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딩동! 하자보수하러 왔습니다: Chapter 11 - Chapter 20

36 Chapters

제 11화. 닫힌 문 너머의 흑심

남편 진우가 현관문을 부서질 듯 쾅 닫고 출근한 뒤, 은수는 안방 침대 모퉁이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오전의 서늘한 햇살이 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 은수의 작고 하얀 손바닥 안에는 태건이 건네주고 간 검은색 명함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명함의 하얀 뒷면, 굵고 단정한 필체로 적힌 태건의 개인 번호 11자리. 은수는 떨리는 엄지손가락으로 그 숫자의 굴곡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집이 삐걱거리든, 문이 안 열리든, 아니면… 그냥 내가 보고 싶든.''손 다치면서 위험하게 공구 잡지 마세요. 부르면 언제든 옵니다.'귓가를 긁어내리던 태건의 낮고 묵직한 음성이 텅 빈 거실의 적막을 뚫고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싱크대 하부장 앞에서 은수의 목덜미를 받치고 숨통을 틔워주던 그 거칠고 뜨거운 입술, 조리대 상판 위로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 얽혀들던 단단한 손가락의 감촉이 은수의 온몸을 아찔하게 곤두세웠다.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남편의 폭언과 결벽증적인 통제 아래 매일 서서히 질식해가던 은수에게, 태건의 묵직한 체온과 서늘한 시선은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뜨거운 숨결이었다. 그냥 아무 핑계 없이 전화를 걸어 와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은수는 아직 자신의 욕망을 날것으로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 온전한 여자로서 그를 다시 마주하고 이 집 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남자의 손길이 닿아야만 하는 그럴듯한 명분이 절실했다.'수리 기사를 부를 만한… 또 다른 하자.'은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대 서랍을 뒤졌다. 남편 진우가 시계를 고칠 때 쓰라며 던져두었던 작은 십자드라이버와 단단한 강철 머리핀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차가운 쇳덩이를 쥔 은수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가 안방 방문 손잡이에 멎었다.은빛으로 번쩍이는 레버형 방문 손잡이.'이번엔… 여기야.'남편 진우의 차가운 통제와 숨 막히는 침묵만이 가득했던 이 금기의 공간으로, 그 거칠고 거대한 남자를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게 만들고 싶었다. 은수는 방문을 반쯤 열어둔 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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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화. 침실의 문을 연 남자

"사모님, 안에 계십니까."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태건의 묵직한 음성에 은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팀장님… 저 안쪽에 있어요. 문이 꼼짝도 안 해요.""손잡이에서 두 걸음 뒤로 물러서 계십시오. 래치 스프링이 튀어서 걸렸으면 바깥 커버를 강제로 해체해야 합니다."문밖에서 묵직한 공구 가방이 바닥에 내려앉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이어 얇은 철제 헤라와 롱노즈 플라이어, 전동 드라이버가 손잡이 틈새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안방의 정적을 사납게 갈랐다. 끼기긱, 짤깍- 위잉!능숙하고 거침없는 손놀림이었다. 태건은 몇 번의 정밀한 조작만으로 손잡이의 외부 금속 캡을 단숨에 비틀어 뜯어냈다. 문틀 속에서 찌그러져 굳어 있던 걸쇠 부속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덜컥- 쾅! 단단히 맞물려 있던 문틀의 족쇄가 풀리며, 굳게 닫혀 있던 안방 문이 활짝 열려젖혀졌다. 서늘한 복도 공기와 함께, 네이비색 작업복 차림의 거구 태건이 안방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남편 진우와 3년간 함께 숨을 쉬고 살을 맞대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침실. 그 금기의 공간 한가운데에 다른 남자의 거대한 그림자가 짙고 묵직하게 드리워졌다. 태건의 딱 벌어진 어깨와 압도적인 체격이 들어서자, 넓던 안방이 순식간에 숨이 막힐 만큼 비좁게 느껴졌다.그가 발을 딛는 순간, 침실 가득 배어 있던 은수의 은은한 살냄새와 태건의 깨끗한 비누 향, 희미한 기계 기름 냄새가 뒤섞이며 짙은 긴장감을 뿜어냈다. 태건의 날카로운 눈매가 침대 옆에 위태롭게 서 있는 은수의 전신을 느리게 훑어내렸다."다치신 데는 없습니까.""네… 덕분에 살았어요."은수는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태건은 문틀 바닥에 떨어진 파손된 래치 볼트 부속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머리핀에 마구 쑤셔져 찌그러진 스프링과 드라이버 날에 긁혀 뭉개진 나사 머리의 흔적들.태건이 그 부속을 커다란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피식, 낮게 실소를 흘렸다. 그의 서늘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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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화. 고장 난 곳을 복구하는 손길

