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절친에게 감금당했다》全部章節:第 1 章 - 第 10 章

22 章節

제1화: 오빠가 사라졌다

밤안개가 내려앉은 국도변에서 경광등이 붉고 푸르게 번쩍였다.가드레일을 들이받은 검은 세단은 운전석 쪽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찌그러져 있었다. 문은 열린 채였고, 터진 에어백과 핸들에는 짙은 혈흔이 남아 있었다.그런데 운전자는 없었다.“사고 직후 자력으로 빠져나갔거나, 제삼자가 데려갔을 가능성을 모두 보고 있습니다. 다만 도로변에서 혈흔이 끊긴 뒤로는 족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형사의 설명이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윤서아는 오빠의 지갑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안쪽 투명 칸에는 며칠 전 남매가 함께 찍은 네 컷 사진이 꽂혀 있었다.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윤도현은 서아에게 유일한 가족이자 가장 든든한 울타리였다. 그런 오빠가 피를 흘린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방범 카메라나 블랙박스는요? 오빠가 왜 그 길로 갔는지도 아직 모르나요?”“사고 지점이 촬영 사각지대입니다.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도 없어졌고요. 범죄 연루 여부는 조금 더 조사해야 합니다.”형사는 도현의 휴대전화와 차량에서 수거한 소지품 목록을 내밀었다. 서아는 몇 번이나 이름을 틀려 쓰고서야 서명을 끝냈다. 오빠에게 전화를 걸면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만 반복됐다.통신사 위치 조회도 진행 중이었지만 마지막 신호는 사고 지점 근처에서 끊겼다고 했다. 서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자까지 보냈다. 읽음 표시는 끝내 뜨지 않았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새벽은 좀처럼 밝아오지 않았다.“실종 신고는 바로 접수하겠습니다. 가족분께서는 연락 가능한 곳에 계셔 주세요.”연락 가능한 곳.그 말이 유난히 막막했다. 부모님도, 가까운 친척도 없었다. 오빠가 사라진 순간 서아는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이 됐다.무엇부터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경찰서 현관을 나서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뺨을 스쳤다.그때 주차장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들어왔다.차가 멈추자 경호원이 내려 뒷문을 열었다. 구김 없는 차콜 그레이 수트를 입은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태강그룹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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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완벽한 보호자

차는 성북동 언덕 안쪽에 자리한 대저택으로 들어섰다.높은 담과 촘촘한 보안 카메라, 굳게 닫힌 철문이 외부와 완전히 분리된 공간처럼 보였다.“내려.”태준이 직접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서아는 잠시 망설이다 그의 손을 잡았다.태준이 안내한 곳은 2층의 넓은 게스트룸이었다.“당분간 여기서 지내. 불편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하고.”문이 열리자 서아는 걸음을 멈췄다. 침대에는 자신이 평소 쓰던 브랜드의 오가닉 코튼 침구가 깔려 있었다. 화장대에는 즐겨 쓰는 프랑스산 스킨케어 제품이 놓였고, 드레스룸에는 모노톤의 실크 잠옷과 린넨 셔츠가 사이즈별로 정리돼 있었다.협탁의 찻잔에서는 서아가 좋아하는 베르가못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욕실에는 알레르기 때문에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무향 샴푸가 있었고, 슬리퍼까지 서아의 발에 꼭 맞는 사이즈였다.서아는 드레스룸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우연히 갖춰 두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이걸 언제 다 준비했어요?”태준은 문가에 기대 선 채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도현이한테 자주 들었어. 네가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 피부에 어떤 원단이 안 맞는지까지 입이 닳도록 말했거든.”“오빠가 그런 얘기까지 했다고요?”도현이 동생 이야기를 많이 하긴 했다. 그래도 스킨케어 브랜드와 잠옷 소재까지 친구에게 설명했을까.의문은 들었지만 오래 붙들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사고 현장의 피와 텅 빈 운전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정말 고마워요. 오빠가 아니었으면 오늘 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을 거예요.”“고맙다는 말은 됐어. 지금은 쉬어.”태준이 다가와 서아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손끝이 귓가를 스치는 순간, 그의 눈빛이 잠깐 짙어졌다가 이내 평소처럼 가라앉았다.“내 방은 복도 끝이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알 수 있게 문은 잠그지 마.”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을 나갔다.묵직한 문이 닫힌 뒤, 서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문을 잠그지 말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자신이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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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나갈 수 없는 집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내내 원고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니터 위로 오빠의 반파된 차와 아침에 들은 기사의 말이 번갈아 떠올랐다.‘혼자 움직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과잉보호라고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통제였다.팀장은 서아의 자리를 몇 번이나 찾아와 조퇴를 권했다. 뉴스에 사고가 보도된 뒤 동료들은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었지만, 서아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사실은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다. 이메일 한 통을 읽는 데도 같은 줄을 서너 번씩 되짚어야 했다.점심 무렵 담당 형사에게 전화했지만 새로 나온 단서는 없었다. 오빠의 카드도, 휴대전화도 사고 직후부터 사용 기록이 끊겨 있었다. 통화를 마치고 창밖을 보니 아침에 타고 온 검은 세단이 맞은편 도로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사는 운전석에서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누군가 자신의 출입과 동선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피부로 와닿았다. 등이 서늘해졌다.윤도현이 실종된 지 하루. 세상에 홀로 남았다는 공포 속에서 믿을 사람은 강태준뿐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마저 믿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서아는 동료들의 시선을 피해 개인 휴대전화를 꺼냈다. 대학 동기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인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아야! 뉴스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도현이 오빠는? 넌 지금 어디야?”친구의 목소리를 듣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유진아, 오빠 일도 그렇고…… 나한테 이상한 일이 생겼어. 오늘 퇴근하고 잠깐 볼 수 있을까? 강남역 근처 북카페에서.”“무슨 일인데 그래? 알겠어. 일곱 시까지 갈게.”통화를 끊고 나서야 막혀 있던 숨이 조금 트였다.퇴근 십 분 전, 서아는 정문 로비를 피하려고 비상계단을 따라 지하 주차장 쪽 후문으로 내려갔다. 기사는 분명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오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강태준.서아는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네.”“후문 골목은 가로등이 어두워. 발목 접지르기 전에 정문으로 돌아가.”평온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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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첫 번째 탈출

