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은 업무 외입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26 챕터

1화 연애는 퇴근했습니다

월요일 오전 여덟 시 반. 지하철 2호선은 오늘도 평화로운 전쟁터였다. 나는 왼손으로 머리 위 손잡이를 단단히 잡았다. 오른손으로 휴대폰 화면을 켰다. 출근 전 업무 메일을 미리 확인하려는 모범적인 직장인의 자세였다. 그런데 메일함 대신 엉뚱한 팝업 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1년 전 오늘 작성한 메모가 있습니다.] 클라우드 동기화가 기어이 판도라의 상자를 연 모양이다. 무심코 알림을 눌렀다. 화면에 익숙한 제목이 나타났다. [그에 대해 기억해 둘 것] 스크롤을 조금 내렸다.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 양파 생으로 들어간 음식 극혐함 (익힌 건 먹음) • 돈가스는 무조건 등심, 소스는 찍먹 • 셔츠는 목 둘레 100, 팔 길이는 수선 필수 • 가고 싶다고 했던 성수동 사진전 (예매 오픈일 알람 맞춰 둘 것) • 생일: 11월 14일 / 1주년: 4월 22일 • 기분 상했을 때 대화법: 바로 따지지 말고 일단 밥부터 먹인 뒤 한 시간 뒤에 말 꺼내기 와. 이걸 내가 다 적어 놨었네. 입술이 저절로 삐죽 튀어나왔다. 생일, 기념일, 좋아하는 음식, 심지어 셔츠 사이즈까지. 이 정도면 여자친구가 아니라 거의 대기업 총수 수행비서 수준 아닌가.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한 칸 더 밀어 올렸다. 제일 아래에 적힌 마지막 줄이 눈에 들어왔다. • 서운한 점 말할 때는 감정 빼고 육하원칙으로 설명할 것 (안 그러면 피곤해함)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얼른 입술을 꾹 깨물어 소리를 삼켰다. 내가 지난 4년 동안 연애를 한 거야, 악성 민원인 고객 관리 업무를 한 거야? 그때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시선이 내 휴대폰 쪽으로 스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목을 비틀어 화면을 내 가슴 쪽으로 숨겼다. 아무도 안 봤어. 아무도 안 봤겠지. 제발 아무도 보지 않았다고 해 줘. 누구에게도 내 호구 연애사가 알려져서는 안된다. 다시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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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연애는 퇴근했습니다

오전 열 시 정각. 제2회의실 대형 모니터에 내가 밤새워 다듬은 기획안이 띄워졌다. [신규 12주 프로젝트: 〈오늘, 둘이서〉 - 오만 원 이하로 즐기는 현실 밀착형 데이트 코스] "다 온건가요?" "비주얼팀 담당자인 한이준 수석 포토그래퍼는 앞선 광고주 미팅이 끝나는 대로 합류한다고 합니다." "그럼 먼저 시작하지." "네." “이 코스는 실제로 다 이용해 본 건가요?” 박 팀장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화면을 가리켰다. 나는 노트북과 연결된 포인터로 지도를 짚으며 또렷하게 답했다. “주요 장소는 전부 1차 답사를 마쳤습니다. 다만 12개 코스에 대해서 각각 시작부터 마지막 장소까지 실제 동선대로 검증이 필요합니다.” “장소별로 확인했으면 된 거 아닌가?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달아 가 봐야 할 이유가 있어요?” “실제 커플들의 이동 동선과 체력 소모량을 계산해야 하니까요.” 나는 노트북 키보드를 눌러 다음 슬라이드를 넘겼다. “지도상으로는 도보 십 분이지만, 그 사이에 언덕이 있는지 횡단보도가 몇 개인지는 직접 걸어 봐야 압니다. 장소 하나씩 떼어 놓으면 훌륭해 보여도 실제로 두 사람이 네 시간 동안 연달어 움직이면 결과물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김 대리가 기획안을 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트 코스 기획이 생각보다 엄청 살벌하네요. 그냥 인스타 감성 나는 예쁜 카페랑 맛집 몇 군데 묶어 주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짰다가는 식당 웨이팅하다가 배고파서 예민해지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다가 다리 아파서 말수가 줄어들고, 마지막 카페는 웨이팅 마감돼서 길바닥에 서 있게 됩니다.”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요.” “네. 그 순간부터는 로맨틱한 데이트가 아니라 야외 생존 훈련이 되는 거죠.” 회의실 곳곳에서 푸스스 웃음이 터졌다. 박 팀장도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문해인 과장, 혹시 본인 경험담이에요?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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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연애는 퇴근했습니다

