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신랑을 대신할 대리인께서는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익숙한 초콜릿 향. 찬란한 금발. 그리고 심장을 멎게 만든 푸른 눈동자. 결혼 상대는 동생인데, 왜 전 약혼자가 내 앞에 서 있는 걸까? 가장 잔인한 결혼식은, 가장 위험한 재회로 시작됐다.
Ver mais오지 않을 것 같던 결혼식 날이 밝았다. 밤새 잠을 설쳤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울 속 굳은 얼굴을 애써 지우며 오늘 치러야 할 끔찍한 의식을 떠올렸다.
남편이 될 프레데릭은 좀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혼식 날이 밝도록 그의 맨얼굴조차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설마 본인 결혼식에도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니겠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가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의 등장이 이 새하얗게 꾸며진 결혼식장에 뚝 떨어진 오물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소백작님, 이제 식장으로 가시죠.”
“그래, 가야지.”
리라의 도움을 받으며 공작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이 결혼이 벨테레브 측에서도 감추고 싶은 일이라는 건 분명했다.
회랑을 빠져나오자 리라가 뒤로 젖혀두었던 면사포를 덮어 주었다.
“소백작님, 식장이 좀 소란스럽네요. 꼭 무슨 일이 터진 것처럼요.”
면사포가 드리우기 전 보았던 상황이 영 달갑지 않았다. 여기저기 팔짱을 낀 채 숙덕거리는 사용인들과 텅텅 비어 있는 하객석. 그나마 자리한 하객들의 분위기도 영 께름칙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기분 나쁜 웅성거림이 면사포 안에 맴돌았다.
아무리 세가 죽었다고는 하나 하트먼과 벨테레브의 결합이었다. 그런 자리에 황실의 귀빈조차 자리하지 않았다. 앙다문 입안이 썼다.
벨테레브에서 이 결혼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과 별개로 내게도 그리 내키는 결혼은 아니었다. 내 전 약혼자의 동생과 결혼하는 모습을 만인 앞에 보여주는 게 유쾌할 리 없으니까.
“무슨 일이 터졌으면 좀 어때. 결혼식도 못 하게 화려하게 터지면 더 좋지.”
말이 씨가 된 것처럼 그날에 터진 사건은 아주 화려했다.
식장에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건만 여기저기에서 고성이 튀어나왔다.
“…… 둘째 공자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괴물이 8마리나 나왔다던데 경계로 파견된 것이 맞습니까?”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도 몰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수치심과 분노가 발끝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경계 밖으로 무려 여덟 마리의 괴물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경계가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엄연히 서남부 평야에서 생긴 하트먼의 일인데도 그 사실을 결혼식장 한복판에서 황실도, 벨테레브도 아닌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알게 되다니.
“설마, 저 악독한 여인에게서 도망이라도 친 것은 아닐는지…….”
“그럼 대체 언제쯤 식이 진행된단 말입니까!”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결혼식 사회자가 앞으로 나와 하객들에게 상황을 알렸다.
“다들 아시겠지만 프레데릭 벨테레브 공자께서 경계 파견 지휘관이 된 관계로 급하게 현장으로 가셨습니다.”
괴물을 상대해본 기사단은 오로지 하트먼 뿐이었다. 그런데도 하트먼에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 감히, 내 영지의 일을!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나를 이런 우스꽝스러운 인형 놀이에 묶어두고 하트먼의 기세를 꺾어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다니. 당장에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찢고 대평야로 말을 달리고 싶은 생각이 넘실거렸다.
이 굴욕을, 이 치욕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나의 하트먼은 반드시 일어설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내게 이 수치를 안겨준 모든 이들을 남김없이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면사포 너머로 내 검을 찾는 눈길이 분주해졌다. 하지만 허공을 가르는 사회자의 낭랑한 선언이 나를 다시금 이 빌어먹을 인형극의 식장 한가운데로 멱살 잡듯 끌어내렸다.
“오늘 결혼식은 모든 절차를 건너뛰고 반지 교환과 성혼 선언 후 종료할 예정입니다. 신랑을 대신할 대리인께서는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끼익하고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뚜벅이는 구두 소리가 버진로드에 오르고 프레데릭의 빈자리를 대신할 이가 다가와 눈앞에 섰다. 익숙한 초콜릿 향이 면사포 안으로 훅 끼쳐왔다.
“!!”
쿵.
익숙하고 농염한 그 향기에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완벽했던 내 인생의 유일한 흠결이었던 사내. 그와 파혼한 지 겨우 석 달.
대리인이라면 으레 프레데릭의 부친인 벨테레브 공작이 자리했어야 했다.
한데, 어째서 그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것인지.
당혹스러운 시선의 끝.
무겁게 뚜벅이는 구두 소리, 면사포 끝자락에 모습을 드러낸 까만 구두, 길게 뻗은 탄탄한 다리와 압도적인 체격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올리던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찬란하게 부서지는 금발과 심해를 퍼 올린 듯한 파란 눈동자.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무심하게 손을 뻗어 온 이는 내 남편이 될 자의 쌍둥이 형이자 나의 전 약혼자, 리하르트 벨테레브였다.
