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3개월 전.]
위태롭게 흔들리는 현의 트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수잔나의 손이 꼭 비브라토를 만들어내는 연주자의 손 같았다.
레이스로 치장한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나는 수잔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절약은 훌륭한 미덕이지요. 허나 온몸에 값비싼 보석을 휘감은 채 옷감만 줄인 꼴이라니. 진정으로 검소함을 실천하는 영애들에 대한 크나큰 실례 아니겠습니까?”
내가 수잔나의 옷차림을 지적하자 근처에서 구경하던 부인들마저 은근슬쩍 몸에 걸친 보석을 가리기 시작했다.
어이없게도 수잔나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이미 숱한 귀족 부인들이 애용하던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이름도 잘 모르는 어린 영애 하나가 나서서 수잔나의 어깨를 툭 쳤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참견이었다.
“영애 가슴팍에 달고 있는 그 보석이 어떤 것인지는 아십니까? 하나는 하트먼 백작 영애가, 다른 하나는 그녀의 약혼자 벨테레브 소공작이 나눠 가졌답니다. 하트먼 백작 영애의 열여덟 번째 생일 연회에서요.”
수잔나의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럴 만도 했다. 성년식에 나눠 가진 보석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수잔나는 이목을 더 끌어보려는 심산인지 목소리를 높여 항의했다.
“하트먼 백작 영애! 제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아직도 모르십니까? 지난밤 당신과 밤을 지새운 사내가 누구인지.” “그, 그 무슨! 저는 어제!”
그녀의 가슴팍에 블루 다이아가 반짝 거렸다. 잠깐이나마 통제하지 못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스산하게 퍼진 살기에 흠칫 놀란 수잔나는 뒷걸음질 쳤다.
조심하려 했건만 검을 다루지 않는 이들에게 내 살기가 협박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실로 그럴만한 사유였다.
블루 다이아의 의미를 안다면 결코 가슴팍에 달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 레이스 부채의 끝으로 수잔나의 가슴팍에 달린 보석을 톡 건드렸다.
겨우 레이스 부채 끝에 닿았을 뿐이나 검에 맞기라도 한것처럼 블루 다이아는 힘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다른 이의 것을 탐내는 것은 절약이 아니랍니다. 성년식에 나눠 가진 보석을 적선받았다 해서 보석의 운명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감히 주제넘게도 말이지.”
“저, 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수잔나가 결국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그러나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악한 미소를 띠며 수잔나를 지독하리만치 괴롭히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여우짓을 하며 리하르트에게 엉겨 붙어있던 수잔나를 향해 모두 ‘그럴 줄 알았어, 그러게 들이댈 사람에게 들이대야지, 저렇게 될 줄 모르고 그랬나.’ 등의 말을 보탤 뿐이었다.
홀로 남은 수잔나의 처절한 외침이 공허하게 퍼졌다.
“제,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시는 건가요! 소공작님과 혼인하신 것도 아니시면서. 정말이지! 영애의 이름이 아깝네요!”
“아하하. 제 이름 걱정할 시간에 영애 이름이나 돌아보시지 그러세요? 백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남의 약혼자를 탐하는 추잡스러움이라니. 저는 베링 자작가 영애라 생각지도 못하고 길거리 작부거나 코르티잔인 줄 알았습니다. 지나가던 개도 침을 뱉겠어요. 안 그런가요, 수잔나 베링 영애?”
수잔나는 결국 시뻘개진 얼굴로 도망치듯 뒤돌아갔다. 의기양양해진 나는 더 큰 목소리로 도망치는 수잔나에게 다시 한번 승리의 쐐기를 박았다.
“약혼의 의미가 무엇인지 떠올려 보시길 바라요. 아! 생각할 시간도 절약하는 중이시려나?”
날선 비아냥이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키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승리감을 만끽하는 것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
나는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고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러게 왜 남의 남자를 건드려.”
손바닥 안쪽이 얼얼했다. 며칠 전부터 수잔나가 리하르트에게 딱 달라붙어 앙앙대는 꼴을 참느라 손바닥 가득 손톱자국이 새겨진 탓이었다. 사실 온갖 아양을 떨어대는 수잔나보다 그녀를 보며 천치처럼 실실 웃고 있던 내 약혼자, 리하르트가 천 배는 더 혐오스러웠지만 말이다.
바닥에 떨어진 블루 다이아가 눈에 박혔다. 나와 나눠 가진 보석을, 감히 다른 여인에게 쥐여주다니.
