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황태자의 신부는 그릇을 굽습니다: Chapter 11 - Chapter 20

67 Chapters

르메르 영지의 가마가 황태자를 알아봤습니다

출발 당일 아침.엘로디아는 황궁 서쪽 정문 앞에 늘어선 행렬을 보자마자 한동안 말을 잃었다.말 열두 필.마차 세 대.황태자 직속 기사단.수행 시종.사냥 장비.황실 깃발.거기에 의무관과 마도사까지.누가 봐도 황태자가 가을 사냥을 떠나는 행렬이었다.문제는.“이게 조용히 르메르 영지에 가는 사람들 맞아요?”엘로디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곁에 서 있던 테오란이 아주 차분하게 대답했다.“공식적으로는 서부 황실 사냥터로 가는 행렬입니다.”“그러니까요.”엘로디아가 앞을 가리켰다.“너무 화려하잖아요.”“황태자께서 조용히 움직이시면 오히려 더 수상합니다.”“그건 또 그렇네요.”납득하고 싶지 않았지만 맞는 말이었다.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불만이 많군.”엘로디아가 돌아봤다.라시엘이 말을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검은 승마복 위에 짙은 남색 외투를 걸친 모습이었다. 평소 황궁 안에서 보던 정복보다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오히려 넓은 어깨와 긴 팔다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문제는 그의 옆구리였다.엘로디아의 시선이 즉시 그쪽으로 내려갔다.라시엘이 알아차렸다.“또?”“왜요?”“아침부터 몇 번째로 상처 보는 거지?”“안 벌어졌나 확인하는 거예요.”“옷 위로?”“걷는 모양 보면 대충 알아요.”라시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내가 지금 불편하게 걸었나?”엘로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그의 걸음걸이를 다시 살폈다.아주 미세하게.정말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른쪽보다 왼쪽 보폭이 짧았다.“아직 당기잖아요.”라시엘의 웃음이 멈췄다.테오란이 옆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제가 같은 말씀을 세 번 드렸을 때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나는 괜찮으니까.”엘로디아가 바로 반박했다.“안 괜찮아요.”“당신한테 통증이 느껴지나?”“아주 조금요.”사실이었다.평소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라시엘이 몸을 크게 움직이거나 옆구리에 힘이 들어가면 엘로디아에게도 희미하게 당기는 감각이 넘어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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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년 전의 여자가 제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엘로디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분명 들었다.착각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엘로디아.이백 년 전의 누군가가.자신의 이름을 불렀다.그것도 우연히 비슷한 이름을 입에 담은 것이 아니라, 마치 언젠가 자신이 이 자리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전하.”엘로디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방금.”“들었어.”라시엘의 대답은 짧았다.그도 평소와 달랐다.금빛 눈이 가마 안의 반쪽 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은빛과 금빛을 뿜어내던 잔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져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심장은 그렇지 않았다.쿵.쿵.엘로디아 자신의 박동.그리고 라시엘의 것.그 사이.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세 번째 박동까지.쿵.엘로디아는 본능적으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언니.”마리엘이 불안한 얼굴로 다가왔다.“괜찮아?”“응.”“안 괜찮아 보이는데.”“그냥…….”엘로디아는 말을 멈췄다.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이백 년 전의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의 초상화가 발견됐고, 그 그림의 주인이 지금 자신을 불렀다고?말로 꺼내는 순간 오히려 더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라시엘이 상자 안에 있던 반쪽 잔을 천으로 감쌌다.“초상화부터 보자.”엘로디아가 그를 바라봤다.“지금요?”“지금 아니면 잠들 수 있을 것 같나?”엘로디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아마 못 잘 것이다.분명 밤새 저 목소리만 떠올릴 테니까.“……가요.”그녀가 먼저 창고 밖으로 향했다.라시엘이 뒤를 따랐다.마리엘도 쪼르르 따라오려다 엘로디아가 뒤를 돌아봤다.“마리엘.”“응?”“이 이야기는 아직 아무한테도 하면 안 돼.”“나도 알아.”“친구한테도.”“언니.”“너 사교계 친구 많잖아.”마리엘이 억울한 얼굴이 됐다.“아무리 그래도 황실 비밀 같은 걸 말하고 다니지는 않거든?”엘로디아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정말?”“정말!”그때 라시엘이 옆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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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잔을 깨뜨리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편지를 다 읽고도 엘로디아는 한동안 손을 내리지 못했다.