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을 했더니 전 남편의 현 아내가 되어있었다.

환생을 했더니 전 남편의 현 아내가 되어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By:  태이해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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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파멸했던 한이서는 안하무인 재벌가 악녀 ‘민채린’의 몸으로 눈을 뜬다. ​자신을 짓밟은 거대한 권력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그녀는 민채린이라는 오만한 가면을 쓰고 서늘한 복수의 판을 짜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작은 변화마저 집요하게 감시하는 옛 연인 강태준이 길목을 막아서며, 치명적인 경계선 위에서의 위험한 게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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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낯선 천장

커다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이서의 얼굴과 몸을 환하게 감싸고 있었다.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빛이 눈부셨다.

따스했다.

차갑고 축축한 시멘트 바닥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순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포근한 온기였다.

피부를 감싸는 따뜻한 기운에 굳어 있던 감각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 귓가를 스치는 잔잔한 공기, 그리고 어디선가 은은하게 퍼지는 고급스러운 향기까지.

이서는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다.

'어?'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머릿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상하다…….'

우리 집에서는 이런 햇살이 들지 않았다.

창문의 방향도, 침실의 구조도 이렇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 그녀가 사용하던 방향제와도 전혀 다른 향이었다.

마치 낯선 누군가의 방에 누워 있는 것처럼.

이서가 무심코 몸을 웅크리며 자세를 바꾸려던 순간이었다.

찰나였다.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따뜻한 감각이 산산이 부서졌다.

대신, 오래전부터 잊고 싶었던 기억 하나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다.

축축한 시멘트 바닥.

등을 짓누르던 차가운 감촉.

어둠 속에서 코를 찌르던 눅눅한 곰팡내.

그리고 어딘가에서 뚝뚝 떨어지던 물소리.

그날의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싫어…….'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손발.

차갑게 식어가던 피부.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번뜩이던 칼날.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 죽어줘야겠어.”

낮고 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숨이 막혔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고, 온몸의 감각이 한순간에 끊어지는 것 같았다.

뜨거운 것이 배를 타고 흘러내렸다.

피 냄새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했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살려줘…….'

머릿속으로 수없이 외쳤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의식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시야가 흐려지고, 귀를 때리던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아 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여자의 웃음소리.

가볍고 맑았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그 웃음소리는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귓가를 맴돌았다.

하하…….

마치 그녀의 죽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 소름 끼치는 잔향이 다시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헉!”

이서는 비명을 지르듯 눈을 번쩍 떴다.

상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쿵.

쿵.

쿵.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와 목덜미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하아…….”

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각이 너무 생생했다.

칼날이 살을 파고들던 순간의 고통도,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던 피 냄새도,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여자의 웃음소리도.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했다.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분명 그곳에 상처가 있어야 했다.

칼이 깊숙이 박혔던 자리.

피가 흘러내리고, 살이 벌어져 있어야 할 자리.

그런데

“……?”

손바닥에 닿은 것은 매끄러운 피부뿐이었다.

이서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상처도.

피도.

흉터조차 없었다.

“말도 안 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그 부위를 더듬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힘껏 눌러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손톱으로 피부를 세게 긁어보았다.

붉은 자국 하나만 남았을 뿐, 칼에 찔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뭐지……?”

목소리가 떨렸다.

“분명…… 날카로운 칼에 이곳을 관통당했었는데…….”

그 기억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은 죽었다.

그것도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살아 있는 것일까.

이서는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이 긴장했다.

혹시라도 다시 무너질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침실.

높은 천장.

커다란 창문.

고급스러운 가구.

처음 보는 공간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낯설어야 하는데, 어딘가 익숙했다.

그 이유를 찾기도 전에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화장대.

그리고 그 위에 놓인 거울.

이서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곳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거울과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정말 살아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죽음의 순간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

거울 앞에 선 이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살아 있었다.

