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서아는 외투 주머니 안의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안 받았어요. 그냥 손잡고 위로해 준 거예요.”
거짓말을 내뱉는 목소리가 자신이 듣기에도 어색했다.
태준은 서아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왔다. 손을 주머니에 넣어 빼앗는 대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거짓말할 때 입술 안쪽을 깨무는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네.”
서아의 턱이 굳었다.
얼마나 오래 자신을 관찰해 왔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알고도 왜 안 뺏어요?”
“네가 그 사람을 그렇게 믿는다면 한번 믿어 봐.”
태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어디까지 해 줄 수 있는 사람인지.”
그는 더 묻지 않고 서재로 올라갔다.
서아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불 속에서 보조 휴대전화를 켜자 지훈이 미리 남긴 메시지가 떠 있었다.
[내일 새벽 5시 반, 정기 식자재 차량이 들어갈 거야. 냉장 탑차가 나갈 때 화물칸에 숨어. 정문 아래에서 기다릴게. 위치 기록이 남지 않게 이 폰만 써.]
구체적인 탈출 계획이었다.
서아는 손을 떨며 답장을 보냈다.
[선배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요. 정말 괜찮아요?]
곧 답이 왔다.
[너 혼자 두는 게 더 위험해. 반드시 나와.]
잠시 뒤 지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통화 오래 못 해. 탑차 기사와는 이야기해 뒀어. 운전석 뒤쪽 상자 세 칸은 비워 둘 거야.”
“선배, 태준이 이 폰 있는 거 알아요.”
“알아도 회선 명의까지는 바로 못 찾을 거야. 호텔에 도착하면 유심은 버려.”
“지금이라도 그만둬요. 선배까지 망가질까 봐 무서워요.”
“이미 네가 저 안에 있다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하면 평생 후회해.”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서아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매트리스 아래에 숨겼다. 문밖을 지나던 태준의 그림자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짧은 문장을 읽자 눈물이 차올랐다. 적어도 자신을 물건처럼 대하지 않는 사람이 바깥에 있었다.
그날 밤 서아는 식자재 차량이 들어오는 시간과 차고지 동선을 머릿속에 외웠다. 희망이 생기자 처음으로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날 오전, 방 안 유선전화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 지훈의 목소리는 심하게 잠겨 있었다.
“서아야, 미안하다. 오늘 약속 장소로 못 갈 것 같아.”
“무슨 일이에요?”
“아침부터 태강그룹 감사팀이 회사에 들어왔어. 내가 맡던 해외 판권 계약이랑 100억 규모 투자 프로젝트가 전부 중단됐고, 난 기밀 유출 혐의로 직위 해제됐어.”
서아의 손에서 수화기가 미끄러질 뻔했다.
“그게 왜 선배 잘못이에요?”
“내가 널 찾아간 직후잖아. 우연일 리 없어.”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지훈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는 소리와 직원들의 웅성거림도 섞였다.
“회사에서는 경찰 조사까지 거론하고 있어. 당장 출입증 반납하래.”
“선배, 나 때문에…….”
“네 탓 아니야. 힘 있는 사람이 권력을 잘못 쓰는 게 문제지.”
지훈은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호텔은 잡아 뒀어. 내 이름이 아닌 예약이라 당장은 못 찾을 거야. 어떻게든 빠져나오면 연락해.”
통화가 끊겼다.
지훈의 경력과 그가 맡은 프로젝트가 단 하룻밤 만에 흔들렸다. 자신을 도우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서아는 곧장 2층 집무실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젖히자 태준은 창가에서 결재 서류를 보고 있었다.
“강태준.”
서아가 책상 위에 손을 짚었다.
“지훈 선배 프로젝트를 중단시키고 직위 해제까지 시킨 거, 당신 짓이죠?”
태준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인생을 망가뜨려요? 나한테 휴대전화 하나 건넨 게 그렇게 큰 죄예요?”
“프로젝트는 내가 다시 살릴 수 있어.”
“없앴다가 돌려주면 죄가 아닌 게 돼요?”
“그가 선을 넘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가.”
“그 선이라는 게 당신이 정한 내 주변 반경이에요?”
태준의 턱이 굳었다.
“내가 경고했는데도 널 데려가려 했지.”
