 뚝 그쳤다. 눈물을 쓱 닦아 낸 그녀가 비웃음을 날렸다.“그래, 일부러 그랬어. 하지만 내가 별수 있어? 이혼하고 애까지 딸린 처지에 도윤 씨라도 안 잡으면 손가락 빨며 굶어 죽으라고?”강도윤은 처음 보는 괴물을 대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럼... 여태껏 날 속였던 거야?”백서윤이 웃었다. 비열하고 보기 흉한 웃음이었다.“속여? 그땐 당신이 멍청했던 거지. 내가 안쓰러운 척 몇 마디 흘리니까 좋다고 안달복달하고, 민준이 불쌍하다니까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아빠 노릇 해줬잖아. 누굴 탓해?”강도윤의 얼굴이 핏기를 잃었다.“당시엔 전남편한테 속았다고 했잖아! 집안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국한 거라며!”백서윤이 입꼬리를 비틀었다.“그걸 진짜 믿었어? 내가 해외로 튄 건 그 백인 놈이 엄청난 재벌이라도 되는 줄 알아서야. 알고 보니 허울뿐인 껍데기라 금방 망해버렸지만. 돈 없는 놈이랑 왜 살아? 당연히 갈라섰지. 귀국해서 도윤 씨부터 찾은 건 간단해.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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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러나 딱 1초뿐이었다.그는 한층 더 빠른 걸음으로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백서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협탁 위의 물컵을 집어 던졌다. 물컵이 문가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바로 그 순간, 침대에 누워 있던 민준이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갔고 목구멍에서는 꺽꺽거리는 숨소리가 괴롭게 새어 나왔다.간호사는 재빨리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기도 부종이에요! 의사 선생님 빨리 불러주세요!”“응급처치 준비하세요!”백서윤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강도윤은 밤을 지새워 공항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해성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편은 이미 매진된 뒤였다.그는 공항 대기실의 차가운 의자에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그사이 나에게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 왔고 수백 건의 메시지가 찍혔다.[지아야, 내가 다 잘못했어.][지금 어디야? 제발 얼굴 한 번만 보여줘.][도하는 괜찮아?][정말 일부러 상처 주려던 게 아니었어.][제발, 전화 좀 받아줘.]나는 단 한 건도 확인하지 않았다.비행기가 해성 공항에 착륙했을 때, 도하는 내 품에 안겨 깊이 잠들어 있었다. 조그마한 머리를 내 어깨에 괸 채 속눈썹에는 아직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달고서 말이다.나는 아이를 안고 내려 미리 예약해 둔 호텔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해성의 밤바람은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택시는 화려하게 불을 밝힌 고가도로를 내달렸다. 도하가 중간에 잠시 깨어나 비몽사몽간에 물었다.“엄마, 우리 이제 여기서 살아?”나는 아이의 머리를 살며시 쓸어 넘겨주었다.“응, 우선은 여기서 지낼 거야. 나중에 엄마가 도하한테 멋진 새집 만들어 줄게.”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새집에는 그 아저씨 없는 거지?”목구멍이 컥 막혀왔다.“응. 우리 둘뿐이야.”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휴대폰 전원을 켰다. 화면이 켜지기 무섭게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전부 강도윤이었다.나는 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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