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오빠의 절친에게 감금당했다: Chapter 11 - Chapter 20

22 Chapters

제11화: 10년

서아는 ‘YSA / ARCHIVE(기록) 2016-2026’이라고 적힌 바인더를 펼쳤다.첫 장에는 대학 신입생 때 잠시 만났던 복학생 선배의 사진과 이력이 정리돼 있었다. 그가 갑자기 입대를 결정하고, 전역 후 태강건설 해외 현장으로 떠난 과정까지 날짜별로 기록돼 있었다.그때는 장학금과 취업이 한꺼번에 해결됐다며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거리 연애를 감당할 수 없어 헤어졌을 뿐이라고.서류 끝에는 태강 인재개발원의 특별 추천 승인서가 붙어 있었다. 추천인란에는 강태준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파일 속 메모에는 더 노골적인 문장이 있었다.‘대상과의 관계 지속 가능성 낮음. 해외 근무 제안 시 수락 확률 87%.’사람의 마음과 이별까지 확률로 계산해 둔 기록이었다. 서아는 종이를 구겨 버리고 싶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다음 파일은 스물셋에 만난 첫사랑의 것이었다.남자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이 자금난에 빠지고, 대출 만기가 갑자기 연장되지 않아 가족이 지방으로 내려갔던 일. 그 채권을 매입한 회사가 태강캐피탈의 계열사라는 자료가 함께 들어 있었다.서아는 종이를 넘기다 손을 멈췄다.헤어지던 날, 그 남자는 울면서 말했다.‘미안해. 우리 집이 이렇게 된 이상 너까지 붙잡을 수가 없어.’그 이별 직후 태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서아를 데리러 왔다. 밤새 울다 지친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페이지를 넘길수록 태준이 건넸던 위로까지 의심스러워졌다.첫사랑과 헤어진 날, 태준은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한강 공원에 나타났다. 비에 젖은 서아를 차에 태우고 말없이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때는 오빠에게 들었겠거니 했다. 기록에는 그날 서아가 벤치에 도착한 시각과 울음을 멈춘 시각까지 적혀 있었다.출판사 입사 면접 일정, 첫 출근 날의 이동 경로, 자주 마시는 커피, 병원 진료와 처방 약, 우울할 때 찾아가던 한강 벤치까지 적혀 있었다.사진 옆에는 짧은 메모도 남아 있었다.‘표정이 어두움. 윤도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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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좋아한 게 아니라 망가뜨린 거야

열아홉이던 봄부터.서아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성인이 된 뒤의 거의 모든 시간이었다. 사랑하고 헤어지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며 자신의 힘으로 살아왔다고 믿었던 세월.그 뒤에 늘 강태준이 있었다.“도현이 자취방에서 처음 봤어.”태준은 벽에 붙은 오래된 사진을 보며 말했다.“비가 오던 날이었지. 노란 우산을 접고 들어와서는 ‘태준 오빠’라고 부르며 웃었어.”“그만해요.”“그날부터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잊으려고 해 본 적은 있어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어.”태준의 시선이 벽에 붙은 가장 오래된 사진으로 향했다. 노란 우산을 들고 웃고 있는 열아홉의 서아였다.사진 속 자신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서아는 그 얼굴을 바라볼수록 속이 뒤집혔다. 이제는 자신의 과거인데도 낯선 사람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태준은 서아의 굳은 표정을 보고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처음엔 네가 도현이 동생이라는 사실만 계속 되뇌었어. 밥을 사 주고 집에 데려다주는 정도면 괜찮다고, 네가 대학을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멀어질 거라고.”“그런데 안 됐죠?”“안 되더군.”“듣고 싶지 않다고요.”서아가 귀를 막으려 하자 태준이 손목을 잡았다. 세게 움켜쥔 것은 아니었지만 놓아주지도 않았다.“도현이 동생이라 선을 넘을 수 없었어. 네가 나를 가족처럼 믿는 것도 알았고.”“그럼 고백이라도 했어야죠. 내가 선택하게 했어야 했다고요.”“거절당할 걸 알았으니까.”“거절하면 끝내야 하는 게 정상이에요.”“나는 끝낼 수 없었어.”“그래서 뒤에서 내 인생을 망쳤어요?”“네 옆에 서는 놈들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어.”태준의 말투는 담담했다.“처음엔 기다리려고 했지. 네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포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무도 네 곁에 둘 수가 없더군.”“당신이 그 사람들을 쫓아냈으니까!”“맞아.”태준은 부정하지 않았다.“멀리 갈 기회를 줬고, 숨기고 있던 약점은 드러나게 했어. 네 앞에서 선택할 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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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 화: 오빠까지 당신이?

