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Bab 11 - Bab 20

30 Bab

제11화

무엇을 물어봐야 할까? 강하리에 대해서?유소담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어떤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강하리를 대하는 이정빈의 태도는 누가 봐도 확연히 다른데...“출장 간 줄 알았는데 강하리 씨 데리러 간 거였네요.”그녀의 비꼬는 듯한 질문에 차갑고 건조하던 이정빈의 눈동자가 즉시 복숭앗빛으로 물들며 능글맞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질투 나?”유소담은 고개를 돌려 그를 진지하게 응시했다.“대표님 생각은 어떤데요?”평소 이 문제에 대해 그녀가 보여주던 냉담함과 체념을 익히 알던 그였기에 이토록 진지하게 묻는 모습이 낯설 따름이었다. 이정빈은 순간 당황하며 얼굴에 띤 유쾌함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네가 질투를 할 리가 없잖아! 질투한다 해도 딴 놈들 때문이겠지!”이정빈은 늘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알 수 없는 말들을 툭툭 던지곤 했다.유소담은 화제를 돌렸다.“그 프로젝트 인수 담당자가 바뀐다고 들었어요.”핸들을 두드리던 이정빈의 손가락이 대뜸 멈췄다.“누가 그래?”그녀는 망설임 없이 배정원을 방패막이로 삼았다.이정빈은 까만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소담아,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아? 고작 배정원 때문에 나한테 물어봤겠어?”이건후의 이름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이정빈과 이건후, 이 둘이 앙숙인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까.하지만 그녀는 이정빈의 예리함을 과소평가했다.곧장 남자의 날카로운 저격이 날아왔다.“내가 출장 간 사이 건후 형이 회사에 들러 대표이사실에서 너랑 한참 얘기를 나눴다며?”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깨달았다. 회사 곳곳이 이정빈의 눈과 귀인데 그가 모를 리 있을까?“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인지 알아?”이정빈의 칠흑 같은 눈동자 아래로 잔혹한 냉기가 서렸다.“둘이 내 사무실에 있다는 건 내가 딴 여자를 껴안고 네 침대에 누워있는 거나 똑같은 거야.”유소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두려움을 짓누르려 했다.“저를 대표님과 같은 부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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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이정빈의 반쪽 얼굴이 그늘에 잠겨 있었다. 억눌린 욕망이 그 안에서 꿈틀거렸고 엄지로 유소담의 뺨을 타고 내려와 귓불까지 느릿하게 훑었다. 입가에는 나른하고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여느 때보다 서늘하고 잔혹했다.유소담은 문득 이 남자가 두려워졌다.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무는 그녀.“하지 마요...”굳게 닫힌 차 안, 비좁은 공간은 두 사람이 엉키며 뿜어내는 달큰하고도 끈적한 열기로 가득 찼다.이정빈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채 차가운 손가락으로 유소담의 뺨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고는 촉촉이 젖은 눈꼬리에 머물렀다.그녀는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정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물을 핥아내듯 삼키더니 지독하리만큼 사악하게 웃었다.“너 지금 너무 예뻐. 건후 형이 이 꼴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유소담의 눈동자에 맺힌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에게 시달려 붉게 달아오른 눈꼬리는 마치 섬세한 공필화처럼 묘하게 매혹적이고 애처로웠다.마음속에 경고음이 울리자 그녀는 견디기 힘든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그런 거 없는데?”유소담은 전혀 믿지 않고 힘이 빠진 채 가냘프게 읊조렸다.“그건 단지 오해예요.”이정빈이 입꼬리를 올리며 한 손으로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움켜쥐었다. 눈 밑에 진한 음탕함이 흘러넘쳤다.“오해? 그럼 앞으론 두 번 다시 건후 형 생각하지 마!”유소담은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이건후를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한편 이정빈은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새하얀 어깨에 입을 맞췄다.“지금 당장을 말하는 게 아니야. 앞으로 평생 이건후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려. 알겠어?”차 안의 희박해진 공기 때문에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이정빈은 그녀의 허리를 징벌하듯 꽉 움켜쥐었다.“대답해. 알아들었냐고?”몸이 허공에 붕 떴다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에 유소담은 정신이 아득해졌다.“네, 알았어요.”