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의 신부는 그릇을 굽습니다

황태자의 신부는 그릇을 굽습니다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09-12
By:  유월In-update ngayon la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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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가 될 생각은 없었다. 엘로디아가 원하는 건 오직 자신의 이름을 건 도자기를 만드는 것뿐. 그래서 황태자비 선발전에서 어떻게든 탈락하려 했는데, 전날 밤 몰래 찾은 황실 도요원에서 장작을 나르게 했던 남자가 황태자 라시엘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함께 빚은 잔에서 수백 년간 사라졌던 황실의 마력이 깨어난다. 잔이 완성될수록 통증과 체온, 촉각에 이어 은밀한 욕망까지 공유되기 시작하고, 엘로디아는 황실에서 지워진 자신의 가문과 혼인잔의 비밀에 다가간다. “황태자비는 싫다고 했지. 그런데 내가 싫다는 말은 아직 못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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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Kabanata
프롤로그. 황태자에게 장작을 나르게 했습니다
엘로디아 르메르는 그날 밤, 황궁에 몰래 들어왔다.정확히 말하면 황궁 자체에 몰래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엄연히 내일부터 시작되는 황태자비 선발전에 참가하기 위해 황궁 서쪽 별궁에 머무르고 있는 후보자 중 한 명이었다. 따라서 황궁에 있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문제라면 지금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 푹신한 침대가 놓인 후보자용 방이지, 황궁 북쪽 끝에 버려지다시피 한 도요원이 아니라는 점이었다.“조금만 더.”엘로디아는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걷어 들고 담장을 따라 걸었다. 다른 손에는 작은 등불이 들려 있었다.밤공기가 서늘했다. 낮에는 황금빛 지붕과 하얀 대리석 때문에 눈이 부실 정도였던 황궁도 밤이 되자 전혀 다른 장소처럼 보였다. 긴 회랑 너머로 달빛이 내려앉았고, 사람의 발길이 끊긴 북쪽 구역에는 풀벌레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그러나 엘로디아의 시선은 그런 낭만적인 풍경에는 조금도 머물지 않았다.그녀는 오직 눈앞의 건물만 보고 있었다.낡은 돌벽.검게 그을린 굴뚝.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아 녹슨 철문.그리고 그 위에 거의 지워져가는 글씨.황실 제3도요원.엘로디아의 눈이 반짝였다.“찾았다.”황태자비 후보가 한밤중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처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감격에 차 있었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오늘 오후 황궁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곳을 찾고 있었다.황태자비 선발전?물론 중요했다.정확히는 빨리 떨어져 나가기 위해 중요했다.그러나 엘로디아가 황궁에 도착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황태자의 얼굴도, 앞으로 경쟁해야 할 후보들의 이름도 아니었다.황궁에는 천년화로가 있다던데.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였다.아르젠 제국의 초대 황제가 황궁을 세우며 함께 만들었다는 화로.황실에서 사용하는 최고급 도자기와 마도도자기가 모두 그 화로에서 태어났다는 전설까지 있었다.도예가에게 황궁은 황제가 사는 곳이기 전에 천년화로가 있는 곳이었다.적어도 엘로디아에게는 그랬다.그리고 오늘 저녁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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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하려고 했는데 점수가 올랐습니다
망했다.아주 제대로 망했다.엘로디아는 황태자석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며 어젯밤 자신이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되짚었다.장작 좀 옮겨주세요.조금 더 필요해요.힘 빼세요.처음부터 너무 칭찬하면 사람이 자만해져요.그리고 마지막.저는 최대한 빨리 탈락할 생각이에요.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태자 본인에게.그것도 황태자비 선발전이 시작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차라리 장작만 나르게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물론 황태자에게 장작을 나르게 한 것도 충분히 불경죄처럼 들렸지만, 그것은 몰랐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다.그런데 탈락하겠다는 말은 달랐다.누가 물어봐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엘로디아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자신 말고도 스물세 명의 황태자비 후보가 있었다. 전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가의 영애들이었다.그들 앞에서 혼자 기절할 수는 없었다.“르메르 영애.”라시엘이 다시 불렀다.엘로디아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예, 전하.”그래도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장하다, 엘로디아.적어도 아직까지는 살아 있다.라시엘이 턱을 살짝 기울였다.