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꽃이 지면 새로운 계절이 온다: Chapter 11 - Chapter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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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한씨 본가.서유리는 아주 긴 꿈을 꾸었다.열이 났을 때 주영훈이 계속 곁을 지켜 주던 때의 꿈이었다.밤새 잠도 자지 않고 몇 번이고 체온을 확인해 주고, 몸을 닦아주었다.“자기야, 내가 있으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야.”아침에 눈을 떴을 때, 주영훈이 주방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전복죽을 끓이고 있던 모습도 떠올랐다.“자기야, 일어났어? 내가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전복죽 끓였어. 와서 냄새 맡아봐. 맛있게 됐어.”“사모님, 대표님께서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직접 끓이셨어요. 저희가 도와드리겠다고 해도 절대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결혼기념일 날, 주영훈이 H시의 불꽃놀이를 전부 빌려서 바닷가에서 로맨틱한 불꽃놀이를 보여 주던 날이었다.그날 주영훈은 이렇게 말했다.“다 당신이 옆에서 응원해 줬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어. 사랑해. 평생 당신만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평생 불꽃놀이를 보여 줄게.”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꽃놀이는 막을 내렸다.서유리는 눈앞에서 주영훈이 자신의 비서와 바람을 피우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심지어 자신이 지워 버린 4개월 된 아이가 눈앞에서 울고 있는 꿈까지 꾸었다.“안 돼!”서유리는 악몽에서 화들짝 깨어났다.눈을 뜨자 눈앞에 낯익은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어딘가 익숙했다.기절하기 직전에 봤던 얼굴 같았다.서유리는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호텔이 아니었다.방 안의 구조는 여전히 낯설었지만, 분위기는 아늑했다.“누구세요? 여긴 어디예요?”“벌써 나를 잊은 거야?”한지석이 살짝 웃었다.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태블릿을 하나 꺼내 들었다.화면에 나타난 건 오빠 서지호의 얼굴이었다.오빠의 모습을 보자, 서유리는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쏟았다.“오빠.”[유리야, 괜찮아? 네가 미리 문자 보내 준 덕분에 내가 지석을 보내서 널 구할 수 있었어.] [주영훈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전부 알아봤어. 걱정하지 마. 오빠가 반드시 복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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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서유리는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행방이 묘연했다.주영훈이 사람을 시켜 찾아다녔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텅 빈 저택에는 주영훈 혼자뿐이었다.주영훈은 벽에 걸린 웨딩 사진을 바라봤다.그러자 서유리와 함께했던 지난날들이 하나둘 떠올랐다.처음의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청년이었다.사업을 해보겠다는 꿈 하나만 품고 부모님에게 받은 2,000만 원을 들고 H시로 내려왔다.실패하고, 다시 도전하고.그렇게 수없이 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주영훈은 마침내 성공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신이 성공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아마 서유리가 자신의 인생에 나타난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처음 서유리를 만난 건 한 비즈니스 연회에서였다.하얀 원피스를 입은 서유리는 갓 대학을 졸업한 듯 보였다.깨끗한 모습이 마치 한 송이 연꽃 같았다.맑고 청초한 분위기가 눈길을 끌었다.하지만 주영훈은 서유리를 힐끗 바라본 뒤 곧바로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그러다 한 남자가 나타나서 자신의 회사에 투자하겠다고 했다.주영훈은 기쁜 나머지 정신없이 들떠 있었다.그러면서 무심코 아까 그 여자의 모습을 찾았다.하지만 서유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그 후 회사에서 비서를 채용하게 됐고, 서유리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주영훈은 그때 확신했다.이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될 거라고.서유리가 회사에 들어온 뒤부터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협력사와 이야기를 나누면 대부분 흔쾌히 받아들였다.입찰에 나서면 거의 매번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낙찰을 받았다.회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장까지 했다.사람들은 모두 서유리 덕분이라고 했다.주영훈 역시 서유리에게 최선을 다해서 잘해주었다.소지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그날 서유리는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쉬고 있었다.주영훈은 어쩔 수 없이 혼자 비즈니스 연회에 참석했다.그곳에 도착했을 때, 소지윤이 마침 한 남자에게 곤란한 일을 당하고 있었다.“선생님, 이러지 마세요. 제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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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주영훈이 회사에 도착했을 때, 회사 앞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몰려든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리며 주영훈의 얼굴을 비췄다.“주 대표님, 회사가 곧 부도가 날 거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바람을 피우고 아내를 버렸다는 얘기가 있던데, 이게 업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최대 투자자가 투자금을 회수했다는데, 이제 회사도 버티기 힘든 게 아닙니까?”...주영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회사 계좌가 정지됐다는 통보를 받았다.재무 이사가 서류 뭉치를 들고 급하게 들어왔다.“대표님...”“어떻게 된 겁니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지난 5년 동안 저희 회사에 계속 투자해 주던 투자자가 오늘 아침에 갑자기 투자금을 회수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가 다른 투자금을 마련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회사 계좌에 남은 돈으로는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주영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바로 핸드폰을 꺼내서 투자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금방 연결됐다.