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주버니를 정부로 두기로 했다.

시아주버니를 정부로 두기로 했다.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17
Por:  스루삐Atualizado agora
Idioma: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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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을 대신할 대리인께서는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익숙한 초콜릿 향. 찬란한 금발. 그리고 심장을 멎게 만든 푸른 눈동자. 결혼 상대는 동생인데, 왜 전 약혼자가 내 앞에 서 있는 걸까? 가장 잔인한 결혼식은, 가장 위험한 재회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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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프롤로그

오지 않을 것 같던 결혼식 날이 밝았다. 밤새 잠을 설쳤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울 속 굳은 얼굴을 애써 지우며 오늘 치러야 할 끔찍한 의식을 떠올렸다.

​

남편이 될 프레데릭은 좀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혼식 날이 밝도록 그의 맨얼굴조차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

‘설마 본인 결혼식에도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니겠지.’

​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가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의 등장이 이 새하얗게 꾸며진 결혼식장에 뚝 떨어진 오물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

“소백작님, 이제 식장으로 가시죠.”

“그래, 가야지.”

​

리라의 도움을 받으며 공작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이 결혼이 벨테레브 측에서도 감추고 싶은 일이라는 건 분명했다.

회랑을 빠져나오자 리라가 뒤로 젖혀두었던 면사포를 덮어 주었다.

​

“소백작님, 식장이 좀 소란스럽네요. 꼭 무슨 일이 터진 것처럼요.”

​

면사포가 드리우기 전 보았던 상황이 영 달갑지 않았다. 여기저기 팔짱을 낀 채 숙덕거리는 사용인들과 텅텅 비어 있는 하객석. 그나마 자리한 하객들의 분위기도 영 께름칙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기분 나쁜 웅성거림이 면사포 안에 맴돌았다.

​

아무리 세가 죽었다고는 하나 하트먼과 벨테레브의 결합이었다. 그런 자리에 황실의 귀빈조차 자리하지 않았다. 앙다문 입안이 썼다.

​

벨테레브에서 이 결혼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과 별개로 내게도 그리 내키는 결혼은 아니었다. 내 전 약혼자의 동생과 결혼하는 모습을 만인 앞에 보여주는 게 유쾌할 리 없으니까.

​

“무슨 일이 터졌으면 좀 어때. 결혼식도 못 하게 화려하게 터지면 더 좋지.”

​

말이 씨가 된 것처럼 그날에 터진 사건은 아주 화려했다.

​

식장에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건만 여기저기에서 고성이 튀어나왔다.

​

“…… 둘째 공자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괴물이 8마리나 나왔다던데 경계로 파견된 것이 맞습니까?”

​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도 몰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수치심과 분노가 발끝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

경계 밖으로 무려 여덟 마리의 괴물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경계가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

엄연히 서남부 평야에서 생긴 하트먼의 일인데도 그 사실을 결혼식장 한복판에서 황실도, 벨테레브도 아닌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알게 되다니.

​

“설마, 저 악독한 여인에게서 도망이라도 친 것은 아닐는지…….”

“그럼 대체 언제쯤 식이 진행된단 말입니까!”

​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결혼식 사회자가 앞으로 나와 하객들에게 상황을 알렸다.

​

“다들 아시겠지만 프레데릭 벨테레브 공자께서 경계 파견 지휘관이 된 관계로 급하게 현장으로 가셨습니다.”

​

괴물을 상대해본 기사단은 오로지 하트먼 뿐이었다. 그런데도 하트먼에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 감히, 내 영지의 일을!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나를 이런 우스꽝스러운 인형 놀이에 묶어두고 하트먼의 기세를 꺾어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다니. 당장에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찢고 대평야로 말을 달리고 싶은 생각이 넘실거렸다.

​

이 굴욕을, 이 치욕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나의 하트먼은 반드시 일어설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내게 이 수치를 안겨준 모든 이들을 남김없이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

면사포 너머로 내 검을 찾는 눈길이 분주해졌다. 하지만 허공을 가르는 사회자의 낭랑한 선언이 나를 다시금 이 빌어먹을 인형극의 식장 한가운데로 멱살 잡듯 끌어내렸다.

