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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1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가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봤다.상경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박준영은 내 신경을 안정시켜줄 등불을 찾기 위해 눈보라를 뚫고 삼천 개의 계단을 올라가서 호국사의 문을 두드린 이였다.내가 말 등에서 떨어졌을 때도, 태자의 신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안고 의원을 찾아갔다.박준영은 내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그래서 모두가 오늘 박준영의 옆에 설 이가 나라고 생각했다.박준영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냉랭하게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그 순간, 나는 박준영도 함께 돌아왔음을 알아차렸다.저번 생에 이하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박준영은 이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었다. 나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그런 눈빛.“전하, 다음 생이 있다면 부디 저와 혼인해 주십시오.”이하윤이 죽기 전에 남긴 이 한마디 때문에 박준영은 평생을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았다.이하윤의 기일마다 박준영은 나를 이하윤의 화상 앞에서 무릎 꿇고 참회하게 했다.“네가 하윤이를 죽였다. 평생 네 죄를 뉘우치면서 살아!”심지어 내가 목숨 걸고 낳은 자식들까지 박준영의 입김에 나를 어머니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아이들은 내가 선물한 장명쇠까지 집어던지며 말했다.“네가 어마마마를 죽였다! 너는 우리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다!”하지만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박준영은 나 대신 화살을 막아주면서까지 나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그 이유는 하나였다. 다음 생에 내가 박준영과 이하윤의 인연을 허락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그래서 지금의 나는 무척 담담했다.“전하, 제 언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을 감축드리옵니다.내 말을 들은 박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때, 이하윤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았다.“하랑아, 네가 언짢다는 거 안다. 헌데 전하께서 마음에 품은 이가 나인 걸 어떡하겠니. 혹여라도 전하를 탓하진 말거라.”말을 하는 이하윤이 손목에 하고 있던 금팔찌는 외할머니께서 내게 남겨주신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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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동궁에서 태자비를 택한다는 소문이 상경 전체에 파다하게 퍼졌다.모두가 나를 웃음거리로 삼았다.“태자께서 전에 하랑 아씨 아니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뭐하냐고, 지금은 다른 이를 택했는데. 사람들 앞에서 버림받았으니 누가 저 아씨랑 혼인하려고 하겠어?”“더러운 짓거리를 해서 태자의 미움을 산 거 아니야?”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전생에는 더 듣기 힘든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머지않아 동궁에서 책봉례 의복을 보내왔다.이하윤은 새빨간 의복을 바꿔 입고 구리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둘러봤다.어머니는 그런 이하윤을 예뻐라하며 머리를 빗겨주고 비녀를 꽂아줬다.“하윤아, 정말 예쁘구나. 앞으로 누가 괴롭히거든 어머니에게 말하거라. 내 꼭 복수해 주마.”아버지는 옆에 앉아서 지도를 보며 혼수로 보낼 좋은 점포를 고르고 있었다.문밖에 선 나는 갑자기 전생에 시집가던 날이 생각났다.이하윤은 밤새 울었고 어머니도 그런 이하윤이 안타까워서 함께 울었다. 아버지는 냉랭한 얼굴로 나를 꾸짖었다.“네 언니는 저리 울고 있는데 너는 단장할 마음이 드냐? 네 언니가 속상해하는 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게냐?”사실 나는 진작에 부모님께서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려야 했다.어머니는 나를 낳으실 때, 난산을 겪으셔서 내가 어머니께 복수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내가 두 달도 채 안 됐을 때, 멀리 떨어진 외조부 집에 보냈다.나는 그곳에서 외조부께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방법을 배웠고 외조모께서는 촛불의 빛을 빌려 옷을 꿰며 주셨다.내가 무릎이라도 다치는 날에는 외조부께서는 나를 업고 집으로 향했고 외조모께서는 애꿎은 승마장을 욕해댔다.내가 열 살이 되던 해, 외조모께서 돌아가신 뒤, 나는 상경으로 돌아왔다.어머니는 상스럽다며 나를 미워했고 아버지는 내가 예의를 모른다며 싫어했다.이하윤은 두 사람의 등 뒤에 숨어서 이렇게 물었다.“혹 저 아이가 새로 온 하녀입니까?”나는 어머니, 아버지의 환심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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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내가 저택으로 들어가자마자 얼굴 위로 찻잔 하나가 날아왔다.뜨거운 피가 눈썹뼈를 타고 흘러내렸고 곧 눈앞이 새빨개졌다.아버지는 대청에 앉아계셨고 안색은 무척 어두웠다.“꿇어!”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다가와서 욕하기 시작했다.“하윤이가 전하랑 말을 타러 갔는데 네가 감히 하윤이를 해치려고 들어? 하윤이를 죽여야 그만둘 거냐?”