“그래서요? 당신 권력으로 사람 하나쯤 짓밟아도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네 손을 잡는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태준은 처음으로 이유를 숨기지 않았다.
“도와주겠다는 명분으로 네가 자기한테 의지하게 만드는 것도.”
“그건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이잖아요.”
태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신이 한 거냐고 묻잖아요.”
잠깐의 침묵 뒤, 그가 대답했다.
“응.”
태준은 열린 문 앞에 서서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예전이라면 비밀번호를 알아냈을 것이다. 문이 잠겨 있어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열었을 남자였다.지금은 서아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들어와요.”말을 듣고도 그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왜 부른 건지 먼저 말해.”“내가 또 거절할까 봐 무서워요?”태준은 잠시 침묵했다.“응.”솔직한 대답에 서아는 문을 조금 더 열었다.“돌려받을 물건은 당신이에요.”태준의 눈이 흔들렸다.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봉투가 구겨졌다.“이건 뭐예요?”“저택과 비밀방 열쇠. 네 자료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장소의 출입 권한도 전부 정리해 왔어. 네가 직접 확인하고 싶으면 확인해.”태준은 봉투를 문 안쪽 바닥에 내려놓았다. 허락 없이 서아의 손에 쥐여 주지도 않았다.서아는 그가 오해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용서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당신이 한 일을 사랑이라고 예쁘게 포장할 생각도 없고요.”“알아.”“그래도 내 마음이 당신한테 가는 걸 부정하지 않기로 했어요.”“그 마음이 죄책감이면 받아들이지 않을게.”“오빠를 구해 준 빚 때문에 부른 거 아니에요. 한 달 동안 당신과 완전히 떨어져 지내 봤는데도 계속 생각났어요. 그래서 부른 거예요.”태준의 굳은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서아는 두 사람 사이의 문턱을 내려다보았다.“대신 조건이 있어요.”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내 휴대전화에 손대지 않기. 위치 추적하지 않기. 내 친구와 직장에 개입하지 않기. 어디를 가든 허락을 요구하지 않기.”서아는 한 항목씩 또렷하게 말했다.“내가 싫다고 하면 멈추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요. 화가 나도 사람을 건드리지 말고, 불안하면 감시하지 말고 나한테 말해요. 다시 한 번 문을 잠그면 그때는 정말 끝이에요.”태준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전부 지킬게.”서아는 곧바로 믿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지난 십 년은 약속 한마디로 지워질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일이었다.“자신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문이 열리자 서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수척해졌지만 분명 살아 있는 얼굴이었다.“서아야!”“오빠!”서아는 가방을 떨어뜨리고 달려갔다. 도현의 품에 안기는 순간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도현은 여동생의 등을 쓸어내리며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서아의 목에 남은 가느다란 상처와 야윈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의 표정이 무너졌다.“혼자 두고 사라져서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살아 있으면 됐어. 돌아왔으면 됐어.”공항 근처 카페에서 도현은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태준이 비자금 조직의 눈을 돌리고, 안전가옥과 도피 경로를 마련하고, 마지막에는 승계권까지 포기했다는 이야기였다.서아도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숨기지 않았다. 위치 추적과 두 번의 탈출, 비밀방에 있던 십 년의 기록까지 모두 말했다.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자식이 널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어.”“오빠가 부탁했잖아. 나를 지켜 달라고.”“지키라는 말이 가두라는 뜻은 아니었어.”도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태준이가 내 목숨을 살린 건 사실이야. 그래도 네가 그 빚까지 대신 갚을 필요는 없어. 네 마음이 아니면 돌아가지 마.”서아는 오빠의 말을 들으면서도 태준의 잘못을 지우지 않았다.그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것과, 자신에게서 선택권을 빼앗은 것은 동시에 존재하는 사실이었다.도현은 귀국한 날 오후 태준의 병실을 찾았다.문이 닫힌 뒤 둔탁한 소리가 한 번 들렸다.“내 동생을 십 년이나 감시해 놓고 친구라고 할 수 있어?”도현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복도까지 새어 나왔다.태준은 변명하지 않았다.“미안하다.”“서아가 용서하지 않으면 다시는 앞에 나타나지 마.”“그래.”“네가 구해 준 내 목숨 때문에 서아가 흔들리게 만들지도 말고.”“그럴 생각 없어.”“다시 한 번 몰래 따라붙는 순간, 친구고 뭐고 끝이야.”“이미 끝나도 할 말 없다.”잠시 뒤 도현이 병실에서 나왔다. 굳은 주먹 관절이