​

“오늘 결혼식은 모든 절차를 건너뛰고 반지 교환과 성혼 선언 후 종료할 예정입니다. 신랑을 대신할 대리인께서는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끼익하고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

뚜벅이는 구두 소리가 버진로드에 오르고 프레데릭의 빈자리를 대신할 이가 다가와 눈앞에 섰다. 익숙한 초콜릿 향이 면사포 안으로 훅 끼쳐왔다.

​

“!!”

​

쿵.

​

익숙하고 농염한 그 향기에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완벽했던 내 인생의 유일한 흠결이었던 사내. 그와 파혼한 지 겨우 석 달.

​

대리인이라면 으레 프레데릭의 부친인 벨테레브 공작이 자리했어야 했다.

​

​한데, 어째서 그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것인지.

​

당혹스러운 시선의 끝.

​

무겁게 뚜벅이는 구두 소리, 면사포 끝자락에 모습을 드러낸 까만 구두, 길게 뻗은 탄탄한 다리와 압도적인 체격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올리던 순간, 숨이 턱 막혔다.

​

찬란하게 부서지는 금발과 심해를 퍼 올린 듯한 파란 눈동자.

​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무심하게 손을 뻗어 온 이는 내 남편이 될 자의 쌍둥이 형이자 나의 전 약혼자, 리하르트 벨테레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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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을 것 같던 결혼식 날이 밝았다. 밤새 잠을 설쳤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거울 속 굳은 얼굴을 애써 지우며 오늘 치러야 할 끔찍한 의식을 떠올렸다.​남편이 될 프레데릭은 좀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혼식 날이 밝도록 그의 맨얼굴조차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설마 본인 결혼식에도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니겠지.’​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가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의 등장이 이 새하얗게 꾸며진 결혼식장에 뚝 떨어진 오물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소백작님, 이제 식장으로 가시죠.” “그래, 가야지.”​리라의 도움을 받으며 공작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이 결혼이 벨테레브 측에서도 감추고 싶은 일이라는 건 분명했다.회랑을 빠져나오자 리라가 뒤로 젖혀두었던 면사포를 덮어 주었다.​“소백작님, 식장이 좀 소란스럽네요. 꼭 무슨 일이 터진 것처럼요.”​면사포가 드리우기 전 보았던 상황이 영 달갑지 않았다. 여기저기 팔짱을 낀 채 숙덕거리는 사용인들과 텅텅 비어 있는 하객석. 그나마 자리한 하객들의 분위기도 영 께름칙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기분 나쁜 웅성거림이 면사포 안에 맴돌았다.​아무리 세가 죽었다고는 하나 하트먼과 벨테레브의 결합이었다. 그런 자리에 황실의 귀빈조차 자리하지 않았다. 앙다문 입안이 썼다.​벨테레브에서 이 결혼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과 별개로 내게도 그리 내키는 결혼은 아니었다. 내 전 약혼자의 동생과 결혼하는 모습을 만인 앞에 보여주는 게 유쾌할 리 없으니까.​“무슨 일이 터졌으면 좀 어때. 결혼식도 못 하게 화려하게 터지면 더 좋지.”​말이 씨가 된 것처럼 그날에 터진 사건은 아주 화려했다.​식장에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건만 여기저기에서 고성이 튀어나왔다.​“…… 둘째 공자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괴물이 8마리나 나왔다던데 경계로 파견된 것이 맞습니까?”​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도 몰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하늘이 무너지는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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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개월 전.]​위태롭게 흔들리는 현의 트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수잔나의 손이 꼭 비브라토를 만들어내는 연주자의 손 같았다.​레이스로 치장한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나는 수잔나를 노려보고 있었다.​“절약은 훌륭한 미덕이지요. 허나 온몸에 값비싼 보석을 휘감은 채 옷감만 줄인 꼴이라니. 진정으로 검소함을 실천하는 영애들에 대한 크나큰 실례 아니겠습니까?”​내가 수잔나의 옷차림을 지적하자 근처에서 구경하던 부인들마저 은근슬쩍 몸에 걸친 보석을 가리기 시작했다.​어이없게도 수잔나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이미 숱한 귀족 부인들이 애용하던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이름도 잘 모르는 어린 영애 하나가 나서서 수잔나의 어깨를 툭 쳤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참견이었다.​“영애 가슴팍에 달고 있는 그 보석이 어떤 것인지는 아십니까? 하나는 하트먼 백작 영애가, 다른 하나는 그녀의 약혼자 벨테레브 소공작이 나눠 가졌답니다. 