어젯밤 낡은 셔츠 차림으로 장작을 들고 있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검은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황태자 제복은 그의 넓은 어깨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가슴에는 황가의 문장인 황금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고, 어깨에서 흘러내린 검은 망토에는 보석으로 만든 작은 장식이 빛났다.그런데 엘로디아에게는 황태자의 위엄보다 다른 것이 먼저 보였다.‘저 손으로 어제 흙을 찌그러뜨렸는데.’심각한 자리에서 떠올릴 생각은 아니었다.그런데 떠올라버렸다.라시엘이 물레 위에서 힘 조절을 못해 흙을 한쪽으로 밀어버렸던 장면.철퍽.엘로디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리고 그 순간 라시엘과 눈이 마주쳤다.‘…….’황태자의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엘로디아는 즉시 표정을 지웠다.‘안 웃었어.’절대로 안 웃었다.하지만 라시엘은 이미 알아챈 것 같았다.입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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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와 감각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쿵.분명 자신의 심장이 아니었다.엘로디아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라시엘을 바라보았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박동은 자신의 것보다 조금 느렸고, 훨씬 묵직했다. 한 번 뛸 때마다 손끝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 안쪽으로 기묘한 울림이 번졌다.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쿵, 쿵.이번에는 두 개였다.하나는 자신의 것.다른 하나는 라시엘의 것.두 박동이 엇갈리다가 아주 잠깐 같은 순간에 겹쳤다.우웅—작업대 위의 잔이 낮게 울었다.엘로디아는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 했다.하지만 라시엘의 손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잠깐.”“놓으세요.”“가만히 있어.”“이 상황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엘로디아가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나 라시엘은 아프지 않을 만큼만 힘을 주면서도 놓아주지는 않았다.그 순간 또다시 이상한 감각이 밀려왔다.따뜻했다.아니, 뜨거웠다.자신의 손목을 감싼 라시엘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과는 달랐다. 손목이 아니라 손바닥 전체가 뜨거워지는 것 같더니, 곧 그 열기가 손가락 끝까지 번졌다.엘로디아의 눈이 커졌다.“전하.”“왜.”“혹시 지금…… 손이 뜨거우세요?”라시엘의 눈빛이 달라졌다.“당신도 느끼나?”그 한마디면 충분했다.엘로디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라시엘의 체온이었다.그가 느끼는 열이 자신에게 전해지고 있었다.“말도 안 돼.”엘로디아가 중얼거렸다.“마도도자기에 감응 기능을 넣는 건 가능해요. 사용자의 마력에 반응해서 온도를 바꾸거나 빛을 내는 정도는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감각을 연결하는 건…….”그녀는 말을 멈췄다.불가능하다고 말하려 했다.그런데 지금 그 불가능한 일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엘로디아가 다시 잔을 보았다.희고 매끈한 표면 위로 금빛 문양이 살아 있는 것처럼 흐르고 있었다. 서로 맞물린 두 개의 원을 중심으로 가느다란 선이 퍼져 나갔다.엘로디아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만지지 마.”라시엘이 막았다.“확인해야 해요.”“뭘?”“어디까지 연결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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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와 생명까지 묶였다고 합니다
엘로디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정확히는,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완성된 혼인잔.끊어지지 않는 감각 공유.그리고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기록.여기에 라시엘의 말까지.내 신부 후보에서 빠지는 것부터 상당히 어려워진 것 같군.“……잠깐만요.”엘로디아가 이마를 짚었다.머리가 지끈거렸다.“정리 좀 할게요.”라시엘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봤다.“그래.”“우선.”엘로디아는 천천히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이 잔은 제가 만든 게 맞죠.”“우리 둘이 만들었지.”“그 부분은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전하는 조용히 계세요.”테오란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황태자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었다.엘로디아는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그리고 이 잔은 원래 초벌 상태였는데 스스로 완성됐어요.”“그래.”“그 결과로 전하와 제가 접촉하지 않아도 서로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게 됐고.”“그것도 맞아.”엘로디아는 세 번째 손가락을 접으려다 멈췄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테오란을 바라봤다.