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은 내 이름을 지웠다: Chapter 11 - Chapter 20

20 Chapters

11화

그때 부엌 문이 열렸다.“언니, 여기 계셨네요.”나경이었다.유림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자 나경은 싱크대 옆에 놓인 컵을 집어 들었다.“물 좀 마시려고요.”물을 따르던 나경은 유림을 흘끗 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어머니가 언니한테 많이 화나셨어요.”“알아.”“언니가 조금만 참으시면 되는데.”유림은 식탁을 닦던 행주를 내려놓았다.“내가 예민해서 당신이 이 집에 들어왔어?”나경의 미소가 옅어졌다.“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속상해요.”“그럼 나가.”“네?”“남의 집 안방에서 자는 게 불편하면 나가면 되잖아.”나경의 얼굴이 굳었다.잠시 유림을 바라보던 그녀는 부엌 문 쪽을 확인한 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언니는 아직도 모르시네요.”“뭘?”나경은 목소리를 낮췄다.“오빠가 저한테 그랬어요. 언니는 결국 아무 데도 못 간다고.”유림은 행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왜?”나경이 웃었다.“어머니 병원비 때문이죠.”유림은 순간 숨을 들이마시지 못했다.도혁이 어머니의 재활치료 지원을 언급했던 밤이 떠올랐다.그 말을 나경에게까지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남편은 아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내연녀와 공유했고, 나경은 그것을 무기처럼 사용하고 있었다.“오빠가 언니를 얼마나 잘 아는데요. 조금만 버티면 결국 조용해질 거라고 하셨어요.”유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경은 승리를 확신한 사람처럼 웃었다.“그러니까 우리 서로 불편하게 만들지 말아요.”나경은 물컵을 들고 부엌을 나갔다.유림은 싱크대 가장자리를 붙잡았다.손끝에 힘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더 잔인한 것이 있었다.그는 그녀가 어머니를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하고 있었다.유림은 고개를 숙였다.어머니가 재활치료를 받으며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치료가 잘된 날에는 딸에게 보여 주겠다며 혼자 숟가락을 들려고 했고, 유림은 그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기뻐했다.그 시간을 지키기 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Read more

12화

그녀가 며칠만 더 필요하다고 하면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 기다렸다.그 모든 과정이 끝나자 남편은 완성된 보고서만 가져갔다.그리고 작성자의 이름을 바꿨다.유림은 모니터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자신이 지워진 것은 감정실 문에 붙어 있던 이름표만이 아니었다.남편은 그녀가 일해 온 시간까지 다른 여자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유림은 화면에 표시된 승인 내역을 다시 읽었다.그 순간 안방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당신은 원래 강하잖아.*남편은 그녀가 강해서 참는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유림은 강해서 참은 것이 아니었다.무너지면 어머니까지 흔들릴까 봐, 자신이 지켜 온 삶이 한꺼번에 무너질까 봐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다.그녀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분명해졌다.남편의 기분도, 이 집의 평화도 아니었다.어머니의 치료를 이어 갈 방법과 자신의 이름으로 해 온 일이었다.***오후가 되자 나경이 서류철을 들고 감정실로 들어왔다.“언니, 이것 좀 봐 주세요.”유림이 컴퓨터에서 눈을 떼자 나경은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새로운 작품의 감정 보고서였다.작품 사진과 소장 이력, 상태 조사표가 첨부되어 있었지만 실제 감정 의견은 아직 작성되지 않은 상태였다.유림은 첫 장을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보고서 작성자란에는 이미 백나경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이게 뭐야?”나경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내일 거래처에 보낼 자료예요. 언니가 감정만 마무리해 주시면 돼요.”유림은 보고서 첫 장을 다시 확인했다.“작성자는 당신으로 돼 있는데?”“제가 책임자니까요.”“그럼 당신이 감정해야지.”나경은 웃었다.“언니가 전문가잖아요.”유림은 서류철을 덮었다.“전문가가 작성한 보고서라면 전문가 이름이 들어가야 해.”그제야 나경의 웃음이 사라졌다.“언니, 아직도 그런 걸 따지세요?”“그런 게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문제야.”나경은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Read more

