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억울하게 파멸했던 한이서는 안하무인 재벌가 악녀 ‘민채린’의 몸으로 눈을 뜬다. 자신을 짓밟은 거대한 권력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그녀는 민채린이라는 오만한 가면을 쓰고 서늘한 복수의 판을 짜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작은 변화마저 집요하게 감시하는 옛 연인 강태준이 길목을 막아서며, 치명적인 경계선 위에서의 위험한 게임이 시작된다.
View More커다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이서의 얼굴과 몸을 환하게 감싸고 있었다.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빛이 눈부셨다.
따스했다.
차갑고 축축한 시멘트 바닥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순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포근한 온기였다.
피부를 감싸는 따뜻한 기운에 굳어 있던 감각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 귓가를 스치는 잔잔한 공기, 그리고 어디선가 은은하게 퍼지는 고급스러운 향기까지.
이서는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다.
'어?'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머릿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상하다…….'
우리 집에서는 이런 햇살이 들지 않았다.
창문의 방향도, 침실의 구조도 이렇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 그녀가 사용하던 방향제와도 전혀 다른 향이었다.
마치 낯선 누군가의 방에 누워 있는 것처럼.
이서가 무심코 몸을 웅크리며 자세를 바꾸려던 순간이었다.
찰나였다.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따뜻한 감각이 산산이 부서졌다.
대신, 오래전부터 잊고 싶었던 기억 하나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다.
축축한 시멘트 바닥.
등을 짓누르던 차가운 감촉.
어둠 속에서 코를 찌르던 눅눅한 곰팡내.
그리고 어딘가에서 뚝뚝 떨어지던 물소리.
그날의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싫어…….'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손발.
차갑게 식어가던 피부.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번뜩이던 칼날.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 죽어줘야겠어.”
낮고 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숨이 막혔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고, 온몸의 감각이 한순간에 끊어지는 것 같았다.
뜨거운 것이 배를 타고 흘러내렸다.
피 냄새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했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살려줘…….'
머릿속으로 수없이 외쳤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의식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시야가 흐려지고, 귀를 때리던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아 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여자의 웃음소리.
가볍고 맑았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그 웃음소리는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귓가를 맴돌았다.
하하…….
마치 그녀의 죽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 소름 끼치는 잔향이 다시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헉!”
이서는 비명을 지르듯 눈을 번쩍 떴다.
상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쿵.
쿵.
쿵.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와 목덜미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하아…….”
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각이 너무 생생했다.
칼날이 살을 파고들던 순간의 고통도,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던 피 냄새도,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여자의 웃음소리도.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했다.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분명 그곳에 상처가 있어야 했다.
칼이 깊숙이 박혔던 자리.
피가 흘러내리고, 살이 벌어져 있어야 할 자리.
그런데
“……?”
손바닥에 닿은 것은 매끄러운 피부뿐이었다.
이서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상처도.
피도.
흉터조차 없었다.
“말도 안 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그 부위를 더듬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힘껏 눌러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손톱으로 피부를 세게 긁어보았다.
붉은 자국 하나만 남았을 뿐, 칼에 찔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뭐지……?”
목소리가 떨렸다.
“분명…… 날카로운 칼에 이곳을 관통당했었는데…….”
그 기억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은 죽었다.
그것도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살아 있는 것일까.
이서는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이 긴장했다.
혹시라도 다시 무너질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침실.
높은 천장.
커다란 창문.
고급스러운 가구.
처음 보는 공간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낯설어야 하는데, 어딘가 익숙했다.
그 이유를 찾기도 전에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화장대.
그리고 그 위에 놓인 거울.
이서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곳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거울과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정말 살아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죽음의 순간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
거울 앞에 선 이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살아 있었다.