주영훈은 거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서 대표님, 주영훈입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갑자기 투자금을 회수하시는 겁니까?”[주영훈 씨, 정말 눈치가 없네.]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5년 전에 내 동생이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모르겠군.]주영훈은 순간 굳어졌다.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동생이라니요? 대표님 동생이 누굽니까?”[내 성이 뭐지?]서지호가 비웃듯 웃었다.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5년 전에 내가 왜 갑자기 당신을 찾아가 투자하겠다고 했는지 생각해 봐.] [유리가 당신이 불쌍하다며 나한테 부탁하지 않았다면, 내가 당신처럼 작은 회사에 투자했을 것 같아?]“유리?”주영훈은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설마 유리가 대표님의 동생이에요?”[믿기 힘든가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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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묘지.서유리는 작은 묘비를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한지석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다가가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그저 홀로 서 있는 서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사실 한지석은 서유리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백하려던 순간, 서지호가 갑자기 말했다.서유리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고.그 후 한지석은 서유리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묵묵히 주영훈의 곁에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고생하면서도 주영훈을 떠나지 않았고, 원래라면 성공할 가능성조차 없던 회사를 지금의 자리까지 키워냈다.그리고 결국 두 사람이 결혼하는 모습까지 지켜봤다.한지석은 자신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주영훈이 이렇게까지 형편없는 인간일 줄은 몰랐다.서유리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까지 남겼다.서유리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든 상관이 없었다.이제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이상, 이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반드시 지켜 주고 싶었다.“아가야.”서유리는 몸을 굽히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눈앞의 묘비를 살며시 쓸어내렸다.묘비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아직 아이에게 이름조차 지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아이를 가진 지 6개월 만에 지워야 했다.차마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서유리는 작은 하얀 국화 한 다발을 묘비 앞에 내려놓고 목이 메어 말했다.“엄마가 미안해. 좋은 곳으로 가서 다시 태어나서 꼭 좋은 부모님을 만나야 해.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을 만나야 해.” “엄마는 네가 똑똑한 아이라는 걸 알아. 그러니까 분명 잘 선택할 수 있지?”서유리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너무 서러웠다.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그런 서유리를 바라보자, 한지석은 가슴이 미어졌다.결국 앞으로 다가가서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아이도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맞아요. 아이도 내가 우는 건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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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서유리에게 맞은 곳이 아팠는지 주영훈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놓았다.한지석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서유리를 자신의 뒤로 감쌌다.“유리가 지금 감정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니까, 당신은 여기서 당장 나가는 게 좋겠어요.”“당신은 누구야? 당신이 뭔데 나보고 나가라는 거야?”주영훈은 한지석 뒤에 숨어 있는 서유리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나와 내 아내의 일에 남이 끼어들 자격은 없어.”서유리가 주영훈을 노려보며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우린 이미 이혼했어. 주영훈,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이혼이 확정됐어? 확정되기 전까지는 우리 이혼한 거 아니야.”주영훈이 서유리에게 손을 내밀었다.“유리야, 내 곁으로 돌아와. 지난 일은 내가 잘못했어. 아이 일도 전부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내 곁으로 돌아와. 당신이 뭘 원하든 다 해줄게. 응?”“꿈도 꾸지 마.”서유리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이혼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해도 우린 이미 이혼한 거나 마찬가지야. 주영훈, 난 죽을 때까지 당신한테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야!”서유리가 비웃듯 웃었다.“당신 소지윤 좋아하잖아? 그런데 나한테 왜 온 거야? 소지윤한테 가. 왜 나를 찾아와?”“아, 맞다.”서유리가 비웃음을 흘렸다.“소지윤이 남자 다섯 명이랑 즐기던 건 봤어?”주영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유리야...”“주영훈, 당신이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 내가 전화로 당신한테 위험하다고, 제발 살려 달라고 했잖아.” “그런데 당신은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어. 소지윤이 마음대로 나한테 무슨 짓을 하도록 내버려 뒀잖아!”서유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지석 오빠가 나타나서 날 구해 주지 않았다면, 난 지금 죽었을 거야.”서유리는 고개를 들고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애써 참았다.“정말 실망이야.”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이제 당신만 보면 역겨워. 그런데 나보고 다시 돌아오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유리야, 난 몰랐어...”