상처는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는 예상하지 못하는 여자가 서 있었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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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낯선 천장
커다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이서의 얼굴과 몸을 환하게 감싸고 있었다.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빛이 눈부셨다.따스했다.차갑고 축축한 시멘트 바닥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순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포근한 온기였다.피부를 감싸는 따뜻한 기운에 굳어 있던 감각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 귓가를 스치는 잔잔한 공기, 그리고 어디선가 은은하게 퍼지는 고급스러운 향기까지.이서는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익숙하지 않은 냄새였다.'어?'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머릿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다.'이상하다…….'우리 집에서는 이런 햇살이 들지 않았다.창문의 방향도, 침실의 구조도 이렇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 그녀가 사용하던 방향제와도 전혀 다른 향이었다.마치 낯선 누군가의 방에 누워 있는 것처럼.이서가 무심코 몸을 웅크리며 자세를 바꾸려던 순간이었다.찰나였다.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따뜻한 감각이 산산이 부서졌다.대신, 오래전부터 잊고 싶었던 기억 하나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다.축축한 시멘트 바닥.등을 짓누르던 차가운 감촉.어둠 속에서 코를 찌르던 눅눅한 곰팡내.그리고 어딘가에서 뚝뚝 떨어지던 물소리.그날의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싫어…….'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움직이지 않는 손발.차갑게 식어가던 피부.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번뜩이던 칼날.“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 죽어줘야겠어.”낮고 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그 순간이었다.날카로운 칼날이 복부를 파고들었다.숨이 막혔다.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눈앞이 새하얗게 번지고, 온몸의 감각이 한순간에 끊어지는 것 같았다.뜨거운 것이 배를 타고 흘러내렸다.피 냄새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했다.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살려줘…….'머릿속으로 수없이 외쳤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의식이 빠르게 가라앉았다.시야가 흐려지고, 귀를 때리던 소리도 점점 멀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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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원수의 얼굴
거울 속에서 정교하고 오만한 표정을 한 민채린의 얼굴이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두 눈에 가득 들어온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서의 사고가 완전히 멈췄다.민채린.분명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증오했던 얼굴이었다.한동안 굳어 있던 이성이 뒤늦게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억눌려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아니야…….”이서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향해 악을 쓰듯 소리쳤다.“이건 아니야……!”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그녀는 떨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아……!”선명한 통증이 느껴졌다.꿈이 아니었다.이서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긴 생머리. 가느다란 손가락. 피부에 닿는 값비싼 실크 잠옷.모두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거울 속 얼굴로 웃어 보기도 했다. 눈썹을 찌푸리고, 입꼬리를 올려보기도 했다.하지만 아무리 표정을 바꿔도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은 한이서의 영혼이 담긴 민채린의 얼굴뿐이었다.“하필…….”목소리가 떨렸다.“하필 민채린의 몸이라니…….”강한 괴리감에 속이 뒤틀렸다.이서는 결국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손끝에 잡힌 긴 머리카락을 무심코 움켜쥐었다.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하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또 한 번 숨이 막혔다.이곳은 자신이 납치됐던 축축한 창고도 아니었다.평생을 살아온 낡은 자취방은 더더욱 아니었다.눈앞에 펼쳐진 것은 한눈에 봐도 최고급 펜트하우스의 침실이었다.침실 한쪽을 차지한 거대한 드레스룸이 눈에 들어왔다.이서는 홀린 듯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문을 열자 이번 시즌 오트쿠튀르 의상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화장대 위에는 한 번쯤 가져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평생 돈을 모아도 쉽게 살 수 없을 만큼 비싼 리미티드 립스틱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한때 길거리 진열장 너머로 바라보기만 했던 세계.그녀가 감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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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부사장님
강태준.그 이름 석 자를 떠올리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과거 갤러리 큐레이터로 일하던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강태준을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그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고 지쳐 보였다. 그림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선 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캔버스만 바라보고 있었다.그 모습에 이끌리듯 다가간 나는 조용히 그림에 담긴 의미를 건넸다.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던 순간.죽어 있던 그의 눈동자에 거짓말처럼 생생한 빛이 다시 피어올랐다.그 눈빛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어쩌면 내가 그의 구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오만이 얼마나 위험한 착각이었는지를.어쩌면 그때의 강태준에게는 정말 위로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무채색으로 죽어 있던 그의 감정에 다시 색이 번지기 시작했고, 꺼져 있던 눈빛에도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다.그리고 그의 뜨거운 구애와 진심이 담긴 프러포즈에 감동한 나는 결국 강태준과 결혼했다.