낡은 종이 위에 남은 마지막 두 줄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네가 사랑한 것이 그 사람인지.아니면 그 사람에게 묶인 감각이었는지.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상화 속 에델리아를 보며 억울하다고 생각했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했고, 황실의 음모에 휘말려 반역자가 되었으며, 이름마저 역사에서 지워진 여자.그런데 정작 에델리아가 이백 년 뒤의 자신에게 남긴 것은 복수하라는 말도, 르메르가의 명예를 되찾으라는 부탁도 아니었다.혼인잔을 믿지 말라는 경고였다.더 정확히는.그 잔 때문에 생긴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엘로디아는 천천히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쿵.심장이 뛰었다.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쿵.조금 더 느리고 묵직한 박동 하나가 겹쳤다.라시엘의 심장.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구분할 수 있었다.문제는.언제부터 이 박동이 익숙해졌는지였다.처음에는 불편했다.남의 심장이 제 몸 안에서 뛰는 것 같았다.잠을 자다가도 라시엘의 심장이 빨라지면 눈을 떴고, 그가 다치면 자신도 아팠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 체온이 겹쳤고, 손이 닿으면 어느 쪽의 감각인지 순간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워졌다.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느껴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해졌다.라시엘이 멀리 있어도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확인하면 안심했다.그가 다치면 화가 났다.심장이 빨라지면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그리고 그가 자신을 볼 때마다 박동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는.그것을 모른 척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엘로디아의 손가락이 편지 끝을 조금 세게 눌렀다.‘그러면.’이 감정은.어디까지 자신의 것일까.“엘로디아.”라시엘의 목소리가 들렸다.엘로디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응답해.”“……듣고 있어요.”“그럼 나를 봐.”그제야 엘로디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라시엘은 바로 앞에 있었다.조금 전과 똑같은 얼굴.똑같은 금빛 눈.그런데 이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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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복도는 고요했다.밤이 깊은 시간이라 시녀도, 기사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벽에 걸린 마도등만 낮은 빛을 흘리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엘로디아와 라시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느껴지던 심장 박동은 없었다.라시엘의 심장이 빠른지.느린지.지금 자신을 보고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그런데도.엘로디아는 이상하게 알고 있었다.그가 기쁘다는 것을.조금 안도했다는 것도.그리고 아마.자신이 먼저 방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꽤 마음에 든다는 것도.그건 심장이 알려주는 정보가 아니었다.라시엘의 눈이었다.입꼬리였다.조금 전까지 굳어 있던 어깨가 미세하게 풀리는 모습이었다.엘로디아는 한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왜 웃으세요?”“웃었나?”“네.”“당신도.”엘로디아의 손이 반사적으로 제 입가로 올라갔다.정말이었다.조금 웃고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정리했다.“안 웃었어요.”“방금 손까지 확인했는데.”“착각이에요.”“이제 심장 소리 안 들린다고 거짓말이 늘었군.”“전하.”라시엘이 낮게 웃었다.그 웃음도.심장 없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엘로디아는 괜히 복도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창 너머로 르메르 영지의 밤이 보였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봐온 정원과 멀리 낮은 산의 윤곽이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익숙한 풍경.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전혀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다.아마 라시엘이 이곳에 있어서일 것이다.그 생각이 들자 엘로디아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제 이런 것까지 다 저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야?’혼인잔이 사라졌는데도.“엘로디아.”“왜요?”“나 보러 나온 거지?”그녀의 얼굴이 굳었다.“아뇨.”“확실해?”“네.”“그럼 어디 가던 길이었는데?”“…….”라시엘은 기다렸다.엘로디아는 급하게 이유를 찾았다.“물.”“방에 있잖아.”“바람 쐬려고.”“가운만 입고?”“밤공기 좋아해요.”“거짓말 못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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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혼인잔을 만든 사람도 르메르였습니다

