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억울하게 파멸했던 한이서는 안하무인 재벌가 악녀 ‘민채린’의 몸으로 눈을 뜬다. 자신을 짓밟은 거대한 권력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그녀는 민채린이라는 오만한 가면을 쓰고 서늘한 복수의 판을 짜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작은 변화마저 집요하게 감시하는 옛 연인 강태준이 길목을 막아서며, 치명적인 경계선 위에서의 위험한 게임이 시작된다.
View More테라스의 밤바람이 민채린의 순백색 치맛자락을 거세게 흔들고 사라진 후에도, 강태준은 그 자리에 굳은 듯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귓가를 짓누르며 맴도는 것은 오직 그 서늘한 음성 하나뿐이었다.'아마도.....내가 한 번 죽어봐서 그런가 봐.'농담이라며 스쳐 지나가던, 그 달콤하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빛나던 미소. "집에 가자, 여보." 라는 낯선 다정함. 그 무서운 잔향이 뇌리를 찌르고 들어온 그날 밤, 태준은 끝내 잠들지 못했다. 차디찬 침실에 홀로 누워 눈을 감을수록, 어둠 속에서 선명해지는 것은 오직 만찬장의 기억뿐이었다.오늘 밤의 '민채린'은 이상했다. 아니, 태준이 아는 민채린의 궤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언제나 과시적이고 요란한 붉은색이나 화려한 보석만을 고집하던 여자가 입고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순백의 드레스였다. 장식을 철저히 배제한 채 우아함과 고상함만을 남긴 그 자태는 결코 민채린이라는 인물이 선택할 만한 색이 아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성운그룹의 경쟁사 대표에게 접근해 날카로우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유연한 미소를 건네던 모습. 과거 자신에게 대들었다며 경멸하던 귀부인들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조련하던 손길. 그리고 대원의 추악한 비밀을 가장 많이 쥐고 있는 강 회장의 개인 비서에게 던진, 그 소름 돋는 통찰력의 한마디까지.그 모든 행동거지에서 그가 아는 민채린 특유의 조급함과 표독스러움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특히 강무성 회장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 앞에서,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읊조린 말."제 역할을 잘 해내겠어요."그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갈았던 순간, 태준의 머릿속에는 벼락처럼 한 여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몇 년 전, 바로 그 만찬장 복도에서 강 회장의 무자비한 경고를 들은 후 똑같이 고개를 숙이며 '제 역할을 다하겠다.'고 말하던 한이서의 얼굴이.태준은 짓눌린 신음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민채린. 소꿉친구라는 이름 아래 가문과 가문의 이해관계로 묶여 있던 여자. 그녀는 언제나 끊임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나선 화장실 복도, 낯익은 노인의 실루엣이 이서의 시야에 걸렸다. 대원그룹의 정점, 강무성 회장이었다. 늙은 호랑이 같은 노인의 시선이 '며느리'인 그녀의 온몸을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그 눈빛에 담긴 것은 며느리를 향한 애정 따위가 아닌, 철저한 탐색과 짙은 경멸이었다."채린아, 얌전해졌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구나. 대원의 성을 달았으면 그에 걸맞게 행동하거라.그전에 태준이 데려왔던 저 변변찮은 여자처럼, 집안의 체면을 구기고 발뒤꿈치도 제대로 못 맞추던 그런 꼴은 이제 보지 말아야겠지? 보는 눈들 피곤하게 만들던 그 천박하고 날카로운 성미도 이제 그만 접어둘 때가 되지 않았느냐."훈계가 이닌 명령이었다. 제 핏줄의 안위를 위해 한이서라는 무고한 목숨을 짓밝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던 냉혈한다운 언사였다.하지만 민채린의 얼굴을 한 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우아하게 허리를 굽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붉은 입술 끝에 매달린 미소는 지독하리만치 희미하고, 또 의미심장했다."네, 회장님 말씀이 옮아요. 저는....제 역할을 잘 해내도록 하겠어요."그녀가 뱉어낸 '역할'이라는 단어는 복도 벽면의 대리석에 부딪혀 서늘하게 공명했다. 강무성 회장이 바라는 대원그룹의 순종적인 며느로로서의 역할. 그리고 이 오만한 왕국을 뼛속까지 파멸로 몰고 갈, 복수자 한이서로서의 진짜 역할.상상조차 못 할 지옥의 서막을 선포하는 이서의 눈동자가 강무성 회장의 머리 위에서 잔인하게 빛나고 있었다.만찬장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갈 무렵, 이서는 난간을 짚은 채 테라스 밖으로 펼쳐진 아득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바람이 그녀의 순백색 치맛자락을 사정없이 흔들던 그때,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강태준이 그녀의 등 뒤에 멈춰 섰다.피리와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그 무거운 목소리가 이서의 어깨너머로 떨어졌다."민채린. 오늘 너... 뭔가 달라 보이는데."태준의 시선이 그녀의 낯선 뒷모습을 집요하게 쫓았다. 하지만 이서는