13화

두려웠다.그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하지만 두렵다는 이유로 또다시 이름을 빼앗긴다면, 앞으로 남편이 무엇을 요구하든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유림은 눈을 떴다.“생각하고 하는 말이야.”도혁이 잠시 침묵했다.“나중에 후회하지 마.”유림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후회할 일은 이미 충분히 했어.”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나경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유림을 바라보았다.“정말 안 하시게요?”유림은 서류철을 나경 쪽으로 밀었다.“작성자를 바로잡으면 검토할게. 아니면 다른 감정사를 찾아.”나경이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언니,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그녀는 서류철을 거칠게 집어 들고 감정실을 나갔다.문이 닫히자 유림은 그제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손끝이 차가웠고 무릎에도 힘이 풀렸다.그녀는 책상 모서리를 붙잡고 한동안 서 있었다.방금 한 말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두려워서 다시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그렇지만 유림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지 않았다.이번만큼은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지키고 싶었다.***퇴근 시간이 지난 뒤에도 유림은 감정실에 남아 관련 자료를 정리했다.《푸른 정원》의 최초 감정 초안부터 개관식에서 나경이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는 영상, 보고서 변경 승인 메일과 문서관리 시스템의 수정 이력까지 하나씩 확인했다.감정실에서 이름표가 철거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도 따로 정리했고, 집에서 있었던 일은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 두었다.자료를 살필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남편과 함께 일하며 쌓아 온 시간이 몇 장의 서류로 줄어든 것 같았다.하지만 적어도 그 서류에는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 보여 주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유림은 개인적으로 보유한 원본과 업무상 열람한 기록을 구분해 목록을 작성했다. 회사 내부 자료를 임의로 외부에 넘기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상담에 필요한 자료의 범위를 먼저 확인하기로 했다.그리고 오래전 윤혜주에게 소개받았던 변호사의 연락처를 찾았다.미술품 복원 일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Read more

14화

차유림의 출입카드가 작동하지 않은 것은 월요일 오전 아홉 시 십이 분이었다.평소처럼 갤러리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삼 층으로 올라온 유림은 감정실 문 앞에서 카드를 갖다 댔다. 짧은 경고음과 함께 표시등이 붉게 변하자 잠시 기계 오류를 의심했지만, 세 번이나 같은 소리가 반복되는 동안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복도 끝에서 시설관리 직원이 다가왔다. 그는 유림의 손에 들린 출입카드를 확인하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업무용 단말기를 꺼냈다.“차 실장님, 출입 권한 변경 안내 못 받으셨습니까? 어젯밤 대표님 지시로 감정실 출입 권한이 조정됐습니다.”“누구 지시라고요?”“강도혁 대표님입니다. 앞으로는 백나경 공동대표님 승인이 있어야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유림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난 금요일, 나경의 이름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거부했을 때 도혁은 생각을 잘하라고 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생각했다고 대답했고, 그날의 대화는 거기서 끝난 줄 알았다.그러나 남편은 주말 사이 아내가 십 년 가까이 사용한 감정실의 출입 권한부터 없애 버렸다.“제 업무용 컴퓨터와 개인 물품이 안에 있습니다. 진행 중인 자료도 확인해야 하고요.”“죄송합니다. 저희는 전달받은 지시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직원에게 더 물어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유림은 출입 오류 화면과 시간을 휴대전화에 남긴 뒤, 권한 변경의 사유와 개인 물품 반환 절차를 서면으로 알려 달라는 메일을 작성했다.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백나경이었다.나경은 유림을 발견하자 놀란 척 눈을 크게 떴지만, 시선은 곧 그녀의 손에 들린 출입카드로 내려갔다.“언니, 아직도 여기 계셨어요? 오빠가 말씀 안 하셨구나.”나경은 감정실 문 앞으로 다가와 자신의 카드를 갖다 댔다. 조금 전까지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가볍게 열리자, 그녀는 유림이 안쪽을 볼 수 있도록 일부러 문을 반쯤 열어 두었다.“앞으로 감정실은 제가 관리하기로 했어요. 중요한 자료가 많으니까 출입 권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Read more