서아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다른 파일에 닿았다.‘YDH / INCIDENT REPORT(사건보고서) 2026.08.’윤도현의 이니셜과 사고가 난 달이 적혀 있었다.서아는 곧장 무릎을 꿇고 파일을 펼쳤다.첫 장에는 사고 당일 도현의 이동 경로가 분 단위로 표시돼 있었다. 차량 속도, 휴대전화 기지국 접속 기록, 태강그룹 사설 경호팀의 추적 보고서까지 들어 있었다.오빠가 사고를 당하기 전부터 태준의 사람들이 뒤를 밟고 있었다.서아는 다음 장을 넘겼다.사고 발생 삼십 분 전, 도현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강태준이었다.통화 시간은 4분 12초.그보다 두 시간 전에는 태강그룹 차명 소유의 한남동 펜트하우스에서 두 사람이 만난 기록도 있었다.파일 뒤쪽에는 국도변 위성 사진과 반파된 차량 사진, 혈흔 분석 결과가 붙어 있었다. 일부 문장은 검은색으로 지워져 있었고, ‘대상 이동 완료’라는 문구만 남아 있었다.별도 봉투에는 도현의 여권 사본과 해외 출국용 임시 신분 서류, 태강그룹이 소유한 비공개 활주로의 운항 기록까지 들어 있었다. 목적지는 보안 코드로 가려져 있었다.마지막 페이지에는 ‘윤서아 보호 단계 상향. 강태준 개인 거주지로 즉시 이동’이라고 적혀 있었다.서아의 손이 멎었다.“사고 당일 오빠를 만났어요?”태준의 시선이 파일로 내려갔다.“마지막 통화도 당신이었고, 사고 전부터 사람을 붙여서 추적했네요.”대답은 없었다.서아는 빠르게 종이를 넘겼다. 사고 차량에서 메모리 카드가 사라진 시각, 도로변 혈흔이 끊긴 지점, 신원을 알 수 없는 검은 차량의 이동 경로가 이어졌다.모든 흔적이 태준에게 닿아 있었다.서아는 날짜와 시각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자신이 잘못 읽었기를 바랐지만, 서로 다른 문서들이 모두 같은 결론을 가리켰다. 사고 전 마지막 통화도, 차량이 멈춘 뒤의 이동도 태준의 보고 체계 안에 있었다.십 년 동안 서아의 주변을 정리해 온 사람.자신을 완전히 독점하려면 마지막으로 치워야 할 사람은 단 하나였다. 오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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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순종하는 척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서아는 아침이 밝자 거울 앞에 앉았다.울어서 부은 눈을 찬물로 가라앉히고, 흐트러진 머리를 빗었다. 더는 분노만 앞세워 부딪치지 않기로 했다.두 번의 탈출은 모두 실패했다. 지훈까지 피해를 입었다. 태준의 보안과 권력을 힘으로 뚫는 것은 불가능했다.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윤서아.십 년 동안 숨겨 온 집착이 유일한 균열이었다.서아는 비밀방에서 본 기록을 떠올렸다. 태준은 중요한 자료를 개인 서재의 보안 금고에 보관했다. 금고를 열려면 그가 늘 지니고 다니는 마스터 카드가 필요했다.그 카드를 손에 넣으려면 태준의 경계부터 풀어야 했다.서아는 하루 동안 태준의 동선을 떠올렸다. 그는 저택 안에서도 카드 홀더를 수트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밤에는 침실 소파에 재킷을 벗어 두고 곧장 욕실로 향하는 습관이 있었다. 십 년 동안 자신을 관찰한 남자를, 이제는 서아가 관찰할 차례였다.드레스룸에는 태준이 준비해 둔 옷이 색깔별로 걸려 있었다. 서아는 그중 그가 오래 바라보곤 했던 연보라색 원피스를 골랐다. 선택하는 순간 수치심이 치밀었지만 눌러 삼켰다.오후 일곱 시, 다이닝룸.태준이 저택으로 돌아오자 서아는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며칠째 방에서 식사를 거부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는 맞은편 의자를 당기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무슨 생각이야?”“밥 먹으려는 생각이요.”“그것뿐?”“다른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원피스의 소매와 정리한 머리카락에 머물렀다가, 다시 서아의 눈으로 돌아왔다.“여기서 굶어 죽으면 나만 억울하잖아요.”서아는 수저를 들었다. 태준은 바로 식사를 시작하지 않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지훈 선배 일부터 돌려놔요.”“오늘 직위 해제는 취소됐어. 프로젝트도 다시 진행될 거야.”서아의 손이 잠깐 멈췄다.“가족 회사는요?”“건드리지 않았어.”“그 말을 믿으라고요?”“확인해도 돼.”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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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가장 약한 곳