하트먼 백작 영애의 열여덟 번째 생일 연회에서요.”​수잔나의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럴 만도 했다. 성년식에 나눠 가진 보석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수잔나는 이목을 더 끌어보려는 심산인지 목소리를 높여 항의했다.​“하트먼 백작 영애! 제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아직도 모르십니까? 지난밤 당신과 밤을 지새운 사내가 누구인지.”“그, 그 무슨! 저는 어제!”​그녀의 가슴팍에 블루 다이아가 반짝 거렸다. 잠깐이나마 통제하지 못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스산하게 퍼진 살기에 흠칫 놀란 수잔나는 뒷걸음질 쳤다.​조심하려 했건만 검을 다루지 않는 이들에게 내 살기가 협박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실로 그럴만한 사유였다.​블루 다이아의 의미를 안다면 결코 가슴팍에 달고 있을 수 없었다.​나는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 레이스 부채의 끝으로 수잔나의 가슴팍에 달린 보석을 톡 건드렸다.​겨우 레이스 부채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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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황성과 벨테레브의 경계에 있는 작은 오두막. 내게 유일하게 친우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프레드! 네 생각엔 리하르트가 제정신인 거 같니? 약혼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데, 입을 맞추고 끌어 안더라니까! 내겐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던 놈이 말이야.”​심드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프레드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당신도 그 여자처럼 리하르트가 안아주길 바랐습니까?”​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내 입에서 리하르트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때면 프레드는 이렇게 딱딱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나는 일부러 얼굴을 잔뜩 구기고 말했다.​“실성했니? 이젠 염증이 나서 줘도 싫어. 그 불결한 바람기에 신물이 난다고. 근데 이제 그것도 끝이야. 나 곧 파혼해.”​당당하게 파혼에 관해 이야기하자 호기심이 생겼는지 갑작스레 여러 질문을 쏟아냈다. 그의 속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정말입니까? 파혼하면 어떡하시려고요? 더 나은 혼처라도 있습니까?”“왜 없겠어. 나 하트먼이야. 재력이라면 제국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는데 어디든 다 환영이지. 여차하면 리하르트 약 좀 오르라고 그 쌍둥이 동생한테 시집가 버리지 뭐.“​홧김에 뱉은 농담이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리하르트의 동생'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프레드의 미간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손에 쥔 나무 컵 손잡이가 빠직거리며 깨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인지. 그는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둘이 형제이잖습니까. 백작님이 허락 안 하실 겁니다. 거기다가 프레데릭은 리하르트랑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던데…….아시잖습니까. 공작가의 저주요.”​헛소문에 흔들리지 않는 그가 갑자기 항간에 떠도는 공작가의 저주에 관해 언급했다. 별일이었다.​“저주? 너는 그게 진짜라고 믿어?”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이상하게도 프레드의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공작가의 저주는 제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한 낭설이었다. 손이 귀한 벨테레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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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노련하게 표정을 숨기고 3황자에게 말했다.​“고작 연애 상담을 위해 백작저에 오신 거라면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겠군요.”​3황자가 리하르트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거나 수잔나와의 참사를 탓할 생각이라면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수잔나야말로 내 약혼을 파기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이였다.황자씩이나 되는 놈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하트먼의 소백작을 찾다니. 하트먼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3황자는 멍청하거나 사랑에 눈이 먼 얼간이쯤 되겠다.​자리를 뜨려는 찰나 예상 밖에도 황자는 또다시 엉뚱한 말을 해왔다.​“아니요. 나는 영애를 도우려 합니다. 소공작에게 위자료를 뜯어내실 생각 아닙니까? 그 액수를 무조건 더 높여 책정해 주지요. 