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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지 못한 인연

다하지 못한 인연

By:  서리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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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의 마음을 얻으려 애쓴 지도 어느덧 일곱 해가 흘렀다. 그런데 혼례를 하루 앞둔 날, 그에게 공략 시스템의 존재를 들키고 말았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증오 또한 컸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고, 결국 승상의 딸 조예진을 태자비로 맞아들인 뒤 그녀를 옥사에 가두었다. 모진 고문으로 그녀가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을 무렵, 진북장군 김동건이 변방에서 서둘러 귀환했다. 황실의 경계와 의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구할 수만 있다면 두 다리를 잃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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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그날, 김동건은 옥사에 갇혀 있던 박지영을 직접 데리고 장군부로 돌아왔다.

눈시울까지 붉힌 그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연모해 왔다며, 공략 대상을 자신으로 바꿔 달라고 애원했다.

그 진심에 마음이 움직인 박지영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김동건과 혼인한 뒤로는 그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지냈다.

적어도 어젯밤까지는 그렇게 믿어왔다.

박지영은 밤참으로 탕을 가져다주려 김동건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그와 호위무사가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김동건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연모한 적이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품은 여인은 오직 조예진뿐이었다.

자신에게 혼인을 청한 것조차 조예진의 연정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그의 다리는 이미 일 년 전에 말끔히 나은 뒤였다.

그런데도 줄곧 절뚝거리는 척한 것은 자신의 죄책감을 이용해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곁에 남아 있기만 하면 조예진은 아무런 걸림돌 없이 이진호의 태자비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니까.

직접 그 진실을 듣는 순간, 박지영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식어 버리는 듯했다.

김동건과 함께 보낸 지난 이 년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거짓이었다.

박지영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에 밤새 울었다.

그러다 동이 틀 무렵, 마침내 시스템을 불러냈다.

“시스템, 이 세계에서 떠나기를 신청할게. 또한 김동건과 이진호와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영원토록!”

곧이어 한동안 들을 수 없었던 무미건조한 기계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숙주님의 요청을 확인했습니다. 시간 통로를 개방합니다. 칠 일 후 숙주님을 이 세계에서 이탈시킵니다.”

바로 그때.

끼익, 문이 열리더니 김동건이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 방 안에 들어왔다.

“지영아, 오늘 저잣거리에서 요즘 유행한다는 물건을 몇 가지 구해 왔소.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는지 골라 보거라.”

박지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깊은 애정이 어려 있었다.

누가 보아도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이었다. 어디에서도 거짓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박지영은 가슴 한복판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바깥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 나으리, 큰일이옵니다! 태자비마마께서 고열로 앓고 계시온데, 좀처럼 열이 내리지 않는다 합니다. 설련(雪蓮)을 구하려 궁녀까지 보내셨습니다.”

박지영은 곧바로 김동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동자에 스쳤다가 사라지는 당황스러움과 근심을 보았다.

역시나였다.

아무리 완벽하게 속인다 한들, 끝내 감출 수 없는 순간은 있는 법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 한편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려 왔고, 움켜쥔 손가락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었다.

조예진이 달라고 한 설련은 평범한 약재가 아니었다.

과거 김동건이 다리를 다쳐 죽을 고비를 넘길 때, 그녀가 직접 천산까지 가서 따 온 귀한 영약이었다.

당시 그녀는 홀로 그곳에서 늑대 떼와 사투를 벌이고, 얼어붙은 설원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겨우 두 송이를 얻었다.

그중 한 송이로 김동건의 목숨을 살렸고, 남은 한 송이는 귀하게 보관해 두었다.

박지영은 알고 있었다.

조예진이 원한다면 김동건은 반드시 내어 줄 터였다.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동건은 그녀가 목숨을 걸고 구해 온 설련을 주저 없이 꺼내 들었다. 이내 관복으로 갈아입고 직접 궁으로 향했다.

그날 밤, 김동건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밤중이 되자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이 쉴 새 없이 울리며 캄캄한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박지영은 이유 모를 불안에 휩싸였다.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고, 눈꺼풀까지 쉼 없이 떨렸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금군이 장군부로 들이닥쳤다.

금군은 태자의 영패를 내보이며 박지영을 붙잡아 그대로 동궁으로 끌고 갔다.

죄목을 듣는 순간 박지영은 귀를 의심했다.