서재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남았다.서아는 천천히 두 팔을 들어 태준의 목을 감쌌다.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다른 감정 때문인지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이래도 덫 안 피할 거예요?”“응.”“내가 카드키를 훔치려고 이러는 걸 수도 있는데.”태준의 눈이 잠깐 가슴 안쪽 카드 홀더로 내려갔다가 다시 서아에게 돌아왔다.“알아.”“알면서도요?”“네가 스스로 내게 입 맞출 이유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태준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서아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처음에는 닿기만 한 짧은 입맞춤이었다. 태준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서아를 붙잡을지, 그대로 기다릴지 판단하지 못하는 듯 손끝만 미세하게 떨렸다. 태준의 숨도 얕아졌다. 그는 바로 반응하지 못한 채 서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이내 그의 팔이 허리를 감쌌다.그의 팔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서아가 숨을 삼키자 곧바로 느슨해졌다.태준은 그녀가 물러날 틈을 남긴 채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맞췄다. 손은 허리 위에 머물렀고, 서아가 조금만 굳어도 바로 힘을 풀었다.그가 끝까지 선택권을 남겨 둘 줄은 몰랐다.서아는 눈을 감았다. 카드만 손에 넣으면 된다고 되뇌었다. 오빠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한 일이라고.그런데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태준의 움직임이 멈췄다.그는 입술을 떼고 서아를 바라보았다. 손끝이 젖은 뺨에 닿았다가 이내 떨어졌다.“싫은데 왜 해.”“당신이 원하는 거잖아요.”“네가 원하지 않는 선은 넘지 않아.”“날 가둬 놓고 그런 말이 나와요?”태준의 얼굴이 굳었다.“가두는 것과 이건 달라.”“나한테는 다르지 않아요.”“……그래.”태준이 처음으로 시선을 피했다.“내가 다르다고 정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지.”그 말에 서아는 오히려 더 흔들렸다. 죄를 인정하면서도 가두는 사람, 모든 선택을 빼앗으면서도 마지막 선에서는 물러나는 사람. 어느 얼굴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태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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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오빠의 목소리

서아는 서재 문을 잠그고 은색 USB를 노트북에 연결했다.화면에는 여덟 자리 암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 비밀방 문을 열었던 자신의 생일과 도현의 생일을 이어 붙였다.04171024.잠금이 풀리며 금융 거래 내역과 음성 파일이 나타났다.폴더 안에는 사고 다음 날 촬영된 도현의 사진도 있었다. 왼쪽 관자놀이에 붕대를 감고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의식은 또렷해 보였다. 해외 병원 진료 기록에는 갈비뼈 골절과 열상, 과다출혈 치료 내역이 적혀 있었다. 사진 모서리에는 촬영 시간과 안전가옥 식별 코드도 남아 있었다.서아는 사진 속 오빠의 얼굴을 손끝으로 짚었다. 살아 있었다. 적어도 사고 다음 날까지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가장 위에 있는 파일의 이름은 ‘202608_Last_Voice_YDH’였다.서아는 한참 커서만 올려 둔 채 움직이지 못했다. 이 안에 든 것이 오빠의 마지막 목소리일 수도 있었다.마음을 다잡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짧은 잡음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서아야. 이걸 네가 듣고 있다면, 오빠가 아직 직접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인 거야.”숨이 멎는 것 같았다.서아는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녹음 속 도현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지만 분명 살아 있었다.“내가 태강그룹 해외 비자금 계좌를 추적하다가 회장 쪽 사람들에게 들켰어. 사고로 꾸며서 없애려고 했고.”도현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의료 장비가 울리는 규칙적인 전자음도 섞여 있었다.“경찰 내부에도 정보가 새는 곳이 있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너부터 인질로 잡으려 할 거야. 그래서 당분간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어.”“나를 빼낸 건 태준이야. 그날 한남동에서 만나 도피 경로를 정했고, 국도 사고도 추적을 끊기 위한 위장이었어. 뒤쫓던 차량을 따돌리다 실제로 충돌해서 다치긴 했지만, 태준이 경호팀을 보내기 전에 놈들이 먼저 도착했으면 난 죽었을 거야. 차에 남은 피는 내 피가 맞지만 치명상은 아니야.”서아의 시야가 흐려졌다.태준이 오빠를 죽인 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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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그래도 용서 못 해