부와 권력은 그 무엇보다 정의에 가까운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두를 손에 쥔 자에게 세상은 참으로 관대했다.과거의 하트먼이 그랬다. 아무리 지독한 추문이라도 한겨울 소리 없이 뱉어내는 입김처럼 잔상만을 남긴 채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오늘, 하트먼은 다시금 권력의 중심에 섰다. 끔찍했던 내 과거 언행들이 그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았던 것처럼 나와 리하르트의 부정한 관계는 그렇게 덮일 것이다.내게 바른 도리나 정의 같은 이념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권력을 잃는 순간 정의라 믿었던 것들조차 누군가의 견해에 의해 절대 악으로 매도당했었으니까.황제 앞에서 내게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과거에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이념을 짊어지고 왜 그리 고통스러워했었는지.나는 엷은 미소로 리하르트를 끌어당겨 짧은 포옹을 했다. 그의 맹세를 이 에스텔 하트먼이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취하였음을, 그가 나의 소유임을 모두에게 선언하듯이 말이다.쿵쿵쿵.귓가에 세차게 뛰는 리하르트의 심장 소리가 스쳐 갔다.이 연회장에서 일어난 일은 이곳에 있지 않은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한 연극이었다. 제 형을 향한 비뚤어진 질투로 나의 날개를 꺾고 심연에 처박아 두려 한 우매하고 비겁한 자를 위한 연극.
나는 눈썰미가 썩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눈치가 없는 머저리도 아니었다.“하!”나란히 선 레이야와 바이올렛을 보고 있으니 부정할 수 없었다. 둘은 아무리 봐도 혈연관계임이 분명했다.“소공작과는 가족 같은 사이였겠군요. 그런 사람에게 차인 셈이니 목숨을 걸 만큼 힘들어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후—, 이 아가씨가 머리만 좋으면 뭐 하나, 완전 헛똑똑이야!”바이올렛이 질색했다. 솔직히 자세한 내막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둘의 서사가 사춘기 시절 읽었던 연애소설처럼 풋풋하고 아름답다면 둘 사이에 낀 내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악역에 불과할 것 같아서다.그러나 바이올렛은 심드렁한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이야기를 풀어냈다.“리키에겐 나도 내 어머니도 다 짐일 뿐이야. 넌 내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잘 알잖아. 내겐 이 질긴 목숨이 너무나 소중하거든.”“……리키?”애칭을 부르는구나 하는 생각보다 귀에 익은 ‘리키’라는 애칭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그 애칭이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바이올렛의 다음 말이 온 신경을 휩쓸어간 탓이다.“리하르트 말이야. 오라버니에게 짐이 되지 않
“리라 물 좀. 목말라.”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바이올렛의 담배 향이 남아 있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끙.”술이 얼마나 독한지 근육통이라도 생긴 것처럼 온몸이 쑤셨다. 술에 취해 기억이 사라졌다. 어떻게 공작저까지 되돌아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눈을 떴을 때는 아비스의 침실이었다.기억 나는 것이라곤 술을 털어 넣고 난 뒤 속이 타는 것 같은 기분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것, 자욱했던 담배 연기, 창 너머로 들리던 꽃 같은 여인들의 웃음소리 같은 희미한 분위기뿐이었다.베개에 머리를 그대로 처박고 엎드린 채 팔만 이불 밖에 꺼내 물을 청했다. 손에 차가운 잔이 와닿았다. 잔 안에 얼음이 부딪혀 짤랑, 하는 소리를 냈다. 나를 위해 얼음물을 준비해 준 리라의 배려가 고마웠다.물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남아 있는 얼음을 손에 덜어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아직도 취기가 남아 얼음을 가져다 대는 순간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기화해 버릴 것 같았다.얼음이 녹아 손목을 타고 팔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물은 곧 옷깃을 적시기 시작했다. 리라의 잔소리가 쏟아지기 전에 옷을 벗어낼 참이었다.하나, 둘 단추를 풀고 한쪽 어깨로 옷자락이 흘러내렸을 때였다.“제 취향은 벗기는 거지만 직접 벗
조금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상자 안에 오래 보관되어 조금은 누렇게 색이 바랜 이 종이 쪼가리처럼 리하르트와 바이올렛의 사이는 그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미 바래고 삭아가는, 잊힌 사이.그럼에도 그가 바이올렛을 떠올리며 그리운 이름이라 칭하는 것에 잠시나마 욱하는 기분이 들다니. 그를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겠다 마음 먹었으면서 쓸데없는 감정을 품는 것도, 그 감정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종류라는 것도 모두 나답지 않았다.나는 손안에 종이를 꽉 구겨 쥐고는 지하실을 빠져나왔다.“하아……. 집중해, 분노해, 에스텔! 칼을 갈고 독을 품어야지.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마.”혼잣말이 제멋대로 삐져 나간 감정의 가지를 가차 없이 잘라냈다. 내게 감정이란 쓸모없는 변수일 뿐이니까.* * *비음 섞인 웃음소리와 높은 음정의 호객하는 소리, 끈적한 음악이 온 거리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어머, 언니! 호위 기사가 이렇게 귀여우면 이런데 데려오는 게 아닌데—. 아하하핫!”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소음 속으로 사라졌다. 화려한 조명에 농을 걸어오는 여인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로소피어텔(Rosso-Viertel)은 아노리스의 가장 더럽고 화려한, 온갖 꽃들이 넘치는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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