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렘은 업무 외입니다: Chapter 11 - Chapter 20

27 Chapters

11화. 5만원짜리 데이트

“해인 씨는 원래 그렇게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하셨어요?”​식사를 반쯤 비웠을 무렵, 한이준이 물었다.​“좋아한다기보다는, 계획대로 진행될 때 마음이 제일 편해요.”​“계획이 틀어지면 많이 불편하세요?”​“당연하죠. 변수에 대응하느라 다른 일까지 꼬일 수 있으니까요. 수석님은 안 불편하세요?”​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생각을 정리하듯 말했다.​“불편할 때도 있죠. 그런데 가끔은 계획이 틀어진 덕분에 더 좋은 장면이 나오기도 해요.”​“계획보다 결과가 좋으면 괜찮다는 건가요?”​“그렇다고 계획을 안 세우는 건 아니고요. 준비는 해 두되, 예상 밖의 상황도 받아들이는 거죠.”​그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예상하지 못한 각도에서 빛이 들어오거나, 우연히 마주친 사람의 표정이 좋을 때가 있거든요. 그런 순간은 일정표에 미리 적어 둘 수 없잖아요.”​“……그건 조금 부럽네요.”​나는 국물만 숟가락으로 천천히 저었다.모든 걸 예상 범위 안에 두어야 안심하는 나와, 예상 밖의 순간을 반기는 이 사람.“과장님도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저는 계획대로 끝났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하거든요.”​“그럼 오늘은 제가 예상 밖의 상황을 담당하겠습니다.”​“그런 역할은 어제 회의에서 정한 적 없는데요.”​“그럼 현장에서 협의하시죠.”​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입꼬리를 내렸다.이 사람하고 있으면 대화가 자꾸 계획 밖으로 벗어난다.그런데 이상하게 싫지는 않았다.​식사를 마친 우리는 식판을 반납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 마지막으로 챙길 물건을 확인했다.약속한 한 시가 가까워졌을 때, 나는 가방을 챙겨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지하 2층 주차장에 내리자 법인 차량 옆에 서 있는 한이준이 보였다.어깨에는 아까 식당에서는 보이지 않던 작은 미러리스 카메라 가방이 메어져 있었다.​“짐은 다 챙기셨어요?”​내가 다가가자 그가 반갑게 물었다.​“네. 체크리스트, 예산표, 상세 지도, 예약 확인서까지요.”​“혹시 빠진 건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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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5만원짜리 데이트

한이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늘도 자연스러운 표정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현장 검증 결과물에 필요한 사진 말씀이시죠?” ​“물론이죠.” ​“대답이 빠르시네요.” ​“업무 판단이 빨라서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 말, 제가 어제 회의실에서 했던 것 같은데요.” ​“좋은 표현은 재활용해야죠.” ​내 입꼬리가 소리 없이 올라갔다. ​오후 1시 30분. 도심 대로에 진입하자 차들이 꼬리를 물고 서행하기 시작했다. 현장까지는 평소라면 삼십 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지만, 낮 시간대에도 도심 도로는 만만치 않았다. ​나는 내비게이션의 예상 도착 시각을 확인했다. 다행히 두 시 전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한이준은 우회 경로가 더 빠른지 화면을 한 번 살피더니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과장님은 쉬는 날에 보통 뭐 하세요?” ​“집에서 쉬거나, 밀린 집안일을 정리하거나요.” ​“그건 쉬는 날이 맞습니까?” ​“제가 정한 기준으로는 맞습니다.” ​“그럼 좋아하는 건요? 일 말고.”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일 말고 좋아하는 것. 그 질문을 받아 본 게 얼마 만인지 잘 모르겠다. ​“……맛있는 거 먹는 거요.” ​“오. 의외로 평범한 답이네요.” ​“왜요? 제가 특별한 취미라도 있을 줄 아셨어요?” ​“아뇨. 맛있는 걸 먹는 사람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서요.” ​“그건 무슨 기준이에요?” ​“제 개인적인 데이터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수석님은요?” ​“저는 좋은 사진을 찍고 나서 맛있는 걸 먹는 거요.” ​“결국 사진이네요.” ​“그런가요?” ​“네. 업무와 취미가 구분되지 않는 사람 같아요.” ​“그럼 오늘은 업무와 취미를 구분해 봐야겠네요.” ​“어떻게요?” ​“맛있는 걸 먹는 건 취미, 코스 검증은 업무.” ​“그건 인정하겠습니다.” ​한이준이 미소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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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5만원짜리 데이트