그래야 내 얄팍한 질투심도 조금 해소가 될 테니까요.”“베링 자작 영애를 마음에 두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리하르트와 제가 파혼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어집니다. 리하르트와 베링 영애의 관계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요.”“베링 영애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공작 부인의 자리라면 기꺼이 도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소백작의 파혼에 개입하면 황실에서 어찌 나올지 너무 뻔히 보여서 말입니다.”​이제야 본론이다. 지겨울 정도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었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그에게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그래서, 지금 제게 ‘계약 약혼’이라도 청하시는 건가요?”“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베링 영애가 상처받고 힘들어할 때를 대비해 제 옆자리는 비워둘 생각입니다. 물론, 부황의 명대로 소백작께 청혼서는 보내야겠지요. 그러니 소백작께서 제 청혼서를 아주 요란하게 거절해 주십시오. 피차 원치 않는 혼약에 묶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당돌하고 뻔뻔한 대답에 하마터면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눈앞에 버젓이 앉아있는 이 에스텔 하트먼을! 원치 않는 혼약이라도 이해관계만 맞는다면 받아들일 계산적인 사람으로 몰아가 제 사랑이 세기의 사랑인 양 포장이라도 하고 싶은 것인가. 교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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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리하르트는 다리를 꼰 채 비스듬하게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문소리에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 ‘하! 이미 내가 온 거 알고 있으면서 눈도 안 뜬다고?’ ​ 거만한 모습에 기분이 팍 상했다. 파혼장에 황가의 도장마저 찍힌 마당에 더 이상 ‘예의를 차린 약혼녀’ 역할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 수틀리면 당장에 ‘하트먼 기사단장 에스텔’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 “크흠!” ​ 작게 헛기침 소리를 내 도착했음을 알렸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 응접실로 들어온 것이 내가 아니라 다른 여인이었다면 대번에 눈을 뜨고 일어나 그 여인을 희롱했을 것이다. ​ 황실의 명령으로 ‘진심 어린 사과’를 하러 온 주제에 아무리 그 ‘진심 어린 사과’에 진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시하다니. ​ ‘그렇다고 기죽을 줄 알고?’ ​ 나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 “베딘, 돌아가지.” ​ 리하르트는 내가 응접실을 나가려 하자 그제야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 “많이 변하셨군요, 소백작. 나는 그대가 여전히 얼굴을 붉히던 소녀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허튼소리. 리하르트 벨테레브, 나한테 사과하러 온 거 아니었습니까? 사람이 온 걸 알면서도 무시하는 게 사과하는 태도 맞습니까?” ​ 날 선 시선에도 리하르트는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 그는 정말이지 천사 같은 외모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뿐이다. 나는 저 천사 같은 모습 안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알고 있다. 그의 본모습은 자신보다 적게는 일곱, 많게는 열 살의 연상까지 주무르고 희롱하는 난잡함의 덩어리다. ​ 다행이라면 내게만은 그 더러운 입맛이 돌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우리 둘 사이는 미지근한 기억과 더럽혀진 세월, 겨우 그것뿐이었다. ​ 리하르트는 능글맞은 미소를 유지했다. ​ “저는 고결하고 오만한 당신이 싫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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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버지는 옆구리를 크게 다쳐 타인의 도움 없이는 거동조차 어려웠다. 이대로 회복을 기다리다간 영지민들이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할 것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통제해야 했다.​집무실에 모인 가신들은 본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말싸움으로 진을 뺐다.​“기사단이 저꼴인데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균열을 보셨다면 이리 말하지는 못할 겁니다. 무려 산 하나 크기를 넘는다고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서남부 평야 대부분을 잃게 될 겁니다!”​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괴물들이 들락거리는 균열이라니. 균열의 크기도 상상을 초월했고 생긴 위치도 좋지 못했다.