설련에 독을 타 태자비가 피를 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박지영은 설련에 손조차 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조예진의 모함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했다.

하지만 박지영에게는 자신을 지켜 줄 권세도, 결백을 밝혀 줄 증거도 없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외쳐도 누구 하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태감들이 못이 촘촘히 박힌 형틀을 들고 왔다.

태자의 명으로 그녀더러 그 위를 구르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진호는 박지영이 자신을 공략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한때 사랑했던 만큼 깊이 그녀를 증오했다. 더구나 그녀가 장군부로 시집간 뒤에는 얼굴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을 만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형벌이 이진호의 명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박지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태자의 분부가 모두 전해지자, 금군은 곧바로 달려들어 박지영을 억지로 못판 위에 짓눌렀다.

날카로운 못 끝이 살갗을 뚫고 파고들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피부가 찢겨 나가며 곳곳에 깊은 핏자국이 벌어졌다.

“아악...!”

박지영은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에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흠뻑 적셨다.

검붉은 피가 바닥의 돌판을 붉게 물들였고, 찢겨 나간 살점이 쇠못에 걸려 있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참혹했다.

고문은 반 시진이나 이어졌다.

박지영은 몇 번이나 이대로 피를 다 쏟고 죽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침내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희미해지는 시야 속으로 누군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김동건이었다...

그가 다급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박지영의 의식은 오랫동안 깊은 어둠 속을 헤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올 무렵, 곁에서 누군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근위대장이었다.

