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당신이 외면했던 온기의 기록: Chapter 1 - Chapter 10

14 Chapters

제1화

나는 서재에 앉아 이혼 합의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읽었다.흰 종이 위에 적힌 검은 글씨는 조항마다 깔끔하고 명확했다.재산 분할 항목에서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결혼 전부터 강준혁의 소유였던 이 집도, 차도 모두 그에게 돌아가고 회사 지분 역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나는 내 명의의 예금만 가져가면 됐다.합의서 아래에 내 이름을 적었다.[서다희.]3년 전만 해도 이해관계에서 시작된 결혼이지만 잘 노력하면 괜찮은 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그때의 나는 정말 바보 같았다.합의서를 서류 봉투에 넣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그와의 대화창을 열었다.[오늘은 좀 일찍 들어와. 상의할 게 있어.]2분쯤 지났을 때 그의 프로필 사진 옆에 한 글자가 떴다.[응.]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소파 위에 던졌다.나는 몸을 돌려 주방으로 가 물 한 잔을 따랐다.주방은 넓었다. 양문형 냉장고와 빌트인 오븐, 독일산 조리도구까지 하나같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하지만 나는 이곳을 거의 쓰지 않았다.신혼 초에는 강준혁이 집에 돌아왔을 때 따뜻한 밥이라도 먹었으면 해서 몇 번 요리를 해 본 적이 있었다.처음 만든 건 돼지 갈비찜이었다. 그는 한입 먹어 보고 괜찮다고 했다.그러고는 전화를 한 통 받더니 미래에게 일이 생겼다며 나가 버렸다.두 번째로 생선요리를 만들었을 때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세 번째에는 상이 꽉 찰 만큼 음식을 차렸다. 오후 4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3시간을 부엌에서 보냈다.그날은 강준혁이 집에 돌아오기는 했다. 하지만 송미래와 함께 왔다.둘은 웃고 이야기하며 집에 들어왔다.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을 본 강준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우리 약속 있어. 나가서 먹을 거야.”송미래는 그의 뒤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고생했네요.”지금도 그때 그 웃음을 떠올리면 속이 뒤틀린다.그 뒤로 나는 다시는 요리하지 않았다.저녁 7시, 강준혁은 돌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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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휴대전화를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TV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연예인 몇 명이 무대에서 유난히 큰 소리로 떠들고 웃고 있었다.소파에 기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모든 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나는 60평이 넘는 이 집에서 이름뿐인 결혼을 붙잡은 채, 평생 나를 마음에 두지 않을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남자는 지금 첫사랑 곁에 있었다.당연하다는 듯 송미래의 곁에 있었고, 조금도 거리낄 게 없다는 듯 행동했다.결혼할 때부터 강준혁은 분명히 말했다.“네가 아니었으면 우리도 그렇게 끝나지 않았을 거야.”그 말은 결국 내가 자신과 송미래를 갈라놓았다는 뜻이었다.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억지로 헤어지게 만들었다는 뜻이었다.우리 집안의 힘과 그 소송을 이용해서 내가 그를 억지로 결혼이라는 굴레에 묶었다고 생각한 것이다.하지만 진실은 달랐다.아빠 회사는 자금줄이 끊겨 급하게 운전자금이 필요했다.반면 강준혁의 회사는 까다로운 소송에 휘말렸고, 우리 집안의 인맥이 필요했다.양가 어른들이 한자리에 모여 밥 한 끼를 먹고는 그대로 이 결혼을 결정했다.나에게 결혼하고 싶은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강준혁에게 나와 결혼하고 싶은지 물은 사람도 없었다.하지만 모두에게 이 결혼은 공평한 거래였다.강준혁의 집에서는 돈을 대고, 우리 집에서는 인맥을 내놓았다. 서로 필요한 걸 얻은 셈이었다.그 거래에서 유일하게 희생자가 된 사람은 송미래였다.강준혁은 내가 송미래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송미래를 당당한 여자친구에서 숨어 지내야 하는 첫사랑으로 만들어 버렸다고.그래서 강준혁은 모든 미안함을 송미래에게 주고, 모든 냉정함은 내 몫으로 남겼다.신혼 첫날 밤, 강준혁은 술을 잔뜩 마신 채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침실로 들어왔다.내가 외투를 벗겨 주고 넥타이를 풀어 주자, 갑자기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힘이 어찌나 센지 겁이 날 정도였다.“서다희.”강준혁은 쉰 목소리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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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아주머니는 대답하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나는 죽을 다 먹은 뒤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오늘은 부동산 중개인과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 이 집을 나가기 전에 새로 살 곳을 구해야 했다.