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는 다리를 꼰 채 비스듬하게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문소리에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하! 이미 내가 온 거 알고 있으면서 눈도 안 뜬다고?’ 거만한 모습에 기분이 팍 상했다. 파혼장에 황가의 도장마저 찍힌 마당에 더 이상 ‘예의를 차린 약혼녀’ 역할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틀리면 당장에 ‘하트먼 기사단장 에스텔’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크흠!” 작게 헛기침 소리를 내 도착했음을 알렸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응접실로 들어온 것이 내가 아니라 다른 여인이었다면 대번에 눈을 뜨고 일어나 그 여인을 희롱했을 것이다. 황실의 명령으로 ‘진심 어린 사과’를 하러 온 주제에 아무리 그 ‘진심 어린 사과’에 진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시하다니. ‘그렇다고 기죽을 줄 알고?’ 나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베딘, 돌아가지.” 리하르트는 내가 응접실을 나가려 하자 그제야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많이 변하셨군요, 소백작. 나는 그대가 여전히 얼굴을 붉히던 소녀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허튼소리. 리하르트 벨테레브, 나한테 사과하러 온 거 아니었습니까? 사람이 온 걸 알면서도 무시하는 게 사과하는 태도 맞습니까?” 날 선 시선에도 리하르트는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정말이지 천사 같은 외모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뿐이다. 나는 저 천사 같은 모습 안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알고 있다. 그의 본모습은 자신보다 적게는 일곱, 많게는 열 살의 연상까지 주무르고 희롱하는 난잡함의 덩어리다. 다행이라면 내게만은 그 더러운 입맛이 돌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우리 둘 사이는 미지근한 기억과 더럽혀진 세월, 겨우 그것뿐이었다. 리하르트는 능글맞은 미소를 유지했다. “저는 고결하고 오만한 당신이 싫
Last Updated : 2026-09-03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