어머니의 말을 들은 내가 입을 떼기도 전, 박준영이 창백한 얼굴을 한 이하윤을 안은 채 들어왔다.“어머니, 하랑이한테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해서 잠깐 이성을 잃었던 겁니다.”피로 물든 내 얼굴을 확인한 박준영은 잠깐 멈칫했다.그러자 이하윤이 기침을 했다.그 소리에 박준영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이하윤의 옷을 여며줬다.“아직 무섭냐?”어머니는 안쓰럽다는 듯 이하윤을 바라보다 다시 나를 쏘아봤다.“멀뚱히 서서 뭘 하는 게야? 가법을 들여라!”어머니의 말을 들은 어멈들은 나를 바닥에 누르더니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다.회초리 한 번에 내 손바닥은 부어올랐다.그 고통에 나는 어깨를 떨었지만 입술을 꼭 깨물었다.전생에 나는 박준영을 위해 자객의 검을 막아줬었다. 그때 상처가 너무 깊어서 뼈까지 보일 지경이었지만 나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때의 박준영은 나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하랑아, 앞으로 너를 다치게 하는 자는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서른 번의 회초리를 맞고 난 내 손바닥은 살가죽이 벗겨졌다.이하윤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어머니, 모레 제 혼인식 날, 하랑이의 배웅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만하십시오.”어머니는 이하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손짓했다.“사당으로 끌고 가거라! 하윤이를 위한 기도경을 아흔아홉 개 베껴 써야만 나올 수 있다!”사당은 음습했다.나는 방석 위에 앉아 있었고 붓을 잡은 손이 자꾸 떨려왔다.글을 쓸 때마다 손바닥의 상처가 다시 터졌다.머지않아 경전지는 내 피로 물들었다.깊은 밤이 되었을 때, 나는 고열에 시달렸다.어렴풋이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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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튿날 아침, 나는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동궁의 예물이 도착했는데 오십 년이 된 여아홍에 상경 최고의 장인이 만든 봉관도 있대.”“제일 중요한 건 선황후께서 직접 준비하신 백옥 동심패지. 정비한테만 내려준다고 했어."그때, 누군가 피식 웃었다.“저기 있는 분이 어찌 이길 수 있겠어? 한낱 변방에서 자란 사람이 동궁 자리를 엿보다니.”그 말을 들은 나는 이불을 꽉 잡았다.그 목소리는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삼 년 전, 집사에게 맞아서 목숨이 간당간당하던 때, 내가 저 하인을 옆에 두고 상처까지 치료해 줬다.그때, 하인은 내 발밑에 납작 엎드린 채 울면서 앞으로 나 하나만을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말했었다.날이 완전히 밝았을 때, 어머니께서 별채에 들르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게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명하셨다.“둘째 아씨의 예물을 전부 하윤이 처소로 옮기거라. 오늘 하윤이 혼인식이니 예단이 적어선 안 되지.”어머니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들었다.“어머니, 그것은 외조모께서 제게 남겨주신 예단입니다. 장군부 낙인이 찍혀있고 제 이름이 적힌 것인데 어찌…”내 목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그리고 다음 순간, 어머니께서는 내 뺨을 내려쳤다.그 힘에 나는 힘없이 쓰러졌고 입 안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네 것이라고?”어머니는 콧방귀를 뀌었다.“하윤이는 태자비다! 하윤이 체면이 곧 우리 이씨 집안 체면이야! 겨우 동궁 첩으로 들어가는 주제에 예물을 남겨둬서 뭘 하려고?”‘첩이라니?’어머니의 말을 들은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동궁의 내시 하나가 웃으며 앞으로 나서더니 봉책문을 펼쳐 들었다.“전하께서 둘째 아씨와의 옛정을 생각하여 태자비와 함께 입궁하라고 전하셨습니다. 첩이긴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 자리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합니다.”그 말을 들은 내 심장은 차갑게 식었다.어멈들은 이미 나무상자를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나는 맨발로 어멈들에게 달려가서 상자를 꽉 잡았다.“놓아라! 내 것이다!”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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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사실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다만 사지가 굳었고, 눈꺼풀은 무거웠으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을 뿐이다.귓가에 놀란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내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박준영은 처음으로 태자로서의 여유를 완전히 잃었다. “어의, 어서 어의를 불러오거라!”그때,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박준영을 말렸다.“전하, 둘째 아씨께서는 이미…”“닥쳐라!”박준영은 실성한 사람처럼 나를 안고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나는 떨리고 있는 박준영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전생에 황궁에 불이 나서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도 박준영은 나를 안고 이렇게 벌벌 떨었다.그때는 박준영이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그저 힘에 버거울 뿐이었다.곧이어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위해 우는 게 아니었다.