서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천천히 일어섰다.다리에 힘이 풀려 책상을 짚어야 했지만, 태준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오빠를 살려준 건 고마워요.”목소리가 잠겼다.“사고를 위장해서 빼돌리고, 안전가옥까지 준비해 준 것도 들었어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오빠가 죽었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태준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내가 오빠를 죽였다고 몰아세운 건 잘못했어요. 그건 사과할게요.”“사과하지 마.”태준의 목소리가 낮았다.“의심하게 만든 건 나야. 설명하지 않았고, 네가 가장 두려워할 만한 자료를 그대로 보게 했으니까.”“그래도 사실이 아닌 걸로 당신을 저주했어요.”“그보다 더한 말을 들어도 싸.”서아는 숨을 한번 고른 뒤 USB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하지만 그게 지난 십 년을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아요.”태준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내 주변 사람들을 치우고, 내 전화를 보고, 지금은 문까지 잠갔어요. 오빠를 구했다는 사실이 그 모든 일을 정당화해 주진 않아요.”“알아.”“당신은 뭘 후회해요?”태준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네가 나를 두려워하게 만든 것. 네가 스스로를 미끼로 써야 했던 것. 네가 울 때도 놓지 못한 것.”“그럼 나를 원한 건 후회하지 않아요?”“그건 후회할 수 없어.”예상은 했지만, 직접 듣고 나니 더 아팠다.“정말 알아요?”서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당신은 계속 보호라고 했잖아요. 내가 위험해서, 오빠가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그건 명분이었어.”태준의 대답은 낮고 선명했다.“도현이가 널 부탁한 건 사실이야. 외부 위협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하지만 널 이 집에 가둔 건 도현이 때문이 아니야.”“그럼요?”“내가 그러고 싶었어.”서아의 표정이 굳었다.“십 년 동안 네가 다른 사람과 웃고, 내가 모르는 곳으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는 데 지쳤어. 위험이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널 지킬 수 있다는 안도감이 아니었어.”태준은 자조하듯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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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진짜 탈출