“나으리께서는 분명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님께서는 애초부터 설련에 손조차 대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태자비마마의 모함인 줄 아시면서, 어찌 태자 저하께 사실을 밝히고 마님을 위해 선처를 구하지 않으셨습니까?”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김동건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 저하께서 한때 지영이를 그토록 마음에 두셨으니, 예진이가 질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이제 와 지영이에게 그동안 쌓인 화를 좀 풀고 싶다는데, 그것으로 예진이의 분이 풀린다면 지영이가 고초 좀 겪는 것이 무슨 대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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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그날, 김동건은 옥사에 갇혀 있던 박지영을 직접 데리고 장군부로 돌아왔다.눈시울까지 붉힌 그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연모해 왔다며, 공략 대상을 자신으로 바꿔 달라고 애원했다.그 진심에 마음이 움직인 박지영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김동건과 혼인한 뒤로는 그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지냈다.적어도 어젯밤까지는 그렇게 믿어왔다.박지영은 밤참으로 탕을 가져다주려 김동건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그와 호위무사가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그리고 그제야 알았다.김동건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연모한 적이 없었다.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품은 여인은 오직 조예진뿐이었다.자신에게 혼인을 청한 것조차 조예진의 연정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였다.더구나 그의 다리는 이미 일 년 전에 말끔히 나은 뒤였다.그런데도 줄곧 절뚝거리는 척한 것은 자신의 죄책감을 이용해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그녀가 자신의 곁에 남아 있기만 하면 조예진은 아무런 걸림돌 없이 이진호의 태자비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니까.직접 그 진실을 듣는 순간, 박지영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식어 버리는 듯했다.김동건과 함께 보낸 지난 이 년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거짓이었다.박지영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에 밤새 울었다.그러다 동이 틀 무렵, 마침내 시스템을 불러냈다. “시스템, 이 세계에서 떠나기를 신청할게. 또한 김동건과 이진호와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영원토록!”곧이어 한동안 들을 수 없었던 무미건조한 기계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숙주님의 요청을 확인했습니다. 시간 통로를 개방합니다. 칠 일 후 숙주님을 이 세계에서 이탈시킵니다.”바로 그때.끼익, 문이 열리더니 김동건이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 방 안에 들어왔다.“지영아, 오늘 저잣거리에서 요즘 유행한다는 물건을 몇 가지 구해 왔소.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는지 골라 보거라.”박지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깊은 애정이 어려 있었다. 누가 보아도 사랑하는 여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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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 말을 듣는 순간, 박지영은 얼음장 속에 내던져진 듯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결국 김동건에게는 조예진만 기쁘다면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이 사람이 바로 자신의 지아비였다.이토록 자신을 속여 마음까지 내어 주게 만들어 놓고, 정작 그의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조예진밖에 없었다!박지영은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드는 절망과 고통만큼은 끝내 눌러 참지 못했다.소리를 들은 김동건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걱정이 가득 어려 있었다. “지영아, 이제 정신이 드느냐?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늦었다. 약효가 좋은 금창약(金瘡藥)을 발라 두었으니 당분간 푹 쉬거라. 며칠 지나면 한결 나아질 것이다.”김동건의 눈빛에 넘칠 듯 어린 안타까움을 보는 순간, 박지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한 이불을 덮고 살아온 사람이 이토록 태연하게 자신을 속여 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마음은 이미 참담할 대로 참담해져, 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를 마주할 기력조차 없었다.박지영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김동건은 직접 수건을 적셔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이어 탕약까지 가져와 한 숟갈씩 떠먹였다.그 뒤로 이틀 동안은 한시도 침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낮으로 자리를 지킨 탓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였다.박지영의 상처에 딱지가 앉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김동건은 그동안 밀린 공무를 처리하러 갔다.그가 자리를 비우자 박지영은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자신의 옷과 장신구를 하나씩 꺼내 모두 없애 버렸다.뒤이어 서찰을 정리하려 서재로 향했다가, 우연히 숨겨진 비밀 장치를 건드렸다.사락사락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벽 한쪽에 느닷없이 문 하나가 나타났다.박지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촛불 하나를 밝혀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비좁은 비밀 통로를 지나 밀실에 들어선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벽마다 조예진의 초상화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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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조예진을 모시는 시녀의 명이 떨어지자, 금군이 곧장 채찍을 치켜들었다.채찍이 박지영의 몸에 내리꽂히려는 순간, 김동건이 황급히 앞을 막아섰다.“태자비마마,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소신이 제 처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마마의 행차를 방해했습니다.”