수술은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지훈과 태준의 비서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비서는 수술실 앞에서도 검찰과 통화를 이어 갔다. 태준이 납치 조직의 차량을 확인한 직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비자금 자료를 즉시 제출하라고 미리 지시했다는 설명이었다.“부사장님은 오늘 밤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까지 생각하고 움직이셨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서아의 손이 더 세게 떨렸다.서아는 응급실 앞 의자에 앉아 피로 얼룩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몇 번을 씻어도 손톱 사이에 붉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의사는 칼이 장기를 비켜 갔고 출혈도 잡혔다고 설명했다. 왼팔 신경에도 큰 손상은 없지만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굳어 있던 숨이 풀렸다.서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밤새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떨리며 내려앉았다. 안도한 순간 오히려 눈물이 더 거세게 쏟아졌다. 지훈이 말없이 휴지를 건넸다. 서아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지훈은 서아 옆에 앉아 한참 말없이 기다렸다.“그 사람이 널 구한 것과, 너한테 한 일이 없어지는 건 별개야.”“알아요.”“그러니까 죄책감 때문에 결정하지 마.”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많은 것이 뒤엉켜 있었다.태준은 다음 날 오후에 의식을 찾았다.서아가 병실에 들어서자 그가 먼저 물었다.“넌 괜찮아?”“왜 또 내 걱정부터 해요?”서아는 침대 옆에 서서 울음을 참았다.“날 가두고 망가뜨린 나쁜 사람이면 끝까지 나빠야지. 왜 나 때문에 칼까지 맞아요?”태준은 힘없이 웃었다.“널 지키는 것 말고는 제대로 해 본 게 없어서.”“그 방식이 잘못됐잖아요.”“알아.”이번에는 변명하지 않았다.그가 협탁 위 서류철을 가리켰다.“비자금 장부 원본이야. 페이퍼컴퍼니 실소유주 명단과 회장 측 비선 조직 자료까지 전부 검찰에 넘겼어. 내 명의로 보유한 의결권도 동결했고, 전략총괄 부사장 사임서도 제출했어.”서아는 서류철을 바라보았다.그 자료가
오피스텔로 돌아온 뒤 사흘이 지났다.서아는 다시 출근했고, 밀린 원고를 정리하고, 퇴근길에는 혼자 지하철을 탔다.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회사로 돌아온 첫날, 지훈은 말없이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직위 해제는 취소됐고 중단됐던 프로젝트도 재개됐지만, 눈 밑에는 며칠간의 피로가 남아 있었다.“선배, 미안해요.”“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나 때문에 회사까지…….”“강태준이 한 일을 네 책임으로 돌리지 마.”지훈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없어?”서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오빠의 안전과 비자금 사건이 정리되기 전에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도 아직 무슨 선택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휴대전화에서 위치 추적 프로그램은 사라져 있었다. 서아는 새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오피스텔 도어록도 교체했다. 밤마다 창문과 현관을 두 번씩 확인했지만, 낯선 차량이나 경호원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강태준에게서는 전화도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그토록 원했던 자유였다.그런데 일상 곳곳에 빈자리가 느껴졌다. 사옥 앞 검은 세단도, 귀가했는지 확인하는 짧은 연락도 없었다. 십 년 동안 모르는 사이 스며든 존재가 한순간에 빠져나가자 익숙했던 풍경까지 낯설었다.서아는 그 감정을 그리움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감금에서 벗어난 뒤 찾아오는 혼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사흘째 밤, 야근을 마치고 오피스텔 복도로 들어섰다.고장 난 센서등이 두 번 깜빡였다. 비상계단 문 옆에 낯선 남자 둘이 서 있었다.서아가 뒤돌아서는 순간 한 명이 입을 막았고, 다른 한 명이 팔을 등 뒤로 꺾었다. 휴대전화가 바닥에 떨어져 화면이 깨졌다.“장부 어디 있어.”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윤도현이 넘긴 원본 위치만 말하면 살려 줄게.”오빠를 노리던 사람들이었다.“가만있어.”코끝에 독한 약품 냄새가 닿았다.서아는 가방을 휘두르고 난간을 붙잡았다. 발뒤꿈치로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을 막은 손이 더 세게 눌렸다