내 수첩에 적힌 현장 체크리스트를 내려다보았다. 상황이 아주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1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말한 ‘현장 확인’은 체험단 뒤를 유령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메모만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체험단이 통째로 증발해 버렸다. 이러면 갑자기 내가 직접 걸어 다녀야 하는 걸 넘어, ‘누구와 함께’ 걸어 다녀야 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최대한 사무적인 표정을 유지하며 손을 들었다. “그럼 대행사를 통해 일일 아르바이트라도 급하게 구해 볼까요?” 박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일일 알바를 쓰면 피드백의 질이 떨어져요. 시간도 없고. 이번에는 내부에서 동선과 예산, 체험 요소부터 먼저 검증하죠. 실제 커플의 감정 반응이나 만족도는 다음 체험단 테스트에서 확인하고요.” 내부 사전 검증.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회사에는 직원이 많다. 김 대리님이나 정 사원이랑 같이 가서 동선과 예산만 체크하면 되는 거다. 누구랑 짝이 되든 빠르게 돌고 칼퇴근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되찾으려던 찰나였다. 똑똑. 회의실 문이 두 번 울리더니 부드럽게 열렸다. “죄송합니다. 앞선 광고주 미팅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조금 늦었습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회의실 공기를 갈랐다. 태블릿과 참고 자료를 한 손에 든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비주얼팀의 수석 포토그래퍼, 한이준이었다. 박 팀장이 손짓했다. “이준 씨, 마침 잘 왔어요. 이번 프로젝트 비주얼 담당이시죠? 현장 테스트 일정도 같이 확인하려던 참이었어요.” 한이준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빈자리를 찾다가, 모니터에 띄워진 내 기획안 표지를 보았다. “아, 이게 그 프로젝트군요. 기획팀 문해인 과장님이 담당하시는 거죠?” 순간 숨이 반 박자 멈췄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바짝 들었다. 한이준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문해인 과장님 맞으시죠?” “아, 네. 맞습니다. 한이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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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연애는 퇴근했습니다

박 팀장이 한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 씨, 이번 주에 현장 테스트 일정 하는거 괜찮겠어요?” 한이준은 자신의 태블릿으로 일정을 한 번 확인하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네, 일정 조정 가능합니다.” 대답이 너무 빠르고 매끄러웠다. 나는 무심코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쉽게 대답하네. 원래 포토그래퍼들은 현장 테스트를 다들 좋아하나? 아니면 그냥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박 팀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두 분이 날짜를 맞춰서 금요일 전까지 A코스 사전 검증을 진행해 주세요. 기획 쪽에서 확인할 항목은 해인 씨가 정리하고, 이준 씨는 촬영과 동선 관련해서 체크해 주시면 됩니다.” 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한이준이 일어나며 나를 바라보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문해인 과장님.”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한이준 수석님.” 그는 태블릿을 정리하며 덧붙였다. “우리 생각보다 잘 맞을 것 같은데요?” 나는 그 말이 철저히 업무적인 의미라고 판단했다. 기획자와 비주얼팀 수석 포토그래퍼. 서로 하는 일이 다르니 호흡만 맞으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겠지. “일단 결과를 보고 판단하시죠.” 내 대답에 한이준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네. 기대할게요.” 기대한다는 말은 참 쉽게 하네. 나는 아직 현장 테스트 일정도 확정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빠져나간 회의실에서 나는 테스트 체크리스트를 정리했다. 한이준은 내 옆에서 자신의 일정을 확인하며 물었다. “현장 테스트는 언제쯤 가능하세요?” “수요일이나 목요일 오후로 잡아 보려고요. 자리로 돌아가서 제 일정을 확인한 뒤에 메시지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먼저 가능한 시간 보내 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빠르겠네요.” 한이준이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그럼 사내 업무 메신저로 보내겠습니다. 개인 연락처는 아직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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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파트너가 왜 이렇게 잘생겼죠?