​“서남부 평야의 한복판에 생긴 균열로 인해 농작물이 모두 고사했습니다. 분기 수확은 완료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평야 한 가운데는 총경작 기간이 3년이나 되는 작물이었습니다. 그것을 전부 잃었으니 당장 백작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멀지 않았습니다.” “그게 문제겠습니까. 이제 제국은 식량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3년이나 키운 작물이 모두 말라 죽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당장 한 달 뒤부터는 파종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야 땅속에서 겨울을 버틴 밀씨앗이 싹을 틔울것이다. 파종 시기를 놓치면 이듬해에 수확 할 수 있는 밀의 품질과 양이 상상을 초월하도록 달라졌다. 이것은 곧 아노리스 제국 전체의 식량사정과 직결되었다.​“괴물이 나타난 뒤로는 겁쟁이들이 전부 도망쳐서 파종은 고사하고 당장 말라죽은 식물들을 걷어내는 것부터 일손이 부족할 지경이오!”“그럼 어쩌자는 것입니까! 당장 균열에서 다시 괴물이라도 튀어나온다면요!”​보고된 괴물은 단 두 개체였다. 그러나 그 두 개체가 잘 훈련된 하트먼 기사단 30명을 모조리 쓸어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졌다. 다행이라면 선제공격하지 않는다는 점 뿐이었다.​젊은 가신들은 모두 황실에 알리기를 원했다.​“황실에 먼저 알리셔야 합니다.” “안 될 말입니다. 먼저 균열부터 처리하고 난 다음에 알려야지요! 아무것도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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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계가 발생한 뒤 재빠르게 어머니를 외가로 보낸 결정은 정말 탁월했다. 평생을 고결하게 살아오신 어머니가 이 수모를 겪으셨다면 분명 까무러치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황궁 기사단 중에 가장 말단에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이는 기사단이라고 해도 황제를 가장 측근에서 호위하는 셀레스티얼 가드 기사단 중 하나였다. 그러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내가 글린트 기사단 근위병들의 천박함을 너무 얕잡아 봤던 것일까.​“야야! 이것 봐! 제국 최고 미녀라더니 몸매도 끝장나는데? 내가 포박해도 되나?”“잘 붙들어봐. 우리도 같이 감상하게—, 크크큭.”​하급 근위병들이 끈적한 시선으로 힐끔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저열한 농담이 그 뒤를 이었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무례를 넘어서서 천박하고 추잡스러웠다.​검을 쥐는 것조차 서투른 말단의 기사 놈들에게 한낱 노리개 따위로 비치다니. 당장이라도 천박한 눈깔들을 파내고 혀를 잘라버리고 싶은 살의가 끓어올랐다.​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쓰레기 같아도 엄연히 황명을 수행하는 집행관들이었다. 가솔들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 이 치욕을 씹어 삼켜야 했다.​애먼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짓이기며 참을성의 한계를 체감하던 때였다.​빡!​제법 날렵해 보이는 선임 근위병 하나가 나를 희롱하던 기사들의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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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쇼어 남작에게 돌아갔다. 쇼어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변했다.​“폐하, 저들을 믿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들은 도래하는 대출 만기 연장 때문에 균열의 존재를 함구한 것입니다! 상황을 알리라는 황실의 지고한 명조차 지키지 않는 것을 보시고도 모르시겠습니까! 저 요망한 계집년이 놀리는 간사한 주둥이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저 사악한 여인은 사교계의 숱한 여인들을 파멸시킨 표독한 마녀입니다! 그 악독한 저주와 원한이 땅을 병들게 하고 결국 이 제국에 끔찍한 균열을 불러온 것입니다!”​아차 싶었다. 가신 중에 배신자가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하다니. 명백한 실책이다.​뒷골이 당겨오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기분에 눈앞이 어질했다.​그러나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그가 내세운 근거들은 하나같이 물증이라곤 없는 허무맹랑한 말 뿐이었다. 우격다짐으로 하트먼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의적으로 논점을 흐린 남작을 반박하려 했을 때였다.​“쇼어남작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과거 리하르트와 염문을 뿌렸던 여인들의 지인이 하나둘 과거 지독했던 내 행실에 대해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헬렌 앨파라스 자작 부인을 기억하십니까? 헬렌은 제 동생이었습니다. 저 백작 영애는 그 아이를 핍박하여 사교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고 지금은!……흐윽.”“황실이 인정한 건축가 루나 카스텔룸은 또 어떻습니까! 