서아는 태준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십 년 동안 오빠 곁에서 묵묵히 자신을 챙기던 강태준과 지금의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나 지금 감금한 거예요?”태준은 커프스링크를 풀며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네가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뭐라고요?” “단어는 중요하지 않아. 도현이가 돌아올 때까지 넌 내 시야 밖으로 못 나가.”“미쳤어. 당신 정말 미쳤어.”서아가 휴대전화를 꺼내 112를 누르려 했지만 통화 연결 표시는 뜨지 않았다. 저택 안에서 개인 회선이 차단된 듯했다.태준이 다가와 휴대전화를 가져갔다. 억지로 비트는 동작조차 없었다. 서아가 쥔 힘이 빠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손에서 빼냈을 뿐이었다.“돌려줘요.”“안 돼.”“소리 지르면 사람들이 들을 거예요.”“여긴 담 밖까지 거리가 멀어. 네가 목만 상해.”태준은 손끝으로 서아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기운 빼지 마. 난 너한테 화내고 싶지 않아.”“이미 충분히 화내고 있잖아요. 소리만 안 지르면 폭력이 아닌 줄 알아요?”태준의 눈매가 아주 조금 굳었다.“네가 다치지 않는 방식으로 막고 있는 거야.”“막는다는 말부터 잘못됐어요. 난 당신 허락을 받아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니까.”태준은 한동안 서아를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안주머니에 넣었다.“저녁은 방으로 올려 보낼게. 배는 곯지 마.”그는 뺨을 한번 쓸어내리고 서재로 올라갔다.잠시 뒤 고용인이 토마토 비프 스튜와 따뜻한 빵을 방으로 가져왔다. 서아는 손도 대지 않았다. 대신 창문과 욕실 환기구, 연결된 드레스룸까지 살폈다. 통창은 두꺼운 강화유리였고, 테라스 문은 제어 패널 없이는 열리지 않았다.복도에서 마주친 고용인에게 조용히 도움을 청해 보기도 했다. 중년의 여자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만 저었다.“저희 가족이 태강 쪽에서 일합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태준은 이 집의 문뿐 아니라 사람들의 사정까지 잠가 둔 셈이었다.서아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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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더 작은 새장

