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황태자비가 될 생각은 없었다. 엘로디아가 원하는 건 오직 자신의 이름을 건 도자기를 만드는 것뿐. 그래서 황태자비 선발전에서 어떻게든 탈락하려 했는데, 전날 밤 몰래 찾은 황실 도요원에서 장작을 나르게 했던 남자가 황태자 라시엘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함께 빚은 잔에서 수백 년간 사라졌던 황실의 마력이 깨어난다. 잔이 완성될수록 통증과 체온, 촉각에 이어 은밀한 욕망까지 공유되기 시작하고, 엘로디아는 황실에서 지워진 자신의 가문과 혼인잔의 비밀에 다가간다. “황태자비는 싫다고 했지. 그런데 내가 싫다는 말은 아직 못 들었는데.”
view more편지를 다 읽고도 엘로디아는 한동안 손을 내리지 못했다.낡은 종이 위에 남은 마지막 두 줄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네가 사랑한 것이 그 사람인지.아니면 그 사람에게 묶인 감각이었는지.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상화 속 에델리아를 보며 억울하다고 생각했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했고, 황실의 음모에 휘말려 반역자가 되었으며, 이름마저 역사에서 지워진 여자.그런데 정작 에델리아가 이백 년 뒤의 자신에게 남긴 것은 복수하라는 말도, 르메르가의 명예를 되찾으라는 부탁도 아니었다.혼인잔을 믿지 말라는 경고였다.더 정확히는.그 잔 때문에 생긴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엘로디아는 천천히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쿵.심장이 뛰었다.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쿵.조금 더 느리고 묵직한 박동 하나가 겹쳤다.라시엘의 심장.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구분할 수 있었다.문제는.언제부터 이 박동이 익숙해졌는지였다.처음에는 불편했다.남의 심장이 제 몸 안에서 뛰는 것 같았다.잠을 자다가도 라시엘의 심장이 빨라지면 눈을 떴고, 그가 다치면 자신도 아팠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 체온이 겹쳤고, 손이 닿으면 어느 쪽의 감각인지 순간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워졌다.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느껴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해졌다.라시엘이 멀리 있어도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확인하면 안심했다.그가 다치면 화가 났다.심장이 빨라지면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그리고 그가 자신을 볼 때마다 박동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는.그것을 모른 척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엘로디아의 손가락이 편지 끝을 조금 세게 눌렀다.‘그러면.’이 감정은.어디까지 자신의 것일까.“엘로디아.”라시엘의 목소리가 들렸다.엘로디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응답해.”“……듣고 있어요.”“그럼 나를 봐.”그제야 엘로디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라시엘은 바로 앞에 있었다.조금 전과 똑같은 얼굴.똑같은 금빛 눈.그런데 이상
엘로디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분명 들었다.착각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엘로디아.이백 년 전의 누군가가.자신의 이름을 불렀다.그것도 우연히 비슷한 이름을 입에 담은 것이 아니라, 마치 언젠가 자신이 이 자리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전하.”엘로디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방금.”“들었어.”라시엘의 대답은 짧았다.그도 평소와 달랐다.금빛 눈이 가마 안의 반쪽 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은빛과 금빛을 뿜어내던 잔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져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심장은 그렇지 않았다.쿵.쿵.엘로디아 자신의 박동.그리고 라시엘의 것.그 사이.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세 번째 박동까지.쿵.엘로디아는 본능적으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언니.”마리엘이 불안한 얼굴로 다가왔다.“괜찮아?”“응.”“안 괜찮아 보이는데.”“그냥…….”엘로디아는 말을 멈췄다.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이백 년 전의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의 초상화가 발견됐고, 그 그림의 주인이 지금 자신을 불렀다고?말로 꺼내는 순간 오히려 더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라시엘이 상자 안에 있던 반쪽 잔을 천으로 감쌌다.“초상화부터 보자.”엘로디아가 그를 바라봤다.“지금요?”“지금 아니면 잠들 수 있을 것 같나?”엘로디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아마 못 잘 것이다.분명 밤새 저 목소리만 떠올릴 테니까.“……가요.”그녀가 먼저 창고 밖으로 향했다.라시엘이 뒤를 따랐다.마리엘도 쪼르르 따라오려다 엘로디아가 뒤를 돌아봤다.“마리엘.”“응?”“이 이야기는 아직 아무한테도 하면 안 돼.”“나도 알아.”“친구한테도.”“언니.”“너 사교계 친구 많잖아.”마리엘이 억울한 얼굴이 됐다.“아무리 그래도 황실 비밀 같은 걸 말하고 다니지는 않거든?”엘로디아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정말?”“정말!”그때 라시엘이 옆에
