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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uthor: 스루삐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2 12:01:25

[3개월 전.]

​

위태롭게 흔들리는 현의 트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수잔나의 손이 꼭 비브라토를 만들어내는 연주자의 손 같았다.

​

레이스로 치장한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나는 수잔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절약은 훌륭한 미덕이지요. 허나 온몸에 값비싼 보석을 휘감은 채 옷감만 줄인 꼴이라니. 진정으로 검소함을 실천하는 영애들에 대한 크나큰 실례 아니겠습니까?”

​

내가 수잔나의 옷차림을 지적하자 근처에서 구경하던 부인들마저 은근슬쩍 몸에 걸친 보석을 가리기 시작했다.

​

어이없게도 수잔나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이미 숱한 귀족 부인들이 애용하던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

이름도 잘 모르는 어린 영애 하나가 나서서 수잔나의 어깨를 툭 쳤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참견이었다.

​

“영애 가슴팍에 달고 있는 그 보석이 어떤 것인지는 아십니까? 하나는 하트먼 백작 영애가, 다른 하나는 그녀의 약혼자 벨테레브 소공작이 나눠 가졌답니다. 하트먼 백작 영애의 열여덟 번째 생일 연회에서요.”

​

수잔나의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럴 만도 했다. 성년식에 나눠 가진 보석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수잔나는 이목을 더 끌어보려는 심산인지 목소리를 높여 항의했다.

​

“하트먼 백작 영애! 제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아직도 모르십니까? 지난밤 당신과 밤을 지새운 사내가 누구인지.”

“그, 그 무슨! 저는 어제!”

​

그녀의 가슴팍에 블루 다이아가 반짝 거렸다. 잠깐이나마 통제하지 못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

스산하게 퍼진 살기에 흠칫 놀란 수잔나는 뒷걸음질 쳤다.

​

조심하려 했건만 검을 다루지 않는 이들에게 내 살기가 협박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실로 그럴만한 사유였다.

​

블루 다이아의 의미를 안다면 결코 가슴팍에 달고 있을 수 없었다.

​

나는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 레이스 부채의 끝으로 수잔나의 가슴팍에 달린 보석을 톡 건드렸다.

​

겨우 레이스 부채 끝에 닿았을 뿐이나 검에 맞기라도 한것처럼 블루 다이아는 힘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

“다른 이의 것을 탐내는 것은 절약이 아니랍니다. 성년식에 나눠 가진 보석을 적선받았다 해서 보석의 운명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감히 주제넘게도 말이지.”

“저, 저는!”

​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수잔나가 결국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

그러나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악한 미소를 띠며 수잔나를 지독하리만치 괴롭히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여우짓을 하며 리하르트에게 엉겨 붙어있던 수잔나를 향해 모두 ‘그럴 줄 알았어, 그러게 들이댈 사람에게 들이대야지, 저렇게 될 줄 모르고 그랬나.’ 등의 말을 보탤 뿐이었다.

​

홀로 남은 수잔나의 처절한 외침이 공허하게 퍼졌다.

​

“제,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시는 건가요! 소공작님과 혼인하신 것도 아니시면서. 정말이지! 영애의 이름이 아깝네요!”

“아하하. 제 이름 걱정할 시간에 영애 이름이나 돌아보시지 그러세요? 백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남의 약혼자를 탐하는 추잡스러움이라니. 저는 베링 자작가 영애라 생각지도 못하고 길거리 작부거나 코르티잔인 줄 알았습니다. 지나가던 개도 침을 뱉겠어요. 안 그런가요, 수잔나 베링 영애?”

​

수잔나는 결국 시뻘개진 얼굴로 도망치듯 뒤돌아갔다. 의기양양해진 나는 더 큰 목소리로 도망치는 수잔나에게 다시 한번 승리의 쐐기를 박았다.

​

“약혼의 의미가 무엇인지 떠올려 보시길 바라요. 아! 생각할 시간도 절약하는 중이시려나?”

​

날선 비아냥이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키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

승리감을 만끽하는 것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

​

나는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고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

“그러게 왜 남의 남자를 건드려.”

​

손바닥 안쪽이 얼얼했다. 며칠 전부터 수잔나가 리하르트에게 딱 달라붙어 앙앙대는 꼴을 참느라 손바닥 가득 손톱자국이 새겨진 탓이었다. 사실 온갖 아양을 떨어대는 수잔나보다 그녀를 보며 천치처럼 실실 웃고 있던 내 약혼자, 리하르트가 천 배는 더 혐오스러웠지만 말이다.

​

바닥에 떨어진 블루 다이아가 눈에 박혔다. 나와 나눠 가진 보석을, 감히 다른 여인에게 쥐여주다니.

​

블루 다이아가 무엇을 뜻하는지 제국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 치욕을, 그대로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

바닥에 뒹구는 블루 다이아가 리하르트의 눈동자인 것만 같아 차라리 누군가 집어가버렸으면 싶었다.

​

나는 블루 다이아를 구둣발로 꾹 눌러밟고 자리를 벗어났다.

