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환생을 했더니 전 남편의 현 아내가 되어있었다.: Chapter 11 - Chapter 20

23 Chapters

제11화. 얼음의 안쪽 [태준의시점]

테라스의 밤바람이 민채린의 순백색 치맛자락을 거세게 흔들고 지나간 뒤에도, 강태준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귓가를 짓누르며 맴도는 것은 오직 그 서늘한 목소리 하나뿐이었다.‘아마도…… 내가 한 번 죽어봐서 그런가 봐.’농담이라고 했다.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을 스쳐 지나갔다.달콤하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빛나던 그 미소.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건넨 한마디.‘집에 가자, 여보.’그 낯선 다정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그날 밤, 태준은 끝내 잠들지 못했다.차디찬 침실에 홀로 누워 눈을 감을수록,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오늘 만찬장에서의 장면뿐이었다.오늘 밤의 민채린은 이상했다.아니.태준이 알고 있던 민채린이라는 사람의 궤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언제나 과시적이고 요란한 붉은색과 화려한 보석만을 고집하던 여자였다.그런데 오늘 그녀가 입고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순백의 드레스였다.불필요한 장식은 철저히 배제하고, 우아함과 고상함만을 남긴 차림.그건 결코 태준이 아는 민채린이 선택할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성운그룹의 경쟁사 대표에게 먼저 다가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가던 모습.자신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경멸하던 귀부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그녀의 경계를 풀어내던 모습.그리고 대원의 수많은 비밀이 오가는 중심에 있는 강무성 회장의 개인 비서에게 던졌던 한마디까지.‘늘 회장님의 그늘에 가려져 계시기엔…… 실장님의 혜안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이 떠오르자 태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 모든 행동에서 태준이 익히 알고 있던 민채린 특유의 조급함과 표독스러움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그 얼굴을 쓰고 있는 것처럼.그리고 무엇보다 이상했던 것은,강무성 회장 앞에서 보였던 그녀의 태도였다.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그저 우아하게 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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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혐오한 여자 [태준의시점]

한이서.조용한 갤러리에서 캔버스를 바라보며 지쳐 있던 자신에게 다가와, 그림에 담긴 진짜 의미를 조용히 들려주던 여자.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맑게 웃던 얼굴.온화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느껴졌던, 차갑고 마른 감촉까지.지금도 손바닥 어딘가에 그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태준은 손을 움켜쥐었다.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그녀에게 차디찬 얼굴로 이혼 서류를 건넸던 그날의 기억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자신을 바라보던 이서의 눈빛.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던 눈동자.그리고 끝내 무너져 내리던 표정.그 모든 순간이 너무나 생생했다.이서가 사지로 내몰린 끝에 병상에 갇히게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태준은 밤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병실을 찾았다.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언제나 어둠과 정적만이 가득했다.모니터에서 새어 나오는 푸르스름한 불빛만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태준은 문가에 선 채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결국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그리고 핏기 하나 없이 마른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손가락을 스치는 체온은 너무나 미약했다.조금만 힘을 빼도,손을 놓는 순간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그것이 당시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다른 방법은 없었다.강 회장의 손에 의해 정말로 그녀의 숨통이 끊어지는 것보다는,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밀어내는 편이 나았다.이혼을 시키고, 대원과의 모든 연결을 끊고, 자신의 곁에서 강제로 떼어내는 것.그것만이 그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적어도 그때의 태준은 그렇게 생각했다.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그것이 이서가 살아남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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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아버지의 전화