당연히 행복한 결혼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다.하지만 결혼 후, 내가 마주한 것은 강무성 회장의 끊임없는 트집과 가문의 냉대였다.태준은 점점 바빠졌고, 귀가하는 시간도 늦어졌다.어느 순간부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마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나는 그 모든 것을 묵묵히 견뎌냈다.그래도 태준만큼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그것이 내가 저질렀던 가장 오만한 착각이었다.화려하지만 숨이 막힐 듯 고요한 저택.온기라고는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은 차가운 궁궐 같은 그곳에서, 나는 언제나 철저히 혼자였다.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감옥과 다를 바 없는 공간에서 태준을 기다리며 홀로 시간을 견뎌냈다.그러던 어느 날, ‘민채린’이라는 거대한 해일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시 내 삶을 덮쳐왔다.오랜 해외 유학을 마치고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부터, 어쩌면 이미 불길한 징조는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귀국과 동시에 그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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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별의 대가
"태준 씨! 나, 나 진짜 아니야!"목이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서재 안을 울렸다."나 정말 그런 짓 안 했어. 태준 씨도 알잖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 그런데 왜…… 왜 나를 믿어주지 않는 거야?"이서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떨렸다.하지만 강태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마침내 차갑게 입을 열었다."……내가 널 왜 믿어줘야 하지?"그 한마디에 이서의 숨이 턱 막혔다."뭐……?"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태준 씨가 나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더 잘 알잖아.""글쎄."너무나도 태연한 대답이었다.마치 지금까지 함께했던 시간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듯.이서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머릿속이 새하얘졌다.이 남자가 정말 자신이 사랑했던 강태준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태준 씨……."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나 정말 아니야. 나 대원 기술을 빼돌린 적도 없고, 그 돈을 받은 적도 없어.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내 말 믿어줘."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하지만 강태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이미 증거는 충분해.""그건 조작된 거야!""그걸 네가 어떻게 증명할 건데?""……."말문이 막혔다.그녀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외쳐도, 이미 모든 증거가 자신을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었던 사람마저 그녀의 편에 서지 않았다.이서는 애써 눈물을 닦아내며 한 걸음 다가갔다."태준 씨가 나한테 이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우리…… 그래도 부부잖아."그 말에 강태준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그는 끝내 시선을 거두며 차갑게 말했다."이혼하자."그 짧은 말이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뭐?""서류는 이미 작성해 놨어."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담담했다."당장 떠나."이서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그를 바라봤다.수없이 많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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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이혼 이후의 삶
강태준과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그날 이후, 내 인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평생을 꿈꿔왔던 갤러리 큐레이터라는 직업은 이제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사치가 되어버렸다.대원그룹의 서슬 퍼런 입김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내 이름이 업계에 오르내리는 순간부터, 그동안 쌓아왔던 경력과 신뢰는 한순간에 무너졌다.이력서를 들고 수없이 많은 갤러리의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같았다."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채용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두 번째도 그랬다.하지만 같은 일이 반복될수록, 나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대원그룹이 나를 업계에서 완전히 밀어내고 있었다.결국 나는 발이 부르트도록 부동산을 전전한 끝에, 겨우 작은 반지하 원룸 하나를 구했다.볕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차디찬 방.창문을 열어도 바깥 풍경 대신 축축한 콘크리트 벽만 보이는 곳이었다.곰팡내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방 한 칸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렸다.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결국 나는 생계를 위해 작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모든 것이 서툴고 낯설었다.커피 머신을 다루는 것도, 주문을 받는 것도, 잔돈을 세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뜨거운 스팀에 손을 데여 살갗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일은 이제 일상이었다.처음에는 손을 움켜쥐며 눈물을 참았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상처조차 아무렇지 않게 넘기게 됐다.더 아픈 곳이 따로 있었으니까.깊은 밤, 손님이 모두 빠져나간 카운터에 홀로 남아 그날 번 돈을 하나씩 세어보던 순간이면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이번 달 월세를 낼 수 있을까.다음 달에는 또 어떻게 버텨야 할까.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대원그룹의 화려한 연회장에서 크리스털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웃고 있었고, 누구도 감히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그런데 지금 내 손에 들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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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웃음의 주인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그 순간.코끝을 찌르는 축축하고 퀴퀴한 창고 냄새.