상처는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는 예상하지 못하는 여자가 서 있었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완벽한 패배였다. 거대한 장벽에 사정없이 부딪힌 절망감이 온몸의 피를 식혀버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택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멍한 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어두운 거실으르 들어선 순간, 이서의 발걸음이 딱 멈추어 섰다. 소파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던 태준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늘한 적막 속에서, 태준은 이서를 향해 아무런 말도 없이 몇 초간 그 짙은 눈동자로 빤히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옷자락에 묻어온 주차장의 흙먼지와 실패의 냄새를 한눈에 읽어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 어디 갔었어?" 메마르게 던져진 태준의 한마디. 그 나직한 음성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동안 민채린의 가면 뒤에서 차갑게 평정심을 유지하던 이서의 가슴 깊은 곳에서,무언가 뜨거운 덩어리가 목울대를 콱 치고 올라왔다. 통제할 수 없는 울컥함이 목구멍을 막아서며 눈시울이 시려왔다. "법무법인에 갔어." 이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 태준은 단번에 그 미세한 균열을 알아채고는, 울컥함에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직시했다. 그리고는 피곤함이 짙게 깔린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어느 법무법인." "한성진." 거실이 2초 동안 조용해졌다. 그러고 나서 태준이 일어섰다. "그 사람한테 왜 갔어?" "당신과 상관없어." "상관없어." 그가 되뇌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사람이 누구 사람인지 알고는 있어?" "알아." 이서가 말했다. "대원 사람이지. 그 말을 하는 거라면." "알면서 갔어." 그의 취조하는 듯한 말투가 이서의 남은 이성을 완전히 꺼트렸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이서의 언성이 순식간에 높아졌다. " 그래. 갔어. 그리고 또 갈 거야. 내가 알고 싶은 걸 전부 알 때까지 계속 갈 거야." 태준은 그녀의 음성에 거슬림이 묻어나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눈썹 뼈 부근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심기가 매우 불편할 때 나오는 그이 오랜 습관이었다. "못 찾아."
쾅! 고요함을 유지하던 법무법인 대표 집무실의 문이 거친 충격음을 발산했다. 안내 직원의 경악한 비명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서늘한 마찰음을 내며 단단한 골프공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날아갔다.콰창! 변호사 책상 바로 뒤편, 벽면에 걸려 있던 거대한 원목 액자가 산산조각이 나며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방으로 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들이 고급 원목 책상 위와 대리석 바닥으로 비처럼 흩뿌려졌다. 민채린 특유의 오만하고 거침없는 기세를 덧씌운 이서가, 한 손에 묵직한 아이언 골프채를 쥐어잡은 채 유유히 걸어 들어왔다. 그 표정에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식의 악녀다운 당당함의 서려 있었다.책상 주인의 이름은 한성진."민채린 씨."그의 말투는 평평했다. 놀람도, 당황도 없었다.이서는 골프채 끝을 바닥에 대고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왜 왔는지 아시죠.""모릅니다.""그럼 더 분명하게 말하죠."이서가 말했다. "3년 전 대원그룹의 해외 인수합병 건. 변호사님이 맡았던 그 건. 중간에 자금 하나의 행방이 불분명합니다. 지금 그 서류를 제게 주시면, 이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한성진은 그녀를 몇 초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아주 옅은 표정을 지었다. 냉소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피로에 가까웠다."서류는 제게 없습니다.""그럼 어디에 있죠?""모릅니다." 그가 말했다. "3년 전 그 사건을 넘겨받은 사람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름만 올렸을 뿐입니다. 실제로 처리한 사람이 사건이 종결되기 전에 모든 걸 가져갔습니다. 제가 받은 건 깨끗한 종결 보고서 한 장뿐입니다."이서는 그를 응시했다."누가 가져갔죠?"한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말할 수 없는 건가요, 모르는 건가요?""……"이번에 이서에게 대답한 것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내뱉지 않는 한 변호사의 평평한 입매뿐이었다.이서는 더 묻지 않았다.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서서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고, 그녀의 구두