화사한 아침 햇살이 차갑게 부서지는 침실. 협탁 위에서 요란하게 진동하는 휴대폰 액정에 [아버지]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서는 잠시 망설이다 단단히 숨을 다잡고 전화를 받았다.연결음이 채 끊기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민 회장의 날카롭고 고압적인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언제까지 태준이 곁에서 소꿉놀이만 하고 있을 셈이냐. 대원의 문턱을 넘었으면 그만한 전리품을 가져와야지. 성운이 너에게 거는 기대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지 마라."​뚝.​차디찬 경고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수화기를 쥔 이서의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민채린 역시 가문의 탐욕을 위해 대원가에 던져진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 어지럽게 꼬여가는 머릿속을 다잡으려던 이서의 눈에, 드레스룸 협탁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작은 이중 서랍이 들어왔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민채린이 따로 사용하던 차가운 금속 재질의 비밀 폰이었다.​홀린 듯 화면을 터치하자, [강태준]이라는 이름이 적힌 암호화된 음성 파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서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이내 스피커 너머로, 낮은 정적을 깨고 민채린의 날카로운 비웃음이 먼저 흘러나왔다."그 사고의 진짜 내막이 세상에 밝혀지면 대원도, 당신도 한순간에 끝이야. 내가 던진 족쇄를 순순히 찬 건 결국 당신 선택이었잖아, 강태준."​뒤이어 흘러나온 강태준의 음성은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소름 끼치도록 가라앉아 있었다.​"원하던 지분을 가져갔으면 그 입 다물어. 내 인내심을 더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걱정 마. 병원에 처박혀 있는 그 불쌍한 여자한텐 더 이상 손대지 않을 테니까. 대신 당신은 평생 내 곁에서 숨만 쉬는 인형으로 살아. 그게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니까."​툭.​비밀 폰이 이서의 손에서 떨어져 대리석 바닥으로 산산조각이 났다.​머릿속이 거대한 폭발에 휘말린 듯 하얗게 바래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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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무너지는 경계

​자신이 당했던 억울한 누명과 의문스러운 사고. 그 모든 것 뒤에 민채린과 성운그룹의 추악한 공작이 있었음을 넘어, 강태준 역시 그 사고의 '진실'에 발목을 잡혀 민채린이 내민 위험한 족쇄를 차고 있었다.​‘그 사고의 내막이라니....? 강태준, 넌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야? 넌 공범인 건가, 아니면......?’​강태준이 무엇 때문에 민채린의 덫에 스스로 걸려들었는지, 그가 숨기고 있는 잔혹한 진실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들이 맺었던 정략결혼이 단순한 욕망의 결합이 아닌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눈 살벌한 거래였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믿어왔던 '배신'의 단면이 전혀 다른 기괴한 형상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말도 안 돼.....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복수의 명분과 전제가 거대한 미스터리 속으로 난도질당한 그 순간, 쪼개질 듯한 극심한 두통이 이서의 뇌리를 강타했다.​"으아아악—!"​이마를 움켜쥐고 비명을 삼키는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 정신적 방어선이 흔들린 틈을 타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진짜 민채린의 잔재가 살점을 찢고 솟구쳐 올랐다.​아득히 멀어져 가는 시야 속에서 이서는 발작하듯 숨을 헐떡였다. 맹렬한 기세로 밀려든 검은 어둠이 마침내 그녀의 남은 의식마저 짓씹듯 삼켜버렸다. 이서의 신체가 비틀거리며 차디찬 바닥 위로 무너져 내렸다.같은 시각, 복도를 지나던 강태준은 민채린의 방 안에서 무언가 쿵 하고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서늘한 직감이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거칠게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자,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민채린이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민채린!"​당황한 그가 황급히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던 그 순간. 무너져 내리는 가냘픈 입술이 아득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냈다."태준 씨....."그 순간, 강태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멈춰 버렸다.목소리. 억양. 미세하게 떨리는 특유의 음색.죽는 날까지, 아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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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고요한 균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하얗고 차가운 병실 천장이었다. 머리를 짓눌러 오던 지옥 같은 두통은 가라앉아 있었지만, 온몸은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짓눌려 있었다.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이서의 곁으로 차분한 차림의 의사가 다가왔다."민채린 환자 분, 과로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 의식 상실입니다. 정밀 검사상 큰 이상은 없지만, 당분간은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형식적인 진단명이 병실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서는 말없이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그때, 문가에 비스듬히 서 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강태준이었다. 그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어두운 표정으로 이서를 내려다보며,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음성을 툭 던져냈다."의사 말 들어."단 한 마디. 어떠한 걱정도, 미련도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한 어조였다. 그는 더 이상 이서의 상태를 살피지도 않은 채, 미련 없이 문을 열고 병실을 나섰다. 닫히는 문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홀로 남겨진 이서는 침대에 누워 사색에 잠겼다. 자신이 왜 쓰러졌는지 그 경위가 명확하지 않았다. 드레스룸 서랍에서 비밀 폰을 꺼내고, 그 속에서 강태준과 민채린의 서늘한 음성 파일을 들었던 것까지는 똑똑히 기억났다. 거대한 음모와 미스터리 앞에서 머릿속이 산산조각 나듯 혼란에 빠졌던 감정도 선명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였다.그 이후의 기억은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오려낸 것처럼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내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행동을 했지? 무슨 말을 했지?'관자 놀이를 짚으며 턱끝까지 차오르는 기억의 파편을 붙잡으로 애썼지만, 끝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서가 문가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보며 속으로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그가 무언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거나 내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면, 저렇게 평범하게 떠니지 않았을 거야.'늘 그렇듯 자신을 혐오하고 무관심하게 대하던 강태준의 태도. 그것이 오히려 이서에게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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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기록된 틈새

