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완벽한 아내로 살아가며 남편의 폭언과 통제에 지쳐가던 은수. 어느 날 집의 하자를 고치러 온 기사 태건은 그녀가 숨기던 상처와 위축된 눈빛을 단번에 알아챈다. 처음엔 우연이었던 만남은 은수가 일부러 고장을 만들며 이어지고, 두 사람은 금지된 감정에 빠져든다. 남편의 외도까지 드러나자 은수는 더 이상 망가진 결혼을 붙들지 않기로 결심한다....
View More유리창을 거칠게 때리는 장대비 소리 사이로, 싱크대 하부장에서 퀴퀴한 물비린내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은수는 젖은 행주를 쥔 손끝에 하얗게 힘을 주었다. 손잡이를 비틀어 짤 때마다 왼쪽 손목 안쪽에서 찌릿하고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
긴 셔츠 소매를 조심스럽게 걷어 올리자, 연하고 흰 살갗 위에 짙은 보랏빛으로 멍울진 손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젯밤의 일이었다.
"내가 집안에 먼지 한 톨, 물기 한 방울 남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남편 진우는 은수의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 쥐어틀며 뺨 바로 옆에 대고 낮게 짓씹듯 쏘아붙였다. 숨통을 조이는 결벽과 가스라이팅. 그의 차가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릴수록 손목을 파고드는 악력은 잔인해졌고, 은수의 자존감은 매일 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조금만 더 완벽하게 하면 돼.'
은수는 메마른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떨리는 손으로 셔츠 소매를 바짝 끌어내려 상처를 덮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짐과 달리, 싱크대 수전 아래 어두운 틈새에서는 여전히 뚝, 뚝 규칙적인 낙수음이 이어졌다. 마치 이 겉만 번지르르한 집의 균열을 조롱하듯 알리는 서늘한 초시계 같았다.
결혼 3년 차.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강남의 번듯한 아파트와 대기업 임원인 남편이었지만, 그 안에서 은수가 누린 것은 숨 막히는 통제와 얼음장 같은 냉대뿐이었다. 진우는 집안의 사소한 삐걱거림조차 은수의 나태함과 무능 탓으로 돌렸고, 은수는 햇빛을 받지 못해 말라 죽어가는 화초처럼 매일 서서히 시들어갔다.
철컥.
현관 도어록이 풀리는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서늘한 복도 공기가 거실 안쪽으로 훅 밀려들었다. 은수는 반사적으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굳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왔어."
진우는 현관 중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팍 찌푸리며 손으로 코를 틀어쥐었다. 그의 서늘한 눈매가 은수를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
"하, 집안 꼴 하고는. 이 썩은 내는 뭐야? 너 하루 종일 집에서 대체 뭐 하고 자빠졌어?"
"배수관 쪽에서 물이 조금 새는 것 같아서… 계속 닦아내고 있었어요. 냄새 안 나게 하려고 락스도 뿌렸는데…"
은수가 조심스럽게 대답하며 다가가 외투를 받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진우는 은수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찰싹, 하는 마찰음과 함께 멍든 손목에 찌릿한 충격이 전해졌다.
"사람을 불러서 고치든가 했어야지, 미련하게 걸레질이나 하고 앉아 있어? 냄새 역겨워서 숨도 못 쉬겠네. 밖에서 온갖 스트레스 다 받고 들어왔는데 집구석 꼬라지가 이 모양이야?"
진우는 거실 소파에 무거운 서류 가방을 거칠게 내던지더니,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은수를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씻고 나올 테니까 냄새부터 당장 어떻게 해 놔. 저녁 먹을 생각도 싹 사라지니까."
쾅!
안방 욕실 문이 부서질 듯 닫히고, 거실에는 다시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았다. 은수는 공중에 쳐내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손등 아래로 손목의 멍이 맥박에 맞춰 욱신거렸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하수구 냄새처럼, 진우와의 결혼 생활은 이미 보이지 않는 깊은 속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은수는 그 썩어가는 냄새를 혼자 틀어막으며 질식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은수는 힘없이 싱크대 앞에 다시 주저앉아 하부장 문을 활짝 열었다. 어둠침침한 틈새에서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은수의 맨발등 위로 툭 떨어졌다. 소름이 오소소 돋을 만큼 차갑고 축축했다.
'더 이상은… 나 혼자 닦아낼 수 없어.'
무언가 부서져 버린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싱크대 상부장 서랍 깊은 곳을 뒤졌다. 지난달 아파트 우편함 옆 게시판에 꽂혀 있던 하자보수 업체의 명함 한 장이 손끝에 걸렸다.