"다음엔… 또 어디를 고장 내실 겁니까."태건의 낮게 잠긴 목소리가 은수의 쇄골 언저리를 뜨겁게 진동시켰다. 은수는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을 억누르지 못한 채 남자의 넓은 등판을 쥐어짜듯 부둥켜안았다. 남자의 두터운 승모근 너머로 거친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남편 진우와 3년간 숨 막히는 통제와 결벽, 냉대 속에 누워 있던 침대 매트리스. 그 차가운 침구 위로 태건의 묵직한 체중과 거친 호흡이 쏟아져 내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스프링 소리가 안방의 적막을 은밀하고 사납게 갈랐다. 남편의 침실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배덕한 일탈.그러나 은수의 가슴속에 차오르는 것은 두려움이나 수치심이 아니었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맹렬하게 번지는 아찔한 해방감과 살아 숨 쉰다는 뜨거운 실감이었다.스스륵.태건이 은수의 턱을 감싸 쥐었던 손을 천천히 내려, 얇은 니트 가디건의 소매를 팔꿈치 위로 조심스럽게 밀어 올렸다.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손목 안쪽에는, 진우가 쥐어틀어 남긴 짙은 보랏빛 멍 자국이 아직 선명했다. 태건의 거칠고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그 상처 위를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거친 손끝에서 전해지는 화끈한 체온과 서늘한 마찰열에 은수가 저도 모르게 흑, 하고 얕은 숨을 들이켰다."아픕니까.""아니요… 아프지 않아요."은수가 붉어진 눈가로 고개를 젓자, 태건의 짙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은수의 흔들리는 속눈썹을 정면으로 꿰뚫어 보았다."여긴 시퍼렇게 멍들었고, 손바닥은 스패너 돌리느라 살갗이 다 부르텄고."태건은 은수의 작고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단단한 뺨에 가만히 가져다 댔다. 남자의 까슬한 턱수염과 화끈거리는 체온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은수의 등골을 타고 찌릿한 전류가 흘렀다."사람을 이렇게 멍들게 방치해 둔 놈이나, 그걸 참고 혼자 곪아 터지던 사람이나."남자의 낮은 목소리는 비난이나 질책이 아니었다. 학대와 고립 속에서 서서히 질식해가던 은수의 비참한 상처를 온전히 꿰뚫어 보고 보듬어 안는 깊은 연민이자 거침없는 도발이었다. 태건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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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화. 서늘해진 시선의 반격

철컥, 띠리링. 태건이 떠나고 현관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안방까지 아득하게 들려왔다.은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틀에 새로 달린 은빛 손잡이에 손을 얹고 아래로 지그시 내리자, 짤깍 소리와 함께 문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나가고 싶을 땐 언제든 문 열고 나오면 됩니다.'귓가에 맴도는 태건의 묵직한 음성에 은수는 심장 부근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것은 단순히 고장 난 방문을 고쳐준 기사의 사무적인 말이 아니었다. 남편의 폭력과 가스라이팅이라는 감옥에 갇혀 질식해가던 은수를 향해 던진 가장 강렬한 구원의 열쇠였다.은수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땀과 열기로 젖은 몸을 씻어내리는 동안, 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늘 공포와 불안으로 잘게 떨리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었다.태건의 뜨거운 체온과 서늘한 시선을 거치며, 은수의 눈빛 속에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단단한 생기가 깃들어 있었다. 저녁 8시 정각. 철컥, 쾅-!현관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진우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거칠게 벗어 던진 진우는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미간을 팍 찌푸리며 넥타이를 홱 풀어헤쳤다."김은수! 밥상은 차려놨어? 사람 들어오는 소리 듣고도 마중도 안 나와?"주방에서 찌개를 담고 있던 은수는 차분하게 국자를 내려놓았다. 예전 같았으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앞치마를 쥐어뜯으며 "죄송해요, 바로 차려드릴게요" 하고 허겁지겁 달려 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은수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단정한 걸음으로 거실로 걸어 나왔다."된장찌개 끓여뒀어요. 씻고 나오시면 바로 드실 수 있어요."은수의 목소리는 지나치리만큼 고요하고 정갈했다. 진우는 가죽 서류 가방을 소파에 팽개치며 은수의 턱밑까지 성큼 다가왔다. 그의 서늘하고 고압적인 눈매가 은수를 향해 날카롭게 내리꽂혔다."목소리 톤이 왜 그 모양이야? 하루 종일 집구석에서 편하게 놀고먹더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진우가 은수의 어깨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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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화. 수증기 속에 갇힌 열기