출발 당일 아침.엘로디아는 황궁 서쪽 정문 앞에 늘어선 행렬을 보자마자 한동안 말을 잃었다.말 열두 필.마차 세 대.황태자 직속 기사단.수행 시종.사냥 장비.황실 깃발.거기에 의무관과 마도사까지.누가 봐도 황태자가 가을 사냥을 떠나는 행렬이었다.문제는.“이게 조용히 르메르 영지에 가는 사람들 맞아요?”엘로디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곁에 서 있던 테오란이 아주 차분하게 대답했다.“공식적으로는 서부 황실 사냥터로 가는 행렬입니다.”“그러니까요.”엘로디아가 앞을 가리켰다.“너무 화려하잖아요.”“황태자께서 조용히 움직이시면 오히려 더 수상합니다.”“그건 또 그렇네요.”납득하고 싶지 않았지만 맞는 말이었다.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불만이 많군.”엘로디아가 돌아봤다.라시엘이 말을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검은 승마복 위에 짙은 남색 외투를 걸친 모습이었다. 평소 황궁 안에서 보던 정복보다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오히려 넓은 어깨와 긴 팔다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문제는 그의 옆구리였다.엘로디아의 시선이 즉시 그쪽으로 내려갔다.라시엘이 알아차렸다.“또?”“왜요?”“아침부터 몇 번째로 상처 보는 거지?”“안 벌어졌나 확인하는 거예요.”“옷 위로?”“걷는 모양 보면 대충 알아요.”라시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내가 지금 불편하게 걸었나?”엘로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그의 걸음걸이를 다시 살폈다.아주 미세하게.정말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른쪽보다 왼쪽 보폭이 짧았다.“아직 당기잖아요.”라시엘의 웃음이 멈췄다.테오란이 옆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제가 같은 말씀을 세 번 드렸을 때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나는 괜찮으니까.”엘로디아가 바로 반박했다.“안 괜찮아요.”“당신한테 통증이 느껴지나?”“아주 조금요.”사실이었다.평소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라시엘이 몸을 크게 움직이거나 옆구리에 힘이 들어가면 엘로디아에게도 희미하게 당기는 감각이 넘어왔다
엘로디아는 그날 밤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이상한 일이었다.황후궁 별채의 침대는 르메르 영지에 있는 제 침대보다 훨씬 넓었고, 매트리스는 몸이 파묻힐 만큼 푹신했다. 두꺼운 커튼을 닫자 달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고, 방 안에는 은은한 라벤더 향까지 퍼져 있었다.잠들기 좋은 조건만 놓고 본다면 완벽했다.그런데 눈을 감을 때마다 자꾸만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불타는 가마.깨진 검은 혼인잔.이백 년 전 황후 세실리아.그리고.이번 생에는 늦었어요.그럼 다음에는 내가 먼저 찾겠습니다.마지막으로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라시엘이었다.난 당신이 나를 선택했으면 좋겠지.운명도 아니고.황태자라는 자리 때문도 아니고.그냥 나라서.“…….”엘로디아는 눈을 번쩍 떴다.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왜 하필 지금 생각나.”혼잣말을 해봤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대신.쿵.다른 심장 하나가 느껴졌다.엘로디아는 그대로 굳었다.아까까지 비교적 느리고 일정했던 라시엘의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져 있었다.쿵.쿵.엘로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설마.’그도 깨어 있나?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걸 느껴서?아니다.생각은 공유되지 않는다.아직은.문제는 그 아직은이라는 단어였다.심장 박동.통증.체온.촉각.감정이 몸에 만드는 반응.처음에는 잔을 함께 만졌을 때만 가능했던 것들이 잔이 완성된 뒤에는 접촉하지 않아도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이대로라면 다음은 뭘까.감정 자체?기억?설마 생각까지?엘로디아는 베개를 끌어안았다.“안 돼.”절대로 안 된다.특히 지금은 더더욱.조금 전부터 라시엘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까.그 순간.쿵쿵.다른 심장이 다시 빨라졌다.엘로디아의 눈이 커졌다.“……전하?”물론 멀리 떨어져 있으니 대답이 들릴 리 없었다.그런데 기묘하게도 정말 라시엘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주 희미하게.가슴 안쪽 어딘가가 잡아당겨지는 감각.엘로디아는 상체를 일으켰다.‘이건 또 뭐야?’침대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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