나는 얼른 가죽을 떼어내려 했지만, 억지로 떼면 접착면이 상할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데, 옆에서 테스트 컷을 찍던 한이준이 내 손끝을 보더니 카메라를 내렸다. “이건 원래 이렇게 비대칭으로 삐뚤게 만드는 디자인인가요?” “설명서에는 아주 반듯하게 붙이라고 나와 있는데요.” “그럼 설명서가 틀렸을 가능성은요?” “그런 가능성까지 검증하시는 겁니까?” “현장 검증 파트너니까요.” 나는 삐뚤어진 가죽 모서리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래. 이건 절대로 내 손재주 문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안내문 가독성 문제다. 기획자로서 냉철하게 원인을 분석하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맞은편에서 망치로 알파벳 도장을 두드리던 한이준의 손이 멈췄다. 탕. 맑은 소리와 함께 그가 도장을 쓱 들어 올렸다. 가죽 키링 한가운데 예쁘게 박혀 있어야 할 알파벳 ‘J’가 오른쪽 구석으로 아슬아슬하게 몰려 있었다. 나는 클립보드를 들고 그의 결과물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수석님도 초보자의 한계를 호되게 겪으셨네요.” “저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검증했습니다.” “무슨 가능성이요?” “초보자의 손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아주 현실적인 가능성이요.” “그건 검증이 아니라 그냥 변명 아닌가요?” “기획자님이 그렇게 냉혹하게 평가하신다면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진지한 그의 표정에 나는 꾹 다물었던 입술 사이로 결국 짧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이준이 구석에 쏠린 자신의 이니셜 키링을 들어 보이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거 보세요. 여백의 미가 살아 있어서 생각보다 느낌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포장해도 명백한 불량품인데요.” “과장님 카드지갑이랑 나란히 두면 원래 이런 비대칭 세트 상품인 줄 알걸요.” 그가 내 작업대 위로 키링을 나란히 내려놓았다. 삐뚤어진 카드지갑과 한쪽으로 쏠린 키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실패작인데, 이상하게 한 세트처럼 묘하게 어울려 보였다. 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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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웃는 얼굴을 찍혔다

돌아보니 그가 카메라를 내린 채 유리 문진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업무상으로요?” “개인적으로요.” “지금은 공식적인 업무 중인데요." “그럼 업무상으로 아주 좋아하시는 걸로 하죠.” 나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빤히 보았다. “그런 식으로 취향을 분류하는 기준은 처음 보네요.” “공식 예산에 들어가는 물건이면 업무, 개인 돈으로 사는 물건이면 좋아하는 취향.” “그럼 둘 다 안 사면요?” “구경은 무료니까요.” 나는 유리 문진을 다시 한 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창밖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노란 꽃잎이 자꾸 눈에 밟혔다. “……이건 조금 귀엽네요.” “그렇죠?” “수석님도 이런 아기자기한 소품 구경하는 거 좋아하세요?” 한이준이 진열대 너머로 시선을 천천히 옮기며 담담하게 답했다. “전 과장님이 뭘 좋아하는지 꽤 궁금해하는 편입니다.” 순간 클립보드를 잡은 손끝이 멈칫했다. 고개를 번쩍 들었을 때, 한이준은 이미 옆 칸의 엽서 진열대를 태연하게 살피고 있었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런 폭탄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 해 놓고 혼자 딴 데를 보는 건데. 나는 괜히 클립보드를 가슴 쪽으로 바짝 끌어안으며 계산대 쪽으로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오후 네 시 오십 분. 소품숍 관람을 마치고 십오 분을 걸어 마지막 코스인 루프탑 카페에 무사히 도착했다. 공방에서 예상보다 오 분이 더 걸렸으니 카페에서는 촬영 점검 시간을 조금 타이트하게 줄여야 했다. 나는 체크리스트에서 카페 체류 시간을 기존 칠십오 분에서 칠십 분으로 삭선 긋고 수정했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가며 경사도와 안전바 유무를 꼼꼼히 확인했고, 3층 루프탑 테라스에 자리 잡고 앉아 주변 소음도를 체크했다. “테이블 간격이 넓어서 옆자리 대화가 거의 안 들리네요. 휴식 공간으로는 최종 합격입니다.” 나는 메뉴판을 펼쳐 들고 남은 예산부터 철저히 계산했다. “아메리카노가 오천 원, 시그니처 라떼가 육천 원, 조각 케이크가 오천오백 원이네요. 음료 두 잔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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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웃는 얼굴을 찍혔다