서아는 철문 손잡이에서 손을 놓았다. 태준은 맨발로 서 있는 서아를 내려다보다 수트 재킷을 벗어 어깨에 덮어 주었다. 이어 들고 온 양말을 내밀었지만 서아는 받지 않았다.“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네가 방문을 연 순간부터.”“알면서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둔 거예요?”“네가 직접 확인해야 포기할 것 같아서.”“포기 안 해요.”“알아.”태준은 그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담담했다.“그래서 네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만큼 문을 더 잠글 거야.”태준이 보행자 출입구의 잠금을 풀고 안으로 들어왔다.“들어가자. 새벽 공기가 차.”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는 소리를 지르거나 팔을 비틀지 않았다. 그저 서아의 손목을 감싸 쥐고 저택 쪽으로 이끌었다.손아귀에 힘을 과하게 주지는 않았지만, 저항해도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현관에 들어서자 태준은 서아를 소파에 앉히고 무릎을 꿇었다. 정원 자갈에 긁힌 발바닥을 소독하려 하자 서아가 다리를 거칠게 거두었다.“손대지 마요.”“상처에 흙이 들어갔어.”“당신이 가둬 놓지만 않았으면 생기지도 않았을 상처예요.”태준의 손이 잠시 멎었다. 그래도 그는 고용인에게 구급함을 건네받아 소독약과 밴드를 테이블 위에 놓고 물러났다.“직접 해. 그대로 두진 말고.”거실을 둘러보자 하룻밤 사이 달라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보안 업체 직원들이 새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고, 현관 옆 콘솔에는 출입자 명단이 떠 있었다. 서아의 이름 옆에는 ‘단독 외출 불가’라는 붉은 표시가 붙어 있었다. 고용인들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움직였다.주방 뒤편 출입문에는 새 전자 잠금장치가 달려 있었고, 복도와 계단 모퉁이에는 감지 센서가 추가돼 있었다. 고용인들은 개인 휴대전화 대신 업무용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전자기기와 물품은 전부 확인하게 했어. 배송 차량도 차고 밖에서 검수하게 할 거고. 오늘 같은 일은 다시 없을 거야.”태준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서아는 어깨의 재킷을 벗어 바닥에 떨어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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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한지훈

다음 날 오후, 정문 초인종이 저택의 적막을 깨뜨렸다.인터폰 화면에는 서아의 직속 선배이자 브랜드 기획팀장인 한지훈이 서 있었다. 서아가 이틀째 출근하지 않고 연락마저 끊기자 직접 찾아온 모양이었다.“윤서아 에디터 만나러 왔습니다. 안에 있는 거 알고 있으니 문 열어 주십시오!”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서아가 벌떡 일어났다.“지훈 선배…….”밖으로 이어진 끈이 아직 남아 있었다. 서아가 현관으로 달려가려 하자, 2층에서 내려오던 태준이 보안 요원에게 손짓했다.뜻밖에도 문이 열렸다.지훈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서아의 핼쑥한 얼굴과 곳곳에 배치된 보안 요원부터 확인했다. 한 손에는 서아의 노트북과 회사 출입증이 든 가방이, 다른 손에는 동료들이 챙겨 보낸 세면도구와 옷이 담긴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직접 찾아온 얼굴에는 밤새 제대로 쉬지 못한 흔적이 선명했다.“서아야, 괜찮아? 회사에도 안 나오고 전화도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선배.”서아가 다가가려는 순간 태준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섰다.“한지훈 팀장님이시죠. 태강그룹 강태준입니다.”그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지훈은 악수를 받지 않았다.“도현이 형님 일로 충격받은 건 압니다. 그래도 회사와 지인 연락까지 끊어 놓을 이유는 없죠. 지금 서아를 억지로 가둬 둔 겁니까?”태준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사고 배후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서아의 신변을 노리고 있습니다. 당사자와 상의해 보호 중이고요.”“그 당사자에게 직접 묻겠습니다.”“그 전에 반입 물품부터 확인하겠습니다.”태준이 손을 내밀자 보안 요원이 지훈의 가방을 가져가려 했다. 지훈이 몸을 틀어 피했다.“서아 개인 노트북과 출입증입니다. 본인에게 직접 주겠습니다.”“이 집에 들어오는 물건은 전부 검사합니다.”“여기가 구치소입니까?”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지훈이 태준 너머로 서아를 바라보았다.“네가 원해서 여기 있는 거야?”“둘이서 이야기하게 해 주십시오.”지훈의 요구에 태준은 짧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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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그의 질투