이혼 합의서에서 재산을 하나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빈털터리는 아니었다.결혼 전에 모아 둔 돈이 조금 있었다.지난 3년 동안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강준혁 집안에서 매달 생활비로 400만 원씩 내 통장에 넣어 줬고, 나는 거의 쓰지 않아 절반 넘게 모아 두었다.그 돈을 합치면 괜찮은 아파트를 하나 빌려 1년쯤 버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그 이후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됐다.중개인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젊은 여자였는데 말이 무척 빨랐다.그녀는 시내 동쪽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집을 보여 줬다. 중심가와 멀지 않았고 단지 환경도 괜찮았다.“이 집은 채광이 정말 좋아요. 집주인이 얼마 전에 새로 인테리어해서 가구랑 가전도 전부 새 제품이고요. 월세는 130만인데 어떠세요?”나는 베란다에 서서 바깥을 바라봤다. 시야가 탁 트여 멀리 있는 공원까지 보였다.집은 크지 않았지만 혼자 살기에는 충분했다.무엇보다 이곳에는 강준혁과 관련된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좋아요. 이 집으로 할게요.”중개인은 내가 이렇게 빨리 결정할 줄 몰랐는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금세 환하게 웃었다.“네, 좋아요. 그럼 바로 집주인한테 연락해서 계약 진행할게요!”나는 1년짜리 임대 계약을 맺고 보증금과 월세를 냈다.열쇠를 받아 밖으로 나오니 햇볕이 따뜻하게 몸을 감쌌다.길가에 서서 손안의 열쇠를 내려다보는데 문득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니 아주머니가 박스를 몇 개 사다 거실에 놓아두었다.위층으로 올라가 드레스룸부터 정리하려던 순간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누가 왔는지 알 것 같았다.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어머, 집에 있었네요.”나는 몸을 돌렸다.현관에 송미래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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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송미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나는 혼자 거실에 서 있는 그녀를 남겨 둔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옷장을 열고 옷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3년 동안 산 것치고는 옷이 많지 않았다.강준혁은 한 번도 나와 쇼핑을 하러 간 적이 없었고, 선물을 준 적도 없었다.결혼기념일에도 없었고, 생일에도 없었다. 밸런타인데이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다.마지막 코트까지 접어 박스에 넣고 테이프를 붙이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확인해 보니 강준혁에게 온 메시지였다.[오늘 저녁은 접대가 있어서 밖에서 먹을 거야. 미래가 막 들어왔으니까 손님방 좀 정리해 줘.]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계속 짐을 쌌다.해 질 무렵에는 드레스룸과 서재 정리가 거의 끝났다.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송미래가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발소리를 들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곧 내 손에 든 이혼 합의서 봉투에 멈췄다.“그게 뭐예요?”나는 대답하지 않고 봉투를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맞은편 1인용 소파에 앉았다.송미래는 그 봉투를 몇 초 동안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이혼 합의서에요?”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상 인정한 셈이었다.그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놀라서가 아니라 기뻐서였다.“진짜 준혁이랑 이혼하려고요?”“네.”“언제요?”“준혁 씨 들어오면 얘기하려고요.”“애초에 이 결혼은 서로 필요해서 한 거였어요. 이제 할 일도 다 끝났고, 빨리 정리하는 게 서로한테 좋죠.”송미래는 한참 동안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서다희 씨.”그녀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정말 준혁이를 안 좋아해요?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거예요?”그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좋아하지 않느냐고?’3년 전 막 결혼했을 때만 해도 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강준혁은 잘생겼고, 사업도 잘됐으며,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면 유난히 빛났다.