주영훈은 다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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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서유리가 떠난 뒤에도 주영훈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옆에 있던 경호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주영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몸을 돌려 작은 묘비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묘비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서유리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나중에 병원에 가서 물어본 뒤에야 알았다.서유리가 지운 아이도 아들이었다.작은 묘비를 바라보던 주영훈의 눈가가 점점 붉어졌다.“아가야, 아빠가 너랑 엄마한테 너무 미안해. 걱정하지 마. 아빠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엄마를 되찾을게.” “그리고 엄마에게 다시 아이가 생기면, 그때 다시 엄마한테 와 줄래? 이번에는 아빠가 절대 너를 다치게 하지 않을게.”“대표님, 회사에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또 문제가 터졌다고 합니다. 빨리 돌아가서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경호원이 허리를 숙이며 재촉했다.주영훈이 힐끗 쳐다보자 경호원은 입을 다물었다.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참 뒤에야 주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서유리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유리야, 네가 없는데 나한테 회사가 있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차 안.서유리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밖의 풍경을 바라봤다.기분은 바닥까지 가라앉아 있었다.그 모습을 본 한지석은 서유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기로 했다.놀이공원이었다.차가 놀이공원 앞에 멈추자, 서유리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집에 가는 거 아니었어요? 왜 여기로 왔어요?”“기분 안 좋아 보여서. 들어가서 좀 놀다 갈래?”서유리는 희미하게 웃었다.사실 놀 기분은 아니었지만, 한지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한지석이 나타나자 직원이 곧바로 달려왔다.“뭐부터 타실 건가요?”“범퍼카 어때?”서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범퍼카는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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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호텔에서 지내는 동안 소지윤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마침내 식사를 가져온 직원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소지윤은 깨진 유리컵 조각으로 직원의 손을 베고, 직원이 당황한 틈을 타서 호텔 밖으로 도망쳤다.하지만 밖으로 나온 뒤에는 갈 곳이 없었다.주영훈에게 어떻게 복수할지 생각하던 중, 텔레비전에서 주영훈의 회사가 위기에 빠졌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그리고 서유리가 해외 재벌가인 서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졌다.소지윤은 텔레비전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서유리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채 놀이공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소지윤의 마음속에 있던 증오가 극에 달했다.“서유리, 네년이 정말 재벌가 아가씨였다고? 대체 왜 너만 잘사는 집안에서 태어난 거야!” “하늘은 왜 나한테만 이렇게 불공평해? 왜 넌 재벌가 아가씨로 태어났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소지윤은 이를 악물었다.“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반드시 복수할 거야!”소지윤은 힘없이 거리를 걷다가 골목 입구에서 몇 명의 건달과 마주쳤다.건달들은 소지윤의 외모를 보고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아가씨, 혼자야? 이렇게 외로운데 오빠들이 같이 놀아 줄까?”“꺼져.”소지윤은 이미 끔찍한 일을 겪은 탓에 남자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했다.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소지윤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지만, 건달들은 계속 다가왔다.“겁먹지 마. 우리 좋은 사람들이야. 그냥 같이 놀자는 거야.”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되자 소지윤은 벽에 등을 기댔다.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주변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아는 사람들을 피하려고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아온 것이 화근이었다.설마 이런 건달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어때, 이제 도망갈 곳도 없지? 얌전히 우리 말 듣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우리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그래?”소지윤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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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날이 밝자마자 소지윤은 침대에 누운 남자를 재촉했다.“당신들 보스를 만나게 해 줘. 약속했잖아. 잊지 않았지?”“걱정 마.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네. 우리 형님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그런데 형님은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 오늘 밤 내가 예쁘게 꾸며 줄게. 형님은 당신 같은 미인을 좋아하거든.”소지윤이 붉은 입술을 살짝 올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리고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좋아. 당신이 보스 마음에 들게만 해 준다면, 나도 당신을 잊지 않을게.”밤이 되자 네온사인이 박태산의 잘생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박태산은 담배를 피우며 아무 표정 없이 무대에서 춤을 추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주변에는 부하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모두 고개를 숙인 채 박태산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이 바닥에서 박태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박태산은 H시 밤의 세계를 장악한 사람이었다.