[한결종합보수 / 하자보수팀장 차태건]
매끄러운 검은색 명함에 정갈하고 힘 있는 필체로 박힌 하얀 글씨. 은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홀린 듯 휴대폰 화면에 적힌 번호를 꾹꾹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차분한 저음이 수화기를 타고 귓가에 곧장 닿았다.
"네, 한결종합보수 차태건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숨소리가 섞인 그 목소리에 은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숨결마저 울리는 깊은 음성이었다.
"저… 여기가 센트럴파크 104동 702호인데요. 싱크대 하부장에서 물이 자꾸 새서요. 냄새도 너무 심하고 역류하는 것 같아요."
은수의 떨리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모님, 내일 오전 10시쯤 방문 점검 가능한데 댁에 계십니까?"
"네. 있어요. 제발… 그때 꼭 좀 와주세요."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찾아뵙겠습니다."
달콤한 장미 꽃향기와 그윽한 와인의 풍미가 은은한 거실 조명 아래 아늑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은수가 품에 안고 있던 화사한 꽃다발을 테이블 중앙 유리 화병에 정성스레 꽂아 넣자, 태건이 등 뒤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남자의 넓고 단단한 두 팔이 은수의 잘록한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으며 자신의 품으로 다정히 끌어당겼다.고급 수트 원단 너머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태건의 두터운 흉근과 힘찬 심장 박동이 은수의 등줄기를 타고 포근한 온기로 스며들었다. 태건은 은수의 가녀린 목덜미에 턱을 가만히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집이 정말 좋습니다. 은수 씨를 닮아서 포근하고, 단단하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태건 씨가 조명 하나까지 수평을 맞춰주고, 현관 빗장도 튼튼하게 손봐준 덕분이에요. 제 인생에서 이렇게 온전하고 편안하게 숨 쉬어본 적이 없어요."은수는 몸을 돌려 남자의 단단한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짙은 눈썹과 날렵한 턱선, 그리고 은수만을 오롯이 담고 있는 남자의 짙은 눈동자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격정적인 열정과 무한한 신뢰가 일렁이고 있었다. 태건의 거칠고 다부진 손바닥이 은수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처음 그 집에 들어섰던 날을 지금도 매일 밤 생생하게 기억합니다."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은수의 귓가를 촉촉하게 적셨다."물비린내 나는 주방에서 시퍼렇게 멍든 손목을 황급히 감추던 당신의 눈빛이… 도저히 잊히지 않았습니다.""태건 씨….""어떻게든 위태롭게 버티던 당신이 그 집에서 나올 때 곁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스패너로 일부러 나사를 풀어 나를 다시 불렀다는 걸 알아챘을 때, 내 심장이 얼마나 미친 듯이 요동쳤는지 모릅니다."태건의 묵직한 고백에 은수의 눈가에서 맑고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지나간 3년의 지옥 같았던 고통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다. 자신의 처절했던 비명을 놓치지 않고 지옥의 문을 부수며 달려와 준 단 한 사람을 향한 벅찬 사랑과 감사의 눈물이었다.태건은 은수의
붉은 노을이 서울숲 너머로 길게 드리워지며 한강 물결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은수는 발코니 통유리창 앞에 가만히 서서 차분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취향과 손길로 가꾼 거실에는 은은한 화이트 재스민 디퓨저 향기가 포근하게 감돌고 있었다.진우의 폭언과 숨 막히는 가스라이팅으로 얼룩졌던 3년의 지옥 같았던 시간은 이제 아득한 전생의 악몽처럼 아물어가고 있었다. 스스로 법정에 당당하게 서서 진우의 추악한 불륜과 회사 비리를 낱낱이 파헤치고, 정당하게 쟁취해 낸 위자료와 재산 분할금으로 마련한 은수만의 온전한 성채였다.집안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더 이상 억지로 나사를 풀어헤친 싱크대도, 래치를 고장 낸 방문도 없었다.물비린내 대신 상쾌한 가을바람이 창문을 스치고, 손끝이 닿는 모든 곳이 완벽하고 견고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은수는 거실 원목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저녁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손수 정성껏 구워낸 스테이크와 신선한 샐러드 접시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스한 온기, 그리고 투명하게 빛나는 크리스탈 와인 잔 두 개.태건과 약속한 오후 7시까지 5분 남아 있었다.'이제 이 집엔 하자가 하나도 없는데, 무슨 핑계로 찾아오실 건가요?'이사하던 날, 장난기가 섞인 은수의 물음에 남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짙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속삭였었다.'고장 난 곳이 없으면, 은수 씨 보러 온전한 남자로 매일 퇴근하면 됩니다.'남자의 그 뜨겁고 단단한 음성이 지난 며칠 동안 은수의 귓가에 맴돌며 심장을 쉼 없이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쿵, 쿵-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며 은수가 입고 있던 아이보리색 니트 원피스의 옷매무새를 가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딩동-! 딩동-! 고요하고 적막하던 거실에 맑고 청아한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과거 도망칠 곳 없이 공포에 질리게 만들던 진우의 난폭한 도어록 소리가 아니었다. 위태로운 일탈을 꿈꾸며 손끝을 덜덜 떨던 초조하고 불안한 긴장감의 소리도