내가 충분히 잘하고, 충분히 다정하고, 충분히 철이 들면 언젠가는 그 사람도 나를 봐 줄 거로 생각했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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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거실에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소파에 앉은 송미래는 커피잔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강준혁을 바라봤다.강준혁은 나를 쳐다봤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화를 내지도 않았고, 붙잡지도 않았다. 심지어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그는 몇 초 침묵하더니 손을 뻗어 봉투를 받아 들었다.“언제 작성한 거야?”“지난주.”그는 봉투를 열어 합의서를 꺼낸 뒤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재산 분할 항목을 본 순간 그는 미간을 더 깊이 좁혔다.“아무것도 안 받겠다고?”“응.”“이 집도?”“결혼 전에 네가 가지고 있던 집이잖아. 나랑 상관없어.”강준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눈빛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조금 섞여 있었다.“서다희, 지금 나한테 화나서 이러는 거야?”하마터면 웃을 뻔했다.‘화가 나서?’상대를 아직 사랑해야 화도 내고 토라지기도 하는 법이다.나는 이미 마음이 끝났는데, 무슨 화를 낸단 말인가.“화나서 그러는 거 아니야. 진심이야. 처음에 결혼한 건 두 집안에 서로 필요한 게 있어서였고, 이제 다 해결됐잖아. 더는 이 결혼을 이어 갈 이유가 없어.”강준혁은 나를 오래 바라봤다.그 눈빛은 묘했다. 나를 살피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정말 충분히 생각한 거야?”“아주 충분히.”그는 합의서를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고 코트 단추를 풀며 소파에 앉았다.“그래.”강준혁이 말했다.망설임 하나 없이 깔끔한 한마디였다.옆에 있던 송미래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가 곧 고개를 숙였다.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감추려는 듯했다.그 모습을 보고도 내 마음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화도 나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고, 억울하지도 않았다.“그럼 언제 서명할 거야?”내가 물었다.강준혁은 소파에 기대 눈썹 사이를 손으로 눌렀다.“내일. 오늘 술을 좀 마셔서 머리가 어지러워.”“알았어.”내가 돌아서 위층으로 가려는데 강준혁이 다시 불렀다.“서다희.”나는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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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후회까지는 아닌데, 시간을 좀 허비한다는 생각은 해.”그의 손가락이 식탁을 아주 가볍게 두드렸다. 사소한 동작이었지만 내 눈에는 들어왔다.“시간을 허비했다...”그가 그 말을 한번 되풀이했다.“나랑 결혼한 3년이 시간 낭비였다는 거야?”“그럼 아니야?”내가 되물었다.“지난 3년 동안 기억해 둘 만한 게 뭐가 있었는데?”강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결혼한 지 3년인데 나랑 밥 몇 번이나 먹었어? 집에는 몇 번이나 들어왔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 내 생일이 언제인지는 알아?”나는 죽그릇을 내려놓고 강준혁을 똑바로 바라봤다.“몰라. 넌 아무것도 몰라. 지난 3년 동안 네 관심은 전부 송미래한테 가 있었으니까.”그제야 그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미간이 좁아지고 입술이 일자로 굳었다.“처음부터 어떤 결혼인지 알고 동의했잖아.”강준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널 원망한 적도 없어. 말했잖아. 서로 필요한 걸 얻은 거라고. 이제 다 끝났으니 각자 갈 길 가면 돼.”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 테이블로 가 서류 봉투를 집어 들고 안을 확인했다.마지막 장 서명란에 ‘강준혁’ 세 글자가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강준혁이 서명했다.문득 지난 3년이 한바탕 꿈처럼 느껴졌다. 꿈에서 깨어나고 보니 손에 남은 건 서명을 한 종이 한 장뿐이었다.“가자. 가정법원 가야지.”내가 말했다.강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거실에 홀로 남았다.5분 뒤 옷을 갈아입고 내려온 강준혁은 짙은 회색 코트에 검은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말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강준혁은 현관 수납장 위에 있던 차 키를 집어 들고 나를 바라봤다.“가자.”가정법원으로 가는 동안 차 안은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다.강준혁은 두 손을 핸들에 올린 채 앞만 바라보며 안정적으로 운전했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나는 조수석에 앉아 창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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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나는 고개를 돌려 강준혁을 바라봤다.