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황성과 벨테레브의 경계에 있는 작은 오두막. 내게 유일하게 친우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프레드! 네 생각엔 리하르트가 제정신인 거 같니? 약혼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데, 입을 맞추고 끌어 안더라니까! 내겐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던 놈이 말이야.”
심드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프레드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당신도 그 여자처럼 리하르트가 안아주길 바랐습니까?”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내 입에서 리하르트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때면 프레드는 이렇게 딱딱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나는 일부러 얼굴을 잔뜩 구기고 말했다.
“실성했니? 이젠 염증이 나서 줘도 싫어. 그 불결한 바람기에 신물이 난다고. 근데 이제 그것도 끝이야. 나 곧 파혼해.”
당당하게 파혼에 관해 이야기하자 호기심이 생겼는지 갑작스레 여러 질문을 쏟아냈다. 그의 속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정말입니까? 파혼하면 어떡하시려고요? 더 나은 혼처라도 있습니까?”
“왜 없겠어. 나 하트먼이야. 재력이라면 제국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는데 어디든 다 환영이지. 여차하면 리하르트 약 좀 오르라고 그 쌍둥이 동생한테 시집가 버리지 뭐.“
홧김에 뱉은 농담이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리하르트의 동생'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프레드의 미간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손에 쥔 나무 컵 손잡이가 빠직거리며 깨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인지. 그는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둘이 형제이잖습니까. 백작님이 허락 안 하실 겁니다. 거기다가 프레데릭은 리하르트랑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던데…….아시잖습니까. 공작가의 저주요.”
헛소문에 흔들리지 않는 그가 갑자기 항간에 떠도는 공작가의 저주에 관해 언급했다. 별일이었다.
“저주? 너는 그게 진짜라고 믿어?”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
이상하게도 프레드의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
공작가의 저주는 제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한 낭설이었다. 손이 귀한 벨테레브에 운명을 거스르고 쌍둥이가 태어나는 바람에 그 대가로 첫째는 천사 같은 외모를, 둘째는 모든 것을 빼앗긴 괴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황당한 전설.
정말 내가 벨테레브의 저주받은 공자에게 시집이라도 갈까 걱정하는 것일까. 나는 잔뜩 얼굴을 구긴 프레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내가 진짜 벨테레브 족속들이랑 결혼이라도 할까 봐 그래? 농담이야 농담. 뭘 그렇게 죽자고 덤벼들어?”
농담이란 말에 기분이 나아졌는지 프레드가 피식 웃으며 반격해 왔다.
“그러신 분이 성년식에 소공작께 입맞춤 한번 못 받았다고 며칠 동안 우셨습니까? 아니면 서, 설마 소공작이 아니라 정말 그 동생을 마음에! 히익!”
프레드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숨을 힉 소리가 나도록 크게 들이켰다. 능청스러운 연기에 입가가 씰룩댔다.
"프레드, 너 설마 질투하는 거니? 안타깝지만 너무 깊이 빠지진 마렴. 우리 사이에 신분 상승이라는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단다."
“허! 깨어있는 귀족이라 신분은 상관없다 하셨던 분 어디 가셨나? 제게도 드디어 기회가 오는 건가 했더니 지체 높은 귀족이라 평민과는 결혼하고 싶지 않으신 건가요?”
솔직히 그를 귀족으로 만들어 남편으로 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지 모른다.
“네가 그 흔한 준남작만 됐어도 너랑 결혼했지. 왜 평민으로 태어난 거니. 이 슬픈 인생아. 아! 나는 절대 평민이랑 결혼 안 할 거니까. 나랑 결혼하고 싶거든 인생 역전! 귀족이 되고 나서 청혼하러 와. 그전엔 절대 안 받아주니까.”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프레드가 배웅했다.
“에스텔, 귀족이 되거든 청혼하러 오라고 하셨지요?”
흐트러진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선명한 자안(紫眼)이 반짝였다.
“그 말 잊지마세요.”
* * *
파혼을 청하는 절차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조금 특이한 경우였다.
톡, 톡, 톡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리다 한숨을 길게 뱉었다.