이정빈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그녀를 꽉 끌어안고 나직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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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뻔한 상황이었다.이정빈은 여유로운 몸짓으로 자신의 탄탄한 가슴 근육과 복근을 훑어보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특유의 비딱하고 야성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왜? 질투 나?”고민기가 유소담의 체온을 쟀다.“38.9도네요. 고열입니다.”무리한 일을 치른 뒤, 찬 바람까지 쐬었으니 열이 나지 않을 리가 있을까?이정빈의 눈빛이 한층 가라앉았다.“당장 수액 놓아서 열부터 내려.”고민기는 답답하다는 듯 투덜거렸다.“대표님, 우리 제발 좀 타협합시다. 다음부터 이런 열감기 같은 일로 저 부르지 마세요. 주사 놓는 건 간호사들 일 아닙니까? 대표님 수하에 간호사들도 있잖아요. 전 의사라고요, 의사.”이정빈은 삐딱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넌 수액 놓을 줄 모르나 봐?”역시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제일 빨랐다.고민기는 할 말을 잃은 채 유소담의 손등에 주삿바늘을 꽂으려 했다. 예리한 바늘 끝이 혈관을 파고들려는 찰나, 이정빈이 딴지를 걸었다.“진짜 할 줄 아는 거 맞아? 못 하겠으면 딴 사람 찾을 테니 저리 비켜.”갑작스러운 참견에 놀란 고민기가 하마터면 주삿바늘을 생살에 찌를 뻔했다.“합니다! 하잖아요, 지금!”다시금 바늘을 들이댔더니 옆에서 이정빈이 거들었다.“살살 해.”고민기는 그를 흘겨보며 생각했다.‘진작 잘해주지 이제 와서 생색은. 소담 씨가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이정빈은 가정부 장경숙을 불러 유소담의 간호를 맡겼다.수액은 느릿하게 떨어졌다. 중간에 잠에서 깬 유소담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정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곁을 지키는 건 장경숙뿐이었다.입술이 바짝 말라 각질까지 일어난 유소담은 몽롱한 정신으로 물었다.“저 어떻게 된 거죠?”장경숙이 서둘러 물을 건넸다.“소담 씨가 열이 좀 나셔서 정빈 도련님이 저더러 돌보라고 하셨어요.”유소담은 물컵을 밀어내며 고집스럽게 되물었다.“그 사람은요?”장경숙이 난처한 듯 덧붙였다.“우 비서님께 듣기로는 도련님께서 크라운 클럽으로 가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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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이 상황에 떼쓰지 마.”이정빈의 목소리는 조급하지도, 화가 섞이지도 않은 담담한 어조였으나 유소담은 그 속에 담긴 단호한 거절을 바로 읽어냈다.이 상황이라니? 대체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걸까? 섹X 파트너와 가슴에 품은 사람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한쪽은 진심이고 다른 한쪽은 저스트 플레이라는 뜻이겠지.이정빈은 벗어 던졌던 외투를 다시 챙겨 입으며 문밖으로 나섰다.“푹 쉬어.”그의 뒷모습을 보며 유소담은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자기 분수에 그를 묶어둘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이정빈은 누군가에게 휘둘리거나 구속받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남자였다. 항상 제멋대로였고 거침없었으며 그 누구의 통제도 허락하지 않았다.길고 몽환적인 눈매에 짙은 안개가 서렸다. 바람에 일렁이는 실크 커튼이 벽 위로 찢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유소담은 그대로 몸을 눕히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지수정에게서 명문가 딸의 법도를 배우며 자라온 그녀였다. 이정빈을 깊이 사랑하고 강하리에게 가는 것을 막고 싶다고 하여 진흙탕 속에 뒹굴며 구걸할 만큼 비굴해질 수는 없었다.출근할 필요가 없으니 오전 열 시가 넘어가도록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지수정의 전화가 오고 나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소담아, 내일 네 생일인 거 알지?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엄마한테 말하렴. 뭐든 다 사줄게.”유소담은 눈을 떴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은 좀 내린 듯했다.‘그러네. 내일이 내 생일이었지. 엄마 아니었으면 까맣게 잊을 뻔했어.’“갖고 싶은 거 없어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마세요. 그 돈 남겨뒀다가 엄마한테 쓰세요.”이한철은 비록 이들 모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대우가 박한 편은 아니었다. 매달 2억 원에 가까운 용돈을 지급했으니까.돈은 전부 지수정의 손에 들어갔다. 유소담은 제 월급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으니 엄마에게 손을 벌릴 이유가 없었다.이 돈이면 지방에서 평생 먹고 살 수 있지만 지수정은 돈을 물 쓰듯 했다. 명품 백과 옷, 액세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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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창밖은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쳤다. 하늘은 붉게 물든 노을에서 먹빛으로 깊어져 갔고 컵에 담긴 차는 김이 모락모락 나던 온기를 잃고 냉랭함만이 감돌았다.