통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정오의 햇살이 화사한 밝은 원목 바닥을 황금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서울숲 인근, 은수가 자신의 이름 석 자로 당당하게 계약한 남향 신축 아파트 12층.탁 트인 통유리창 너머로 푸르른 나무들의 물결과 잔잔하게 흐르는 도심의 전경이 한눈에 파노라마처럼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진우의 눈치를 보며 매일 숨죽이던 어둡고 음침했던 그 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눈부신 온기와 맑은 공기였다."하…… 정말 좋다."은수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얇은 화이트 린넨 커튼을 부드럽게 젖히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오직 자신의 의지와 스스로 쟁취해 낸 위자료와 정당한 몫으로 마련한 온전한 자신만의 첫 보금자리였다.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바윗덩이가 말끔히 녹아내리며, 전신으로 차오르는 벅찬 자유와 해방감에 입가에 절로 맑고 투명한 미소가 번졌다."은수 씨. 거실 중앙 조명 수평 완벽하게 맞췄습니다."사다리 위에서 전동 드라이버를 든 태건이 은수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삿짐 정리를 모두 마친 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남자의 팔뚝 위로 단단한 힘줄과 구릿빛 근육이 멋스럽게 도드라져 있었다. 남자는 은수가 직접 고른 펜던트 조명을 천장 브래킷에 체결한 뒤, 사다리를 한 칸씩 밟아 바닥으로 내려왔다.경쾌한 착지음과 함께 다가온 태건의 몸에서 건강한 땀 냄새와 은은한 시트러스 비누 향이 기분 좋게 번져왔다. 태건이 벽면의 터치 스위치를 딸깍 올리자, 따뜻한 주백색 조명이 거실을 아늑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빛이 은수 씨를 닮아서 참 따뜻합니다."태건의 나직하고 묵직한 찬사에 은수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붉게 물들었다."태건 씨가 아침부터 무거운 가구 배치에 조명 설치까지 다 도와준 덕분이에요. 혼자였으면 엄두도 못 냈을 텐데.""내가 하자보수 전문 기사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고객님의 새 집인데, 볼트 하나도 어긋나지 않게 완벽하게 시공해 드려야죠."태건은
커다란 갈색 이삿짐 상자들이 거실 한가운데에 탑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서랍마다 켜켜이 묵어 있던 3년간의 지옥 같았던 흔적들이 하나둘씩 분리수거 비닐과 종이 상자 속으로 미련 없이 던져졌다. 남편 진우가 매일같이 옷매무새와 주름 하나를 꼬투리 잡으며 폭언을 퍼붓던 안방 붙박이장도, 생활비 10만 원을 초과했다며 손목을 비틀던 대리석 식탁 위도 이제는 하얗게 먼지만이 내려앉아 있었다.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되어 있었지만, 햇빛 한 줌 제대로 들지 않아 마치 시체처럼 차갑고 습하게 가라앉아 있던 집. 은수는 텅 빈 거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더 이상 코끝을 찌르며 목을 옥죄던 서늘한 곰팡이 냄새도, 진우의 역겨운 술 냄새와 상간녀의 독한 인공 향수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자신을 옥죄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마침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린 기분이었다."은수 씨. 무거운 가구랑 큰 짐들은 제가 다 트럭 적재함에 실어뒀습니다."등 뒤에서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정한 회색 맨투맨 티셔츠에 짙은 카고 바지 차림의 태건이,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소매로 훔치며 거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남자의 탄탄한 가슴과 넓은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강하고 뜨거운 열기, 그리고 언제나 은수의 얼어붙은 마음을 차분하게 어루만져 주는 쌉싸름하고 짙은 비누 향이 휑한 거실을 따스하게 채웠다.태건은 은수가 쥐고 있던 무거운 테이프 커터기를 자연스럽게 건네받으며, 그녀의 가녀린 손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이제 주방 쪽에 작은 상자 하나만 정리하면 끝납니다.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챙기십시오.""고마워요, 태건 씨. 오늘 혼자였으면 이 무거운 짐들을 어쩌지 못하고 하루 종일 쩔쩔맸을 텐데…….""내가 은수 씨 곁에 있는데 왜 혼자 고생을 합니까. 당신 곁을 지키고 돕는 건 당연히 내 몫입니다."남자의 거친 엄지손가락이 은수의 부드러운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투박하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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