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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Chapters

제11화

장 상궁은 김동건을 보자마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방 안에서 일어선 사내의 눈빛이 어쩐지 몹시 섬뜩했기 때문이다.김동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 부인이 태자비마마에게 독을 썼다는 말이냐?”영문을 모르는 장 상궁은 여전히 거침없이 쏘아붙였다.“나으리, 마님께서는 너무 분수를 모르고 계십니다. 이번 일로 저희 마마께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게다가 이번에 마마께 독까지 탔으니, 그냥 넘기셔서는 아니 됩니다. 반드시 엄히 다스리셔야 합니다.”장 상궁이 더 말하기도 전에 김동건의 얼굴이 시퍼렇게 굳었다.짝! 짝!김동건이 장 상궁의 뺨을 두 차례 후려치자, 장 상궁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뺨을 감싸고 소리쳤다.“나으리, 대체 무슨 짓이십니까! 저는 태자비마마의 유모입니다! 감히 저를 치시다니, 마마께서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김동건은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을 쳤다.“내가 조예진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기에, 너희 같은 것들까지 내가 장군의 몸으로 하인 하나 벌하지도 못할 사람이라 여긴 것이냐?”김동건은 장 상궁의 뒷덜미를 움켜쥐어 곁에 있던 호위무사에게 내던지더니, 허리춤의 장검을 짚은 채 마차에 올라탄 뒤 낮게 명했다.“여봐라. 말을 준비해 궁으로 간다.”조예진은 자잘한 일만 생겨도 김동건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궁문을 지키던 금군들은 장 상궁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겁에 질린 표정은 미처 살피지 못한 채 곧장 김동건을 들여보냈다.“드디어 오셨군요!”조예진을 모시는 상궁 하나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오늘 아침 마마께서는 장군부인께서 보내신 음식을 드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복통을 앓으시더니 방금은 피까지 토하시고는 정신을 잃으셨습니다.”“부인께서 마마를 해치신 것이 한두번이 아니니, 이번만큼은 절대 가볍게 넘기시면 아니 됩니다! 나으리께서 진정 마음에 품으신 분은 마마이시니, 이제 그 여인을 내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말을 이어 가던 상궁은 김동건의 안색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태자비를 지나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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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김동건은 겁에 질린 듯 다급히 소리쳤다.“그만해라! 이 악독한 계집, 그 입 다물라!”김동건은 칼을 들고 조예진을 향해 내리찍으려 했다.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누군가 재빨리 뛰어들어 그 칼을 막아 섰다.문밖에 있던 궁녀가 안에서 들려오는 다툼 소리에 일이 잘못될까 두려워, 태자를 부른 것이었다. 태자가 미리 자신의 곁을 지키던 호위를 보내왔기에, 때마침 그 일격을 막을 수 있었다. “무엄하오! 김 장군,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오?”이내 방 안으로 들어선 태자는 피로 물든 광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태자비를 놓으시오!”태자 곁의 호위무사들이 김동건을 밀어내자, 김동건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그러다 피범벅이 된 조예진을 품에 안은 태자를 노려보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지영이는 저 여인에게 내몰려 떠났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그게 대수란 말이오?”“박지영이 그리도 중요한 사람이었소? 장군께서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태자비를 죽이려 들 만큼 그 여인이 중요하단 말이오?”김동건은 고개를 저었다.“저하께서는 아직 제 뜻을 모르시는군요. 지영이는 집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 시스템이 지영이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습니다. 이제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이번 생에 다시는 지영이를 볼 수 없습니다.”“무슨 말이오?”이진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품에 안고 있던 조예진의 몸이 저도 모르게 풀려났으나, 그는 그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그 모습을 본 김동건은 이상하게도 속이 후련해졌다.“아직 모르셨습니까? 그때 저하께서는 지영이가 공략을 위해 저하께 다가왔을 뿐, 진심은 없다고 여기셨지요. 허나 그 삼 년 동안 지영이는 진심으로 저하께 마음을 주었습니다.”“지영이가 아직 저하를 잊지 못했다는 걸 알았기에, 저는 제 자신이 지영이를 연모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러 거짓으로 잘해 주는 척했고, 조예진이 지영이를 괴롭히는 것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제가 정말 지영이에게 죄가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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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박지영은 소리 소문 없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왔다.두 세계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흘렀다. 공략 임무의 세계에서 육칠 년을 보냈어도, 이곳에서는 고작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눈을 뜨자마자 부엌에서 끓이던 죽이 부글부글 끓어넘치기 직전인 것이 보였다.급히 부엌으로 향하던 박지영은 세면대 앞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젊고 아름다운 얼굴.아침 장미꽃잎에 맺힌 이슬처럼 맑고 고운, 스물두 살의 자신이었다.그곳에서 속고 상처받았던 날들은 안개처럼 아득했다. 갑자기 통장에 들어온 거액의 돈과 끓어넘치기 직전인 죽을 빼면,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그제야 박지영은 어째서 시스템이 임무를 마친 숙주의 95%가 현실로 돌아가기를 택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유는 간단했다. 