엘로디아는 편지에 적힌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에드리아 르메르.에델리아의 쌍둥이 언니.그리고.검은 혼인잔의 진짜 주인.같은 르메르.같은 시대.심지어 쌍둥이.그런데 지금까지 본 기록 어디에도 에드리아라는 이름은 없었다.에델리아조차 이름이 지워져 있었으니 이상할 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에델리아는 사람 수가 맞지 않는 임금 장부와 식량 배급량, 작업용 장갑의 수처럼 이름을 지우고도 완전히 지우지 못한 흔적이 남았다.에드리아는 달랐다.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그 어떤 빈칸조차 없었다.“쌍둥이라면.”엘로디아가 편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가문 기록에 출생 기록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해요.”라시엘이 맞은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한 사람을 역사에서 없애는 건 가능해도 태어난 사실까지 완전히 지우는 건 쉽지 않지.”“특히 쌍둥이면 더요.”마리엘이 두 사람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혹시 언니가 아까 본 초상화 있잖아.”“응.”“그게 에델리아가 아니라 에드리아일 가능성은?”엘로디아가 멈칫했다.라시엘의 눈빛도 바뀌었다.“왜 그렇게 생각하지?”마리엘이 어깨를 으쓱했다.“쌍둥이라며. 똑같이 생겼을 거 아니야.”단순한 말이었다.그런데 그게 오히려 문제였다.두 사람이 같은 얼굴이었다면.지금까지 자신들이 에델리아라고 믿었던 여자가 정말 에델리아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초상화 아래 금속판에는 분명 에델리아 르메르라고 적혀 있었다.하지만 그 이름표가 이백 년 전부터 그대로 붙어 있었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엘로디아가 벌떡 일어났다.“초상화.”라시엘도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마리엘이 놀라 물었다.“다시 가게?”“확인해야 해.”“뭘?”엘로디아는 대답 대신 편지를 접었다.“이름표가 정말 원래부터 붙어 있던 건지.”마리엘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이해했다.“설마.”“아직 몰라.”엘로디아는 빠르게 숨겨진 방으로 향했다.라시엘이 바로 뒤따랐다.그러다 몇 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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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가 검은 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은 르메르 영지로 향할 때보다 훨씬 조용했다.같은 마차.같은 두 사람.그런데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올 때는 엘로디아가 창밖을 보며 집 이야기를 했고, 라시엘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틈만 나면 놀렸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손이 닿고, 혼인잔을 통해 체온과 심장 박동이 겹치는 것이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해져 가던 길이었다.지금은.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라시엘의 심장도.체온도.상처가 당기는 감각도.혼인잔은 천년화로에 남아 있었고, 둘 사이의 감각 연결은 완전히 희미해진 상태였다.그런데 엘로디아는 오히려 예전보다 라시엘을 더 자주 보고 있었다.눈을 감았다가도 한 번.창밖을 보다가도 한 번.문서를 읽다가도 슬쩍.라시엘이 괜찮은지 직접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그의 얼굴이 창백하지 않은지.옆구리를 무의식적으로 누르고 있지는 않은지.숨이 평소보다 가쁘지 않은지.혼인잔이 있을 때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았던 것들을 이제는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그리고.그게 생각보다 싫지 않았다.“또.”라시엘이 문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엘로디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뭐가요?”“보고 있잖아.”“안 봤는데요.”“방금 봤어.”“전하는 문서 보고 있었잖아요.”“그럼 못 느낄 것 같나.”“심장도 안 들리면서요?”라시엘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심장을 들어야 당신 시선을 아나?”엘로디아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라시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이번이 다섯 번째.”“세고 있었어요?”“응.”“왜요?”“좋아서.”대답이 너무 자연스러웠다.엘로디아는 바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정말 말이 안 통해.”“잘 통하는 것 같은데.”“전하하고 제가요?”“당신 얼굴 보면 대충 알겠어.”엘로디아가 홱 돌아봤다.“무슨 뜻이에요?”“지금은 부끄러운 거.”“아닌데요.”“조금 화난 척하고 있고.”“…….”“그런데 정말 화난 건 아니고.”엘로디아의 얼굴이 굳었다.