샹들리에 아래로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이 끊임없이 오갔다. 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 낮게 이어지는 웃음소리, 그리고 누구도 대놓고 꺼내지 않는 거래와 이해관계가 뒤섞인 자리였다.대원그룹이 주최한 오늘의 만찬에는 정재계 인사들은 물론, 국내외 기업의 대표와 사교계의 거물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우아한 사교의 장이었지만, 이곳에서 오가는 말 한마디와 명함 한 장에는 저마다의 목적이 숨어 있었다.그리고 이서는 그 틈에서 조용히 사람들을 살폈다.가장 먼저 그녀가 다가간 사람은 성운그룹의 유일한 경쟁사 대표였다. 평소 민채린이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서는 그가 잠시 흘린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최근 추진 중인 해외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었다. 한이서는 갤러리 시절, 수많은 사업가들의 뒷이야기를 들으며 안목을 키워왔다. 그 지식이 지금, 이 자리에서 빛을 발했다."혹시 말레이시아 진출을 고려 중이신가요?"대표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볍게 명함을 내밀었다. 대표는 망설이다가 그녀의 명함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 이서는 알았다- 이 인연이 언젠가 쓰일 거라는 것을.그녀는 곧바로 다음 목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사교계의 거물 귀부인. 과거 민채린의 독설에 상처 입고 등을 돌린 인물이다. 이서는 그녀의 곁에 자연스럽게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드레스가 정말 아름다우세요. 어떤 디자이너의 작품인지 여쭤봐도 될까요?"귀부인의 어깨에 감돌던 긴장이 순간 풀렸다. 민채린이라면 절대 건네지 않을 말투- 상대를 낮추지 않고, 세우지도 않는,그저 있는 그대로의 온기. 귀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스며든 경계가 조금씩 녹아내렸다.그리고 마지막 목적지. 대원그룹의 정점, 강무성 회장의 개인 비서 앞이었다. 화려한 만찬장에서 유령처럼 스며들어 있지만, 대원의 모든 추악한 비밀을 쥐고 있는 핵심 인물."늘 회장님의 그늘에 가려져 계시기엔, 실장님의 혜
민채린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지 어느덧 사흘. 그사이 이서는 거울 속 낯선 얼굴에 적응하기 위해 밤낮으로 애썼다. 민채린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 민채린의 걸음걸이로 걷는 법, 민채린의 눈빛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법-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거울 속에 비친 눈동자는 한이서의 것이었다. 그렇게 사흘은 준비의 시간이자, 자기 자신을 지우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결전의 만찬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서는 민채린의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 상류사회의 정점에 서 있는 최고급 스타일리스트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 손으로 민채린의 시그니처와도 같던 과시적인 화려함을 과감히 지워버렸다. 순백의 드레스, 장신을 배제한 심플함, 우아하고 고상한 자태. 그것은 과거 한이서가 가장 잘 소화하던 색이었다.거울 속에서 완전히 다르게 태어난 스스로를 바라보는 이서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얼굴은 뼛속까지 증오하는 민채린이었으나, 그 육신을 지배하는 기운은 온연히 한이서의 것이었다. 거울 속 원수의 입술이 비틀리며 서늘한 조소를 흘렸다."기대해, 강태준. 당신이 사랑하고 이용했던 이 오만한 껍데기로, 당신들의 완벽한 세상을 가장 처참하게 부숴줄 테니까."최고급 스타일리스트의 손길로 완성된,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자태. 장식을 덜어내어 더욱 눈부신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채, 이서는 강태준의 팔에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만찬장에 발을 들였다.두 사람이 입장하자 사방에서 일순 숨을 숨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과시적인 화려함만을 쫓던 '민채린'이 선보인 오늘 밤의 낯설고도 고상한 기품에, 장내의 모든 시선이 매료된 순긴이었다.하지만 쏟아지는 찬사 따윈 이서의 안중에 없었다. 그녀의 모든 감각은 오직 제 곁에 선 전 남편, 강태준의 반응 하나에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그는 여전히 얼음처럼 냉담했다. 심지어 팔짱을 낀 그녀의 숨결이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지자, 강태준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숨기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살짝 찡그리기까지 했다. 곁에 있는 것조차 끔찍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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