“마지막.”테오란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죽는다.”“……기록에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엘로디아의 표정이 굳었다.“기록이 틀렸을 가능성은요?”“있습니다.”그 한마디에 엘로디아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요?”“이백 년 전 기록이니까요. 현재 확인된 사실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그렇죠?”엘로디아가 라시엘을 바라봤다.“그렇다잖아요.”“그래서?”“그러니까 우리가 죽고 사는 사이까지 됐다고 바로 결론 내릴 필요는 없죠.”라시엘은 잠시 그녀를 보더니 아주 침착하게 물었다.“그럼 확인해볼까?”엘로디아가 굳었다.“뭘요?”“죽어보면 확실하겠지.”“전하!”라시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농담이야.”“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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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위보다 먼저 지켜야 할 것이 생겼습니다
새벽 종이 세 번 울리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공방 안의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작업대 위에는 이백 년 전의 황실 족보가 펼쳐져 있었다.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한 양피지 위, 공식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이름 하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제2황자, 레오넬 아르젠.그리고 그 아래.혼인도공 르메르가의 보호 아래 이동.마지막으로.황실의 진짜 계승자를 숨긴다.엘로디아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두 번째에는 누군가 악의적으로 남긴 위조 기록일 가능성을 떠올렸다. 세 번째에는 차라리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생긴 환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양피지는 사라지지 않았다.라시엘의 심장 박동도 계속 느껴졌다.쿵.조금 빠른 박동.쿵.또 한 번.그 소리가 자신의 가슴 안쪽에서 울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엘로디아는 지금 상황이 너무 현실적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니까.”엘로디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생각보다 침착하게 나왔다.“지금 전하께서는 이백 년 전부터 황실 계승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죠.”테오란이 대답했다.“가능성만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그리고 르메르 가문은 그걸 알고 있었고.”“이 기록이 사실이라면요.”“그래서 진짜 계승자를 숨겼고.”“예.”엘로디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그 뒤에 반역자가 됐고요.”“……예.”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엘로디아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이상했다.자신은 르메르가의 과거를 특별히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가문이 한때 지금보다 잘살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수도에도 저택이 있었다고 했고, 황실에 물건을 납품했다는 낡은 자랑도 가끔 들었다.하지만 그 정도였다.몰락한 가문의 후손이라 해도 엘로디아에게 중요한 건 현재였다.빚을 갚고.좋은 흙을 사고.더 좋은 가마를 만들고.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도자기를 만드는 것.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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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 후보에서 빠지려 했을 뿐인데
엘로디아는 라시엘의 말을 듣고도 몇 초 동안 반응하지 못했다.내가 누구를 고르고 있는지.분명 그렇게 말했다.그것도 셀레스트와 황의, 테오란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농담이라고 넘기기엔 목소리가 너무 낮고 진지했다. 더 난감한 건 그 말을 들은 순간 제 심장이 먼저 배신했다는 사실이었다.쿵.라시엘의 것.쿵.자신의 것.서로 다른 두 심장이 비슷한 속도로 뛰었다.엘로디아는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전하.”“왜.”“그런 말씀은 아무 데서나 하시면 안 돼요.”“여기가 아무 데인가?”“사람이 이렇게 많은데요.”라시엘은 아주 태연하게 주변을 둘러봤다.침대에 누워 있는 셀레스트.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테오란.아무것도 못 들은 척 시선을 내린 황의.문가를 지키는 기사 둘.“많군.”“그걸 이제 아셨어요?”“그래도 다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야.”“그게 문제가 아니라…….”엘로디아는 말끝을 흐렸다.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웠다.황태자가 자신을 신부로 고를 수도 있다고 말한 것?아니면 그 말을 들은 순간 자신도 싫지만은 않았다는 걸 심장이 들켜버린 것?후자가 더 심각했다.‘아니야.’엘로디아는 곧바로 생각을 잘라냈다.놀란 것뿐이다.황태자가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데 심장이 안 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반드시 그런 이유였다.