박 팀장에게서 현장 검증이 무사히 끝났는지 묻는 확인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는 클립보드와 공방에서 만든 카드지갑 쇼핑백, 카페 영수증 뭉치를 한 손에 위태롭게 몰아 쥐고 휴대폰을 꺼내려다 그만 중심을 잃고 삐끗했다. 그 순간, 옆에서 한이준의 손이 뻗어 와 내 손에 들린 클립보드와 쇼핑백을 자연스럽게 받아 갔다. “제가 들게요.” “아, 괜찮습니다. 무겁지도 않은데요. 제가 못 들어서가 아니라…….” “알아요. 그래도 제가 들고 싶어서요.” 나는 휴대폰을 쥔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말문이 막혀서 더 이상 핑곗거리를 찾지 못했다. 잠시 뒤, 나는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다음번 외근에는 이렇게 들어주시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이 있습니까?” “현장 검증이 오늘 딱 한 번으로 끝난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전체 코스가 열두 개니까요.” “그렇죠. 미비한 부분도 수정해야 할테고.” “맞아요. 순전히 코스 검증을 위해서요.” “네. 코스 검증 때문이죠.” 한이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든 채 앞장서서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등을 따라 걸으며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차라리 아까처럼 한마디 더 능청스럽게 놀렸으면 시원하게 받아치기라도 했을 텐데. 왜 저렇게 사람 무장해제 시키게 아무렇지 않게 져주고 넘어가는 거야. 우리는 차를 타고 꽉 막힌 도로를 뚫고 회사 근처까지 무사히 돌아왔다. 외근 복귀 보고를 마치고 나서야 오후 일곱 시가 조금 넘어 각자 퇴근길에 올랐다. 밤 아홉 시. 집으로 돌아와 개운하게 씻고 나온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젖은 머리로 노트북을 켰다. 가방에서 오늘 하루 종일 품고 다닌 체크리스트와 가죽 카드지갑을 꺼내 책상 한편에 반듯하게 올려두었다. 일 밀리미터쯤 비뚤어진 모서리가 노란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엑셀 파일을 띄우고 〈오늘, 둘이서〉 A코스 1차 사전 검증 결과 보고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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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웃는 얼굴을 찍혔다

금요일 오후. 제3 회의실. 나는 회의실 데스크에 노트북을 펴고 검토표를 반듯하게 정렬했다. 오늘은 어제 진행한 현장 검증 결과를 바탕으로 사진 자료를 검토하는 날이다. 업무 자료 검수. 사진의 활용도 확인. 코스별 만족도와 개선점 정리. 좋다. 오늘의 목적은 아주 명확하다. 어제 현장에서 한이준 씨가 내 클립보드와 쇼핑백을 휙 받아 갔던 일. ‘ '다음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던 태도. 그런 사적인 여운 따위는 이 공식적인 회의실에 들일 필요가 없다.그가 무슨 말을 하든 철저하게 업무적으로 해석하고 튕겨내면 그만이다. 나는 모니터 하단의 시계를 확인했다. “……그런데 언제 오려나? 연락을 해봐야하나...” 무심코 중얼거리는 순간,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한이준이 들어왔다. 그의 양손에는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한 잔씩 들려 있었다. “기다리셨어요?” 그가 내 앞자리에 커피 한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아뇨. 저도 방금 왔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제가 아주 정확히 맞췄네요.” “뭘요?” “해인과장님 저를 기다리지 않은 시간을요.” 나는 마우스를 쥔 채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건 대체 어떻게 맞추시는데요?” “제 감입니다.” “비주얼팀 수석이라 그런가요?” “제 직책이 거기서 왜 나옵니까?” “평소에 사진 찍으실 때 감이 아주 좋으실 것 같아서요.” 내 비꼬는 칭찬에 그는 오히려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그 훌륭한 감을 한 번 믿어 보시죠.” “유감이지만, 기획 업무에서는 감보다 객관적인 데이터가 우선입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제 훌륭한 감은 회의 시작 전에 깔끔하게 접어두겠습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검토표를 펼쳤다. 시작부터 저런 식이다. 칼같이 쳐내면 능청스럽게 흡수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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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웃는 얼굴이 찍혔다