등을 짓누르던 차갑고 눅눅한 바닥의 감각.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납치범의 일그러진 얼굴.그리고 귓가를 파고들었던 낮고 쉰 목소리."미안하다."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누군가가 너를 영원히 입막음하라고 큰돈을 줬거든."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이어 날카로운 칼날이 복부를 사정없이 꿰뚫었다."아……!"숨이 멎을 듯한 격통이 전신을 휘감았다.피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몸 안의 체온이 빠져나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냉기가 온몸을 뒤덮었다.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갔다.의식이 점점 멀어졌다.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귓가를 파고드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있었다.날카롭고, 가볍고, 청명한 웃음.마치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광경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극이라도 되는 것처럼.그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흐릿해진 시야 끝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창고 후문이었다.그 빛을 가로막은 한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문틀에 기대어 선 채, 느긋한 자세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여자는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다는 듯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그리고 귀에 걸린 귀걸이 하나를 빼냈다.우아하기 짝이 없는 손짓이었다.희미한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귀걸이 끝에는 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그 순간에도 여자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다급함도 없었다.마치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는 사람처럼.의식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 이서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저 여자는…… 지금 웃고 있는 건가?'그제야 그녀는 보았다.여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그리고 그 웃음소리를.그건 명백히 민채린의 목소리였다.민채린은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고 있었다.그것이 생을 마감하기 전, 이서가 본 민채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그리고 그 순간의 기억이 지금, 하나도 빠짐없이 되살아났다."……민채린."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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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비틀린 기억
민채린이 창고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순간이었다.죽기 직전까지 스쳐 지나갔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휘감던 그때, 어딘가 맞지 않던 퍼즐 한 조각이 갑작스럽게 제자리를 찾아간 듯한 장면이 떠올랐다.쾅!창고 정문이 강제로 열렸다.쇠창살이 비틀리며 찢어지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그리고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나를 발견한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달려왔다.그리고 그대로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너무 세게.살갗이 부서질 듯 거칠고 절박하게.온몸을 짓누르는 힘에 배를 꿰뚫은 통증마저 잠시 멀어질 정도였다.그는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목이 찢어질 듯 소리를 질렀다.끊어질 듯 쉰 목소리.처절하고 다급한 울부짖음.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왜 그렇게까지 나를 끌어안았는지.끝내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그때였다.따뜻한 무언가가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한 방울.그리고 또 한 방울.뺨을 타고 흘러내린 액체는 이상할 만큼 뜨거웠다.피였을까?아니면…….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그의 얼굴을 보려 했다.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그는 내 머리를 자신의 품 안으로 깊숙이 끌어안고 있었다.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피로 얼룩진 그의 셔츠뿐이었다.끝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그리고 그 기억은 그곳에서 끊겼다."……!"이서는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운 회상에서 깨어났다.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거칠게 숨만 몰아쉬었다.얼굴에서 뜨겁고 축축한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이서는 무의식적으로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냈다.그리고 손등에 묻은 것을 내려다보았다.눈물이었다.그 순간까지도 이서는 그것을 자신의 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민채린의 손등으로 민채린의 얼굴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자신.거울 속에는 너무나도 아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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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순백의 드레스
민채린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지 어느덧 사흘.그동안 이서는 거울 속 낯선 얼굴에 익숙해지기 위해 밤낮으로 애썼다.민채린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민채린의 걸음걸이로 걷는 법.민채린 특유의 눈빛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법.거울 앞에 서서 수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거울 속 눈동자만큼은 끝내 바뀌지 않았다.그 얼굴은 민채린이었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사람은 한이서였다.그렇게 흘러간 사흘은 단순한 준비의 시간이 아니었다.자신의 얼굴을 부정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고, 한이서라는 존재를 조금씩 지워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기도 했다.그리고 오늘.마침내 결전의 날이 찾아왔다.대원그룹의 연례 자선 만찬.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짓밟은 사람들과 다시 마주하게 되는 날이었다.이서는 민채린이 가진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 상류사회의 정점에 서 있는 최고급 스타일리스트를 불러들였다.그리고 그의 손을 빌려, 민채린을 상징하던 과시적인 화려함을 과감하게 지워버렸다.화려한 장신구도.과도하게 꾸며낸 화장도.