노트북 화면의 푸르스름한 빛이 방 안의 어둠을 차갑게 가르고 있었다. 이서는 민채린의 태블릿과 휴대폰을 연동해 그녀가 남긴 메신저 기록, SNS 비밀 계정, 그리고 암호화된 일정을 하나씩 파헤쳐 나갔다. 민채린이라는 여자가 구축해 둔 인간관계의 지형도를 그려내는 작업이었다.화면을 넘기던 이서의 손가락이 멈춰 섰다. 지난 만찬장에서 자신이 의도적으로 접촉했던 세 사람의 이름이 민채린의 과거 연락망 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대원그룹의 최대 경쟁사 대표, 상류사회 사조직을 주도하는 귀부인, 그리고 강무성 회장의 곁을 지키는 수석비서.민채린 역시 이들에게 포셥의 손길을 내밀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전부 일방적인 거절이나 차가운 무응답. 민채린은 이들을 포섭하는 데 완벽히 실패해 있었다.이서는 턱을 괴고 빽빽하게 적히 ㄴ대화 기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실패의 이유는 명확했다.민채린은 지나치게 급했고, 오만했으며, 상대를 오직 '이용해 먹을 도구'로만 취급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며 가문의 권력을 배경 삼아 상대를 압박하려 들었다. 정꼐와 재계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들이 그런 뻔한 탐욕에 놀아날 리 만무했다.'너는 사람 낚는 법을 모르는구나,민채린.'이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자신은 민채린과 달랐다.사람의 욕망을 건드리는 법, 상대를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 대해 마음을 여는 인내심. 억울하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바닥까지 떨어져 본 한이서에게는 민채린이 갖지 못한 그 치밀함과 기다림의 유연함이 있었다.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빈틈을 파고들어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스며들면 그뿐이었다.복수는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계산과 전략의 영역이었다.거실로 나온 이서는 정적 속에서 서성이는 강태준과 마주쳤다.소파 끝에 비스듬히 앉아 서류를 넘기던 태준이 나직하게 고개를 들었지만, 이서는 단 한 순간도 그와 시선을 섞지 않았다. 의도적인 외면이었다.눈길조차 주지 않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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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증거의 첫걸음