“오늘 우리 하윤이 혼인식 날인데 왜 하필 지금 죽은 거야? 지금 일부러 하윤이 앞길을 망치려고 드는 게야!”아버지도 잔뜩 화가 나서 말했다.“재수 없게! 어서 치우거라, 좋은 시간 놓칠라.”이하윤은 훌쩍이며 입을 뗐다.“하랑아,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한 거야. 동궁에 들어가기 싫으면 언니한테 말을 하지. 왜 죽음으로 전하를 난감하게 하려는 거야?”그 말을 들은 박준영이 나를 안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하랑이는 죽지 않았다.”머지않아 어의가 도착했고 내 맥을 짚어보더니 안색이 굳었다.그리고 잠시 후,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전하, 슬픔을 가누소서. 둘째 아씨는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어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앞마당은 또다시 정적에 휩싸였다.박준영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봤다. 어두웠던 눈빛이 점점 슬픔으로 물들었다.“그럴 리 없다. 하랑이가 아픈 걸 얼마나 무서워하는데 이리 죽을 리가 없다.”박준영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나는 웃음이 나왔다.‘박준영, 내가 아픈 걸 무서워하는 걸 알고 있었구나.’어머니는 울면서 이하윤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하윤아, 걱정 말거라.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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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관의 못을 뜯어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그리고 다음 순간, 누군가가 나를 안아서 관에서 꺼내더니 품에 꼭 안아줬다.쓴 환약 하나가 입안으로 들어왔고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나는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굳었던 사지에 드디어 감각이 돌아왔다.눈을 떠보니 사내 하나가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있었다. 그의 눈매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날카로워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이경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하랑아, 내가 늦었다.”그를 보니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아니야, 늦지 않았어.”이경호의 소매를 잡고 있는 내 손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이경호, 나를 데리고 가줘.”내 말을 들은 이경호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그래, 이번에는 누구도 널 못 데려가게 할 것이다.”마차는 달리고 달려서 상경을 벗어났다.성문은 이미 닫혔지만 이경호는 북경(北境)의 병부를 가지고 있었기에 성문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리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나는 그런 이경호를 가만히 바라봤다.불빛이 이경호의 얼굴을 비췄고 나는 순간 지금이 어느 때인지 헷갈렸다.“이경호, 어찌 여전히 나와 혼인하겠다는 거야?”삼 년 전, 이경호는 어명을 받아 전장으로 나가기 전에 나를 찾아왔었다.소년 장군은 장군부의 오래된 나무 아래에 서서 혼서를 꼭 잡고 있었다.“내가 살아온다면 나와 혼인하겠느냐?”그때 나는 박준영에게 빠져있었기에 그저 이렇게 말했었다.“네가 돌아오면 그때 보자.”나중에 이경호가 다시 상경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모두가 당연시하게 생각하는 태자비감이 되어있었고 이경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나는 명성도 잃고 꼴도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기까지 했다.이경호는 탕약을 식혀서 내 입가로 가져왔다.“삼 년 전에 내가 너에게 묻지 않았냐. 네가 태자비가 될 사람인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그런 걸 물은 게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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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나는 이경호가 들고 있던 혼서를 내려다봤다.그가 들고 있던 혼서는 삼 년 전의 그 혼서였다.혼서는 조금 빛바래졌지만 잘 보관되어 있었다.그 혼서를 받아든 나는 정중하게 내 이름, 이하랑을 적었다.나와 이경호가 혼인식을 올리던 그날, 북경에는 밤새 눈이 내렸다.화려한 혼수를 나르는 행렬도 없었고 귀빈도 없었다.그저 붉은 등롱 몇 개와 술, 그리고 병사들의 우렁찬 축하 소리밖에 없었다.이경호는 외조모께서 내게 남겨주신 낡은 은비녀를 머리에 해줬다.이 은비녀는 내가 상경을 떠날 때, 유일하게 가져온 물건이었다.나머지 예물은 전부 이하윤의 처소로 옮겨졌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금은보화는 뺏길 수 있지만 외조부께서 가르쳐주신 말 타는 법과 활 쏘는 법, 그리고 외조모께서 내게 주신 사랑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다.이경호는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하랑아, 북경에는 바람이 거세다. 그러니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들거든 나에게 기대거라.”그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나는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어.”혼인식을 올린 지 사흘째 되는 날, 드디어 상경의 소식이 전해왔다.내 관을 묻던 날, 박준영이 직접 그곳에 들렀다고 했다.그리고 그는 밤새 내 무덤 앞에 서있었다고 했다.날이 밝았을 때, 박준영은 내 무덤을 팠다고 했다.관 속에는 얼굴을 바꾼 여인의 시신이 있었다. 