강준혁의 얼굴은 선이 단단했고 턱은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시선은 먼 곳에 머물러 있었다.“지난 3년 동안 내가 너한테 잘해 주지 못한 건 사실이야.”“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나는 고개를 숙여 이혼 서류를 가방에 넣은 뒤 다시 그를 바라봤다.“강준혁, 송미래랑 행복하게 살아.”그제야 강준혁이 나를 돌아봤다. 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미안함도, 아쉬움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내가 왜 이렇게 망설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미련 한 점 없이 떠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너...”강준혁은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결국 한마디만 내놓았다.“너도.”나는 가볍게 웃고 길가에 세워진 택시 쪽으로 걸어갔다.“데려다줄 필요 없어.”나는 강준혁에게 등을 보인 채 손을 한번 흔들었다.“앞으로는 각자 잘 살자.”택시 문을 열고 올라탄 뒤 새로 구한 집 주소를 말했다.차가 출발할 때 백미러로 뒤를 한번 바라봤다.강준혁은 아직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이혼 서류를 손에 쥔 채 내가 떠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백미러 속 강준혁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다가 끝내 차들 사이로 사라졌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끝났다.정말 끝났다.택시가 아파트 단지 앞에 멈췄다. 캐리어를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마침 옆집 이웃과 마주쳤다.파마를 한 중년 여자였다. 장바구니를 들고 있던 그녀는 나를 보자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아가씨, 새로 이사 왔어요?”“네. 오늘 막 들어왔어요.”“혼자 살아요?”“네.”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한번 훑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고 웃으며 말했다.“젊을 때 자기 공간이 있는 것도 좋죠. 난 아가씨 같은 젊은 사람들이 제일 부러워요. 자유롭고 좋잖아요.”나는 웃으며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탔다.집에 도착해서 남은 짐을 정리하고 샤워한 뒤 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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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전화를 끊고 나는 소파에 기대 한동안 천장을 바라봤다.창밖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꽤 시끌벅적했다.집은 크지 않았지만 조용하고 방음도 잘돼서 좋았다.강준혁과 살던 60평 넘는 큰 집은 너무 텅 비어 있어 말을 하면 메아리까지 울릴 것 같았다.나는 이곳에서 일주일을 지내며 집을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로 꾸몄다.아침마다 알람 없이 눈을 뜨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커피 한 잔을 산 뒤 단지를 산책했다. 집에 돌아와 책을 읽기도 하고 드라마를 몰아보기도 했다.이런 생활이 강준혁과 함께 살던 지난 3년보다 백배, 천 배 편했다.8일째 되던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다희야, 아빠가 그러는데 이번 주말에 집에 와서 밥 먹자더라. 너 보고 싶기도 하고, 얘기도 좀 하고 싶대.”나는 그러겠다고 했다.택시를 타고 본가에 도착해 마당으로 들어서자 아빠가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짙은 색 재킷을 입은 아빠는 3년 전보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얼굴의 주름도 깊어져 있었다.나를 보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금세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왔냐?”“네, 아빠.”아빠는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살 빠졌네. 들어가자. 네가 좋아하는 갈비찜 해 놨어.”식사하는 동안 아빠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내 그릇에 계속 반찬만 올려 줬다.엄마도 옆에 앉아 몇 번이나 나를 바라봤지만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아빠였다.“다희야, 이혼은 정말 충분히 생각한 거냐?”“네. 충분히 생각했어요.”“그놈이 너 괴롭혔어?”그 질문에 나는 잠깐 멈칫했다.‘괴롭혔냐고?’대놓고 괴롭혔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잘해 줬다고도 할 수 없었다.“아니요. 그냥 서로 안 맞았어요.”아빠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그때 아빠가 못나서 회사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너한테 그런 결혼까지 하게 했구나.”“아빠...”“내 말부터 들어.”아빠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눈에는 미안함과 안쓰러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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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는 청첩장을 보며 몇 초 동안 멍하니 있었다.