다음 날 아침, 서아는 작은 여행 가방에 자신의 물건을 담았다.많은 것은 필요 없었다. 이 저택에 있던 옷과 화장품 대부분은 태준이 준비한 것이었다. 자신의 휴대전화와 지갑, 처음 입고 왔던 옷만 챙겼다.드레스룸에 걸린 연보라색 원피스 앞에서 잠시 손이 멈췄다. 태준을 속이기 위해 골랐던 옷이었다. 그날의 입맞춤과 그가 멈춰 섰던 순간이 떠올랐지만, 서아는 끝내 옷을 두고 문을 닫았다.침대 옆에는 태준이 다시 돌려준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위치 추적 프로그램은 삭제돼 있었고, 보안 업체의 원격 접근 권한도 모두 해제돼 있었다. 그래도 서아는 전원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가방을 끌고 1층으로 내려가자 고용인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누구도 서아를 막지는 않았지만, 모두 태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태준은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넥타이도 매지 않은 채 셔츠 소매만 걷어 올린 모습이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어디 가려고.”“내 집이요.”“안 된다고 했어.”“어젯밤에는 내일 다시 물으라고 했잖아요.”“밤새 생각해도 위험해.”“대신 안전한 곳을 정해 주겠다는 말도 하지 마요. 호텔도, 다른 집도 싫어요. 내 집으로 갈 거예요.”“경호만 붙이게 해.”“싫어요.”“당신한테 허락받으려고 내려온 거 아니에요.”서아는 현관 쪽으로 걸었다.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열어요.”태준이 다가왔다. 서아는 손잡이를 붙든 채 그를 돌아보았다.“당신 곁에 있으면 난 내가 아닌 사람이 돼요.”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매일 의심하고, 도망칠 방법만 생각하고, 살아남으려고 당신이 원하는 척까지 했어요. 더 여기 있으면 정말 망가질 것 같아요.”태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서아는 울지 않았다. 분노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당신이 좋아한 게 웃고 살아 있는 윤서아라면, 이대로 두지 마요.”“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내가 도움을 요청할게요. 그때 와요.”“네가
서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천천히 일어섰다.다리에 힘이 풀려 책상을 짚어야 했지만, 태준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오빠를 살려준 건 고마워요.”목소리가 잠겼다.“사고를 위장해서 빼돌리고, 안전가옥까지 준비해 준 것도 들었어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오빠가 죽었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태준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내가 오빠를 죽였다고 몰아세운 건 잘못했어요. 그건 사과할게요.”“사과하지 마.”태준의 목소리가 낮았다.“의심하게 만든 건 나야. 설명하지 않았고, 네가 가장 두려워할 만한 자료를 그대로 보게 했으니까.”“그래도 사실이 아닌 걸로 당신을 저주했어요.”“그보다 더한 말을 들어도 싸.”서아는 숨을 한번 고른 뒤 USB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하지만 그게 지난 십 년을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아요.”태준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내 주변 사람들을 치우고, 내 전화를 보고, 지금은 문까지 잠갔어요. 오빠를 구했다는 사실이 그 모든 일을 정당화해 주진 않아요.”“알아.”“당신은 뭘 후회해요?”태준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네가 나를 두려워하게 만든 것. 네가 스스로를 미끼로 써야 했던 것. 네가 울 때도 놓지 못한 것.”“그럼 나를 원한 건 후회하지 않아요?”“그건 후회할 수 없어.”예상은 했지만, 직접 듣고 나니 더 아팠다.“정말 알아요?”서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당신은 계속 보호라고 했잖아요. 내가 위험해서, 오빠가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그건 명분이었어.”태준의 대답은 낮고 선명했다.“도현이가 널 부탁한 건 사실이야. 외부 위협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하지만 널 이 집에 가둔 건 도현이 때문이 아니야.”“그럼요?”“내가 그러고 싶었어.”서아의 표정이 굳었다.“십 년 동안 네가 다른 사람과 웃고, 내가 모르는 곳으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는 데 지쳤어. 위험이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널 지킬 수 있다는 안도감이 아니었어.”태준은 자조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