그제야 조예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진북장군이 그리 청하니, 채찍질은 면해 주지요.”그러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박지영을 내려다보았다.“박씨, 바닥에 엎드려 본궁에게 열 번 머리를 조아리거라. 허면 이번 일은 더는 묻지 않겠네.”‘먼저 시비를 건 것은 분명 그녀인데, 헌데 나더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라니!’박지영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 뒤에서 거칠게 걷어찼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박지영은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을 억누르며 김동건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김동건의 시선은 오직 조예진에게만 머물러 있었다.마치 그녀는 그의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금군에게 짓눌린 채 열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지만, 조예진은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 얼굴이었다.“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구나. 정성이 모자란 모양이니, 열 번 더 조아리게 하거라!”바닥을 짚은 박지영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김동건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었다.그 순간, 박지영은 그에게 품었던 마지막 기대마저 사라져 버렸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힘껏 이마를 내리쳤다.쿵! 쿵! 쿵!둔탁한 소리가 거리에 연이어 울려 퍼졌다.갈라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얼굴을 타고 내려와 옷깃을 붉게 물들였다.박지영은 입술이 터져 피가 배어 나오도록 악물었다.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번졌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아프다는 신음 한마디 내지 않았다.그 처참한 꼴을 지켜보고서야 조예진은 비로소 만족한 듯했다.그제야 김동건도 정신을 차린 듯 박지영을 부축해 일으켰다.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 궁녀가 뒤에서 그를 불러 세웠다.“진북장군, 태자 저하께서는 조금 전 입궁하셨습니다. 오늘 태자비마마께서 바깥나들이를 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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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화살은 조예진의 몸을 불과 몇 치 앞에 두고 멈췄다.조예진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그 대신 십자형 화살촉이 박지영의 어깨를 관통했다. “아...!”살을 찢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박지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가슴께로 붉은 피가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순간 온몸의 힘이 풀리며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화살대가 등에 박힌 채 뚝 부러졌다.피가 흥건한 바닥 위에서 박지영의 몸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연신 경련을 일으켰다. 시야도 서서히 흐려졌다.주변의 아우성은 점점 아득해졌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끝내 정신을 잃기 직전, 흐릿한 시야 속으로 김동건의 모습이 들어왔다.김동건은 말을 타고 조예진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가고 있었다.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그리고 얼마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사람 또한 김동건이었다.그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다, 지영아.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어제 너를 데리고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경솔했다. 자객들이 태자비마마만 노린다고 생각해 너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구나. 내가 곁에 있었으면서도 너를 다치게 했구나.”박지영은 눈을 감았다.이제는 듣기조차 지겨운 변명이었다.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김동건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그의 신분상 태자비를 지켜야만 했으리라 스스로 납득했을 것이다.하지만 조예진을 살리겠다고 제 몸을 화살받이로 내몬 모습을 직접 본 이상, 더는 그 어떤 변명도 믿을 수 없었다.박지영은 왜 자신을 화살받이로 내세웠느냐고 묻지도 않았다.중상을 입은 자신을 버려둔 채 어째서 조예진부터 데리고 떠났느냐고 따지지도 않았다.이유는 너무도 분명했으니까.자신은 김동건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뿐이었다.마음에도 없는 변명을 듣느라 더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그 뒤로 며칠 동안 김동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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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박지영은 온몸의 피가 한순간에 얼어붙는 듯했다.조예진이 자신을 이토록 처참하게 욕보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상궁들에게 붙들린 채 궁궐 후원으로 끌려가는 내내, 매서운 찬바람이 칼날처럼 살갗을 파고들었다.얇은 옷 한 벌만 걸친 채 한기에 내몰리자 온몸이 금세 얼얼해지고, 드러난 살갗은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는 내내 오가는 궁녀와 금군, 내관들은 하나같이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멀찍이 선 이들은 박지영을 흘겨보며 거리낌 없이 수군거렸다.“이미 진북장군 나으리의 부인이 된 몸인데, 어쩜 저리 낯짝이 두꺼울까! 역시 요망하기 짝이 없어!”“저런 꼴로 궁 안을 돌아다니는 걸 보니, 혹여 아직도 저하께 미련이 남은 것 아니겠지? 행실이 저리 문란하니, 저런 년은 물에 처넣어 죽여야 마땅해!”숨길 생각조차 없는 조롱이 사방에서 쏟아졌다.박지영은 밀려드는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세게 깨문 탓에 비릿한 맛이 번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몸은 이미 한기에 굳어 감각조차 희미했다. 뼛속 깊이 스민 냉기에 온몸이 쉼 없이 떨렸다.어느 순간에는 정말 이대로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다시 동궁전으로 끌려와 따스한 기운에 몸이 풀리고서야, 박지영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상궁들은 박지영을 전각 한쪽에 내려놓고 물러났다.몸을 웅크린 채 가쁜 숨을 고르던 박지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붓을 놀리고 있는 조예진이었다.그리고 그 곁에는 김동건이 서 있었다.