다음 날 아침, 서아는 작은 여행 가방에 자신의 물건을 담았다.많은 것은 필요 없었다. 이 저택에 있던 옷과 화장품 대부분은 태준이 준비한 것이었다. 자신의 휴대전화와 지갑, 처음 입고 왔던 옷만 챙겼다.드레스룸에 걸린 연보라색 원피스 앞에서 잠시 손이 멈췄다. 태준을 속이기 위해 골랐던 옷이었다. 그날의 입맞춤과 그가 멈춰 섰던 순간이 떠올랐지만, 서아는 끝내 옷을 두고 문을 닫았다.침대 옆에는 태준이 다시 돌려준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위치 추적 프로그램은 삭제돼 있었고, 보안 업체의 원격 접근 권한도 모두 해제돼 있었다. 그래도 서아는 전원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가방을 끌고 1층으로 내려가자 고용인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누구도 서아를 막지는 않았지만, 모두 태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태준은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넥타이도 매지 않은 채 셔츠 소매만 걷어 올린 모습이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어디 가려고.”“내 집이요.”“안 된다고 했어.”“어젯밤에는 내일 다시 물으라고 했잖아요.”“밤새 생각해도 위험해.”“대신 안전한 곳을 정해 주겠다는 말도 하지 마요. 호텔도, 다른 집도 싫어요. 내 집으로 갈 거예요.”“경호만 붙이게 해.”“싫어요.”“당신한테 허락받으려고 내려온 거 아니에요.”서아는 현관 쪽으로 걸었다.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열어요.”태준이 다가왔다. 서아는 손잡이를 붙든 채 그를 돌아보았다.“당신 곁에 있으면 난 내가 아닌 사람이 돼요.”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매일 의심하고, 도망칠 방법만 생각하고, 살아남으려고 당신이 원하는 척까지 했어요. 더 여기 있으면 정말 망가질 것 같아요.”태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서아는 울지 않았다. 분노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당신이 좋아한 게 웃고 살아 있는 윤서아라면, 이대로 두지 마요.”“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내가 도움을 요청할게요. 그때 와요.”“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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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그가 오지 않았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뒤 사흘이 지났다.서아는 다시 출근했고, 밀린 원고를 정리하고, 퇴근길에는 혼자 지하철을 탔다.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회사로 돌아온 첫날, 지훈은 말없이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직위 해제는 취소됐고 중단됐던 프로젝트도 재개됐지만, 눈 밑에는 며칠간의 피로가 남아 있었다.“선배, 미안해요.”“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나 때문에 회사까지…….”“강태준이 한 일을 네 책임으로 돌리지 마.”지훈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없어?”서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오빠의 안전과 비자금 사건이 정리되기 전에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도 아직 무슨 선택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휴대전화에서 위치 추적 프로그램은 사라져 있었다. 서아는 새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오피스텔 도어록도 교체했다. 밤마다 창문과 현관을 두 번씩 확인했지만, 낯선 차량이나 경호원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강태준에게서는 전화도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그토록 원했던 자유였다.그런데 일상 곳곳에 빈자리가 느껴졌다. 사옥 앞 검은 세단도, 귀가했는지 확인하는 짧은 연락도 없었다. 십 년 동안 모르는 사이 스며든 존재가 한순간에 빠져나가자 익숙했던 풍경까지 낯설었다.서아는 그 감정을 그리움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감금에서 벗어난 뒤 찾아오는 혼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사흘째 밤, 야근을 마치고 오피스텔 복도로 들어섰다.고장 난 센서등이 두 번 깜빡였다. 비상계단 문 옆에 낯선 남자 둘이 서 있었다.서아가 뒤돌아서는 순간 한 명이 입을 막았고, 다른 한 명이 팔을 등 뒤로 꺾었다. 휴대전화가 바닥에 떨어져 화면이 깨졌다.“장부 어디 있어.”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윤도현이 넘긴 원본 위치만 말하면 살려 줄게.”오빠를 노리던 사람들이었다.“가만있어.”코끝에 독한 약품 냄새가 닿았다.서아는 가방을 휘두르고 난간을 붙잡았다. 발뒤꿈치로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을 막은 손이 더 세게 눌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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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이번에는 보내 주려고

수술은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지훈과 태준의 비서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비서는 수술실 앞에서도 검찰과 통화를 이어 갔다. 태준이 납치 조직의 차량을 확인한 직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비자금 자료를 즉시 제출하라고 미리 지시했다는 설명이었다.“부사장님은 오늘 밤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까지 생각하고 움직이셨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서아의 손이 더 세게 떨렸다.서아는 응급실 앞 의자에 앉아 피로 얼룩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몇 번을 씻어도 손톱 사이에 붉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의사는 칼이 장기를 비켜 갔고 출혈도 잡혔다고 설명했다. 왼팔 신경에도 큰 손상은 없지만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굳어 있던 숨이 풀렸다.서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밤새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떨리며 내려앉았다. 안도한 순간 오히려 눈물이 더 거세게 쏟아졌다. 지훈이 말없이 휴지를 건넸다. 서아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지훈은 서아 옆에 앉아 한참 말없이 기다렸다.“그 사람이 널 구한 것과, 너한테 한 일이 없어지는 건 별개야.”“알아요.”“그러니까 죄책감 때문에 결정하지 마.”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많은 것이 뒤엉켜 있었다.태준은 다음 날 오후에 의식을 찾았다.서아가 병실에 들어서자 그가 먼저 물었다.“넌 괜찮아?”“왜 또 내 걱정부터 해요?”서아는 침대 옆에 서서 울음을 참았다.“날 가두고 망가뜨린 나쁜 사람이면 끝까지 나빠야지. 왜 나 때문에 칼까지 맞아요?”태준은 힘없이 웃었다.“널 지키는 것 말고는 제대로 해 본 게 없어서.”“그 방식이 잘못됐잖아요.”“알아.”이번에는 변명하지 않았다.그가 협탁 위 서류철을 가리켰다.“비자금 장부 원본이야. 페이퍼컴퍼니 실소유주 명단과 회장 측 비선 조직 자료까지 전부 검찰에 넘겼어. 내 명의로 보유한 의결권도 동결했고, 전략총괄 부사장 사임서도 제출했어.”서아는 서류철을 바라보았다.그 자료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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