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남편이 이혼 후 아이까지 데리고 돌아온 첫사랑을 여전히 잊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뒤, 나는 아들에게 남편을 ‘아빠’가 아닌 ‘아저씨’라고 부르도록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가 고열로 신음하던 깊은 밤, 첫사랑의 전화 한 통에 남편은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나는 열이 펄펄 끓는 아들의 이마를 짚어주며 가만히 속삭였다. “아저씨 잘 가요, 해야지.” 아들과 함께 학부모 모임에 가기로 약속했던 날에도 첫사랑이 자기 아들은 아빠가 없다며 울먹이자 남편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아들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학부모 단톡방에 ‘아저씨’의 결석 사유를 직접 적어 내라고 했다. 아들은 매번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마침내 우리에게 진 빚과 죄책감을 깨달은 듯했다. 그는 먼저 우리 세 식구가 함께 가족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사진관 앞. 첫사랑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는 징징거리며 울먹였다. “도윤 씨, 지금 민준이 하원 좀 도와주면 안 돼? 유치원 애들이 아빠 없다고 놀려대서...” 남편의 얼굴에 곤란함과 안타까움이 번졌다. 그가 막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눈치를 주기도 전에 아들이 먼저 남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아저씨가 좋아하는 그 아이한테 가보세요. 가족사진은 엄마랑 나 둘만 찍어도 돼요.”
Ver mais“무슨 일인데?”그는 저만치서 도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는 내 남자친구를 가만히 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연애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을게. 하지만...”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그냥 가볍게 만나는 정도로만 끝내면 안 될까? 결혼은 하지 말고.”나는 순간 흠칫하다가 그만 실소를 터뜨렸다.마침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던 도하도 그 말을 들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강도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아저씨, 지금 우리 엄마한테 애원하는 거예요?”강도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일그러졌지만 부정하지는 못했다.“그래.”도하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먹고는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하지만 우리 엄마가 누구랑 결혼할지는 엄마 마음이에요. 아저씨는 예전에 엄마를 소중하게 생각 안 했으니까 지금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없어요.”강도윤의 눈빛에서 마지막 희망마저 사그라들었다.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까마득히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한때 내 온 세상이나 다름없었던 남자가 지금 내 앞에서 비굴하고 애원하고 있었고 후회에 젖어 볼품없이 무너져 있었다.하지만 통쾌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할 뿐이었다.“그거 알아? 예전에 내가 제일 바랐던 건 당신이 아주 가끔이라도 나와 도하를 돌아봐 주는 거였어. 나중에야 깨달았지. 사람이 한자리에만 서서 계속 기다릴 수는 없다는 걸. 그러고 있다간 나 자신이 먼저 썩어 문드러진다는 걸.”그가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지아야, 나 정말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알아. 딱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나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뒤늦은 사과는 받아줄게. 하지만 뒤늦은 사랑 따위, 이제 나한테 아무 소용이 없어.”강도윤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마치 그 한마디에 못이라도 박힌 사람처럼.도하가 내 손을 꼭 잡았다.“엄마, 우리 이제 집에 가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연하의 남자친구가 다가와 내 손에 들린 가방을 자연스레 받아 들었다.
나는 받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도하가 더없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엄마, 이건 그 사람이 당연히 줘야 하는 거야. 그동안 나한테 빚진 거잖아.”나는 순간 흠칫하다가 이내 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돈이며 선물이며 들어오는 족족 다 받았다. 하지만 도하는 단 한 번도 그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강도윤이 찾아올 때마다 도하는 그저 꼬박꼬박 깍듯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아저씨, 안녕하세요.”강도윤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감히 바로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예전에는 나와 도하가 그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다. 언제 집에 들어오냐고, 아이와 놀아 줄 수는 없냐고, 당신 마음에 우리가 있기는 하냐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하지만 이제는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강도윤이 나와 도하의 뒤를 목매어 쫓아오고 있었다.물론 우리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말이다.