남편 진우가 출근길에 나서며 현관문을 닫자마자, 은수는 거실을 가로질러 곧장 안방 욕실로 향했다.어젯밤 진우의 휴대폰 액정 위로 번쩍였던 붉은 하트 이모티콘과 낯선 여자의 이름. 과거였다면 배신감에 무너져 내리며 눈물을 쏟았겠지만, 지금 은수의 심장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자신을 옥죄며 벌레 보듯 학대하던 남편의 추악한 이면. 그 썩어빠진 위선을 확인한 순간, 은수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죄책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온전한 온기로 자신을 숨 쉬게 만들어준 남자 태건을 향한 걷잡을 수 없는 갈망뿐이었다.은수는 세면대 아래 수납장을 열고 작은 펜치와 스패너를 꺼내 들었다. 타일 바닥에 쪼그려 앉은 은수의 시선이 샤워기 헤드 연결부와 벽면 수전의 온수 유량 조절 밸브에 닿았다.'주방 배수관, 안방 방문 손잡이… 그리고 이번엔 욕실.'집안 곳곳에 스스로 새겨 넣은 파괴의 흔적들은, 태건을 제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은밀하고 치명적인 초대장이었다. 은수는 차가운 펜치로 샤워기 호스 체결 너트를 힘껏 물려 비틀었다.끼기긱-!단단히 맞물려 있던 고무 패킹이 찢어지며 황동 연결부가 덜렁거렸다. 은수는 멈추지 않고 벽면의 온수 밸브 캡을 뜯어낸 뒤, 스패너를 걸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과도하게 꺾었다. 치이익- 푸쉬익!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밸브 틈새에서 뜨거운 물이 세차게 새어 나오며 사방으로 튀었다. 샤워기 헤드는 거친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뱀처럼 요동치며 사방으로 뜨거운 물줄기를 흩뿌렸다. 유리 거울과 타일 벽면이 순식간에 뽀얀 김으로 뒤덮였고, 욕실 안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짙은 수증기로 가득 찼다.은수는 물줄기에 젖어가는 셔츠를 그대로 둔 채, 떨리는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꺼내 태건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 수화기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네, 차태건입니다."팀장님… 욕실 샤워기 쪽에서 뜨거운 물이 사방으로 쏟아져요. 밸브를 잠글 수가 없어요."은수의 떨리는 목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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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화. 위험한 경고와 중독

쏴아아- 치익.태건이 한 손으로 은수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몽키 스패너를 뻗어 벽면 수전의 온수 차단 밸브를 돌려 잠갔다. 사방으로 맹렬하게 뿜어져 나오던 온수 줄기가 일순간 멎었다.샤워기 헤드가 바닥에 툭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욕실 안에는 두 사람의 거칠고 뜨거운 숨소리만이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울려 퍼졌다. 타일 벽에 등을 기댄 은수는 젖은 셔츠 사이로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태건 역시 흠뻑 젖은 작업복 상의가 단단한 흉근에 달라붙어 짙은 남성미를 뿜어내고 있었다.남자의 굵은 목덜미와 날렵한 턱선을 타고 맑은 물방울이 은수의 쇄골 위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서로의 살갗이 맞닿은 자리마다 데일 듯한 열기가 번져 나갔다. 태건은 은수를 안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며 상체를 일으켰다.그는 수납장에서 마른 흰색 타월 한 장을 꺼내 들더니,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은수에게로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스스륵.태건의 커다란 손이 타월을 쥐고 은수의 젖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물기를 털어내는 그의 손길은 거칠고 단단해 보이던 외면과 달리 한없이 부드럽고 섬세했다. 남편 진우가 3년간 은수에게 퍼부었던 폭언과 냉대 속에서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온전하고 정갈한 보살핌이었다.태건은 은수의 이마와 젖은 뺨, 그리고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타월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은수의 오른손 끝이 타월 밖으로 드러난 순간, 태건의 움직임이 일순간 굳어버렸다.배관 밸브를 억지로 비틀다 쇳조각에 긁힌 은수의 검지손가락 마디. 연한 살갗이 발갛게 벗겨져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태건의 짙은 눈매가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태건은 공구함에서 작은 소독 티슈와 밴드를 꺼냈다. 은수의 다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받쳐 든 뒤 핏방울을 닦아내고 상처 위에 밴드를 붙였다. 마지막으로 상처가 나지 않은 손가락 마디에 짧게 입을 맞췄다."읏… 팀장님."은수가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리자 태건은 억지로 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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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화. 핑계 없는 밤의 열기