수요일 오전 열 시. A코스 현장 검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나는 소회의실 테이블 위에 출력해 온 A코스 검증 체크리스트를 반듯하게 펼쳤다. 대중교통 접근성, 장소별 예상 비용, 시간대별 대기 시간, 추가 비용 발생 여부, 실제 체류 시간, 현장 촬영 가능 지점, 동선 변경 필요 여부까지. A4 용지 세 장에 걸쳐 내부 사전 검증 단계에서 확인해야 할 항목들이 명사형으로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한이준이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문서를 들여다보았다. 첫 장을 훑던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와. 이 정도면 데이트가 아니라 정기 세무 조사 대상인데요?” “세무 조사요?” “예산이 백 원만 펑크 나도 바로 사유서 쓰고 불려 갈 것 같은데요.” 나는 볼펜 꼭지를 딸깍 누르며 대꾸했다. “백 원이 아니라 십 원만 초과해도 원인을 철저히 분석할 겁니다. 오만 원 이하로 즐기는 저예산 코스가 이번 기획의 핵심이니까요.” “무섭네요." “수석님 개인 사비를 털어 쓰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럼 제 돈이면 백 원 정도는 기획자 재량으로 봐주시나요?” “절대 안 됩니다.” “단호하시네요.” “예산 앞에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한이준이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표에 적힌 세부 예산안을 짚었다. “이 오만 원이면 두 사람 기준인 거죠?” “네. 두 사람 합산 오만 원입니다. 공방 체험비 삼만 원, 카페 음료와 디저트 만 오천 원, 나머지 오천 원은 추가 구매나 예비비로 잡았습니다.” “계산이 아주 빈틈이 없네요. 혹시 내일 현장에서 기가 막힌 길거리 간식 냄새가 나도 꾹 참아야 하나요?” “예비비 오천 원 안에서 해결 가능한 간식이면 기획안 범위 내로 허용됩니다.” “다행이네요. 붕어빵 정도는 사 먹을 수 있겠어요." “대신 영수증이 없으면 계좌이체 내역이나 구매 내역이라도 꼭 캡처해서 남겨 주세요.” “길거리 붕어빵을 사 먹고 구매 내역 캡처요?” “증빙 자료가 없으면 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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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파트너가 왜 이렇게 잘생겼죠?

“내일 공방에서는 구체적으로 뭘 만드나요?”“가죽 카드지갑이나 각인 키링 중 하나를 고르는 코스예요. 생초보자도 구십 분 안에 충분히 끝낼 수 있는 난이도로 엄선했습니다.”“다행이네요. 제가 카메라 렌즈 조립하는 것 말고는 손재주가 아주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요."“오히려 잘됐네요. 손재주가 없는 분이 직접 현장에서 부딪혀 봐야 일반인 기준의 체험 난이도 검증이 훨씬 더 정확해지거든요.”“듣다 보니 갑자기 제가 기획팀의 실험 대상이 된 기분인데요.”“정확히는 아주 훌륭한 사전 검증 파트너십니다.”한이준이 픽 웃으며 지도의 다음 골목 구간을 짚었다.“그럼 사진 찍을 시간은요?”“촬영은 체험 중간중간 자연스럽게 진행하면 됩니다. 사진만 찍겠다고 별도로 시간을 뭉텅이로 빼 두면 코스 흐름이 뚝뚝 끊기면서 늘어지니까요.”한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태블릿에 무언가를 빠르게 메모했다.“좋네요. 대신 소품숍으로 가는 골목에서 딱 오 분만 멈추면 어떨까요?”“골목에서요?”“오후 세 시 반쯤이면 그 골목 담벼락 쪽으로 그림자가 예쁘게 질 시간이거든요. 공방에서 직접 만든 결과물을 손에 들고 걷다가, 마음에 드는 소품을 창너머로 발견하는 거예요. 억지로 카메라 보고 브이 포즈를 잡는 것보다, 걷고 대화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는 게 훨씬 트렌디하고 예쁘게 나올 것 같아서요.”“그럼 촬영 때문에 억지로 동선을 멈추는 게 아니라, 실제로 커플들이 구경할 만한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촬영하는 거네요.”“네. 사진을 찍으려고 억지로 데이트하는 게 아니라, 데이트하다 보니 사진이 예쁘게 남는 쪽으로 기획을 살리는 거죠.”나는 그 말을 입안에서 잠깐 곱씹었다. 그럴듯하다. 아니, 이번 기획 의도에 완전히 정확히 들어맞는다.“그럼 사진 찍히는 게 부담스러운 일반인 분들도 훨씬 덜 어색하겠네요. 코스 흐름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요.”“과장님은 사진 찍히는 이용자의 심리까지 깊게 생각하시는군요.”“기획자는 원래 한 번에 여러 가지 변수를 동시에 다 생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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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파트너가 왜 이렇게 잘생겼죠?