이만한 돈 앞에서 사랑은 그저 덧없는 일이었다.박지영은 소파에 몸을 던지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비명을 질렀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을 갓 졸업하고 부모를 잃은 처지였다. 그런데 한순간에 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었다.김동건의 얼굴은 한참을 떠올려 보아도 흐릿하기만 했다. 결국 박지영은 그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그리고 소월이...박지영은 그 착한 아이를 떠올렸다. 다행히 모아 둔 포인트가 조금 남아 있어 소월이를 되살릴 수 있었다. 시스템의 말에 따르면 소월이는 이미 화목하고 행복한 집안에 다시 태어났다고 했다.지난 생에서 소월이는 아들을 귀하게 여기는 부모에게 팔려 종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부모에게 하나뿐인 딸로 사랑받으며,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박지영이 살던 곳은 시내에서도 임대료가 유난히 싼 셰어하우스였다. 옆방 사람은 한낮부터 잠이라도 자고 있었는지, 그녀의 환호성에 짜증스럽게 벽을 몇 번 두드렸다.박지영은 화들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기쁨까지 누를 수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제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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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박지영은 임무의 세계를 겪어 본 사람이라, 김동건이 이곳에 나타난 사실이 아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다만, 이제는 그와 조금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김동건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박지영의 뒤를 바짝 따라붙을 뿐이다.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이 계속 따라붙었다. 이대로 꽃집에 갈 수는 없다는 걸 안 박지영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다른데 가서 얘기하자.”두 사람은 근처 카페에 마주 앉았다.김동건은 줄곧 박지영만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박지영의 차가운 눈빛도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대체 뭘 하려는 거야?”박지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여기까지 따라온 게 정말 의미 있다고 생각해?”“조예진은 어쩌고? 그 여자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보지 않고, 날 찾아와서 뭘 하겠다는 건데?”“여긴 당신한테 낯선 세상이야. 여기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떠나기로 한 순간부터 당신과는 완전히 끝낼 생각이었어.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김동건이 조심스레 박지영의 손을 잡으려 하자, 박지영은 곧바로 손을 빼냈다.김동건은 시선을 떨군 채 말했다.“지영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한 번만, 딱 한 번만 만회할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난 정말 널 사랑해.”“조예진의 본모습도 알았어. 내가 그동안 네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도 알아. 네가 떠나고 나서야, 내가 진짜 사랑한 사람이 너였다는 걸 깨달았어.”“이곳에서 살아가는 법도 다 알아봤어. 나도 여기 사람들처럼 살 수 있어. 나 혼자 두지 마. 응?”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김동건을 박지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곁에 있을 때는 온갖 수를 써서 나를 괴롭히다가, 이제 와서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다니.’“됐어.”박지영은 냅킨으로 김동건이 닿았던 손을 깨끗이 닦아 냈다.“당신을 사랑했던 박지영은 이제 없어. 김동건, 난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후회도 없어.”“하지만 이제 나는 나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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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그 뒤로 며칠 동안 김동건은 박지영의 일상에서 좀처럼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그는 매일 아침 박지영이 사는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며 아침을 챙겨 왔다. 박지영이 본체만체해도 한쪽에 앉아 말없이 박지영을 바라보기만 했다.처음에는 없는 사람처럼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계속되자, 박지영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느 날, 박지영은 결국 김동건에게 다가갔다.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 김동건의 눈빛이 환해졌다. 하지만 정작 입을 연 박지영의 얼굴에는 싸늘한 기색만이 어려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우린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분명 말했잖아.”김동건은 고개를 숙인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난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그랬어. 지영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널 놓을 수가 없어.”박지영은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놓을 수 없다고? 김동건,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벌써 잊었어?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야?”김동건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변명할 수 없었다. 자신이 남긴 상처는 이미 너무 컸고, 박지영의 마음은 그 상처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이제 그만 가.”박지영은 등을 돌렸다.