햇살이 비스듬히 기울어 거실 바닥을 붉게 물들이던 오후 4시. 은수는 싱크대 앞에 가만히 서서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스패너를 쥐지도 않았고, 안방 방문 손잡이의 래치를 억지로 쑤셔 망가뜨리지도 않았다. 욕실의 온수 유량 조절 밸브 역시 조금의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집안의 모든 것은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 어디에도 인위적인 하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장 난 곳 없어도 됩니다. 핑계 대지 않아도 돼요.''그냥… 보고 싶다고 전화 한 통만 하십시오. 어디에 있든 당신한테 올 테니까.'귓가를 집요하게 맴도는 태건의 낮고 묵직한 음성. 은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거짓된 고장과 배덕한 핑계 뒤에 숨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맨얼굴과 날것의 욕망으로 그 남자를 불러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쿵, 쿵, 쿵. 심장이 흉곽을 부술 듯 세차게 방망이질했다. 은수는 떨리는 숨을 들이쉬며 태건의 번호를 눌렀다.신호음은 단 한 번도 온전히 울리지 않았다.- 네, 차태건입니다.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거칠고 단단한 숨소리. 현장의 기계 소음이 섞여 있었지만, 은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던 듯한 고요한 집중력이 묵직하게 전해졌다. 은수는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간신히 메마른 입술을 떼어 숨결을 뱉어냈다."…태건 씨."수화기 너머의 소음이 일순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은수 씨?낮게 잠긴 그의 음성이 은수의 귓바퀴를 뜨겁게 흔들었다."어디 고장 난 곳은… 없어요. 물도 안 새고, 문도 잘 열려요."- ………."그런데… 그냥 보고 싶어서요."마침내 뱉어낸 고백에 은수의 눈시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전신이 떨려왔지만, 동시에 영혼을 옥죄던 족쇄가 풀린 듯한 아찔한 해방감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묵직한 가죽 점퍼를 낚아채는 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바로 갑니다. 문 잠그고 기다리십시오.통화가 끊어지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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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화. 서늘한 증거와 잔혹한 각성

태건이 떠나고 난 뒤, 시계 침은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적만이 무겁게 내려앉은 어두운 거실.철컥, 쾅-!현관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술에 잔뜩 취한 진우가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독한 위스키 냄새와 담배 찌든 내가 맑았던 거실 공기를 단숨에 역하게 오염시켰다. 진우는 넥타이를 홱 풀어헤쳐 바닥에 내팽개치며, 어둠 속에 서 있는 은수를 향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쏘아붙였다."야, 김은수. 물 한 잔 떠와. 목구멍 타들어가니까 빨리빨리 움직여."은수는 동요 없는 서늘한 눈으로 조용히 걸어 나와 얼음물 한 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진우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소파에 털썩 쓰러지듯 누워 그대로 드르렁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다. 그의 무방비하고 추악한 모습을 내려다보는 은수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은수는 소파 아래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진 진우의 명품 정장 재킷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바스락. 재킷 안쪽 깃에서 코를 찌르는 낯선 향기가 훅 끼쳐왔다. 결코 은수의 것이 아닌, 달콤하고 화려한 백화점 명품 니치 향수 냄새.그리고 흰 와이셔츠 깃 안쪽에는 선명하게 뭉개진 진분홍빛 립스틱 자국이 추잡하게 번져 있었다. 은수의 입가에 서늘한 실소가 번졌다. 손목을 비틀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완벽과 결벽을 강요하며 은수를 쥐잡듯 잡던 남편의 비열한 민낯이었다.은수는 숨을 죽인 채 진우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묵직한 가죽 지갑을 꺼냈다.드르륵. 지갑의 지퍼 포켓과 카드 수납칸을 낱낱이 열어젖히자, 빳빳하게 접힌 영수증 서너 장과 명함 한 장이 손끝에 걸려 나왔다. 은수는 스마트폰의 조도를 낮추어 영수증에 찍힌 활자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확인했다.[그랜드 하얏트 서울 스위트룸 / 1,480,000원][청담동 하이엔드 오마카세 2인 코스 / 680,000원][갤러리아 백화점 다이아몬드 목걸이 / 5,200,000원]지난주, 본사 지방 공장 출장이라며 1박 2일 외박했던 날짜와 정확히 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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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화. 덜컹거리는 창호와 불길한 초침