블루 다이아가 무엇을 뜻하는지 제국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 치욕을, 그대로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바닥에 뒹구는 블루 다이아가 리하르트의 눈동자인 것만 같아 차라리 누군가 집어가버렸으면 싶었다.
나는 블루 다이아를 구둣발로 꾹 눌러밟고 자리를 벗어났다.
여기저기에서 나를 안주 삼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신의 환생이라 불리면 뭐합니까. 성격이 저리 드센데.”
“그러게나 말이야. 그 유명했던 코르티잔에게도 극독을 먹여 쫓아냈다지 않나. 벨테레브 소공작이 밖으로 도는 것도 이해가 가.” “그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소공작 말인가? ‘벨테레브의 씨뿌리개’라는 별명까지 붙었다던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후—. 다 들린다, 이것들아.’
지겨운 레퍼토리였다. 리하르트와 바람이 난 여인들은 모두 사교계를 떠났다. 내가 생각해도 그 응징이 소름 끼치도록 잔인하긴 했다. 그러나 그 이면은 알지도 못하면서 입방아를 찧어대는 꼴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연회장을 빠져나가자 끈적하고도 질투 어린 시선들이 등 뒤로 쏟아졌다. 누군가는 내 완벽한 미모를 탐했고, 누군가는 하트먼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시기했다.
한쪽 구석 테라스에 모인 사내들 사이에 아버지의 친우 솔벤 자작이 술에 취해 또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우리 에스텔에게 유일한 흠결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그 개망나니 벨테레브 소공작이 그녀의 약혼자라는…….”
개망나니라는 말에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영식이 슬며시 물었다.
“저기, 벨테레브 소공작이 어떻길래 저리 망나니라는 말까지 나옵니까?”
“아직도 모릅니까? 소공작을 본 적은 있습니까? 그 천사 같은 외모를요. 그는 그 외모로 바람을…….”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또각거리는 구둣소리에 점차 멀어져갔다.
오두막으로 도망이라도 칠까 싶은 때에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내 이름을 외쳤다.
“하트먼 백작 영애! 잠시만!”
곁눈질로 나를 부르는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에네스트 공작이었다. 연락하나 없이 사라지더니 이제와 공작이 되었다고 아는 척이라. 아니꼬운 마음을 꾹 눌러담고 그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공작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 이것을…….”
공작이 조심스레 내민 하얀 손수건 위의 블루 다이아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바닥에 떨어진 블루 다이아를 구둣발로 꾹 눌러밟고 왔다. 그러나 손수건 위의 블루 다이아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셨네요. 어찌 되었든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다이아를 빼앗듯 잡아채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바닥에 떨어지고 짓밟힌 후에야 내 손에 되돌아온 블루 다이아라니. 리하르트가 내게 치욕스러움을 안겨주고 싶은 것이라면 이번엔 제대로 성공했다.
나는 시종들에게 물어 리하르트가 있는 중앙 분수대로 향했다.
손에 쥔 블루다이아 때문인지 리하르트의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며칠 전, 리하르트가 약혼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자의로 백작저를 찾아왔었다.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그를 떠올리니 헛웃음이 흘렀다.
나는 그때의 그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천사처럼 찬란한 미소를 띠며 '파혼'을 입에 올리던 그 미친놈을.
리하르트의 기행은 아무리 길어봐야 3개월짜리였다. 유부녀나 코르티잔만 건드리며 방탕하게 굴던 그가, 하필 미혼의 젊은 귀족 영애에게 보석까지 쥐여주며 파혼을 요구한다? 이번엔 진짜 사랑이라도 만났다는 건가.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블루 다이아의 일은 리하르트가 단단히도 선을 넘은 것이다.
그의 눈동자를 닮은 블루 다이아를 그의 면상에 던져줄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초저녁인 데다 해가 다 떨어지지 않아 여전히 밝았다. 중앙 분수대는 밀회를 나눌 장소도 아닐뿐더러, 귀족들과 사용인들이 부지런히 지나다니는 길목이었다.
“하!”
나는 기어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미친 건가? 저 정신나간 망아지 새끼가.”
분노에 젖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시선의 끝엔 나의 약혼자 리하르트 벨테레브가 수잔나와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리하르트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그는 불이 붙을 것 같은 눈으로 내 눈을 응시한 채 수잔나를 끌어당겨 품안에 가두었다. 마치 이 모든 저열한 행위가 오로지 나 하나를 도발하기 위해 전시된 무대라는 듯이.