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애쓰던 흔적도 모두 걷어냈다.대신 그녀가 선택한 것은 순백의 드레스였다.군더더기 없는 실루엣.장식을 최대한 덜어낸 단정한 디자인.화려함보다 우아함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차분한 자태.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과거의 한이서가 가장 잘 소화하던 분위기였다.스타일링이 모두 끝난 뒤, 이서는 천천히 거울 앞에 섰다.거울 속에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민채린이 없었다.같은 얼굴이었다.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차갑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지난 사흘 동안 눌러 삼킨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얼굴은 뼛속까지 증오하는 민채린이었지만, 그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온전히 한이서였다.이서는 거울 속 자신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거울 속 원수의 입술이 서늘하게 휘어졌다."기대해, 강태준."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더 이상 과거의 미련도,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당신이 사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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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대원의 심장
샹들리에 아래로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와 낮게 이어지는 웃음소리.겉으로는 우아하고 화려한 사교의 장이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누구도 대놓고 꺼내지 않는 거래와 이해관계가 조용히 오가고 있었다.대원그룹이 주최한 오늘의 만찬에는 정재계 인사들은 물론, 국내외 기업의 대표들과 사교계의 거물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누군가는 새로운 사업을 위해 이곳을 찾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인맥을 넓히기 위해 잔을 들었다.그리고 누군가는 남들이 흘린 단 한마디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냈다.이서는 그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사람들을 하나씩 살폈다.누가 누구와 가까운지.누가 누구를 경계하는지.그리고 누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가장 먼저 그녀가 다가간 사람은 성운그룹의 유일한 경쟁사로 꼽히는 기업의 대표였다.평소 민채린이라면 굳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인물이었다.하지만 이서는 우연히 그의 대화에서 흘러나온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다.최근 추진하고 있는 해외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였다.이서는 자연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혹시…… 말레이시아 진출을 고려 중이신가요?"대표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짧은 찰나였지만 이서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그걸 어떻게…….""최근 사업 방향을 조금 찾아봤어요."이서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명함을 내밀었다.갤러리에서 일하던 시절, 그녀는 수많은 사업가와 기업 관계자들을 가까이에서 접했다.작품을 판매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업과 업계의 흐름을 접했고, 사람의 말투와 표정에서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읽어내는 법도 익혔다.지금까지는 그저 자신의 일에 필요한 감각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것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었다.대표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의 명함을 받아들었다."민채린 씨가 이런 쪽에도 관심이 있었습니까?""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꼭 하나뿐일 필요는 없잖아요."이서는 가볍게 웃으며 한발 물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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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죽음의 잔향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만찬장을 빠져나온 이서는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시끌벅적한 만찬장과 달리,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샹들리에의 불빛이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번지고 있었다.복도 끝에서 낯익은 노인의 실루엣이 이서의 시야에 걸렸다.대원그룹의 정점.강무성 회장이었다.이서의 발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강무성 역시 그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늙은 호랑이 같은 노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몸을 훑었다.머리끝부터 발끝까지.마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평가하듯 집요하고 노골적인 시선이었다.그 눈빛에 며느리를 향한 애정 따위는 없었다.탐색.경계.그리고 짙은 경멸.이서는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의 한이서였다면 저 눈빛 하나만으로도 몸이 굳었을 것이다.대원이라는 거대한 이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끊임없이 확인받아 왔으니까.하지만 지금의 이서는 달랐다.저 노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든, 더 이상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이미 한 번 죽어본 사람이었으니까."채린아."강무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얌전해졌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구나."칭찬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하지만 이서는 알았다.그건 칭찬이 아니었다."대원의 성을 달았으면 그에 걸맞게 행동하거라."강무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전에 태준이가 데려왔던 그 변변찮은 여자처럼 집안의 체면을 구기고, 발뒤꿈치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그런 꼴은 이제 보지 말아야겠지?"한이서.자신을 말하고 있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서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러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강무성은 그런 그녀의 침묵을 순종으로 받아들인 듯 말을 이었다."사람들 보는 눈 피곤하게 만들던 그 천박하고 날카로운 성미도 이제 그만 접어둘 때가 되지 않았느냐."이서는 속으로 천천히 웃었다.그래.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사람 하나쯤 없애버리고도 아무렇지 않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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