“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김동건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이미 박지영을 잃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박지영이 자신에게 완전히 마음을 닫고 그를 원망할지라도 김동건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김동건은 박지영의 일상에 한층 더 깊이 끼어들었다.말없이 멀리서 바라보던 데서 그치지 않았다. 집 앞에 불쑥 나타나 박지영의 걸음을 막고, 룸메이트와 함께 나설 때면 일부러 끼어들어 대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박지영이 현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따라왔다.그러던 어느 날이었다.박지영은 가게 창밖으로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은 가로등 불빛에 닿아 반짝였다.박지영은 전날 임제윤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불빛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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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김동건은 식은 커피를 손에 든 채 아파트 창가에 서 있었다.창밖으로는 맞은편에 자리한 ‘아침이슬’ 꽃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꽃을 포장해 손님에게 건네는 박지영의 모습도, 임제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김동건은 보름째 이곳에 머물며 매일같이 멀리서 박지영을 바라보았다. 저녁이면 지친 기색 속에서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꽃집 문을 닫는 모습까지.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박지영에게 다가가고 싶을 때마다, 꽃집에서 자신을 향해 보냈던 차가운 눈빛과 단호한 말이 떠올랐다.창밖이 서서히 어두워졌다.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한 박지영의 곁에는 오늘 임제윤이 없었다. 혼자 가게 문을 닫는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이자, 김동건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이 시간쯤이면 맞은편 편의점에 들르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거리에서 박지영을 마주칠 수 있었다.박지영은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김동건에게는 충분했다.건물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박지영이 꽃집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연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박지영은 해 질 무렵의 빛 아래 유난히 맑고 고와 보였다.김동건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멀어지는 박지영의 뒷모습을 한참 눈에 담았다.박지영은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김동건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이러는 자신이 얼마나 추한지 알지만 멈출 수 없었다.그때였다.교차로에서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튀어나와 박지영을 향해 곧장 돌진했다.김동건의 머릿속은 새하얘졌지만, 몸은 먼저 움직였다.김동건은 박지영을 힘껏 밀쳐 냈고, 그 대신 차에 부딪혀 멀리 내던져졌다.시간이 한순간 멈춘 듯했다.바닥에 넘어진 박지영은 무릎이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김동건이 쓰러져 있었는데 몸 아래로 선명한 피가 번져 나갔다.“김동건!”박지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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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김동건이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동안, 박지영과 임제윤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어느 날 박지영은 이른 아침부터 임제윤을 위해 닭고기탕을 끓여 보온 도시락통에 담아 병원으로 갔다. 임제윤이 끓인 것만큼 맛있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담은 것이었다.병원에 들어서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곳처럼 느껴져, 박지영은 병원 특유의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다.임제윤이 알려 준 곳으로 찾아가자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박지영이 노크하려던 순간, 안에서 임제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 성공률이 높은 편이에요. 제가 직접 수술할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박지영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임제윤은 한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 수술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었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흰 가운과 금테 안경 너머의 눈빛은 다정하면서도 진지했다.할머니는 몹시 불안한 듯 손을 연신 비볐다.“임 선생님, 저는... 무서워요.”임제윤은 할머니의 손을 가볍게 잡아 주었다.“저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있잖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문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지영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환자를 제 가족처럼 대하는 의사는 임제윤이 처음이었다.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본래 좋은 사람과 함께해야 한다는 말이 맞았다.박지영이 김동건에게 마음을 준 것도, 처음에는 그가 다정하게 자신을 아껴 주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동건이 자신을 구해 곁에 둔 것은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였고, 다정함 역시 그녀를 붙들어 두기 위한 거짓이었다.