그는 조예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감출 생각조차 없는 애틋한 연모가 눈빛에 선명하게 묻어났다.잠시 뒤 마지막 붓질을 마친 조예진이 활짝 핀 모란 그림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진북장군, 어떻습니까?”김동건은 그림을 바라보며 답했다.“살아 있는 꽃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옵니다.”그러자 조예진은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그러다 구석에 앉아 있는 박지영에게 시선을 돌렸다.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서늘하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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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 말을 직접 듣는 순간, 박지영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자신이 겪은 고통과 수모가 김동건에게는 그저 연모하는 여인을 떠올리기 위한 흔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그렇다면 그는 대체 자신을 무엇이라 생각했던 걸까?’박지영은 묻고 싶었다.더는 참지 못한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마음이라니요... 무슨 마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박지영이 깨어난 것을 본 순간, 김동건의 손이 멈칫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그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지영아, 정신이 들었느냐?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느냐?”눈앞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태도를 바꾸는 모습에 박지영은 새삼 놀랐다.목소리가 한층 차갑게 가라앉았다.“등에 새긴 곳이 전부 아픕니다.”그러자 김동건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군에서 쓰는 진통 연고를 가져오게 했다.그리고 손에 힘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에 약을 발라 주었다.“약을 바르면 통증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청화(靑花)를 넣은 약욕도 준비해 두었다. 며칠 지나 상처가 아물면 괜찮아질 게다.”‘청화라니?’박지영의 눈빛이 굳었다.‘그것은 등에 새긴 무늬의 빛깔이 흐려지지 않도록 하는 데 쓰는 약재가 아니던가?’그녀는 홱 고개를 들었다.“그 무늬가 그렇게도 마음에 드십니까?”떨리는 목소리 끝에 억눌러 온 감정이 터져 나왔다.“허나 저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치욕으로 남을 텐데, 서방님께서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붉어진 눈가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그제야 김동건은 달래듯 말했다.“지영아, 등에 있는 것이니 네 눈에는 보이지 않지 않느냐. 그냥 없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박지영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김동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청화를 넣으려 한 것도 상처 자국과 멍을 가라앉히려 했을 뿐이다. 네가 싫다면 넣지 않으마. 허니 노여워하지 말거라, 응?”박지영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김동건의 마음에는 오직 조예진뿐이었다.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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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정월 열아흐레는 김동건의 생일이었다.장군부에서는 예년처럼 몇 상의 잔칫상을 차렸고, 점심 무렵부터 동료들이 하나둘 찾아와 축하를 건넸다.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모두 박지영이 직접 챙겼다.하지만 올해는 몸이 좋지 않다는 말만 남긴 채 손을 떼었다.그러자 장군부는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다.찾아온 손님을 잘못 맞이하는가 하면 술과 음식을 빼먹고, 그릇을 깨뜨리는 일까지 끊이지 않았다.김동건 역시 밀려드는 손님을 혼자 감당하지 못했다.그제야 그는 해마다 박지영이 얼마나 많은 일을 도맡아 해 왔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았다.밤이 깊어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김동건은 박지영이 머무는 처소를 찾았다.둘이서라도 조촐하게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막 술과 음식이 차려졌을 때, 문지기가 급히 찾아와 알렸다.“태자 저하와 태자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박지영은 두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김동건만 나가도록 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예진이 사람들을 잔뜩 거느리고 처소까지 들이닥쳤다.“부인께서 아프다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그리 위중해 보이지는 않네요.”조예진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설마 본궁을 피하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박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곁을 지키던 시녀 소월이 먼저 나섰다.“태자비마마, 저희 마님께서는 며칠째 몸져누워 계셨사옵니다. 몸이 쇠약하여 혹여 마마와 태자 저하께 누가 될까 염려한 것이니,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옵소서.”그러자 조예진의 시선이 곧바로 소월에게 향했다.“어디서 온 천한 계집이 감히 본궁의 말에 끼어드는 것이냐? 여봐라, 뺨을 서른 대 쳐라!”명을 받은 상궁 몇이 곧장 달려들어 소월을 붙잡았다.이어 손을 치켜들어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소월의 얼굴은 순식간에 벌겋게 부어올랐고, 처절한 울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박지영 역시 조예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시녀에게 화풀이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더구나 소월이가 자신 때문에 화를 입었다는 걸 알기에, 즉시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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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일개 시녀가 제 주인을 저리 감싸고 나서다니?’조예진이 화를 내기도 전에 김동건이 먼저 소월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무엄하다!”이진호의 눈빛에는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하찮은 시녀 주제에 감히 태자비를 모함하다니? 김 장군, 알아서 처리하게!”그 말을 들은 김동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칼을 뽑았다.