15화

유림은 출입문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돌아섰다. 자신이 잃은 것은 책상 하나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쌓아 온 경력과 앞으로 증명할 기회까지 남편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그날 오전, 갤러리 전체 직원에게 특별전 감정 연구 발표회 안내 메일이 발송됐다.발표자는 백나경 공동대표였다.유림은 첨부된 연구 개요를 읽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작품의 보존 상태를 바탕으로 제작 시기를 재검토하고, 과거 복원 과정에서 발생한 흔적을 비교해 감정의 근거를 보강한다는 내용이 몇 달 전 자신이 작성한 연구 계획서와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특히 ‘기존 감정 결과와 복원 이력의 불일치 구간을 추적한다’는 항목은 유림이 직접 제안했던 연구 방향이었다.자료를 더 내려 보자 오래된 풍경화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유림은 그 작품을 조사하면서 과거 복원 보고서에 기록되지 않은 상태 변화와 소장 이력의 공백을 발견했었다. 당시에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아 제작 시기에 관한 최종 판단을 보류했는데, 이번 발표 개요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적혀 있었다.*복원 흔적의 재분석을 통한 제작 시기 확정.*유림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복원 기록에 공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과 그 공백을 해소했다는 결론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추가 자료가 확보되지 않았다면 제작 시기를 확정할 수 없었고, 섣부른 판단은 작품의 거래와 가치 평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그런데 정작 원본 자료가 있는 감정실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유림은 잠시 생각하다 윤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혜주야, 지금 통화 가능해?”수화기 너머로 복원 작업실의 기계음이 들렸다.“가능해.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왜 그래?”유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혜주는 대학 시절부터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친구였고, 복원 일을 시작한 뒤에도 서로의 작업을 확인해 주던 사람이었다. 까다로운 작품을 맡으면 밤늦게까지 의견을 나누었고,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은 함께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그런 친구에게 남편이 자신의 연구를 내연녀에게 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Read more

16화

그 사실만으로도 참아 왔던 울음이 다시 올라왔다.***혜주가 도착했을 때 유림은 일 층 카페 구석에 앉아 있었다.혜주는 코트도 벗지 않은 채 맞은편 의자에 앉더니 작은 보관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안에는 풍경화의 복원 상태를 조사하면서 작성한 기록과 사진 목록이 들어 있었고, 자료마다 조사 날짜와 작성자가 표시돼 있었다.유림은 첫 장을 펼쳤다.그날의 작업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작품 표면의 손상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조명을 여러 각도로 바꾸었고, 오래된 복원 보고서와 실제 상태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찾아 따로 표시했었다.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으며, 혜주도 그 판단에 동의했다.“네가 이 작품은 바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소장 이력에도 비어 있는 기간이 있고, 예전 복원 기록도 불완전하다고.”“맞아.”“그런데 나경이 발표 자료에는 제작 시기가 확정된 것처럼 적혀 있다며?”유림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주는 기록을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그럼 네 연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어. 결론만 가져가고 왜 보류했는지는 모르는 거지.”그때 유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도혁이었다.“지금 어디야?”“갤러리.”“감정실 앞에서 소란 피웠다며. 당신이 업무 지시를 거부했으니까 권한을 조정한 거야. 목록 보내면 개인 물건은 확인해서 돌려줄 테니 더는 문제 만들지 마.”유림은 혜주와 눈을 마주쳤다.“내가 작성한 연구를 나경이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도 당신이 승인했어?”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유림아, 회사가 어려울 때 당신 연구에 투자한 사람이 누구야? 그 연구가 세상에 나가려면 갤러리 이름이 필요하잖아.”“회사가 성과를 활용하는 것과 작성자를 바꾸는 건 달라.”도혁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당신은 늘 그런 식이야. 자기가 조금만 기여해도 전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나경이가 앞에 서는 편이 회사 이미지에도 좋고, 당신은 원래 뒤에서 일하는 게 맞아.”유림의 손끝이 얼어붙었다.밤을 새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Read more