박지영이 마음을 온전히 내준 뒤에야, 김동건은 숨겨 왔던 본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임제윤은 달랐다.처음 우연히 마주쳤을 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알게 되었다. 임제윤의 다정함은 자신에게만 향한 특별한 모습이 아니라, 원래부터 따뜻하고 선한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박지영은 임무의 세계에서 겪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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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다음 날 아침, 임제윤은 차를 몰고 박지영을 데리러 왔다.연한 하늘색 셔츠 차림의 임제윤은 소매를 팔꿈치까지 자연스럽게 걷어 올려, 탄탄한 팔을 드러내고 있었다.“우리 어디 가요?”박지영이 궁금한 듯 묻자 임제윤은 웃었다.“가 보면 알아.”차가 한 갤러리 앞에 멈춰서자 박지영은 놀란 얼굴로 임제윤을 바라보았다.“여기예요?”“응.”임제윤이 웃으며 말했다.“오늘 인상파 특별전이 열리거든. 지영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갤러리에 들어선 박지영은 눈앞에 펼쳐진 그림들에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미술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림마다 담긴 아름다움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임제윤은 박지영의 손을 잡고 그림을 한 점씩 설명해 주었다.“이건 모네의 ‘수련’이야.”임제윤은 빛깔이 화려한 그림을 가리켰다.“색이 이렇게 달라지는 거 봐. 예쁘지?”박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그림은 처음이었다. 그림 속 빛과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모네는 말년에 거의 앞을 보지 못했대.”임제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데도 계속 그림을 그렸지. 이 수련들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 세상이었을 거야.”박지영은 임제윤의 말에 깊이 빠져들었다. 임제윤이 미술을 이토록 잘 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요?”임제윤은 가볍게 웃었다.“대학 다닐 때 미술사를 부전공했어. 의사가 되긴 했지만, 미술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야.”임제윤은 박지영의 손을 잡고 갤러리를 돌며 그림마다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지영이 이야기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관람 시간이 끝나 있었다.갤러리 밖으로 나오자, 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임제윤은 박지영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예술이랑 의학은 사실 비슷한 것 같아. 방식만 다를 뿐, 둘 다 삶 속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잖아.”박지영은 임제윤을 올려다보았다.저녁 노을이 임제윤의 옆얼굴을 비추자, 온몸이 옅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박지영은 눈앞의 임제윤이 아름다운 그림처럼 느껴져 한참 시선을 떼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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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그날 일은 박지영에게도 적지 않은 불안을 남겼다. 김동건이 집 주소까지 알아낸 이상, 한 번 피했다고 계속 피할 수는 없었기에 박지영은 새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그 고민을 알아챈 임제윤은 수줍게 동거를 제안했고, 두 사람의 관계도 차츰 안정되어 가고 있었기에 박지영은 오래 망설이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다.하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전에, 박지영에게는 반드시 정리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그녀는 우연히 김동건이 가게 맞은편 집을 임대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그가 매일 그곳 창가에 서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하나하나 지켜봤을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힐 만큼 역겨웠다.박지영은 더는 참지 않고, 김동건이 완전히 단념하게 만들기로 했다.그날 밤 박지영은 임제윤을 가게로 불렀다.임제윤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남은 꽃들을 정리했고, 박지영은 곁에 붙어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맞은편 창가에서 김동건이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박지영은 일부러 임제윤과 더 다정하게 굴었다.김동건은 맞은편 집 창가에서 커튼 뒤에 몸을 숨긴 채 꽃집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창백한 얼굴로 주먹만 꽉 움켜쥘 뿐,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했다.박지영은 임제윤에게 한층 더 살갑게 기댔다. 그러다 발돋움해 임제윤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김동건은 더는 참지 못했다.휙!김동건은 커튼을 확 잡아당겨 닫고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눈을 돌려도 한때 박지영이 자신에게 잘해 주던 모습과 눈을 휘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더는 견디지 못한 김동건은 문을 열어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가 빗속에 서서 차가운 비를 온몸으로 맞았다.맞은편 꽃집 유리창 너머로 박지영과 임제윤이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박지영의 얼굴에는 김동건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밝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딩!그때 머릿속에서 시스템의 알림음이 울렸다.“경고: 숙주의 남은 시간은 24시간입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경우, 숙주는 완전히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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