“파혼 대기 기간만 석 달. 이러면 벨테레브에서 반론을 준비할 시간만 벌어주는 꼴인데 이걸 받아들이라고?”
대기 기간이 속을 썩였다. 각종 이권이 걸린 문제니만큼 대기 기간을 줄여야 했다.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나 어떤 기함할 수를 끌어다 반전을 시킬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그때, 은쟁반에 서신을 담아온 리라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봉랍의 인장이 눈에 띄었다. 해럴드 3황자의 문양이었다.
“절묘한 때에 서신이라니.”
오며가며 겨우 안면만 익힌 3황자의 서신이라니.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서둘러 서신을 확인했다. 내용은 내가 원했던 것보다 더 흥미로웠다. 그가 내 서류를 쥐고 사적인 방문을 청한 것이다.
“리라, 황궁에 가야겠다.”
과거 나와 혼인하는 황자에게 황위를 주겠다던 황제의 해묵은 선언 때문일 것이다. 황실도 하트먼도 이익관계에 충실한 선택이었던 그 선언이, 1황자 루데우스의 잠적 이후 휴지조각이 되었던 그 카드가, 나의 파혼장 접수와 동시에 다시금 황궁을 뒤흔든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정 실권을 쥔 3황자가 내 서류를 빌미로 사적인 방문을 청할 리 없지. 치장을 돕던 리라의 눈썹이 하늘로 솟았다.
“아가씨! 꼭 가셔야 하는 거예요?”
“폐하의 서신이 아닌게 어디니? 파혼장 접수하자마자 다시 약혼 준비하게 되는 것보다는 낫잖아.”
“으윽!”
몸서리치는 리라를 보니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3황자의 방문 요청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의 방문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하트먼이 차기 황제감으로 3황자의 손을 들어주는 형세가 되었다.
“하트먼이 중립을 고수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노골적이란 말이지?”
그렇다고 방문 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만남 자체로 3황자는 원하는 바를 달성할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은 조금 달랐다. 석 달이나 되는 파혼 대기 기간과 뒤따를 파혼 소송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아야 했다.
현재 여러 황자 중 능력 면으로나 인성 면에서 해럴드 3황자만큼 황태자의 자리에 어울리는 황자도 없었다. 아쉽게도 그는 모두에게 호남이라 불렸지만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는게 흠이랄까?
“그 이목구비 진—한 얼굴만 좀 어떻게 안 되나 몰라.”
볼멘소리를 뱉으면서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리하르트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서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둘 사이에 언뜻언뜻 오고 가는 시선을 보면 친분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3황자가 황위에 야욕을 가지고 있어 내게 청혼을 하려는 것이라면 이번 방문에 응하는 것으로 리하르트에게 엄청난 복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라, 오늘의 전투는 조금 특별하단다. 아주 화려한 전장이거든. 그러니 제대로 꾸며. 딱 보면 청혼쯤은 술술 나오도록 말이야.”
* * *
황궁의 서쪽 별궁, 3황자의 중앙 응접실. 고급스러운 찻잎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가운데, 정적이 내려앉았다.
달그락, 탁.
해럴드가 찻잔을 받침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나는 삐뚜름하게 올라가 있는 그의 새끼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찻잔을 우악스럽게 내려놓는 것부터 거슬렸었다. 거기에 한참을 뜸을 들이며 말을 꺼내지 않는 답답함까지. 외모 외에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을 하나 더 추가했다.
3황자의 진한 이목구비가 드디어 입을 떼려는지 결연한 표정으로 변했다.
해럴드는 결국 저 무거운 입술을 떼어 위대한 동맹이니 계약이니 운운하며 청혼을 내뱉을 것이다. 뻔하디 뻔한 상황에 하품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의 그 오만한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저는 수잔나 베링 자작 영애를 흠모하고 있습니다.”
반사적으로 지난 연회의 참사를 떠올렸다. 내 귀가 어떻게 된 게 아니라면 지금 해럴드의 입에서 튀어나온 여인의 이름은 그 불여우였다. 술집 작부들이나 입을 법한 옷으로 내 약혼자를 홀리고 그와 입을 맞추던 수잔나.
만약 리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지금 상황을 두고 분명 이렇게 말했으리라.