조용한 소회의실 바닥으로 볼펜이 떨어지며 유난히 또렷한 소리가 울렸다. 한이준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허리를 숙여 바닥에 구른 볼펜을 주워 들었다.“여기요.”“……감사합니다.”“참고로 뒷부분은 업무적인 평가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나는 그가 건넨 볼펜을 빼앗듯 쥐며 차갑게 대답했다.“그런 건 공식 보고서에서 제외할게요.”“아쉽네요. 제가 보기엔 기획안보다 가장 중요한 항목인데.”나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확 돌려버렸다. 침착하자, 문해인. 저 사람은 원래 숨 쉬듯 저런 가벼운 농담을 잘 던지는 부류의 사람인거다. 저런 말장난에 매번 화들짝 놀라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최대한 사무적이고 차가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보고서에는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팩트만 기재하겠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확인해 보시겠어요?”“뭘요?”“제가 해인 씨가 웃을 때 예쁘다고 생각한다는 그 팩트요.”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이준은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었다. 말투는 가벼운 장난 같았지만, 나와 마주친 눈빛만은 묘하게 단단했다. 조금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그건 주관적인 판단입니다.”“아까 주관적으로 평가해달라도 한건 과장님이잖아요.”아. 내가 몇분 전에 대체 왜 내 무덤을 파는 그런 소리를 지껄였을까.과거의 나, 당장 타임머신 타고 돌아가서 입을 틀어막고 싶다.“회의록에 불필요한 사담이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그럼 제일 중요한 내용만 딱 남길까요?”“네.”“해인 과장님음 기획을 아주 잘한다.”“네.”“그리고 웃을 때 예쁘다.”“……그건 좀 빼 달라고 했잖아요.”“알겠습니다. 공식 회의록에는 남기지 마세요.”한이준이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태블릿을 챙겼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그래도 제 기억에는 남겨도 되죠?”나는 꾹 다문 입술을 끝내 열지 못했다.회의가 무사히 끝나고 우리는 나란히 복도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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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파트너가 왜 이렇게 잘생겼죠?

나는 기획팀 사무실 유리문을 열며, 재빨리 그의 손에서 내 서류 파일을 쏙 빼앗아 들고 걸음을 휙 재촉했다.“그럼 내일부터는 업무 평가부터 차근차근 점수 잘 받아야겠네요.”그는 등 뒤에서 기분 좋게 소리 내어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나한테만 특별한 게 아니다.원래 저 사람의 성격 기본 설정값이 친절과 다정함인 거다. 아주 합리적이고 머리 아플 일 없는 깔끔한 결론이다. 그런데 왜....내 입안이 왜 이렇게 괜히 쌉싸름한 건지 알 수가 없다.오후 두 시. 나는 오전 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을 검토하고 반영하느라 모니터 앞에 딱 붙어 있었다.이동 시간과 체류 시간을 한 번 더 체크하고 깔끔하게 PDF로 변환하고 나니 더는 손볼 곳이 없었다.그런데 자꾸 마우스 커서가 화면 오른쪽 아래의 사내 메신저 아이콘 주위를 배회했다.연락이 올 이유는 명확하다. 나는 이 코스의 총괄 기획 담당자니까.그리고 이건 자그마치 12주짜리 장기 프로젝트니까.나는 키보드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황급히 뗐다. 잠깐.아직 메시지 알림이 뜨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강아지처럼 메신저 창을 기다리고 있어?그때, 모니터 우측 하단에서 파란색 알림 창이 뿅 하고 솟아올랐다.[한이준]: 해인 과장님, 오전에 같이 정리한 촬영 포인트 세부 동선표 다 되셨을까요?나는 일 초 만에 대화창을 열고 바탕화면의 PDF 파일을 쭉 끌어다 놓았다.[문해인]: 네. 방금 수정한 최종 버전입니다. 골목길 촬영 시간과 카페 체류 시간까지 전부 수정해서 반영했습니다.[한이준]: 확인했습니다. 손이 정말 빠르시네요.[문해인]: 바로바로 정리하는 편입니다.[한이준]: 덕분에 내일은 외근 나가서 길 잃을 걱정은 전혀 안 해도 되겠네요.[문해인]: 3페이지에 상세 지도도 첨부했어요. 길을 잃으시면 지도부터 확인해 주세요.[한이준]: 지도가 왜 필요해요. 현장 기획자인 과장님만 졸졸 따라가면 되는데요.엔터 키를 치려던 내 손이 우뚝 멈췄다. 지도가 있는데 왜 굳이 나를 졸졸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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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파트너가 왜 이렇게 잘생겼죠?