비록 평민이었다고는 하나 제국을 대표할 인재였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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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두운 감옥의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간수가 무거운 철문을 밀어젖혔다. 강렬한 햇살이 따갑게 쏟아져 내렸다. 줄곧 어두운 곳에 있다 밖에 나온 탓에 잠시 현기증이 일어 몸이 휘청였다. ​ “아아—! 에스텔!” ​ 울음이 차오른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른하게 들려왔다. ​ 밝은 빛에 적응해 점차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베일을 쓴 채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 며칠 사이 몰라보게 변해버린 모습에 어머니는 짧은 탄성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볼을 적셨다. 잘못도 없이 죄송했다. 나는 주저앉았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 “어머니, 울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 곱던 아이가 묽은 수프 한 그릇도 못 먹은 것이냐. 이 어미를 얼마나 속 끓이게 해야 만족하겠니, 아가.” ​ 어머니는 까칠해진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커다란 눈물방울을 무릎 위로 뚝뚝 떨구었다. 비쩍 말라 한 줌도 되지 않을 팔뚝이 피죽도 먹지 못한 것처럼 안쓰럽게 보였으니 당연했다. ​ 몇 발짝 뒤엔 전신을 까만색으로 온통 칠해놓은 듯한 거구의 남성이 말뚝으로 박아놓은 듯 서 있었다. ​ 설명하기 힘든 이질감이 느껴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까만 로브에 까만 가면…….” ​ 색이라곤 없이 온몸이 새까맣게 보였다. 가면까지 온통 까만 데다 눈구멍까지 천을 덧대 놓았다. 뜨거운 날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마치 그의 주변만은 심연처럼 서늘하고 기민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 그가 어머니를 이곳으로 끌어왔을 것이다. ​ ‘이런 몰골을 어머니께 보이게 하다니.’ ​ 고마움보다 형언할 수 없는 거부감이 먼저 일었다. 눈이 시큰하도록 그를 노려봤다. ​ “쯧.” ​ 사내는 혀를 차며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 “어머니, 그자입니까? 프레데릭 벨테레브요.” ​ 눈물이 한가득 고인 어머니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나는 그 까만 형상이 멀어져 가는 것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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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에게 에스텔은 경계 너머의 삶을 이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를 처음부터 비호하고 나섰다면, 하다못해 경계에서 괴물이 튀어나온 순간에 곧장 경계로 향했다면 이런 기회는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 은은하게 번지는 가드니아 향기가 코끝을 스쳐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 그녀가 자포자기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숨이 얽힐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본능이 꿈틀거렸다. ​ 반대로 이 지경까지 되어서야 그녀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 그녀의 불행을 등에 업고 얻어낸 반쪽짜리 진심이 못내 가슴을 난도질했다. 그러나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린 제한된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몸 구석구석 탐하고 싶었다. ​ “하아⋯⋯.” ​ 그녀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이성과 강한 충돌을 일으켰다. 그녀의 어깨 위에 얼굴을 떨구고 안에 담은 말들을 고르고 골라 뱉어냈다. ​ “후회…… 하실지 모릅니다.” “그딴 거 난 안 해. 넌? 후회할 거 같아?” ​ 또렷하게 의사를 밝히는 파동이 번졌다. ​ 그녀가 내 정체를 알게된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까. ‘프레데릭’에게 순결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견디지 못해 나를 택한 그녀가……. ​ ‘죽어도 내 입으로는 말 못 해.’ ​ 도저히 밝힐 수 없었다. 그녀를 반역이라는 굴레에서 건져 올린 프레데릭이 실은 그녀를 두고 가야 하는 프레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껏 평민이라 알고 있었던 프레드의 정체가 그녀가 저주해 마지않던 리하르트의 동생이라는 것도. ​ 그녀와 몸이 얽힐수록 달큰한 가드니아의 향이 농도를 더해갔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 알았다면, 이라니. 의미 없는 가정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녀에게 끝내 밝히지 못한 정체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의 말도 모두 전하지 못한 채 목구멍 안쪽으로 눌러 삼켰다. ​ 그녀의 앞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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