17화

외부 소장가와 미술품 거래 관계자들이 앞줄을 차지했고, 뒤쪽에는 갤러리 직원들이 서 있었다. 유림은 공개 설명회 참석 가능 여부를 확인한 뒤 뒤편 자리에 앉았다.무대 위에는 백나경이 서 있었다.크림색 정장을 입은 그녀는 마이크 높이를 조절하며 환하게 웃었다. 화면에 오래된 풍경화의 사진이 나타나자 유림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맞잡았다.나경은 작품의 제작 배경과 소장 이력을 설명한 뒤 표면 상태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중 상당수는 유림이 작성했던 문장이었고, 어떤 표현은 단어 하나 바뀌지 않은 채 화면에 나타났다.“저는 이 작품의 복원 흔적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기존 제작 시기 추정이 잘못됐을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유림은 고개를 들었다.그 불일치를 처음 기록한 사람은 유림이었고,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남긴 사람도 그녀였다. 그런데 나경은 자신이 모든 연구를 처음부터 이끌어 온 사람처럼 설명을 이어 갔다.발표가 끝나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대형 화면에는 마지막 장이 떠 있었다.*연구 총괄 및 감정 책임자 백나경.*유림은 그 문장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천천히 맞잡았다.며칠 밤을 새워 완성한 연구였다. 어머니가 재활치료를 받던 날에도 병원 복도에서 자료를 확인했고, 새벽까지 복원 기록을 대조하다 책상에 엎드려 잠든 적도 있었다.그 시간을 도혁은 알고 있었다.유림이 새벽에 돌아오면 왜 그렇게 늦었느냐고 물었고, 주말에도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하면 집안일은 누가 하느냐며 짜증을 냈으니까.그런데 이제 남편은 그 연구를 다른 여자의 업적으로 발표하고 있었다.도혁은 박수가 잦아들자 무대에 올라 나경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오늘 발표를 보시니 아시겠지만, 백나경 공동대표는 우리 갤러리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뛰어난 연구 능력은 물론이고, 작품을 보는 안목과 판단력까지 갖춘 사람이죠.”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결혼 초기에 유림이 감정한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았을 때 도혁이 잠깐 보여 주었던 표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Read more

18화

유림은 가방 끈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가 판단을 보류했던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확정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신중함이야말로 감정사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었지만, 도혁은 그것을 무능의 증거로 바꾸고 있었다.“그래서 이번 연구부터는 나경 씨가 직접 방향을 잡았습니다. 기존 자료를 검토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비로소 외부에 발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완성한 겁니다.”도혁은 나경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능력이 있는 사람은 결국 결과로 증명하는 법이죠.”나경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대표님이 믿어 주신 덕분이에요.”도혁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잘했으니까.”유림은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려 애썼다.남편은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저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밤을 새워 보고서를 완성했을 때도, 외부 전문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도 도혁은 다음 일을 재촉했다.그런데 지금은 유림의 연구를 발표한 나경에게 능력이 있으니 믿는다고 말하고 있었다.그때 도혁이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마침 차유림 씨도 오늘 참석하셨네요. 차유림 씨, 잠깐 일어나 주시겠습니까?”수십 명의 시선이 한꺼번에 유림에게 쏠렸다.잠시 망설였지만 계속 앉아 있으면 도혁이 또 다른 말을 덧붙일 것 같았다. 유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도혁은 만족한 듯 웃었다.“차유림 씨도 그동안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 주셨습니다. 다만 본인의 기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유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최근에는 회사가 여러 차례 업무 조정을 제안했는데, 본인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실무 담당자와 최종 책임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현재는 연구에 참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중요한 연구를 맡기기에는 아직 판단력과 책임감이 부족하다고 봤습니다.”유림은 입술을 깨물었다.그 말이 너무 잔인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Read more