박지영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통을 견디며 눈을 뜬 순간, 김동건의 칼이 소월의 가슴을 꿰뚫는 장면을 보았다.“안 돼!”따뜻한 피가 얼굴을 적시고, 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파고들었다.박지영은 눈을 크게 뜬 소월이가 소리 없이 바닥에 쓰러져, 서서히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 순간 그녀의 가슴에도 칼날이 파고든 듯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박지영은 눈앞이 캄캄해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피를 왈칵 토해 냈다.온몸을 찢는 고통에 정신은 점점 아득해졌다.의식을 잃기 직전, 박지영은 이진호의 냉담한 목소리를 들었다.“박지영은 태자비를 해하려 했으니, 법도에 따라 엄히 다스릴 것이다...”그 뒤 며칠 동안 박지영은 물감옥에 갇혔다.차가운 물이 어깨까지 차올라 피부가 하얗게 불었고, 물에 잠긴 상처는 점점 곪아 흉측하게 변해 갔다.하루에도 몇 번씩 몸이 얼어 정신을 잃으면 하인들은 박지영을 매달아 불에 쬐어 억지로 깨웠다. 그러고는 다시 물속에 던져 넣었다.온몸은 성한 데 하나 없이, 뼈마디와 살갗이 모두 부서져 내릴 듯 쑤시고 아팠다.반복되는 고문 끝에 박지영은 죽음의 문턱에 섰다고 느꼈다.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는지 모를 때 김동건이 나타났다.김동건은 겉옷을 벗어 박지영의 몸을 감싼 뒤 품에 안고 그 지옥 같은 곳을 나왔다.그의 품은 뜨거웠지만, 박지영의 몸에 밴 한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박지영은 힘겹게 눈을 뜨고 떨리는 입술로 한마디를 물었다.“소, 소월이는요?”김동건은 걸음을 멈추고 깊게 미간을 찌푸렸다.“태자비마마를 모함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이미 사람을 시켜 난장터에 버렸으니, 지영아, 소월이는 없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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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김동건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조예진은 단번에 알아챘다.조예진은 평상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여지(荔枝)의 껍질을 벗겼다. 눈처럼 희고 투명한 과육을 드러낸 뒤, 서두를 것 하나 없다는 듯 천천히 입에 넣었다.조예진은 김동건이 자신에게 품은 마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김동건이 박지영을 맞아들인 것도 결국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김동건은 흠잡을 데 없는 사내였지만, 고작 장군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조예진은 천하에서 가장 귀한 자리에 오르겠다고 마음먹은 여인이었다.김동건과 맺어질 생각은 없었지만,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제 뜻대로 쓸 수 있는 칼이 되어 줄 뿐 아니라, 박지영을 괴롭힐 기회까지 만들어 주었으니.조예진은 사람을 홀릴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과육을 문 입술은 붉게 빛났고, 나른한 몸짓마다 묘한 매력이 흘렀다.하지만 김동건은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미간의 주름만 깊어질 뿐, 조예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조예진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곧 감춘 그녀는 곧장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장군께서는 오늘따라 무슨 생각에 그리 잠겨 있습니까? 대체 누구를 그리 떠올리고 계시는지요?”하지만 김동건은 조예진의 예상과 달리 비위를 맞추며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마, 장군부에 급한 일이 생긴 듯합니다. 먼저 물러가도 되겠습니까?”궁 안은 경비가 삼엄했다. 태자비를 지키는 데 장군인 김동건까지 필요할 리 없었다.그럼에도 김동건은 조예진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 수 있으니 마다하지 않았다.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마음이 몹시 불안해 어서 장군부로 돌아가 봐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조예진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했다.“그래요, 가세요. 오늘 나가면 다시는 내게 오지 마세요.”김동건은 조예진의 뒷말을 듣지 못했다. 물러가도 된다는 뜻으로만 여긴 그는 급히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조예진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문 쪽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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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박지영이 정말 자신을 떠났다는 것을 믿지 못한 김동건은 사람을 풀어 끊임없이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했다.박지영에게 어떻게 사과할지도 이미 생각해 두었다. 마음이 여린 박지영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용서해 줄 터였다.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그러할 생각이었다.문제는 그녀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김동건은 장군부의 하인들을 거의 모두 내보냈고 자신도 밤낮없이 곳곳을 헤맸다. 며칠이 지나자 낯빛은 초췌해졌고, 두 눈에는 핏발까지 섰지만 끝내 박지영을 찾지 못했다.박지영은 마치 세상에서 홀연히 사라진 듯, 다시는 그의 앞에 나타나려 하지 않았다.‘멀쩡한 사람이 어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정녕 그 정체 모를 시스템이 박지영을 데려간 것일까?’그 생각이 미치자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났다.기진맥진한 김동건은 박지영의 방으로 들어가 은은한 향기가 밴 폭신한 침상에 몸을 뉘었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박지영의 모습이 떠올랐다.연모하지 않았다고 해도, 진심이었든 거짓이었든 지난 두 해 동안은 그녀에게 잘해 주었다.더구나...김동건은 가슴을 짚은 채 속을 태우는 듯한 막막함을 느꼈다.‘정말 박지영을 연모하지 않았던가?’더 깊이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저도 모르게 서재로 향한 김동건은 두 사람에게도 한때 정이 깊었던 날들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전장에 나가 있을 적이면 박지영은 그에게 여러 통의 서신을 써 보냈다.그런데 서신을 보관해 둔 함 앞에 이르러서야 그는 망연해졌다.그 안에는 서신이 단 한 통도 남아 있지 않았다.‘서재에는 기밀문서가 많아 쉽게 청소도 맡기지 않았는데, 그 서신들은 어찌 감쪽같이 사라진 걸까?’그제야 오래전 어느 날 밤이 떠올랐다. 박지영이 이곳에 물건을 가지러 왔다고 했던 일이다.‘그때 가져간 것이 바로 서신들이었단 말인가?’‘그토록 내가 싫어, 추억으로 남길 만한 것조차 하나 남겨 두기 싫었단 말인가?’김동건은 씁쓸히 웃으며 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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