노트북 화면 중앙에서 모래시꼐 아이콘이 정지하고, 100% 라는 숫자와 함께 복구된 데이터 폴더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이서는 밤을 지새운 피로도 잊은 채 마우스를 쥐었다. 메모리 카드 안에는 비밀 폰에서 추출한 음성 파일 외에도 여러 개의 텍스트 문서와 암호화된 가계정 내역이 숨겨져 있었다. 그중에는 민채린이 가문 몰래 빼돌리거나 거래했던 자금의 흔적이 담긴 비밀 장부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다.이서는 숨을 죽인 채 파을들을 하나씩 파헤쳐 나갔다.음성 파일 속에서 민채린이 언급했던 '그 사고'. 문서에 담긴 정황과 날짜를 종합해 볼 때, 그 사고는 분명 자신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대원그룹에서 쫓겨났던 '산업 스파이 사건'을 가리키고 있었다.자신의 인생을 단숨에 사지로 내몰았던 그 잔혹한 사건. 하지만 파일에 적힌 단편적인 정황만으로는 당시 그 공작의 '진짜 내막'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완벽히 파악하기 어려웠다.그러나 단 한 가지, 명백하게 입증된 사실이 있었다.녹음 속에서 강태준이 내뱉었던 짧은 한마디.'지분을 가져갔으면 그 입 다물어.'최소한 강태준과 민채린의 결합은 상류사회가 겉으로 칭송하던 다정한 재혼도, 두 사람의 정략적 욕망이 합치된 완벽한 모의도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지분과 약점을 둘러싼 차가운 '거래'에 불과했다.이서는 헤드폰을 착용하고 문제의 음성 파일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지분을 가져갔으면 그 입 다물어.내 인내심을 더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반복해 들을수록, 이서의 신경은 태준의 목소리 토톤과 미세하게 떨리는 음색의 디테일에 집중됐다.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자의 오만함이나 배신에 성공한 자의 비열함은 그 목소리에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거대한 덫에 걸려 외통수에 몰린 자가 내지르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서늘한 방어 기제에 가까웠다. 그는 자발적으로 판을 짜고 민채린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억눌린 협박과 강제된 선택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족쇄를 차고 있었다.이서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칫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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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수면 아래의 씨앗

외부의 시선이 완벽히 차단된 최고급 프라이빗 골프 클럽의 VIP 라운지. 푸른 필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는 오직 스치는 바람 소리와 은은한 차 향기만이 맴돌고 있었다.테이블 맞은편에는 대원과 성운의 오랜 경쟁사인 서가그룹의 서 대표가 앉아 있었다. 사교계 만찬장에서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지 며칠 만에 성사된 비공개 회동이었다.그저 단정하고 우아한 필체로 적힌 몇 개의 회사 이름뿐이었다."성운그룹 산하에 있는 몇 개 해외 법인들이에요. 최근 회계 흐름이 묘하게 물투명해 보여서요. 서 대표님께서 한 번쯤 가볍게 들여다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가지고 나왔습니다."직접적인 고발도, 혐의에 대한 단정도 아니었다. 그저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냄새만 풍겨주는 정갈한 제안.서 대표의 노련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쪽지에 적힌 사명들을 훑어본 뒤, 턱을 괴며 이서를 흥미롭다는 듯 응시했다."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주는 겁니까? 아무리 대원가의 며느리가 되었다 한들, 당신은 엄연한 성운의 민채린인데."상대의 의도를 떠보려는 날카로운 질문이었지만, 이서의 표정에는 티끌만 한 동요도 일지 않았다. 그녀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저는 성운의 미래에 대해....제 나름의 그림을 그리고 있거든요."가문을 배신하겠다는 선언도, 그렇다고 노골적인 복수심을 드러내는 위험한 고백도 아니었다. 상류사회의 권력 싸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후계 구도를 염두에 둔 은밀한 견제'처럼 보이게 만드는 지극히 모호하고 완벽한 대답이었다.서 대표는 낮게 실소를 흘리더니, 쪽지를 반으로 정갈하게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흐음....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확인해보지요."작은 씨앗 하나가 경쟁사의 품 안으로 조용히 건네졌다.저택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레스룸 안에서 이서의 휴대폰이 날카롭게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은 예상대로 [아버지] 였다.이서는 숨을 고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되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민 회장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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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같은 지붕 아래의 균형