그 손에 얼마나 많은 피가 묻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박태산은 미인을 좋아했지만, 그의 곁에서 사흘을 버티는 여자조차 거의 없었다.여자들이 박태산을 두려워해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지금 소지윤은 달랐다.술잔을 들고 하이힐을 신은 채 가느다란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먼저 박태산에게 다가갔다.“혹시 박태산 오빠세요? 제가 한 잔 드려도 될까요?”부드럽고 나른한 목소리였다.소지윤은 일부러 손가락으로 박태산의 손등을 스쳤다.노골적으로 호감을 드러내며 말했다.“오빠가 H시에서 제일 잘나가는 남자라고 오래전부터 들었어요. 이렇게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박태산이 고개를 들었다.소지윤을 한 번 훑어봤지만, 눈빛에는 온기라고는 전혀 없었다.“넌 누구지?”“형님, 어제 제가 알게 된 여자입니다.”건달 우두머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 박태산의 귀에 몇 마디 속삭였다.그러자 박태산이 턱짓했다.“맞은편에 앉아.”소지윤은 얌전히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나한테 뭘 원하는지 말해.”“역시 똑똑하시네요. 제가 아무 말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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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한씨 가문의 본가에서 지낸 지도 어느덧 한 달 가까이 됐다.그동안 서유리의 기분도 많이 나아졌다.한지석은 서유리를 웃게 해 주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매일 서유리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회사 일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한지석의 손에는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금빛 털이 복슬복슬한 고양이였다. 짧은 다리가 앙증맞고 무척이나 귀여웠다.고양이를 본 서유리는 깜짝 놀라 입을 가렸다.“이 고양이, 지석 오빠가 데려온 거예요?”“응. 네가 며칠 전부터 고양이 영상을 계속 찾아보고 있는 것 같아서 한 마리 골라 왔어. 마음에 들어?”한지석이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자, 고양이는 곧장 서유리에게 달려갔다.자신을 이렇게 따르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 서유리는 허리를 숙여서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너무 귀엽다. 털도 보들보들해. 그럼 이제 내 고양이인 거예요?”“응. 이름은 네가 지어.”“그럼 솜이 어때요? 털이 이렇게 많잖아요! 이것 봐요.”서유리가 팔을 내밀었다.고양이를 잠깐 안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옷에 털이 잔뜩 묻어 있었다.“좋아. 유리 네 고양이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해.”한지석이 웃으며 손을 뻗어 서유리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그런데 서유리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고 싫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흘렀다.그날 한지석이 자신에게 고백했던 일이 떠오르자, 서유리의 얼굴이 붉어졌다.서유리가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던 건 너무 빨리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정확히 말하면, 이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지쳐 있었다.한지석은 좋은 사람이었다.자신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아, 맞다. 생각해 보니까 오늘 구청에 가서 이혼 신고 마무리하는 날이지?”사실 한지석이 말하지 않아도 서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혼 신고를 마무리하러 가야겠다는 생각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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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소지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한 끝에야 박태산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박태산은 지금까지 소지윤이 만났던 남자들과는 전혀 달랐다.특이하고 가학적인 취향이 있었고, 쉽게 만족하지도 않았다.소지윤이 그동안 온갖 일을 겪으며 버텨 온 사람이 아니었다면, 하룻밤을 견디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눈을 떴을 때, 박태산은 이미 옷을 다 입고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태블릿을 보고 있던 박태산은 소지윤이 깨어난 걸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앞으로 나만 따라다녀.”그 말이 무슨 뜻인지 소지윤도 잘 알고 있었다.오늘부터 자신이 박태산의 여자가 된다는 뜻이었다.“알겠어요.”소지윤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저 먼저 씻고 올게요.”욕실로 들어간 소지윤은 옷을 벗었다.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다.참고 참았던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복수를 위해서 이렇게 자신의 몸까지 내어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예전에는 다른 남자들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단지 욕구를 풀기 위해 남자를 만났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복수를 위해서 남자의 뒤틀린 욕망까지 받아들여야 했다.그 생각만으로도 수치심이 밀려왔다.얼마나 오랫동안 씻었는지 모른다.한참이 지나서야 소지윤은 욕실에서 나왔다.“됐어. 자료도 확보했으니까 이제 나가자.”박태산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네. 옷만 갈아입고 갈게요.”소지윤이 옷을 갈아입으려던 순간 갑자기 심하게 기침이 터졌다.몇 번 기침하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피가 한꺼번에 쏟아졌다.소지윤은 깜짝 놀랐다.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며칠 전부터 몸 상태가 계속 이상했다.설마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건 아닐까?하지만 소지윤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차는 한참을 달려서 택배 물류센터 앞에 멈췄다.소지윤은 박태산이 왜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몰랐다.조급한 마음에 물었다.“오빠, 여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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