그러다 웃음이 났다.정말 빠르기도 했다.이혼한 지 겨우 보름인데 벌써 청첩장까지 나왔다.진작 다 준비해 두고, 방해물인 내가 자리만 비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청첩장을 뒤집어 보니 뒷면에 작은 글씨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저희의 사랑을 지켜봐 주시고, 행복을 함께 나눠 주세요.]사랑.행복.강준혁에게서 저런 단어가 나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우습기만 했다.나는 청첩장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기대 한참 생각했다.‘갈까, 말까?’보통이라면 가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안 가면 아직 미련이 남은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오히려 가면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 줄 수도 있었다.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나는 휴대전화를 들어 강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청첩장 받았어. 축하해.]이번에는 답장이 꽤 빨리 왔다.[올 거야?][모르겠어. 일정 봐서.”]상대가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한참 깜빡이더니, 잠시 후 한 구절이 도착했다.[왔으면 좋겠어.]나는 더는 답하지 않았다.10월 18일이 되었지만 결국 결혼식에는 가지 않았다.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정말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다.그날 나는 대학 동기 임유라와 약속이 있었다. 둘이 쇼핑몰을 한참 돌아다니다 훠궈를 먹고 밀크티까지 마신 뒤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다.밤에 SNS를 보다 보니 누군가 결혼식 현장 사진을 올려 둔 게 보였다.강준혁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무대에 서 있었고, 옆에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송미래가 있었다.둘은 확실히 잘 어울렸다.누가 봐도 잘난 남자와 예쁜 여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나는 게시물에 '좋아요'를 하나 누르고 그대로 넘겼다.그런데 이후 상황은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결혼한 지 3주쯤 됐을 때부터 공통 지인을 통해 이상한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강준혁이랑 송미래가 싸웠대.”임유라가 전화로 말했다.“그래? 왜 싸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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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렇게 보내고 휴대전화를 거실 테이블 위에 엎어 둔 뒤 다시 영화를 봤다.하지만 강준혁의 메시지는 점점 더 자주 왔다.어떤 날은 밤늦게, 어떤 날은 새벽에 왔다.내용도 갈수록 이상해졌다.[오늘 늦게까지 야근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습관처럼 ‘나 왔어’라고 말하려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예전엔 네가 있을 때 거실 불이 항상 켜져 있었는데.][오늘 그 케이크 가게 앞을 지나는데 네가 단 걸 좋아했던 것도 생각났어.]며칠 참다가 결국 한마디 보냈다.[강준혁, 너 이제 결혼했어. 할 말 있으면 네 아내한테 해.]그쪽에서는 꼬박 하루 동안 아무 답도 없었다.그리고 다음 날 아주 긴 메시지가 왔다.[서다희,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미래랑 결혼하고 나니까 계속 뭔가 이상해.][예전에는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자꾸 보이기 시작해.][네가 매일 밤 거실에 불 하나를 켜 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끄던 것.][물을 줄 때마다 늘 따뜻하게 줬던 것. 뜨거운 물은 위에 안 좋다고 했잖아.][내 셔츠가 어느 수납장에 있는지 전부 기억하고, 넥타이를 색깔별로 정리해 뒀던 것도.][미래는 그런 걸 하나도 못 해.]메시지를 다 읽고도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늦게 찾아온 이 상황이 황당하기만 했다.나는 그런 걸 3년 동안 해 왔다.그 3년 동안 강준혁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제대로 봐 준 적도 없었다.‘그렇게 원하던 첫사랑과 결혼하고 나서야 이제 그런 것들이 그리운 걸까?’나는 딱 네 글자만 보냈다.[정신 차려.]그리고 그의 알림을 꺼 버렸다.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이혼한 지 세 달쯤 됐을 때 임유라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부터 잔뜩 들떠 있었다.“다희야! 나 방금 뭘 봤는지 알아?”“뭔데?”“강준혁! 너희 예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 앞에 혼자 서 있더라! 담배를 얼마나 자주 피웠는지 몰라!”“지나가다 봤는데 살도 엄청나게 빠진 것 같았어.”나는 미간을 찌푸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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