조용한 갤러리 안쪽, 낯익은 캔버스 앞에 이서가 멈춰 섰다.화폭 위에 내려앉은 붓 터치를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캔버스 귀퉁이에 적힌 희미한 서명을 내려다보던 이서는 곁으로 다가온 갤러리 큐레이터에게 무심한 듯 질문을 건넸다."이 그림, 꽤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소장자분은 계속 같은 분이신가요?"질문을 들은 직원이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손님. 한 분께서 수년째 갤러리에 위탁 대여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개인 소장자분의 신원이나 구체적인 인적 사항은 철저히 비공개로 부쳐져 있어서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완벽한 보안. 이서는 더이상 캐묻지 않고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군요."갤러리 문을 나서는 이서의 구두 굽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자신이 버려지고 잊힌 자리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의과거를 이 공간에 영원히 박제해 두고 있었다. 그 익명의 소장자가 누구인지 지금 당장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 손의 주인도.'저택으로 돌아와 고요한 거실을 지나치려돈 찰나였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태블릿을 넘기던 강태준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 할아버지의 개인 만찬이 있어."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어조. 그는 시선을 태블릿에 고정한 채 말을 덧붙였다."너도 참석하라고 하셨어."이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을 툭 던졌다."알았어."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이서가 거실을 지나 2층 계단을 밟고 올라서려던 바로 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묵직하게 진동했다. 화면을 켜자, 방금 전 거실을 스쳐 지나온 강태준의 이름으로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내일은 화려한 건 빼고 입어. 할아버지는 눈에 띄는 걸 아주 싫어하시니까.]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때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더니, 뒤돌아서자마자 날아든 무심한 경고.이서는 화면에 뜬 짧은 문장을 몇 초 동안 가만히 응시했다. 차가운 껍데기 속에 숨겨진 것이 가문의 며느리를 향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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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악녀의 수단

이서는 민채린의 비밀 폰 속 오래된 파일을 뒤지다 그 이름을 발견했다.한성진. 3년 전 대원그룹의 한 해외 인수합병 건을 담당했던 변호사. 그 인수합병은 결국 '상대방 자진 철수'로 종결됐지만, 비밀 폰 안에는 암호화되지 않은 메모 하나가 남아 있었다. 한 줄뿐이었다."한성진, 해외 계좌, 사할."사할. 무엇의 사할인지 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원의 인수합병 건을 맡았던 변호사가 메모에서 '해외 계좌'와 나란히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찾아갈 이유는 충분했다.다음 날 오전 열 시, 이서는 법무법인에 도착했다. 프런트에는 젊은 여직원이 있었다. 훈련된 예의 바른 미소를 띠고 있었다."죄송합니다. 한 변호사님께서 갑작스러운 외부 미팅이 생기셔서 방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다음에 다시 일정을……"이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프런트를 지나 복도 끝의 유리문 너머로 향했다. 유리문 뒤, 의자 등받이에 걸린 짙은 회색 정장 재킷과 탁자 위에 놓인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보였다."언제 돌아오시나요?""그게…… 확실하지 않습니다."이서는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돌아서서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 주차장 버튼을 눌렀다.차에 앉아 잠시 조용히 있었다. 오래전, 자신이 갤러리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너는 너무 물러. 네가 옳게 하기만 하면 남들도 너에게 잘 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러면 그러할수록 남들이 너를 더 밟아."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대원에서 쫓겨나고 나서야 그 말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이서는 시동을 걸고 차를 주차장 밖으로 내보냈다. 스포츠용품점 앞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 골프채 한 자루를 샀다. 나올 때는 하늘이 흐려지고 바람이 세졌다.만약 세상이 '민채린'이라는 이름을 악녀라 부르며 멸시한다면, 굳이 그 이름을 정화하려 애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모든 악명과 오명은 '민채린'이라는 껍데기가 전부 뒤집어쓸 터였다. 진짜 영혼은 그 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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