일정 수정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책상 위 휴대폰이 웅- 하고 진동했다. 사내 메신저 알림이었다.[한이준]: 과장님. 내일 일정표 보니까 오후 두 시 현장 인근 지하철역 도착이네요.[한이준]: 회사에서 같이 출발하는거 맞죠?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빠르게 타자를 쳤다.[문해인]: 네 맞아요. 오전에 업무보시고.[문해인]: 같이 가면 되요. 법인 차량은 제가 미리 예약해 뒀어요. 점심 드시고 오후 1시에 회사에서 차로 같이 출발이에요.[한이준]: 그럼 제가 운전할게요.[문해인]: 괜찮습니다. 차량 예약을 제가 했으니 제가 운전해도 되요.[한이준]: 가는 동안 과장님은 동선이랑 체크리스트를 한 번 더 확인하셔야 하잖아요. 조수석에 앉아서 점검하세요.그의 말이 맞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장을 쳤다.[문해인]: ……그건 맞네요. 알겠습니다.[한이준]: 그럼 정해졌습니다. 내일 오후 1시, 지하 2층 주차장에서 뵙겠습니다.[문해인]: 네. 확인했습니다.[한이준]: 제가 차에 먼저 가서 시동 켜놓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과장님음 천천히 내려오세요.나는 휴대폰을 보다 짧은 숨을 내뱉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다고? 같은 회사 직원끼리 회사 법인 차량으로 외근 나가는 것뿐인데, 왜 자꾸 주말 데이트 픽업 같은 말을 하는 거야?그때 메시지가 한 줄 더 도착했다.[한이준]: 아, 과장님..[문해인]: 네?[한이준]: 내일은 차 안에서부터 시작이네요. 일 말고도 조금 재미있었으면 좋겠어요.나는 화면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차 안에서부터 시작이라고? 차를 타는 순간부터 외근이 시작된다는 뜻이겠지. 당연히 그렇겠지.그런데 왜 굳이 '일 말고도' 재미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건데?나는 빠르게 답장을 입력했다.저희는 철저한 업무 목적으로 외근가는 겁니다.전송하기 직전, 엄지손가락이 허공에 멈췄다. ……누가 물어봤나?이준은 그저 막히는 외근 길에 즐겁게 가자고 한 건데, 나 혼자 정색하면 오히려 이상한 망상을 혼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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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5만원짜리 데이트

블라우스를 옷장에 걸어 버렸다.결국 세 번의 번복 끝에 핏이 깔끔한 차분한 니트와 움직이기 편한 슬랙스를 골랐다.평소에도 충분히 입을 만한, 그러나 평소보다 아주 약간 더 신경 쓴 조합이었다.​현관으로 나가 신발장도 열었다.가장 발이 편한 단화를 꺼내 물티슈로 앞코를 닦았다.​“내일은 네 시간이나 현장을 돌아다녀야 하니까. 발 아프면 업무 효율 떨어지잖아.”​그렇게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들어 날씨 앱을 켰다.내일 오후 강수 확률 0퍼센트.그래도 혹시 모른다며 가방 구석에 작은 3단 우산을 챙겨 넣었다.​“좋아. 내일 업무 준비 끝.”​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누웠다.이불을 목까지 덮었다.그리고 삼 분 뒤, 다시 일어나 불을 켜고 옷걸이에 걸린 니트를 한 번 더 확인했다.​“……문해인. 너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목요일 오전.회사 기획팀 사무실.​나는 평소보다 삼십 분 일찍 출근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노트북이 켜지는 동안 까만 모니터 화면에 얼굴을 비춰보았다.괜히 니트 소매를 한 번 당겨보고,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사진에 찍힐 수도 있고, 업무 파트너와 장시간 함께 다녀야 한다.기획자로서 단정한 인상을 주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좋은 아침입니다, 해인 과장님..”​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어깨가 흠칫 움직였다.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한이준이 커피 두 잔을 양손에 든 채 서 있었다.​“아, 좋은 아침이에요.”​그는 내 책상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려놓았다.그러더니 내 쪽을 잠깐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오늘은 준비가 더 완벽해 보이네요.”​키보드 위에 올려둔 손가락이 멈췄다.​“……어제 정리한 현장 자료 말씀하시는 거죠?”​한이준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곧바로 웃었다.​“물론이죠. 자료도 완벽하고요.”​자료도?나는 복도로 걸어 나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저 사람은 문장 끝에 꼭 이상한 여지를 남겨야 직성이 풀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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