그녀는 괜히 셀레스트의 이불 끝을 정리했다.“아르망 영애께서는 좀 어떠세요?”셀레스트가 입꼬리를 올렸다.“갑자기 제게 관심을 돌리시는 걸 보니 대답하기 곤란하셨나 봐요.”“……몸은 괜찮으신 것 같네요.”“덕분에요.”셀레스트의 얼굴에는 아직 핏기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눈빛은 제법 또렷했다.엘로디아는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오늘은 아무것도 함부로 드시면 안 될 것 같아요. 황의가 확인한 것만 드세요.”“네.”“잔도 황실에서 새로 가져오는 건 쓰지 마시고요.”“그럼 뭘로 마시죠?”“제가 하나 만들어드릴게요.”말은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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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더 생각나는 법입니다
엘로디아는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금 떨어져 계시면 안 될까요?문제는 그 말을 하고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라시엘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왜?”“그냥요.”“그냥은 이유가 아니지.”“지금은 이유로 쳐주세요.”“싫은데.”엘로디아는 정말 저 남자의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했다.물론 폭군처럼 함부로 굴지도 않았고, 권력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문제는 상대가 곤란해한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원인을 찾아내려 한다는 점이었다.특히 그 상대가 자신일 때.엘로디아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라시엘의 눈이 그 움직임을 따라왔다.“봐.”“뭘요?”“피하고 있잖아.”“전하께서 너무 가까우니까요.”“평소에도 이 정도는 가까웠는데.”“평소랑 지금은 다르잖아요.”“뭐가?”엘로디아는 입을 다물었다.차마 말할 수 없었다.조금 전 황후에게 들은 말.감정이 몸에 만드는 반응.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단계.정확히 어디까지 공유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지금처럼 가까이 서 있기만 해도 어느 쪽의 것인지 모를 열기가 자꾸 목덜미와 귀 끝을 타고 올라오는 상황이라면 거리를 두는 게 당연했다.그런데 라시엘은 기다리고 있었다.정말 끝까지 대답을 들으려는 얼굴이었다.“전하.”“응.”“사람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는 게 더 좋은 일도 있어요.”“그건 알아.”“정말요?”“그래.”“그럼 지금이 그런 때예요.”“그런데 당신이 숨기려고 하는 걸 알면 궁금해져.”엘로디아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그건 전하 성격 문제 아닌가요?”“아마도.”너무 쉽게 인정해서 더 할 말이 없었다.그때 황후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봤다.베아트리스 황후는 소파에 기댄 채 꽤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엘로디아는 그제야 깨달았다.‘폐하 계셨지.’라시엘 때문에 잠시 잊어버렸다.그 사실이 더 부끄러웠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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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제가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엘로디아는 그날 밤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이상한 일이었다.황후궁 별채의 침대는 르메르 영지에 있는 제 침대보다 훨씬 넓었고, 매트리스는 몸이 파묻힐 만큼 푹신했다. 두꺼운 커튼을 닫자 달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고, 방 안에는 은은한 라벤더 향까지 퍼져 있었다.잠들기 좋은 조건만 놓고 본다면 완벽했다.그런데 눈을 감을 때마다 자꾸만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불타는 가마.깨진 검은 혼인잔.이백 년 전 황후 세실리아.그리고.이번 생에는 늦었어요.그럼 다음에는 내가 먼저 찾겠습니다.마지막으로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라시엘이었다.난 당신이 나를 선택했으면 좋겠지.운명도 아니고.황태자라는 자리 때문도 아니고.그냥 나라서.“…….”엘로디아는 눈을 번쩍 떴다.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왜 하필 지금 생각나.”혼잣말을 해봤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대신.쿵.다른 심장 하나가 느껴졌다.엘로디아는 그대로 굳었다.아까까지 비교적 느리고 일정했던 라시엘의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져 있었다.쿵.쿵.엘로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설마.’그도 깨어 있나?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걸 느껴서?아니다.생각은 공유되지 않는다.아직은.문제는 그 아직은이라는 단어였다.심장 박동.통증.체온.촉각.감정이 몸에 만드는 반응.처음에는 잔을 함께 만졌을 때만 가능했던 것들이 잔이 완성된 뒤에는 접촉하지 않아도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이대로라면 다음은 뭘까.감정 자체?기억?설마 생각까지?엘로디아는 베개를 끌어안았다.“안 돼.”절대로 안 된다.특히 지금은 더더욱.조금 전부터 라시엘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까.그 순간.쿵쿵.다른 심장이 다시 빨라졌다.엘로디아의 눈이 커졌다.“……전하?”물론 멀리 떨어져 있으니 대답이 들릴 리 없었다.그런데 기묘하게도 정말 라시엘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주 희미하게.가슴 안쪽 어딘가가 잡아당겨지는 감각.엘로디아는 상체를 일으켰다.‘이건 또 뭐야?’침대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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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메르 영지의 가마가 황태자를 알아봤습니다