명절이나 휴가철이 되면 나는 도하를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설 연휴에는 홋카이도로 눈 구경을 가고 어린이날 연휴에는 바닷가로 서핑을 하러 갔다. 여름방학에는 유럽으로 성을 보러 떠났다.강도윤은 대체 어디서 일정을 알아내는지 매번 쥐도 새도 모르게 쫓아왔다. 우리가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릴 때면 머지않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호텔에서 조식을 먹을 때면 두 테이블 건너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도하가 스키를 탈 때도 혹여 아이가 넘어질까 봐 먼발치서 뒤따라왔다.하루는 도하가 정말로 미끄러져 넘어진 적이 있었다. 강도윤은 거의 날아오다시피 뛰어왔다.하지만 도하가 한발 먼저 툴툴 털고 일어서며 옷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안 도와주셔도 돼요, 아저씨.”강도윤이 뻗었던 손이 공중에서 초라하게 굳어버렸다. 결국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그래, 우리 도하 의젓하네.”그는 이제 우리를 방해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후회를 뼈저리게 씹어 삼키는 법도 익혔다.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음을 약하게 먹을 일은 없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강도윤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프런트에서 편지 하나를 전해 주었다. 봉투 위에는 그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지아야, 도하야, 나 절대로 포기 안 해.]나는 읽자마자 편지를 쓰레기통에 곧장 던져버렸다. 침대 머리에 앉아 빵을 뜯어 먹던 도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엄마, 뭐라고 쓰여 있어?”나는 풋 웃어 보였다.“별거 아니야.”도하도 따라 웃었다. 강도윤을 떠나온 뒤, 아이가 처음으로 되찾은 진짜 웃음이었다.그 후 일 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백서윤이 죗값을 치렀다.담당 간호사는 백서윤이 민준이에게 작정하고 망고를 먹이던 영상을 경찰에 넘겼다. 영상 속 그녀는 아이가 망고에 알러지가 있다는 걸 똑똑히 알면서도 몇 번이고 망고를 집어 먹도록 유도하고 있었다.경찰이 즉시 수사에 나섰다. 백서윤은 처음엔 그저 어쩌다 보니 일어난 실수라며 오리발을 내밀려 했다. 하지만 병원 복도 CCTV, 간호사의 녹음 파일, 민준이의 진술, 그리고 강도윤과 주고받은 문자 내역까지 어느 하나 빼도 박도 못할 증거로 잡혔다.그동안 그녀는 민준이가 아빠를 찾는다, 민준이가 아프다 같은 핑계로 강도윤을 나와 도하 곁에서 끊임없이 빼돌렸다. 그 모든 핑계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 그에 딱 맞아떨어지는 통화 기록으로 증명되었다.그리고 강도윤은 직접 법정에 서서 증언까지 했다.결국 백서윤은 아동 학대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민준이의 친부는 소식을 듣자마자 해외에서 날아와 아이를 데려갔다. 들리는 말로는 친부를 보자마자 민준이는 서러움을 토해내듯 왈칵 안겼고, 죽어도 안 놓으려고 떼를 썼다고 한다.생각해 보면 그 아이도 가엾은 존재였다. 강도윤을 빼앗아 간 주범이 아니라 제 친모의 욕심에 이용당한 불쌍한 도구였을 뿐이니까....나와 도하는 해성에서 무사히 자리를 잡았다.그동안 모아둔 적금으로 작은 단독주택 한 채를 마련했다. 크진 않아도 자그마한 마당이 딸린 집이었다. 도하가 딸기를 심고 싶다고 해서 아이 손을 잡고 가게에 들
“지아야,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도하를 봐서라도...”도하의 이름이 나오자 내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버렸다.“이제야 도하 생각이 나?”강도윤은 입을 벙긋거렸으나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그때 뒤에서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하가 애착 인형인 공룡을 안은 채 내 뒤에 서 있었다. 문밖에 무릎을 꿇고 있는 강도윤을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강도윤은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사람처럼 손을 뻗어 아이에게 다가가려 했다.“도하야, 아빠 왔어. 아빠가 엄마 마음 돌릴 수 있게 도하가 좀 도와줘, 응? 아빠는 엄마랑 이혼하고 싶지 않아.”그는 도하의 마음이 약해질 거라 믿었다. 예전의 도하는 누구보다 아빠를 잘 따랐으니까. 그가 퇴근하고 들어오면 제일 먼저 달려가 다리를 껴안으며 아빠를 부르던 아이였으니까.하지만 이번에 도하는 내 뒤로 한 걸음 물러섰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내뱉었다.“아저씨, 가서 아저씨 진짜 애나 챙기세요. 나와 엄마 인생에 더는 찾아오지 마시고요.”강도윤이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공중에 붕 떠 버린 그의 손이 처량하게 떨렸다.“도하야, 내가 네 아빠야. 어떻게 아빠한테 아저씨라고 불러?”도하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끝내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우릴 먼저 버린 건 아저씨잖아요.”강도윤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아빠는 너 버린 적 없어.”도하가 고개를 저었다.“버린 거 맞잖아요.”그러고는 말을 이었다.“내 생일날 유니버설 스튜디오 가고 싶다고 했을 땐 유치하다고 하셨으면서 민준이는 덥석 데리고 가셨잖아요. 나 열이 39도까지 났는데 엄마 혼자 나 안고 응급실로 뛰어갔어요. 아저씨는 전화 한 통 받고 곧바로 민준이한테 달려가 버리셨잖아요. 그날 나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엄마 붙잡고 아빠 언제 오냐고 계속 물어봤단 말이에요.”강도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도하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참관수업 날도 그랬죠. 꼭 온다고,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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