유소담은 일곱 시부터 아홉 시까지 이정빈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 채 그 자리를 지켰다.하염없는 기다림에 얼굴엔 피로가 짙게 깔렸다. 중간중간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고 또 고쳤다. 이정빈이 준비했을 생일 선물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맞이하고 싶었으니까.서서히 인내심이 바닥났고 리누아의 직원들도 그녀가 바람을 맞은 게 아니냐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유소담은 이미 차갑게 굳어버린 두 팔을 쓰다듬으며 이정빈에게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것뿐이라고 스스로 달랬다.밤 10시, 약속 시각으로부터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참다못한 그녀가 이정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통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 대표님?”이정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그 대신 다정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소담 씨? 저 하리예요.”유소담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전화를 받은 상대가 강하리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강하리 씨, 대표님 좀 바꿔줄래요?”어느덧 다시 거리감을 두며 성까지 붙여서 호칭하는 그녀였다.“미안해요 소담 씨. 정빈이가 지금 막 샤워하러 들어갔거든요. 당장은 나오기 힘들 것 같은데... 혹시 아주 급한 일 아니면 정빈이 나오는 대로 다시 연락하라고 전해줄까요?”수화기 너머의 강하리는 더없이 배려심 넘치는 태도로 중재안을 제시했다.샤워? 이정빈이 샤워를 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두 사람은 지금...유소담의 심장에 뜨거운 기름을 들이부은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휴대폰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고 숨이 턱턱 막혔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낮게 읊조렸다.“네, 부탁드릴게요.”그 말을 끝으로 휴대폰이 손에서 툭 떨어졌지만 유소담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몇 분 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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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국제의료센터 응급실. 유소담은 병상에 누운 채 의료진이 온몸을 검사하도록 가만히 있었다.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새하얀 벽과 눈부신 조명 탓에 눈앞의 모든 것이 어딘가 흐릿하게 느껴졌다. 깊은 밤인데도 응급실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저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고 있었다.유소담은 혼자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연신 안쓰럽고 의아한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담당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유소담 씨, 운이 정말 좋으셨네요. 차가 거의 폐차될 정도로 큰 사고였는데도 가벼운 찰과상 정도밖에 없어요.”유소담은 다소 창백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선생님, 좀 어지럽고 속도 메스꺼운데 왜 그런 거죠?”담당 의사가 검사지를 넘겨보며 설명했다.“머리에 충격을 받으셨어요. 검사 결과 두개내출혈은 없고 가벼운 뇌진탕 정도예요. 어지럼증이나 메스꺼움, 멍한 느낌은 흔한 증상이에요. 이틀 정도 푹 쉬시고 머리를 너무 쓰지 마세요. 자연히 좋아질 거예요.”“네, 감사합니다.”교통경찰이 사고를 낸 운전자와 함께 다가왔다.“CCTV를 확인해 보니 본인이 직접 차도로 걸어 들어가셨더군요. 두 분이 상의해서 합의하실지 결정하시면 돼요.”사고를 낸 사람은 택시를 모는 중년 남성이었는데, 순박해 보이는 얼굴로 연신 미안해했다.“아가씨, 정말 죄송해요. 제가 아가씨를 친 건 맞지만 양쪽 다 과실이 있잖아요. 병원비랑 검사비는 제가 전부 부담하겠습니다. 크게 다치신 것도 아니니 이쯤에서 마무리하면 안 될까요?”운전자는 눈앞의 여자가 부잣집 아가씨라는 걸 알아봤다. 온몸을 값비싼 옷과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었다. 병원비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아마...유소담도 굳이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기에 교통경찰과 운전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죠. 저 때문에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그렇게 교통사고 건은 정리됐다.간호사가 서류를 들고 침대 옆에 섰다.“겉으로는 찰과상과 가벼운 뇌진탕뿐이지만 보호자 서명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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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유소담은 심장이 찢어질 만큼 아프면 사람은 당연히 과장되고 극적인 모습으로 울부짖고 무너질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무너지면 이토록 고요하고 적막할 수도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은 물처럼 흘러가는데, 자신만 이 고통의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멈춰 선 기분이었다.