한이준이 항복하듯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웃었다.“정정하겠습니다.”“어떻게요?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일할 때 무서운 게 아니라, 일할 때도 멋있습니다.”“그건 됐어요.”“웃을 때는 훨씬 더 좋고요.”나는 쏘아붙이려다 입을 그대로 다물어 버렸다.회의실 공기가 갑자기 진공 상태로 변한 것 같았다.……이 사람.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사진 구도 얘기였다. 데이트 분위기 얘기였고. 그런데 왜 저 마지막 말은 사진 검토표 그 어디에도 적을 수 없는 뉘앙스인 거지?나는 황급히 마우스를 쥐고 다음 사진으로 휙 넘겨 버렸다.“다음 사진 보시죠.”“네. 넘어가시죠.”그는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았다. 어떤 변명도 덧붙이지 않고 군말 없이 다음 사진의 채광을 설명했다.그 깔끔한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미치게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사진 검토 회의가 무사히 끝났다. 한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태블릿을 챙겼다.“오늘 검토한 원본이랑, 방금 확정한 활용 후보 사진들은 공유 폴더를 따로 나눠 뒀습니다.”“감사합니다. 제가 기획안 폴더로 복사해서 쓸게요.”“네. 혹시 기획서 쓰시다가 더 필요한 컷이 생기면 언제든 말씀하세요.”“네. 수고하셨습니다.”그가 회의실을 나가고 나서야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한이준이 메신저로 보내준 공유 폴더 링크를 클릭했다. 폴더 안에는 오늘 확인한 사진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나는 업무에 필요한 배경 사진과 소품 사진들을 내 PC 기획안 폴더로 복사했다. 그러다 아까 그 사진을 다시 발견했다.공방에서 빵 터져서 웃고 있는 내 얼굴.나는 이 사진을 기획안 폴더로 옮겨 놓고, 그 위에서 마우스 커서를 빙글빙글 돌렸다.이 사진은 굳이 내 개인 PC 기획안 폴더에 남겨 둘 필요가 없다.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와서 외부 홍보 자료로 쓸 것도 아니다.그렇다고 개인 소장용 증명사진도 아니고, 내가 따로 보관할 이유가 전혀 없다.……아니, 애초에 내가 이걸 왜 내 개인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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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웃는 얼굴이 찍혔다.