19화

앞줄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이 많이 배려하셨네요.”도혁은 그 말을 듣고도 부정하지 않았다.오히려 겸손한 듯 웃었다.“같이 일한 정이 있으니까요.”유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강도혁 대표님.”그녀의 목소리가 세미나실에 울렸다.도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네, 차유림 씨.”남편은 그녀를 아내가 아닌 직원으로 부르고 있었다.유림은 떨리는 손을 천천히 폈다.“제 어머니 치료 문제를 이 자리에서 말씀하실 이유는 없습니다.”도혁은 잠시 침묵하더니 난처한 듯 웃었다.“보십시오. 제가 이런 점 때문에 걱정하는 겁니다. 개인적인 감정이 앞서면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워집니다. 지금도 제가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 본인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잖아요.”도혁은 객석을 향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차유림 씨는 자신의 기여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회사의 성과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특히 최종 판단과 책임을 맡은 사람의 역할을 인정하지 못하면 조직 안에서 함께 일하기 어렵죠.”나경이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받았다.“저는 차 실장님께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실무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앞으로도 마음을 풀고 좋은 관계로 지냈으면 좋겠어요.”유림은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나경은 그녀의 연구를 가져간 사람인데도, 마치 자신이 상처받은 상대를 용서하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도혁은 그런 나경을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나경이는 참 마음이 넓어요. 그래서 제가 믿는 겁니다.”그 순간 유림은 남편이 자신을 얼마나 철저하게 짓밟고 있는지 깨달았다.도혁은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욕설도 하지 않았고, 손을 들지도 않았다. 그 대신 가장 온화한 얼굴로 아내의 경력을 부정하고 전문성을 깎아내렸으며, 어머니의 병을 사람들 앞에 드러낸 뒤 자신을 끝까지 배려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그리고 나경은 그 옆에서 관대한 승리자처럼 웃고 있었다.유림은 남편을 바라보았다.결혼식 날 수많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Read more

20화

그 말이 끝났을 때 유림은 남편을 향해 더 이상 어떤 감정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슬프다고 말해도 도혁은 이해하지 않을 것이고, 억울하다고 말하면 또다시 욕심이라고 할 것이다.유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제가 감사해야 할 사람은 제 일을 정직하게 평가해 준 사람이지, 제 이름을 지운 사람이 아닙니다.”도혁의 얼굴이 굳었다.“그리고 제가 작성한 보고서의 원본과 변경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그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세미나실 뒤편에서 누군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도혁은 잠시 말을 잃었다.유림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그녀는 천천히 자리에 앉아 가방을 정리했다. 손이 떨리고 눈앞이 흐려졌지만 사람들 앞에서 울지는 않았다.오늘 남편이 자신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거짓말했는지, 누가 그 말을 들었는지, 어떤 자료가 발표됐는지 하나씩 기억해 두기로 했다.행사가 끝난 뒤 유림은 복도로 나와 벽에 손을 짚었다.그제야 참았던 숨이 거칠게 흘러나왔다.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까지 짓밟을 수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유림은 휴대전화를 꺼내 발표회에서 들은 주요 발언과 참석자, 공개된 자료의 내용을 기록했다. 손끝이 여전히 떨렸지만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조금 전 도혁은 수십 명 앞에서 그녀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선언했다.그렇다면 이제 유림이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남편이 지워 버린 자신의 이름을, 남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그 자리에서 다시 증명하는 것.유림은 눈가를 닦고 비공개 검토회 안내 데스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비공개 검토회는 같은 날 오후, 갤러리 안쪽 회의실에서 열렸다.유림은 행사 담당자에게 자신의 감정 경력과 해당 작품의 선행 조사 참여 사실을 알렸고, 검토회 책임자의 승인을 받은 뒤 참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회의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Read more
PREV
12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