서아는 외투 주머니 안의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었다.“아무것도 안 받았어요. 그냥 손잡고 위로해 준 거예요.”거짓말을 내뱉는 목소리가 자신이 듣기에도 어색했다.태준은 서아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왔다. 손을 주머니에 넣어 빼앗는 대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거짓말할 때 입술 안쪽을 깨무는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네.”서아의 턱이 굳었다.얼마나 오래 자신을 관찰해 왔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알고도 왜 안 뺏어요?”“네가 그 사람을 그렇게 믿는다면 한번 믿어 봐.”태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어디까지 해 줄 수 있는 사람인지.”그는 더 묻지 않고 서재로 올라갔다.서아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불 속에서 보조 휴대전화를 켜자 지훈이 미리 남긴 메시지가 떠 있었다.[내일 새벽 5시 반, 정기 식자재 차량이 들어갈 거야. 냉장 탑차가 나갈 때 화물칸에 숨어. 정문 아래에서 기다릴게. 위치 기록이 남지 않게 이 폰만 써.]구체적인 탈출 계획이었다.서아는 손을 떨며 답장을 보냈다.[선배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요. 정말 괜찮아요?]곧 답이 왔다.[너 혼자 두는 게 더 위험해. 반드시 나와.]잠시 뒤 지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통화 오래 못 해. 탑차 기사와는 이야기해 뒀어. 운전석 뒤쪽 상자 세 칸은 비워 둘 거야.”“선배, 태준이 이 폰 있는 거 알아요.”“알아도 회선 명의까지는 바로 못 찾을 거야. 호텔에 도착하면 유심은 버려.”“지금이라도 그만둬요. 선배까지 망가질까 봐 무서워요.”“이미 네가 저 안에 있다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하면 평생 후회해.”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서아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매트리스 아래에 숨겼다. 문밖을 지나던 태준의 그림자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짧은 문장을 읽자 눈물이 차올랐다. 적어도 자신을 물건처럼 대하지 않는 사람이 바깥에 있었다.그날 밤 서아는 식자재 차량이 들어오는 시간과 차고지 동선을 머릿속에 외웠다. 희망이 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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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두 번째 탈출

서아는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타인의 오랜 노력과 생계를 무너뜨리고도 그는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얼굴이었다.“왜 그랬어요? 선배는 오빠를 걱정하고 날 도우려 했을 뿐이에요.”“내가 지키는 사람을 허락 없이 데려가려 했으니까.”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난 당신이 지키는 물건이 아니에요.”“알아. 물건이었다면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어.”그의 손이 서아의 뺨 가까이 다가왔다. 서아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도현이를 찾으면 한 팀장 일은 원상복구시킬 거야. 그러니까 주변 사람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협박을 걱정처럼 말하는 태도에 속이 뒤집혔다.서아는 방으로 돌아와 보조 휴대전화를 켰다. 낮 동안 경호원 교대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 침대에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이불과 베개를 쌓았다. 욕실 샤워기를 약하게 틀어 물소리가 계속 나게 해 두었다. 방문 센서가 열리는 기록은 남겠지만, 새벽 배송 시간에는 주방 쪽 움직임이 많아 즉시 확인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지훈이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메이플 호텔 804호. 예약 번호 2174. 나는 감사팀 눈을 피해 늦게라도 갈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빠져나와.]정문 아래에서 만나려던 계획은 무너졌지만, 탈출 경로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새벽 다섯 시, 식자재를 실은 냉장 탑차가 지하 차고로 들어왔다.배송 기사와 조리사들이 검수대에서 서류를 확인하는 사이, 서아는 배기 덕트 뒤에 숨어 있다가 열린 화물칸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빈 상자와 보냉재 사이에 웅크리자 냉기가 옷 속까지 파고들었다.잠시 뒤 차가 움직였다.속도를 줄이는 진동과 함께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비원이 화물칸을 확인할까 봐 서아는 입을 손으로 막고 숨을 죽였다.차가 멈췄다.뒷문 잠금쇠가 흔들리고 문이 손바닥 하나만큼 열렸다. 손전등 빛이 상자 위를 훑었다. 서아는 보냉재 아래로 얼굴을 묻었다. 심장 소리가 밖까지 들릴 것 같았다.“이상 없습니다.”문이 다시 닫혔다.몇 분 뒤 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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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처음 보는 얼굴