그녀는 이건후를 보지 않고 멀리 잘려나간 듯한 빛과 그림자를 바라보며 더없이 담담하게 말했다.“강하리 씨가 몸이 안 좋아요. 이 대표님이 곁에서 돌보느라 올 수가 없어요.”이건후는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과 이불을 움켜쥔 손가락 마디를 보았다.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는 감출 수 없었다.이건후가 부드럽게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하리랑 정빈이는 어릴 때부터 같이 컸으니 정이 남다른 건 당연해. 그래도 소담아, 네가 교통사고까지 당했는데 정빈이가 이러는 건 좀 지나쳤어. 기회가 되면 내가 한번 얘기해 볼게.”유소담은 입술을 꾹 다문 뒤 눈을 들어 이건후를 바라봤다.“오빠, 이 대표님은 강하리 씨를 많이 사랑하죠?”이건후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이내 옅게 웃었다.“하리가 외국으로 떠나던 날, 정빈이가 술을 마시다가 위출혈로 응급실에 실려 갔던 건 기억나.”직접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말만으로도 이정빈이 강하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유소담은 살짝 튼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운명의 목덜미라도 붙잡힌 것처럼, 그 슬픔은 말로 설명할 수도 쏟아 낼 수도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거대한 맷돌에 천천히 짓이겨지는 듯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고통이었다.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한 번 더 물었다. 결국 자신을 속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이건후는 줄곧 유소담의 감정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차갑게 식어 있던 마음 한구석도 저절로 흔들렸다.그는 두 손으로 유소담의 얼굴을 감싸고 엄지로 매끈한 볼을 살살 쓸었다.“됐어.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자. 오늘 네 생일이잖아.”손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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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익숙한 목소리에 유소담은 반사적으로 이건후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남자는 새까만 고급 코트를 입고 바람이 스치는 곳에 서 있었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에는 바깥의 축축한 밤이슬이 맺혀 있었다. 아래로 가라앉은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관자놀이에는 핏줄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굳게 긴장한 턱선만 봐도 감정이 이미 한계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폭발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 시선에 유소담은 심장이 철렁했다. 이정빈이 방금 장면을 분명 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순간 그와 눈을 마주할 용기마저 사라졌다.이정빈이 올 줄은 몰랐다. 지금쯤 강하리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응급실에서는 기계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모든 것이 정해진 선을 따라 흘러가는데, 그들 사이의 무언가는 이 순간 처참하게 부딪혀 망가졌다.먼저 적막을 깬 건 이건후였다.“정빈? 네가 여긴 웬일이야?”이정빈의 시선이 유소담이 걸친 외투를 훑었다. 느긋하게 눈썹을 치켜든 그는 낮은 목소리를 길게 늘였다.“왜? 형은 와도 되고 난 오면 안 돼?”이건후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그런 뜻은 아니야.”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순식간에 팽팽해졌다.유소담은 이정빈이 한 걸음씩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봤다. 반짝이는 구두가 바닥을 밟을 때마다 묵직한 소리가 나, 마치 그녀의 심장 위를 밟고 오는 듯했다.이정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그 순간 누군가 시야 앞을 가렸다. 이건후가 반쯤 앞으로 나서 유소담 앞을 막은 것이다.“정빈아, 소담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몸이 좀 안 좋아.”그 행동은 이정빈 속에서 타오르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건후의 뒤에 숨듯 서 있던 유소담이 무의식적으로 반걸음 물러나는 모습까지 보이자, 그의 신경은 단숨에 곤두섰다.이정빈이 유소담을 향해 턱짓했다. 새까만 눈은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었고, 얇은 입술 끝에는 음울한 냉소가 걸렸다.“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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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이정빈이 문득 웃었다. 