‘망했네. 그것도 아주 대차게.’
부와 권력은 그 무엇보다 정의에 가까운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두를 손에 쥔 자에게 세상은 참으로 관대했다.과거의 하트먼이 그랬다. 아무리 지독한 추문이라도 한겨울 소리 없이 뱉어내는 입김처럼 잔상만을 남긴 채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오늘, 하트먼은 다시금 권력의 중심에 섰다. 끔찍했던 내 과거 언행들이 그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았던 것처럼 나와 리하르트의 부정한 관계는 그렇게 덮일 것이다.내게 바른 도리나 정의 같은 이념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권력을 잃는 순간 정의라 믿었던 것들조차 누군가의 견해에 의해 절대 악으로 매도당했었으니까.황제 앞에서 내게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과거에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이념을 짊어지고 왜 그리 고통스러워했었는지.나는 엷은 미소로 리하르트를 끌어당겨 짧은 포옹을 했다. 그의 맹세를 이 에스텔 하트먼이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취하였음을, 그가 나의 소유임을 모두에게 선언하듯이 말이다.쿵쿵쿵.귓가에 세차게 뛰는 리하르트의 심장 소리가 스쳐 갔다.이 연회장에서 일어난 일은 이곳에 있지 않은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한 연극이었다. 제 형을 향한 비뚤어진 질투로 나의 날개를 꺾고 심연에 처박아 두려 한 우매하고 비겁한 자를 위한 연극.
나는 눈썰미가 썩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눈치가 없는 머저리도 아니었다.“하!”나란히 선 레이야와 바이올렛을 보고 있으니 부정할 수 없었다. 둘은 아무리 봐도 혈연관계임이 분명했다.“소공작과는 가족 같은 사이였겠군요. 그런 사람에게 차인 셈이니 목숨을 걸 만큼 힘들어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후—, 이 아가씨가 머리만 좋으면 뭐 하나, 완전 헛똑똑이야!”바이올렛이 질색했다. 솔직히 자세한 내막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둘의 서사가 사춘기 시절 읽었던 연애소설처럼 풋풋하고 아름답다면 둘 사이에 낀 내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악역에 불과할 것 같아서다.그러나 바이올렛은 심드렁한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이야기를 풀어냈다.“리키에겐 나도 내 어머니도 다 짐일 뿐이야. 넌 내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잘 알잖아. 내겐 이 질긴 목숨이 너무나 소중하거든.”“……리키?”애칭을 부르는구나 하는 생각보다 귀에 익은 ‘리키’라는 애칭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그 애칭이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바이올렛의 다음 말이 온 신경을 휩쓸어간 탓이다.“리하르트 말이야. 오라버니에게 짐이 되지 않
“리라 물 좀. 목말라.”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바이올렛의 담배 향이 남아 있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끙.”술이 얼마나 독한지 근육통이라도 생긴 것처럼 온몸이 쑤셨다. 술에 취해 기억이 사라졌다. 어떻게 공작저까지 되돌아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눈을 떴을 때는 아비스의 침실이었다.기억 나는 것이라곤 술을 털어 넣고 난 뒤 속이 타는 것 같은 기분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것, 자욱했던 담배 연기, 창 너머로 들리던 꽃 같은 여인들의 웃음소리 같은 희미한 분위기뿐이었다.베개에 머리를 그대로 처박고 엎드린 채 팔만 이불 밖에 꺼내 물을 청했다. 손에 차가운 잔이 와닿았다. 잔 안에 얼음이 부딪혀 짤랑, 하는 소리를 냈다. 나를 위해 얼음물을 준비해 준 리라의 배려가 고마웠다.물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남아 있는 얼음을 손에 덜어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아직도 취기가 남아 얼음을 가져다 대는 순간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기화해 버릴 것 같았다.얼음이 녹아 손목을 타고 팔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물은 곧 옷깃을 적시기 시작했다. 리라의 잔소리가 쏟아지기 전에 옷을 벗어낼 참이었다.하나, 둘 단추를 풀고 한쪽 어깨로 옷자락이 흘러내렸을 때였다.“제 취향은 벗기는 거지만 직접 벗