출발 당일 아침.엘로디아는 황궁 서쪽 정문 앞에 늘어선 행렬을 보자마자 한동안 말을 잃었다.말 열두 필.마차 세 대.황태자 직속 기사단.수행 시종.사냥 장비.황실 깃발.거기에 의무관과 마도사까지.누가 봐도 황태자가 가을 사냥을 떠나는 행렬이었다.문제는.“이게 조용히 르메르 영지에 가는 사람들 맞아요?”엘로디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곁에 서 있던 테오란이 아주 차분하게 대답했다.“공식적으로는 서부 황실 사냥터로 가는 행렬입니다.”“그러니까요.”엘로디아가 앞을 가리켰다.“너무 화려하잖아요.”“황태자께서 조용히 움직이시면 오히려 더 수상합니다.”“그건 또 그렇네요.”납득하고 싶지 않았지만 맞는 말이었다.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불만이 많군.”엘로디아가 돌아봤다.라시엘이 말을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검은 승마복 위에 짙은 남색 외투를 걸친 모습이었다. 평소 황궁 안에서 보던 정복보다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오히려 넓은 어깨와 긴 팔다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문제는 그의 옆구리였다.엘로디아의 시선이 즉시 그쪽으로 내려갔다.라시엘이 알아차렸다.“또?”“왜요?”“아침부터 몇 번째로 상처 보는 거지?”“안 벌어졌나 확인하는 거예요.”“옷 위로?”“걷는 모양 보면 대충 알아요.”라시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내가 지금 불편하게 걸었나?”엘로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그의 걸음걸이를 다시 살폈다.아주 미세하게.정말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른쪽보다 왼쪽 보폭이 짧았다.“아직 당기잖아요.”라시엘의 웃음이 멈췄다.테오란이 옆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제가 같은 말씀을 세 번 드렸을 때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나는 괜찮으니까.”엘로디아가 바로 반박했다.“안 괜찮아요.”“당신한테 통증이 느껴지나?”“아주 조금요.”사실이었다.평소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라시엘이 몸을 크게 움직이거나 옆구리에 힘이 들어가면 엘로디아에게도 희미하게 당기는 감각이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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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년 전의 여자가 제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엘로디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분명 들었다.착각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엘로디아.이백 년 전의 누군가가.자신의 이름을 불렀다.그것도 우연히 비슷한 이름을 입에 담은 것이 아니라, 마치 언젠가 자신이 이 자리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전하.”엘로디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방금.”“들었어.”라시엘의 대답은 짧았다.그도 평소와 달랐다.금빛 눈이 가마 안의 반쪽 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은빛과 금빛을 뿜어내던 잔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져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심장은 그렇지 않았다.쿵.쿵.엘로디아 자신의 박동.그리고 라시엘의 것.그 사이.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세 번째 박동까지.쿵.엘로디아는 본능적으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언니.”마리엘이 불안한 얼굴로 다가왔다.“괜찮아?”“응.”“안 괜찮아 보이는데.”“그냥…….”엘로디아는 말을 멈췄다.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이백 년 전의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의 초상화가 발견됐고, 그 그림의 주인이 지금 자신을 불렀다고?말로 꺼내는 순간 오히려 더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라시엘이 상자 안에 있던 반쪽 잔을 천으로 감쌌다.“초상화부터 보자.”엘로디아가 그를 바라봤다.“지금요?”“지금 아니면 잠들 수 있을 것 같나?”엘로디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아마 못 잘 것이다.분명 밤새 저 목소리만 떠올릴 테니까.“……가요.”그녀가 먼저 창고 밖으로 향했다.라시엘이 뒤를 따랐다.마리엘도 쪼르르 따라오려다 엘로디아가 뒤를 돌아봤다.“마리엘.”“응?”“이 이야기는 아직 아무한테도 하면 안 돼.”“나도 알아.”“친구한테도.”“언니.”“너 사교계 친구 많잖아.”마리엘이 억울한 얼굴이 됐다.“아무리 그래도 황실 비밀 같은 걸 말하고 다니지는 않거든?”엘로디아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정말?”“정말!”그때 라시엘이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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