도무지 속을 읽을 수 없는 웃음이었다.“형도 남자고 나도 남자야. 남자는 남자 속을 제일 잘 알지. 그러니까 내 앞에서는 그 더러운 속셈을 완전히 감추든가, 아니면 아예 가면을 벗어.”이건후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시선만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혔다.유소담도 이씨 집안 내부의 사정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이정빈이 이렇게까지 정색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평소 눈가에 걸려 있던 느슨함마저 오히려 섬뜩했다.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다. 앞으로 이건후가 선을 넘는다면, 그때는 전쟁을 선포하겠다는 뜻이었다.이건후 역시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옅게 웃으며 돌아서려는데 이정빈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유소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정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또 뭘 하려는 거지?’갑자기 등이 서늘해졌다. 순간 걸치고 있던 정장 재킷이 벗겨졌다.이정빈은 그 재킷을 이건후에게 건넸다. 잘생긴 얼굴에는 날이 잔뜩 선 채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형 옷.”한쪽이 물러서지 않으면 바로 폭발할 듯한 살벌한 경고였다.이건후는 유소담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재킷을 받아 들고 성큼성큼 떠났다.그가 사라지고서야 유소담은 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에는 어느새 얇게 땀이 배어 있었다. 두 사람이 정말 싸우기라도 할까 봐 내내 마음을 졸였다.표정이 조금 풀리자마자 칼날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몸을 훑었다.이정빈은 자신이 입고 있던 검은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더니 기쁜지 화난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물었다.“왜? 그렇게 걱정돼?”유소담은 키가 거의 170㎝로 또래 여성 중에서는 큰 편이었고 강하리보다도 조금 더 컸다. 하지만 190㎝에 달하는 이정빈과 비교하면 작아 보였다. 그의 코트를 걸치자 종아리까지 내려와, 나란히 서 있으면 유난히 아담해 보였다.이정빈이 차분할수록 오히려 더 섬뜩했다. 유소담은 그의 말에 담긴 떠보는 뜻을 알아채고 눈을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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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유소담은 이정빈의 손을 떼어 냈다. 이정빈과 강하리의 일은 줄곧 마음속 응어리였다.“전 그런 적 없어요.”이정빈은 믿지 않았다.“하리가 몸이 안 좋다고 했잖아. 내가 곁에 있어 줘야 했어.”‘하리, 하리. 또 강하리!’같은 말을 다시 듣자 유소담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목소리도 한층 차가워졌다.“제가 오라고 한 적 없어요. 못 믿겠으면 누가 이 대표님한테 전화했는지 직접 알아봐요. 그러면 제가 거짓말했는지 아닌지 알겠죠.”이정빈은 어이가 없어 웃으며 느긋하게 손을 저었다.“그러니까 내가 괜히 혼자 설레발 쳤다는 거네?”“아니면요?”일년에 한 번 오는 생일이었다. 처음에는 이정빈이 잊은 줄 알았다가 몇 번이나 기대를 품고 또 절망했다. 그래서인지 유소담의 말에도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그녀는 누구나 마음대로 주무르고 괴롭힐 수 있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때 목숨처럼 사랑했던 이정빈도 예외는 아니었다.이정빈이 자조적으로 웃었다.“그래. 내가 미쳤지. 괜히 여기까지 널 찾아왔네.”유소담은 마침내 감정을 쏟아 낼 틈을 찾은 듯했다.“맞아요. 미친 거 맞아요. 제정신이면 이런 짓 안 하죠.”생일 약속을 바람맞히는 건 그 정도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그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강하리 씨를 돌봐야 했다면 우도영 씨한테 식당을 예약시키고 옷까지 보낼 필요도 없었잖아요.”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것만큼 미운 일도 없었다.이정빈의 얼굴은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는 축 늘어진 눈꺼풀을 올리며 별일 아니라는 듯 두 손을 펼쳤다.“갑자기 아플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유소담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강하리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진 거라면, 내가 너무 앞서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이정빈은 내가 전화했던 일도 모르는 모양이네.’강하리가 말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유소담은 손안에서 굴리던 막대사탕을 바라봤다. 아까 이건후가 준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손을 뻗어 빼앗아 갔다.고개를 들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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