호텔 복도에는 태준의 보안 요원들이 서 있었다.서아는 뒤로 물러났지만 방 안 어디에도 빠져나갈 곳은 없었다. 태준의 시선은 곧 책상 위 노트북과 외장하드에 닿았다.“도현이 일을 직접 찾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어떻게 찾았어요?”태준의 시선이 서아의 외투 주머니에 잠시 닿았다.“한 팀장이 마련한 법인 명의 회선이야. 그 폰을 켠 순간부터 위치는 확인할 수 있었어.”“그럼 왜 바로 막지 않았어요?”“네가 누구에게 가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니까.”“나를 미끼처럼 풀어놓은 거네요.”“내가 따라갈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태준은 서아의 젖은 머리와 호텔 가운, 어깨에 걸친 지훈의 재킷을 차례로 보았다. 마지막에 재킷에 닿은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알면서도 일부러 탈출하게 두었다. 자신과 지훈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려고.욕실 문이 열리며 지훈이 나왔다.“서아야, 뒤로 가.”그는 서아 앞을 막아섰다.“강 부사장님, 여기까지 찾아와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태준의 표정이 굳었다.“직위 해제와 프로젝트 중단으로는 부족했나 보군.”“서아는 당신 소유물이 아닙니다.”“그러는 한 팀장은 무슨 자격으로 남의 집에서 데려갔지?”“서아가 요청했으니까요.”“그 요청을 기다렸다는 듯 호텔과 차량까지 준비해 뒀더군.”“당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돕는 데 특별한 자격은 필요 없습니다.”태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 말을 할 자격이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하나?”태준이 손짓하자 보안 요원 둘이 들어와 지훈의 양팔을 붙잡았다. 지훈이 버텼지만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놔줘요!”서아가 달려들자 태준이 팔을 뻗어 앞을 막았다.그는 지훈을 보며 낮게 말했다.“가족이 운영하는 출판 유통사, 최근 자금 사정이 좋지 않더군. 태강 쪽 납품 계약까지 끊기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지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가족까지 건드리겠다는 겁니까?”“다시는 서아에게 접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당신이 아니라 서아가 결정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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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잠겨 있던 방

저택으로 돌아온 뒤 감시는 더 촘촘해졌다.서아의 방문 앞에는 경호원이 상주했고, 식사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목의 상처는 얕았지만 태준은 주치의까지 불러 확인하게 했다.그날 호텔에서 보았던 그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유리 조각이 피부에 닿는 순간, 태준은 서아보다 더 겁먹은 얼굴이었다.친구의 동생을 보호하려는 감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사흘 뒤 오후, 태준이 태강그룹 긴급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저택을 비웠다. 경호 인력 대부분이 외곽과 정문에 배치된 시간이었다.서아는 문 앞 요원이 통화를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복도로 나왔다. 계단 아래에서는 보안 업체 직원들이 정문 센서를 점검하고 있었고, 고용인들은 저녁 준비로 주방에 모여 있었다.목적지는 2층 끝 태준의 개인 서재였다.평소 잠겨 있던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살짝 벌어져 있었다. 급히 나가며 실수한 것인지, 일부러 남겨 둔 틈인지 알 수 없었다.서아는 숨을 죽이고 안으로 들어갔다.짙은 목재 향이 밴 방에는 경제 서적과 사업 보고서가 빈틈없이 정리돼 있었다. 책상 위에는 결재가 끝난 서류와 만년필 한 자루뿐이었다.서아는 서랍과 파일함을 차례로 열었다. 도현의 이름이 적힌 자료는 없었다. 대신 자신의 출판사 조직도와 회사 주변 지도, 한지훈의 인사기록이 들어 있는 얇은 파일을 발견했다. 가장 최근 출력 날짜는 오늘이었다.그는 저택을 비운 동안에도 서아 주변의 변화를 보고받고 있었다.책상 아래에는 저택 전체의 보안 상태를 확인하는 보조 모니터가 있었다. 게스트룸 앞 센서와 정문 카메라뿐 아니라 출판사, 오피스텔 주변에서 촬영된 화면까지 저장돼 있었다. 서아는 화면을 급히 껐다.책장을 살피던 중, 한쪽 기둥만 유난히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손끝으로 표면을 누르자 작은 클릭음이 났다.거대한 책장이 옆으로 움직였다.뒤에는 회색 철문이 숨겨져 있었다.전자 도어록에는 네 자리 숫자를 입력하는 패드가 달려 있었다.태준의 생일과 도현의 생일을 차례로 눌렀지만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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