이른 오후의 초가을 햇살이 거실 통유리창을 지나 베란다 바닥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은수는 알루미늄 창호 레일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창틀을 밀 때마다 덜컹거리는 금속음이 정적을 갈랐다.어젯밤 확보한 립스틱 자국과 최수연의 명함, 호텔 영수증 사진은 이미 세 곳에 백업해 두었다. 진우의 외도와 돈의 흐름을 확인한 뒤 죄책감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증거를 지키고 안전하게 집을 나갈 준비였다. 진우는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현관문을 쾅 닫으며 거만하게 쏘아붙였다.'오늘 해외 주요 바이어들과의 대형 계약 만찬이 있어서 자정이나 돼야 들어올 테니까, 쓸데없이 전화해서 귀찮게 굴지 마.'남편이 늦은 밤까지 귀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정보. 은수는 베란다 창호의 어긋난 유격을 확인한 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태건의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신호음이 채 두 번을 넘기기 전, 수화기 너머에서 태건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은수의 귓바퀴를 묵직하게 파고들었다.- 네, 은수 씨."태건 씨… 거실 베란다 창문 레일이 많이 덜컹거려요. 롤러 수평이 틀어졌는지 창틀이 심하게 흔들리고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데…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바로 출발합니다. 15분이면 도착합니다.전화가 끊어지고, 은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번 호출에는 거짓이 없었다. 창호는 실제로 덜컹거렸고, 은수는 처음으로 숨길 것 없이 태건의 도움을 구했다. 시원한 초가을 바람이 불어왔지만, 은수의 심장은 긴장감으로 뜨겁게 고동쳤다.철컥, 띠리링-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 도어록이 풀리는 익숙하고 든든한 기계음이 울렸다. 복도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군화 소리가 거실을 지나 베란다 앞까지 곧장 들이닥쳤다. 네이비색 작업복 차림에 묵직한 가죽 공구함을 든 거구의 태건이었다.팔꿈치 위로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단단하게 솟아오른 전완근과 푸른 핏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남자의 몸에서 훅 끼쳐오는 깨끗한 비누 향과 희미한 기계 기름 냄새가 맑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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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화.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숨결

"김은수! 차 키를 서재 책상에 두고 나가서 다시 들어왔잖아. 사람 들어오는 소리 듣고도 어디 처박혀 있어!"현관 중문이 부서질 듯 쾅 열리며, 날카로운 구두 굽 소리가 마루를 짓이기듯 거실 한복판으로 거칠게 들이닥쳤다.은수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세차게 요동쳤다. 지금 진우가 태건과 단둘이 있는 모습을 본다면, 수리라는 설명을 듣기도 전에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이 컸다. 밤새 모은 증거와 이혼 준비도 그 난동 속에서 훼손될 수 있었다.그 절체절명의 찰나, 태건의 크고 단단한 손이 은수의 떨리는 손목을 낚아챘다. 남자의 움직임에는 한순간의 망설임이나 흔들림도 없었다. 태건은 바닥에 놓여 있던 무거운 공구 가방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며, 베란다 구석에 딸린 비좁은 다용도실 문을 소리 없이 밀어 열었다.스스륵- 탁. 태건은 은수를 다용도실 안쪽 구석으로 밀어 넣은 뒤, 자신의 거대한 몸을 틈새로 밀어 넣고 문을 안쪽으로 닫았다. 세탁기와 건조기, 높게 쌓아 올린 철 지난 수납 상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어둡고 협소한 밀실.성인 한 명이 간신히 서 있을 만한 공간에 두 사람의 몸이 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포개어졌다. 은수의 가녀린 등줄기가 차가운 타일 벽에 닿았고, 그 위로 태건의 두터운 흉근과 딱 벌어진 어깨가 빈틈없이 쏟아져 내렸다."……읍."은수가 공포와 극도의 긴장감으로 비명을 삼키려 하자, 태건의 거친 손바닥이 은수의 입술을 지그시 감싸 막았다. 남자의 화끈거리는 손바닥 체온과 거친 숨결이 은수의 코끝을 가득 메웠다. 태건은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은수의 귓바퀴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고, 숨소리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쉿… 괜찮습니다. 내가 다 막아낼 테니 숨만 가만히 쉬고 계십시오."어둠 속에서 푸르게 번뜩이는 태건의 깊고 서늘한 눈동자. 그 흔들림 없는 시선에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단단한 셔츠 깃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쿵, 쿵, 쾅-!거실 통유리창 너머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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