​

여기저기에서 나를 안주 삼은 목소리가 들렸다.

​

“여신의 환생이라 불리면 뭐합니까. 성격이 저리 드센데.”

“그러게나 말이야. 그 유명했던 코르티잔에게도 극독을 먹여 쫓아냈다지 않나. 벨테레브 소공작이 밖으로 도는 것도 이해가 가.”

“그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소공작 말인가? ‘벨테레브의 씨뿌리개’라는 별명까지 붙었다던데.”

​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

‘후—. 다 들린다, 이것들아.’

​

지겨운 레퍼토리였다. 리하르트와 바람이 난 여인들은 모두 사교계를 떠났다. 내가 생각해도 그 응징이 소름 끼치도록 잔인하긴 했다. 그러나 그 이면은 알지도 못하면서 입방아를 찧어대는 꼴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

연회장을 빠져나가자 끈적하고도 질투 어린 시선들이 등 뒤로 쏟아졌다. 누군가는 내 완벽한 미모를 탐했고, 누군가는 하트먼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시기했다.

​

한쪽 구석 테라스에 모인 사내들 사이에 아버지의 친우 솔벤 자작이 술에 취해 또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

“우리 에스텔에게 유일한 흠결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그 개망나니 벨테레브 소공작이 그녀의 약혼자라는…….”

​

개망나니라는 말에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영식이 슬며시 물었다.

​

“저기, 벨테레브 소공작이 어떻길래 저리 망나니라는 말까지 나옵니까?”

“아직도 모릅니까? 소공작을 본 적은 있습니까? 그 천사 같은 외모를요. 그는 그 외모로 바람을…….”

​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또각거리는 구둣소리에 점차 멀어져갔다.

​

오두막으로 도망이라도 칠까 싶은 때에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내 이름을 외쳤다.

​

“하트먼 백작 영애! 잠시만!”

​

곁눈질로 나를 부르는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에네스트 공작이었다. 연락하나 없이 사라지더니 이제와 공작이 되었다고 아는 척이라. 아니꼬운 마음을 꾹 눌러담고 그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

“공작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 이것을…….”

​

공작이 조심스레 내민 하얀 손수건 위의 블루 다이아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바닥에 떨어진 블루 다이아를 구둣발로 꾹 눌러밟고 왔다. 그러나 손수건 위의 블루 다이아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있었다.

​

“쓸데없는 짓을 하셨네요. 어찌 되었든 감사합니다.”

​

나는 그에게서 다이아를 빼앗듯 잡아채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바닥에 떨어지고 짓밟힌 후에야 내 손에 되돌아온 블루 다이아라니. 리하르트가 내게 치욕스러움을 안겨주고 싶은 것이라면 이번엔 제대로 성공했다.

​

나는 시종들에게 물어 리하르트가 있는 중앙 분수대로 향했다.

​

손에 쥔 블루다이아 때문인지 리하르트의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며칠 전, 리하르트가 약혼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자의로 백작저를 찾아왔었다.

​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

그를 떠올리니 헛웃음이 흘렀다.

​

나는 그때의 그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천사처럼 찬란한 미소를 띠며 '파혼'을 입에 올리던 그 미친놈을.

​

리하르트의 기행은 아무리 길어봐야 3개월짜리였다. 유부녀나 코르티잔만 건드리며 방탕하게 굴던 그가, 하필 미혼의 젊은 귀족 영애에게 보석까지 쥐여주며 파혼을 요구한다? 이번엔 진짜 사랑이라도 만났다는 건가.

​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블루 다이아의 일은 리하르트가 단단히도 선을 넘은 것이다.

​

그의 눈동자를 닮은 블루 다이아를 그의 면상에 던져줄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초저녁인 데다 해가 다 떨어지지 않아 여전히 밝았다. 중앙 분수대는 밀회를 나눌 장소도 아닐뿐더러, 귀족들과 사용인들이 부지런히 지나다니는 길목이었다.

​

“하!”

​

나는 기어코 입술을 깨물었다.

​

“정말 미친 건가? 저 정신나간 망아지 새끼가.”

​

분노에 젖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시선의 끝엔 나의 약혼자 리하르트 벨테레브가 수잔나와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

리하르트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그는 불이 붙을 것 같은 눈으로 내 눈을 응시한 채 수잔나를 끌어당겨 품안에 가두었다. 마치 이 모든 저열한 행위가 오로지 나 하나를 도발하기 위해 전시된 무대라는 듯이.

​

그와 마주친 순간 들끓던 감정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

‘하, 이젠 지겹다, 지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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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 이별을 고할 때다. 길고도 괴로운 시간이었다.

​

나는 수잔나를 품에 안고도 나를 향해있는, 그 진득한 눈빛을 마주했다. 어이가 없어 오히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

손에 쥔 블루 다이아가 지는 해를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마치 그의 눈동자처럼.

​

나는 꽃보다 더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

‘그래, 네가 원했던 대로 파혼해 주지. 그러나 쉽게는 안 될 말이지. 반드시 저 오만한 모가지를 꺾어 내 발밑에 조아리도록 만들어 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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