그와 마주친 순간 들끓던 감정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하, 이젠 지겹다, 지겨워.’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 이별을 고할 때다. 길고도 괴로운 시간이었다.
나는 수잔나를 품에 안고도 나를 향해있는, 그 진득한 눈빛을 마주했다. 어이가 없어 오히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손에 쥔 블루 다이아가 지는 해를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마치 그의 눈동자처럼.
나는 꽃보다 더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그래, 네가 원했던 대로 파혼해 주지. 그러나 쉽게는 안 될 말이지. 반드시 저 오만한 모가지를 꺾어 내 발밑에 조아리도록 만들어 줄 테다.’
황실 조사단의 파견은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시기보다 빠른 행보였다.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쇼어의 행동 개시 시점을 백작위의 승계가 확정되고 난 후로 점치고 있었다. 하트먼 백작이자 아노리스의 방패, 라이오넬 하트먼이 백작위 승계를 공표했다는 것은 곧 그의 건강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쇼어 남작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지?” “하트먼 백작님은 안중에 없는 듯했습니다. 꼭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처럼요.”아버지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때에 싸움을 걸어왔다는 것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건강이 틀림없이 나빠질 것이라는 철통같은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내가 하트먼에 숨어든 쇼어의 수족을 모두 처단한다 하더라도 절대 끊어낼 수 없는 벨머쉬필 공급망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레이 경, 아무래도 나는 돌아가 봐야겠어.” “소백작님, 반드시 소공작님을 대동하십시오. 벨머쉬필이 연관되어 있는 이상 그것의 성분과 제조 방법을 알리고 반입 루트에서 하트먼이 결백하다는 것을 밝혀줄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뿐이니까요.” “훗.”내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모르는 레이 경 덕분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한시라도 빨리 백작저로 되돌아가야 했다. 이 연회에서 하트먼의 화려한 귀환을 공표했다고 하더라도 황실 조사단을 맞이했을 백작저는 혼란할 것이 분명했다.나는 이미 이 연회에서 얻고자 했던 것들을 모두 쟁취했다. 그러니 당장 떠난다 하더라도 조
부와 권력은 그 무엇보다 정의에 가까운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두를 손에 쥔 자에게 세상은 참으로 관대했다.과거의 하트먼이 그랬다. 아무리 지독한 추문이라도 한겨울 소리 없이 뱉어내는 입김처럼 잔상만을 남긴 채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오늘, 하트먼은 다시금 권력의 중심에 섰다. 끔찍했던 내 과거 언행들이 그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았던 것처럼 나와 리하르트의 부정한 관계는 그렇게 덮일 것이다.내게 바른 도리나 정의 같은 이념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권력을 잃는 순간 정의라 믿었던 것들조차 누군가의 견해에 의해 절대 악으로 매도당했었으니까.황제 앞에서 내게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과거에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이념을 짊어지고 왜 그리 고통스러워했었는지.나는 엷은 미소로 리하르트를 끌어당겨 짧은 포옹을 했다. 그의 맹세를 이 에스텔 하트먼이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취하였음을, 그가 나의 소유임을 모두에게 선언하듯이 말이다.쿵쿵쿵.귓가에 세차게 뛰는 리하르트의 심장 소리가 스쳐 갔다.이 연회장에서 일어난 일은 이곳에 있지 않은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한 연극이었다. 제 형을 향한 비뚤어진 질투로 나의 날개를 꺾고 심연에 처박아 두려 한 우매하고 비겁한 자를 위한 연극.