이서는 민채린의 비밀 폰 속 오래된 파일을 뒤지다 그 이름을 발견했다.한성진. 3년 전 대원그룹의 한 해외 인수합병 건을 담당했던 변호사. 그 인수합병은 결국 '상대방 자진 철수'로 종결됐지만, 비밀 폰 안에는 암호화되지 않은 메모 하나가 남아 있었다. 한 줄뿐이었다."한성진, 해외 계좌, 사할."사할. 무엇의 사할인지 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원의 인수합병 건을 맡았던 변호사가 메모에서 '해외 계좌'와 나란히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찾아갈 이유는 충분했다.다음 날 오전 열 시, 이서는 법무법인에 도착했다. 프런트에는 젊은 여직원이 있었다. 훈련된 예의 바른 미소를 띠고 있었다."죄송합니다. 한 변호사님께서 갑작스러운 외부 미팅이 생기셔서 방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다음에 다시 일정을……"이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프런트를 지나 복도 끝의 유리문 너머로 향했다. 유리문 뒤, 의자 등받이에 걸린 짙은 회색 정장 재킷과 탁자 위에 놓인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보였다."언제 돌아오시나요?""그게…… 확실하지 않습니다."이서는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돌아서서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 주차장 버튼을 눌렀다.차에 앉아 잠시 조용히 있었다. 오래전, 자신이 갤러리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너는 너무 물러. 네가 옳게 하기만 하면 남들도 너에게 잘 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러면 그러할수록 남들이 너를 더 밟아."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대원에서 쫓겨나고 나서야 그 말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이서는 시동을 걸고 차를 주차장 밖으로 내보냈다. 스포츠용품점 앞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 골프채 한 자루를 샀다. 나올 때는 하늘이 흐려지고 바람이 세졌다.만약 세상이 '민채린'이라는 이름을 악녀라 부르며 멸시한다면, 굳이 그 이름을 정화하려 애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모든 악명과 오명은 '민채린'이라는 껍데기가 전부 뒤집어쓸 터였다. 진짜 영혼은 그 악
조용한 갤러리 안쪽, 낯익은 캔버스 앞에 이서가 멈춰 섰다.화폭 위에 내려앉은 붓 터치를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캔버스 귀퉁이에 적힌 희미한 서명을 내려다보던 이서는 곁으로 다가온 갤러리 큐레이터에게 무심한 듯 질문을 건넸다."이 그림, 꽤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소장자분은 계속 같은 분이신가요?"질문을 들은 직원이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손님. 한 분께서 수년째 갤러리에 위탁 대여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개인 소장자분의 신원이나 구체적인 인적 사항은 철저히 비공개로 부쳐져 있어서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완벽한 보안. 이서는 더이상 캐묻지 않고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군요."갤러리 문을 나서는 이서의 구두 굽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자신이 버려지고 잊힌 자리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의과거를 이 공간에 영원히 박제해 두고 있었다. 그 익명의 소장자가 누구인지 지금 당장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 손의 주인도.'저택으로 돌아와 고요한 거실을 지나치려돈 찰나였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태블릿을 넘기던 강태준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 할아버지의 개인 만찬이 있어."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어조. 그는 시선을 태블릿에 고정한 채 말을 덧붙였다."너도 참석하라고 하셨어."이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을 툭 던졌다."알았어."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이서가 거실을 지나 2층 계단을 밟고 올라서려던 바로 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묵직하게 진동했다. 화면을 켜자, 방금 전 거실을 스쳐 지나온 강태준의 이름으로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내일은 화려한 건 빼고 입어. 할아버지는 눈에 띄는 걸 아주 싫어하시니까.]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때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더니, 뒤돌아서자마자 날아든 무심한 경고.이서는 화면에 뜬 짧은 문장을 몇 초 동안 가만히 응시했다. 차가운 껍데기 속에 숨겨진 것이 가문의 며느리를 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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