라시엘이 만족스럽게 말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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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셀레스트를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검은 잔의 균열 사이에서 떠오른 이름은 너무도 선명했다.셀레스트 드 아르망.엘로디아는 몇 초 동안 그 이름을 바라보기만 했다.잘못 읽었을 가능성은 없었다. 세드릭이 자신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보여준 글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다음 순간 황실 제1도요원 쪽에서 다시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쾅—!두꺼운 창문이 흔들렸다.멀리서 사람들의 고함과 비상종 소리가 겹쳐 들렸다.댕—! 댕—!엘로디아의 손이 차갑게 식었다.“셀레스트.”조금 전까지 라시엘의 품 안에서 축 늘어져 있던 황후가 가늘게 숨을 들이마셨다. 검은 마력선이 끊긴 뒤 아직 의식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얼굴에는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라시엘은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소파에 눕힌 뒤 바로 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황의를 불러!”황후궁 밖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이 들어왔다.“폐하를 황실 치료실로 옮기되 누구도 단독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해. 치료 인원도 전부 내 직속 기사 입회하에 확인하고.”“명 받들겠습니다.”“그리고 제1도요원은?”“폭발 직후 황태자궁 기사단이 이동했습니다!”“아르망 영애 위치부터 확인해.”엘로디아가 즉시 덧붙였다.“만지지 말라고 해주세요.”기사가 멈칫했다.“예?”“셀레스트 영애가 이상한 상태여도 함부로 붙잡거나 마법으로 제압하지 말라고요. 검은 잔이 사람의 기억이나 의지를 옮기는 중이면 외부 자극 때문에 연결이 더 깊어질 수도 있어요.”라시엘이 바로 명령을 수정했다.“들었지. 발견하면 포위만 하고 접근하지 마. 엘로디아가 도착할 때까지.”“예!”기사가 뛰어나갔다.엘로디아는 여전히 손 안의 검은 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아까 세드릭의 연결을 끊으며 생긴 균열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넓어져 있었다. 검은 연기는 거의 사라졌지만 잔은 완전히 죽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 깊은 곳에서 일정한 마력의 흐름이 미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아마.제1도요원.그리고 셀레스트.“전하.”“응.”“이건 제가 가져갈게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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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화로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검은 항아리 조각에 떠오른 마지막 문장을 읽고도 엘로디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천년화로에서 기다리겠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잔을 완성하지.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르메르의 옛 가마 아래 숨겨져 있었고, 에드리아와 에델리아의 기억이 남아 있었으며, 무엇보다 엘로디아와 라시엘 두 사람이 함께해야만 문이 열리는 공간. 그래서 혼인잔까지 그곳에 두고 왔다. 다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제가 두고 왔어요.” 엘로디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라시엘은 바로 그녀를 바라봤다. “우리가.” “제가 먼저 그러자고 했잖아요. 감각이 없는 상태에서도—” “엘로디아.” 단호한 목소리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라시엘은 조금 전까지 셀레스트를 받치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 기사에게 맡겼다. 그의 옆구리 쪽 외투가 검은 불에 그을려 있었지만 피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은 아닌 듯했다. “세드릭이 노린 거라면 우리가 가지고 있어도 방법을 바꿨을 거야.” “그래도.” “지금 필요한 건 누가 잘못했는지 찾는 게 아니라 먼저 도착하는 거지.” 맞는 말이었다. 엘로디아는 입술 안쪽을 한 번 세게 깨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면 얼마나 걸려요?” 라시엘이 대답하려는 순간 테오란이 먼저 말했다. “지금 바로 말을 바꿔가며 달려도 이틀입니다.” “이틀.” 엘로디아의 표정이 굳었다. 올 때는 황태자의 공식 행렬이었기 때문에 더 오래 걸렸다. 하지만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르메르 영지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세드릭이 이미 천년화로에 도착했다면. 너무 늦다. “마탑의 전이 마법은?” 라시엘이 물었다. 테오란이 고개를 저었다. “영지 안에 고정 좌표가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전이 거점에서도 반나절 이상 말을 타야 합니다.” “그럼 일단 거기까지라도—” “잠깐만요.” 