나는 눈썰미가 썩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눈치가 없는 머저리도 아니었다.“하!”나란히 선 레이야와 바이올렛을 보고 있으니 부정할 수 없었다. 둘은 아무리 봐도 혈연관계임이 분명했다.“소공작과는 가족 같은 사이였겠군요. 그런 사람에게 차인 셈이니 목숨을 걸 만큼 힘들어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후—, 이 아가씨가 머리만 좋으면 뭐 하나, 완전 헛똑똑이야!”바이올렛이 질색했다. 솔직히 자세한 내막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둘의 서사가 사춘기 시절 읽었던 연애소설처럼 풋풋하고 아름답다면 둘 사이에 낀 내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악역에 불과할 것 같아서다.그러나 바이올렛은 심드렁한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이야기를 풀어냈다.“리키에겐 나도 내 어머니도 다 짐일 뿐이야. 넌 내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잘 알잖아. 내겐 이 질긴 목숨이 너무나 소중하거든.”“……리키?”애칭을 부르는구나 하는 생각보다 귀에 익은 ‘리키’라는 애칭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그 애칭이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바이올렛의 다음 말이 온 신경을 휩쓸어간 탓이다.“리하르트 말이야. 오라버니에게 짐이 되지 않
“리라 물 좀. 목말라.”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바이올렛의 담배 향이 남아 있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끙.”술이 얼마나 독한지 근육통이라도 생긴 것처럼 온몸이 쑤셨다. 술에 취해 기억이 사라졌다. 어떻게 공작저까지 되돌아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눈을 떴을 때는 아비스의 침실이었다.기억 나는 것이라곤 술을 털어 넣고 난 뒤 속이 타는 것 같은 기분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것, 자욱했던 담배 연기, 창 너머로 들리던 꽃 같은 여인들의 웃음소리 같은 희미한 분위기뿐이었다.베개에 머리를 그대로 처박고 엎드린 채 팔만 이불 밖에 꺼내 물을 청했다. 손에 차가운 잔이 와닿았다. 잔 안에 얼음이 부딪혀 짤랑, 하는 소리를 냈다. 나를 위해 얼음물을 준비해 준 리라의 배려가 고마웠다.물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남아 있는 얼음을 손에 덜어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아직도 취기가 남아 얼음을 가져다 대는 순간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기화해 버릴 것 같았다.얼음이 녹아 손목을 타고 팔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물은 곧 옷깃을 적시기 시작했다. 리라의 잔소리가 쏟아지기 전에 옷을 벗어낼 참이었다.하나, 둘 단추를 풀고 한쪽 어깨로 옷자락이 흘러내렸을 때였다.“제 취향은 벗기는 거지만 직접 벗
조금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상자 안에 오래 보관되어 조금은 누렇게 색이 바랜 이 종이 쪼가리처럼 리하르트와 바이올렛의 사이는 그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미 바래고 삭아가는, 잊힌 사이.그럼에도 그가 바이올렛을 떠올리며 그리운 이름이라 칭하는 것에 잠시나마 욱하는 기분이 들다니. 그를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겠다 마음 먹었으면서 쓸데없는 감정을 품는 것도, 그 감정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종류라는 것도 모두 나답지 않았다.나는 손안에 종이를 꽉 구겨 쥐고는 지하실을 빠져나왔다.“하아……. 집중해, 분노해, 에스텔! 칼을 갈고 독을 품어야지.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마.”혼잣말이 제멋대로 삐져 나간 감정의 가지를 가차 없이 잘라냈다. 내게 감정이란 쓸모없는 변수일 뿐이니까.* * *비음 섞인 웃음소리와 높은 음정의 호객하는 소리, 끈적한 음악이 온 거리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어머, 언니! 호위 기사가 이렇게 귀여우면 이런데 데려오는 게 아닌데—. 아하하핫!”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소음 속으로 사라졌다. 화려한 조명에 농을 걸어오는 여인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로소피어텔(Rosso-Viertel)은 아노리스의 가장 더럽고 화려한, 온갖 꽃들이 넘치는 거리였다.
쨍그랑!“에스텔 하트먼! 그 계집년만 아니었어도!”술잔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며 유리 조각이 바짓단에 튀었다. 안 그래도 최악이었던 기분이 바짓단에 튄 잔해물에 엉망으로 변했다.“재수가 없으니, 잔이 깨져도 이 지랄이야!”새 잔을 집어 들자 브론딘이 얼른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남작님, 모두 예상대로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예상대로? 이 멍청한 놈! 예상대로 된 것이면 빚더미에 앉을 일 따위 없었겠지!”분명히 곡물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뛸 것이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노리스는 극심한 기아에 허덕일 것이고 하트먼은 손가락질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충성심 높은 하트먼의 부관들을 매수하는 것부터 남작가 재정은 이미 바닥이었다. 그것을 만회해 보고자 급하게 곡식을 사들여 더 비싼 값에 팔아보고자 한 것이 오히려 남작가 재정을 파탄내 버렸다.반대로 처참한 몰골로 불행을 탓하고 망가져야 했을 에스텔은 날이 갈수록 본래의 위엄을 되찾아갔다. 내게 자비를 구하고 결국 내 소유물이 될 깜찍한 년이 그 똑똑한 머리와 재주로 어떻게든 이 고비를 넘겨보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결국 내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