그 시신은 내가 전에 자주 하던 빨간색 실을 손목에 하고 있었다.그 시신은 이경호가 준비한 여인 죄수의 시신이었다.다행히 솜씨가 좋은 약사를 만나서 사또를 속일 수 있었다.하지만 박준영은 여전히 미친 것처럼 그 시신을 안고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이씨 저택으로 돌아간 박준영은 내가 머물던 처소로 쳐들어갔다.하지만 그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침상 아래에는 변방의 그림 몇 개와 끊어진 채찍, 그리고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한 서신만이 남아 있었다.“하랑아, 내 너와 혼인하는 날에 이 천하를 예물로 바치리다.”내 처소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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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박준영은 곧바로 북경을 떠나지 않았다.그는 순찰을 핑계로 군영 밖의 역관에 머물렀다.그리고 매일 동궁의 이가 옥비녀, 비단, 보약 등을 들고 찾아왔다.그 속에는 선황후가 남겨준 백옥 동심패도 있었다. 전생에 나는 반평생을 박준영에게 구걸했지만 이하윤의 위패 앞에서만 동심패를 봤었다.그런데 이번 생에 동심패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나는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고 전부 되돌려보냈다.사흘이 되던 날, 박준영은 직접 찾아왔다.그는 군영 밖에 서서 낮게 말했다.“하랑아, 네가 날 원망한다는 걸 안다.”활을 닦고 있던 나는 그 말을 들었지만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내 말에 박준영이 침을 삼켰다.“전에는 내가 눈이 멀어서 그랬다. 네가 하윤이를 죽인 것만 기억했지 너도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는 걸 잊었다.”그 말을 들은 나는 멈칫했다.박준영은 자신이 나의 희생을 잊어서 내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박준영, 너는 아직도 모르구나. 내 희생 따위 기억할 필요 없어. 나는 그저 네가 진실 앞에서 날 한 번만이라도 믿어주면 그걸로 됐어.”내 말을 들은 박준영은 제자리에 얼어버리고 말았다.그리고 그때, 군영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이하윤이 온 거였다.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하랑아, 역시 살아있었구나.”이하윤은 다시 박준영을 보며 울먹였다.“전하, 저는 하랑이가 가짜 죽음까지 꾸며서 도망간 걸 원망하지 않습니다. 헌데 하랑이는 왜 전하를 이리 속인 걸까요?”그 말을 들은 박준영은 전처럼 이하윤을 감싸지 않았다.순간, 이하윤은 당황했고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서 손을 잡았다.“하랑아, 전하와 함께 돌아가거라. 내가 태자비 자리를 내어주마. 그러니 언니를 미워하지 말거라.”그 말을 하는 이하윤의 눈 밑으로 차가움이 스쳐 지나갔다.그러더니 작은 비수 하나를 꺼내 자신의 어깨를 찔렀다.“하랑아, 어찌 날 죽이려는 거야?”곧 바닥으로 쓰러진 이하윤은 처량하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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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는 시선을 거두었다.“네 잘못을 내게 고할 필요는 없다.”머지않아 상경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다.종친부에서는 사흘에 걸쳐 이하윤의 하녀, 매수당한 어의, 위증을 한 어멈까지 샅샅이 조사하여 모든 것을 밝혀냈다.그 소식은 빠르게 상경 전체에 퍼졌다.아버지는 결국 관직을 뺏긴 채 옥에 갇혔고 어머니는 매일 궁문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울었지만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이하윤은 태자비 자리에서 쫓겨났고 절로 들어가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박준영의 행실을 전해 들은 폐하께서는 분노하셨다. 그리고 사람도 제대로 못 알아보고 덕을 잃었다고 꾸짖으며 반년 동안 처소에서 반성하라고 명했다.동궁에서 사죄서가 연달아 도착했지만 나는 하나도 보지 않았다.그러는 사이, 북경에 봄이 찾아왔고 쌓인 눈도 녹았다.이경호와 함께 순찰을 마치고 군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누군가를 보게 됐다.그이는 바로 박준영이었다.박준영이 그곳에서 얼마나 서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얼른 다가왔다.“하랑아.”그러자 이경호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나는 그를 막았다.“전하, 어쩐 일이십니까?”내 말을 들은 박준영은 품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상자에는 금팔찌, 동심패, 그리고 수리한 흔적이 있는 봉황관이 있었다.그 봉황관은 어머니께서 이하윤에게 선물한 거였다. 종친부에서 장물을 거두었고 결국 내 손으로 다시 들어온 거였다.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었다.이것이 어쩌다가 박준영에게 넘어갔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원래 네 것이었다.”박준영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었다.“내가 너 대신 가져왔다.“늦었습니다.”나는 그 물건들을 힐끔 보곤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러자 박준영의 손이 멈칫했다.“하랑아, 내 아바마마께 동궁의 모든 혼약을 폐하게 해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돌아가자. 내 태자비의 예로 널 다시 맞이할 것이다. 앞으로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거든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박준영의 말을 듣던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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