조금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상자 안에 오래 보관되어 조금은 누렇게 색이 바랜 이 종이 쪼가리처럼 리하르트와 바이올렛의 사이는 그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미 바래고 삭아가는, 잊힌 사이.그럼에도 그가 바이올렛을 떠올리며 그리운 이름이라 칭하는 것에 잠시나마 욱하는 기분이 들다니. 그를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겠다 마음 먹었으면서 쓸데없는 감정을 품는 것도, 그 감정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종류라는 것도 모두 나답지 않았다.나는 손안에 종이를 꽉 구겨 쥐고는 지하실을 빠져나왔다.“하아……. 집중해, 분노해, 에스텔! 칼을 갈고 독을 품어야지.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마.”혼잣말이 제멋대로 삐져 나간 감정의 가지를 가차 없이 잘라냈다. 내게 감정이란 쓸모없는 변수일 뿐이니까.* * *비음 섞인 웃음소리와 높은 음정의 호객하는 소리, 끈적한 음악이 온 거리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어머, 언니! 호위 기사가 이렇게 귀여우면 이런데 데려오는 게 아닌데—. 아하하핫!”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소음 속으로 사라졌다. 화려한 조명에 농을 걸어오는 여인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로소피어텔(Rosso-Viertel)은 아노리스의 가장 더럽고 화려한, 온갖 꽃들이 넘치는 거리였다.
쨍그랑!“에스텔 하트먼! 그 계집년만 아니었어도!”술잔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며 유리 조각이 바짓단에 튀었다. 안 그래도 최악이었던 기분이 바짓단에 튄 잔해물에 엉망으로 변했다.“재수가 없으니, 잔이 깨져도 이 지랄이야!”새 잔을 집어 들자 브론딘이 얼른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남작님, 모두 예상대로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예상대로? 이 멍청한 놈! 예상대로 된 것이면 빚더미에 앉을 일 따위 없었겠지!”분명히 곡물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뛸 것이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노리스는 극심한 기아에 허덕일 것이고 하트먼은 손가락질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충성심 높은 하트먼의 부관들을 매수하는 것부터 남작가 재정은 이미 바닥이었다. 그것을 만회해 보고자 급하게 곡식을 사들여 더 비싼 값에 팔아보고자 한 것이 오히려 남작가 재정을 파탄내 버렸다.반대로 처참한 몰골로 불행을 탓하고 망가져야 했을 에스텔은 날이 갈수록 본래의 위엄을 되찾아갔다. 내게 자비를 구하고 결국 내 소유물이 될 깜찍한 년이 그 똑똑한 머리와 재주로 어떻게든 이 고비를 넘겨보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결국 내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이제껏 내 행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하트먼을 노리는 자가 대상을 가릴 리가 없는 것을.다행스럽게도 해 질 녘쯤이 되자 아버지께서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의식을 회복함과 동시에 넋이 나간 것 같았던 어머니도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갔다.그러나 나는 아버지와의 만남을 하루 뒤로 미뤘다. 내 걸음 한 보에도 가슴을 졸이는 리하르트를 위해서. 또 이미 넝마가 되어버린 마음을 기워 조금이나마 이성을 되찾아보고자 함이었다.날이 밝자 아침부터 부산한 움직임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타국 왕비로 시집간 고모님이 방문했을 때처럼 온 하트먼이 떠들썩했다. 내 얼굴을 보며 여기저기서 눈물을 터뜨리는 하녀들, 시종들이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모두 나를 걱정하고 있던 하트먼의 가솔이었다.그러던 중 사용인들이 충격에 휩싸인 눈을 하고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쭈뼛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리하르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 큰 키로 잔뜩 허리를 수그린 채 사용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그럴 만도 했다. 그가 내 약혼자였을 시절, 백작저에 어쩔 수 없는 일로 찾아오는 날이면 악에 받친 사용인들의 거친 비난과 다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의 수난을 겪어야 했으니 말이다. 다 제 주인을 두고 바람이 난 몹쓸 인간을 응징한 것이었으니 자업자득이었다.“빨리 안 오십니까, 소공작? 인사하셔야지요. 백작님께서 기다리십니다.”리하르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