다음 작품? 설마 다음에도 나랑 어디 가서 같이 뭘 만들 생각이라는 건가?아니지. 그냥 말꼬리를 잡고 이어가는 가벼운 농담이겠지.그런데 왜 나는, 방금 모니터에 뜬 그 농담이 조금 마음에 드는 걸까.그날 저녁. 집 거실. 샤워를 마치고 편한 티셔츠로 갈아입고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았다.맥주 캔을 따려던 찰나, 탁자 위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오랜 친구 나리였다.“살아 있냐, 문해인?”“전화받자마자 갑자기 무슨 스릴러 대사야?”“너 어제 현장 검증 간다고 했잖아. 무사히 살아 돌아왔는지 생사 확인하는 거지.”“현장 검증이 무슨 오징어 게임이야? 생존을 확인하게.”“네가 낯선 사람하고 오랜시간 붙어 있는 걸 얼마나 피곤해하는데. 네 성격 기준으로는 거의 서바이벌 생존 게임이지.”나는 반박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리의 분석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그건 깔끔하게 인정.”“그래서 외근은 어땠어? 그 사진 찍는다는 비주얼팀 남자.”나는 소파 쿠션을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일 아주 잘하더라.”“잘생겼어?”“갑자기 그 질문이 왜 나와?”“질문에 질문으로 교묘하게 답하지 마. 내 질문은 아주 심플해. 잘생겼어, 안 잘생겼어?”“……외모는 내 업무 평가 항목이 아니야."“아, 그렇구나. 공식적인 업무 평가 항목은 아니구나.”수화기 너머 나리의 목소리가 묘하게 한 톤 높아졌다.“그럼 비공식적인 사적인 평가 항목에는 떡하니 들어간다는 거네?”“전혀 그런 뜻이 아니거든?”“그래서 잘생겼냐고 묻잖아!”“…….”“해인아.”“왜.”“너 지금 대답늘 안 하고 있네.”“생각 중이었어.”“무슨 생각?”“……가장 객관적이고 적절한 표현을.”“세상에. 남자가 잘생겼다는 말을 하는 데 적절한 표현까지 고르고 있어?”나는 무릎에 올린 쿠션을 꽉 껴안았다.“그냥, 인상이 꽤 괜찮아.”“오호라. 인상이 괜찮다.”“응. 사람을 편하게 해 줘.”“키는 커?"“몰라.”“몰라? 어제 네 시간이나 같이 있었을 거잖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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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웃는 얼굴이 찍혔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게. 나는 왜 일어난 일들을 이렇게 세세하게 다 기억하고 있을까. 그냥 철저한 업무 파트너였으면, 기획안에 적을 내용만 기억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리가 쐐기를 박듯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문해인, 다음에 그 남자랑 또 만나면 나한테 끝난 직후에 바로 보고해.. “내가 왜 너한테 사생활 보고를 해?” “이건 네 삭막한 인생에 닥친, 연애 가능성에 대한 1급 긴급 상황이잖아. 그것도 사내 연애!” “내 사전에 사내 연애 가능성 같은 건 절대 없어.” “그래, 알았어. 그럼 그냥 상사한테 올리는 업무 보고라고 생각해.” “……뭐, 그 정도라면 할 수는 있겠네.” “와우! 좋았어! 다음 보고를 기대하마!” “내일 보자. 잘 자라!” 나는 귀가 붉어진 채 급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야, 문해인! 나 아직 말 안 끝났..." 뚝. 나는 달아오른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던져 놓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사람 피곤하게 만드네.” 분명히 짜증을 내며 중얼거렸는데, 거울에 비친 내 입가는 이상하게 조금 올라가 있었다. 밤이 깊어졌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다음 주 출근해서 처리할 회의 안건들을 머릿속으로 차례차례 정리했다. 다음 주 기획안도 수정해야 하니 일찍 자야 한다. 그러다 문득, 내 기획안 폴더 아이콘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사진 분류도 끝났고, 자료 복사도 끝났다. 이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푹 잘 시간이다. 나는 노트북 전원을 끄려다 말고,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기획안 폴더를 열었다. '활용_후보'라는 이름의 폴더를 더블 클릭했다. 공방 작업대 앞에서 빵 터져서 웃고 있는 내 얼굴이 환한 화면에 나타났다. 삐뚤어진 키링을 내려다보다가, 한이준의 뻔뻔한 농담에 웃음을 터뜨린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는 휠을 굴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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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우리. 둘이서

일요일 밤. 집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콘솔 게임 패드를 쥐고 격투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오케이, 거기서 막고…… 카운터!”화면에 승리 문구가 뜨고 대기 창으로 넘어가자, 나는 패드를 내려놓고 무심코 탁자 위의 휴대전화로 손을 뻗었다. 화면을 톡톡 쳤지만 새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 단톡방 메세지 두 개가 전부였다.조용히 화면을 다시 껐다.누구한테 연락이 오길 기다린 건 절대 아니다. 그냥 원래 스마트폰 중독이니까 습관적으로 확인했을 뿐이다.현대인은 원래 하루에 수십 번씩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법이다.나는 다시 패드를 고쳐 쥐고 새 게임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화면을 노려보며 소리 내어 혼잣말까지 했다.“집중해. 잡생각 지우고 집중하자, 문해인.”그러나 삼 분 뒤, 내 캐릭터는 어이없는 타이밍에 콤보를 맞고 KO 당했다.“아, 진짜!”나는 패드를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고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어차피 게임은 내일 퇴근하고 와서 다시 이기면 된다. 그런데 한이준 수석은 굳이 내가 뭐 안 해도 내일 회사 가면 볼 수 있다.그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소파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잠깐만. 나 지금 왜 내일 그 사람 얼굴 보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한 거지?출근을 기다리는 직장인이라니, 나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야?혼란스러운 머리를 감싸 쥐며 소파 쿠션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월요일 오전. 회사 제2 회의실.팀장에게 보고 하기 위해 회의실 모니터에 A코스 현장 검증 결과 보고서와 사진 검토 자료를 띄웠다.“보고서 잘 봤어요. 생각보다 결과가 꽤 좋네요.”“감사합니다. 공방 체험 소요 시간이 예상보다 조금 오버되긴 했지만, 카페 체류 시간을 조정하면 전체 도보 일정은 무리 없이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사진 결과물들도 좋고요. 특히 현장 체험 컷이 억지스럽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더군요. 일부러 모델들 만들어낸 포즈 취한 것보다 데이트 분위기가 훨씬 잘 살아 있어요.”나는 그 말을 듣고 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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