엘로디아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세드릭은 자신들에게 천년화로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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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를 심사하라고 했지 유혹하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황태자의 얄미움을 첫 번째 심사 항목으로 넣겠다는 엘로디아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정확히는.황궁으로 돌아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더 심각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다시 말씀해보세요.”엘로디아는 황후궁의 작은 회의실 한가운데 앉아 테오란을 바라봤다.테오란의 앞에는 조금 전 왕관의 화로에서 발견한 두루마리와 르메르 영지에서 급히 보내온 필사본, 황실 법전 세 권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라시엘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었고, 치료를 마친 베아트리스 황후까지 침실에서 나와 회의에 참석했다.검은 잔에 정신을 침범당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황후의 모습은 단정했다.다만 평소보다 얼굴이 조금 창백했고.무엇보다.기분이 상당히 나빠 보였다.자신의 몸을 누군가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들은 뒤부터였다.“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테오란이 담담하게 말했다.“왕관의 화로와 수호자의 화로가 동시에 깨어남에 따라, 아르젠 제국 건국법 부칙 제7장에 명시된 ‘왕관 심사’가 자동으로 발효됐습니다.”“그건 들었어요.”엘로디아가 손가락으로 법전 한쪽을 두드렸다.“제가 이해가 안 되는 건 그다음이에요.”테오란은 잠깐 라시엘을 봤다.라시엘은 아주 태연했다.“말해.”“왕관 심사가 시작되는 즉시 현 황태자의 계승권은.”짧은 침묵.“임시 보류됩니다.”엘로디아의 눈이 커졌다.“보류?”“예.”“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온다는 뜻이에요?”“직위 자체가 박탈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황위 계승과 관련된 권한은 제한됩니다.”“어느 정도로요?”이번에는 베아트리스가 대신 답했다.“황제의 유고가 생겨도 바로 즉위하지 못하는 정도.”엘로디아의 얼굴이 굳었다.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제도였다.자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를 심사한다는 말을 듣고, 반쯤은 오래된 황실 의식 정도로 생각했다.하지만.진짜였다.라시엘이 황제가 될 수 있는지를.자신이 판단한다.“이런 걸.”엘로디아가 천천히 말했다.“왜 아무도 몰랐어요?”테오란이 법전의 낡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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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도 다시 좋아할 수 있을까요

라시엘의 심장이 들렸다.쿵.쿵쿵.평소보다 빠르고 거칠었다. 마치 엘로디아의 가슴 바로 옆에서 뛰는 것처럼 선명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 박동이 왜 자신에게 들리는지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다.이상했다.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 소리라는 건 안다.그런데 언제부터 들었지?무엇 때문에?그리고 왜.저 남자가 저렇게 다급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엘로디아.”라시엘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엘로디아는 본능적으로 그 손을 내려다봤다.따뜻하다.아주 익숙한 체온이었다.‘익숙해?’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손.”라시엘이 즉시 놓았다.엘로디아가 놀랄 정도로 빨랐다.“미안해.”그는 한 걸음 물러났다.“안 만질게.”엘로디아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이상하다.왜 저 사람은 자신이 싫다고 말하기도 전에 물러나는 방법부터 알고 있을까.그때 창밖에서.쨍그랑.작은 조각 하나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엘로디아가 고개를 돌렸다.흰 도공복을 입은 중년 남자.검은 눈.세드릭.그 이름은 기억났다.황후의 몸에 들어갔고.셀레스트의 몸을 빼앗으려 했으며.사람의 기억과 몸을 그릇이라고 부르는 미친 도공.그가 깨진 흰 잔의 조각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입술이 움직였다.하나씩.그리고.네가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된 기억부터.엘로디아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소리야.”세드릭은 웃었다.라시엘이 검을 들었다.“테오란.”“예.”“엘로디아에게서 떨어지지 마.”“전하는요?”엘로디아가 반사적으로 물었다.라시엘이 그녀를 봤다.그 순간.쿵.또 심장이 뛰었다.왜.왜 저 사람 심장이 자신에게 들리지?라시엘의 입술이 단단하게 굳었다.“저 자를 잡는다.”“잠깐.”엘로디아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정작 자신이 더 놀랐다.라시엘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내려갔다.그는 움직이지 않았다.“왜.”“혼자 가지 마요.”말하고 나서도 이상했다.자신은 라시엘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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