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내 이름을 지웠다

남편은 내 이름을 지웠다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0-23
Par:  월야Mis à jour à l'instant
Langu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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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7년, 차유림은 남편 강도혁의 갤러리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지웠다. 그런데 갤러리 창립 기념식 날, 남편은 그녀가 발굴한 명화와 평생 쌓아 온 감정 실적을 내연녀 백나경의 것이라 발표한다. 안방도, 직장도, 어머니의 치료비마저 빼앗긴 유림. 조작된 감정서로 위조범이라는 누명까지 쓰게 되자 그녀는 마침내 남편을 떠난다. 모두가 끝났다고 믿은 순간, 세계적인 경매사 대표 서무원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다. 빼앗긴 이름을 되찾으려는 여자와 그녀를 버리고서야 미친 듯이 집착하기 시작한 남편. “당신이 지운 내 이름, 이제 당신이 무너지는 이유가 될 거야.” 그녀의 복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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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itre 1

1화

개관식이 시작되기 삼십 분 전, 차유림은 남편이 자신의 그림에 붉은 리본을 묶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갤러리 중앙 전시실이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조명 아래, 오래된 호두나무 액자에 담긴 《푸른 정원》이 걸려 있었다. 액자 오른쪽 아래에는 유림만 알아볼 수 있는 작은 흠집이 있었다.

결혼하기 전, 그녀가 몇 년 동안 모은 돈으로 구입한 그림이었다.

“여보, 저 그림은 왜 여기 있어?”

강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직원에게 리본을 조금 더 높이라고 지시한 뒤 액자 아래 놓인 설명문을 확인했다.

유림이 가까이 다가갔다.

**《푸른 정원》 — 강도혁 컬렉션.**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소장자 이름이 잘못됐어.”

“뭐가?”

“내 그림이잖아.”

그제야 도혁이 돌아보았다. 그는 아내의 얼굴보다 손목시계를 먼저 확인했다.

“오늘 행사에 쓰려고 가져왔어.”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집에 걸어 두는 것보다 여기 전시하는 게 낫잖아.”

“전시하는 것과 소장자를 바꾸는 건 다른 문제야.”

도혁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유림아, 오늘만큼은 좀 협조해 주면 안 되겠어?”

유림은 설명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림을 처음 발견했던 날이 떠올랐다. 오래된 개인 소장품 목록에서 작품의 존재를 확인하고, 작가의 유족에게 연락해 관련 자료를 구했던 시간. 소유 이력과 복원 기록을 대조하느라 몇 달을 보냈다.

그림을 구입한 뒤에도 제대로 된 액자를 맞추기 위해 여러 작업실을 돌아다녔다.

도혁은 그 모든 과정을 알고 있었다.

결혼하고 처음 맞은 겨울, 직접 그림을 거실에 걸어 주기도 했다.

*당신이 아끼는 거니까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 걸자.*

그때의 남편은 적어도 그녀가 그 그림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었다.

“설명문은 고쳐 줘. 소장자는 차유림이라고.”

도혁은 대답 대신 전시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한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오빠!”

백나경이었다.

몸에 꼭 맞는 금빛 드레스가 조명 아래 반짝였다. 그녀는 직원에게 꽃다발을 맡기자마자 도혁에게 다가갔다.

“저 안 늦었죠?”

“시간 맞춰 왔네.”

도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유림은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넥타이를 골라 줄 때만 해도 남편은 그녀에게 웃어 주지 않았다. 식탁에서 개관식 준비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피곤하다며 대화를 끊었다.

그런 남자가 나경 앞에서는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나경은 도혁의 넥타이를 만져 매듭을 바로잡았다.

“오빠, 제가 골라 드린 넥타이는요?”

“오늘은 이게 낫겠다 싶어서.”

“다음에는 꼭 제가 고른 거 하세요.”

두 사람의 손길과 대화가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유림이 없는 곳에서 오래전부터 이런 시간을 보내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유림 언니.”

나경이 그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죠? 그런데 얼굴이 너무 안 좋으세요.”

“잠을 좀 못 잤어.”

“그러게요. 이제 언니도 좀 쉬셔야죠.”

나경의 시선이 《푸른 정원》으로 옮겨 갔다.

그녀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어머, 오빠. 정말 가져오셨네요?”

유림의 눈썹이 움직였다.

“나경 씨도 이 그림 알아?”

“그럼요. 제가 얼마나 갖고 싶어 했는데요.”

나경은 그림 앞에 다가가 액자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쓸었다.

“제 대표실에 걸면 정말 예쁠 것 같아요.”

“대표실?”

유림이 되묻자 도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경이가 오늘부터 공동대표야.”

잠시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

“오늘 공식 발표할 거야.”

“나는 처음 듣는데.”

“당신한테까지 경영 문제를 일일이 보고해야 해?”

그는 사소한 일로 시간을 빼앗긴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다.

나경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언니, 오빠가 말씀 안 하셨어요? 전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그녀의 입술이 살짝 내려갔다.

“제가 괜히 난처하게 만들었네요.”

유림은 나경을 보지 않았다.

“그림은?”

도혁이 말했다.

“취임 선물로 줄 거야.”

유림은 남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내 그림을?”

“당신도 알잖아. 나경이가 개관 준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그래서 내 그림을 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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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개관식이 시작되기 삼십 분 전, 차유림은 남편이 자신의 그림에 붉은 리본을 묶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갤러리 중앙 전시실이었다.천장에서 쏟아지는 조명 아래, 오래된 호두나무 액자에 담긴 《푸른 정원》이 걸려 있었다. 액자 오른쪽 아래에는 유림만 알아볼 수 있는 작은 흠집이 있었다.결혼하기 전, 그녀가 몇 년 동안 모은 돈으로 구입한 그림이었다.“여보, 저 그림은 왜 여기 있어?”강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직원에게 리본을 조금 더 높이라고 지시한 뒤 액자 아래 놓인 설명문을 확인했다.유림이 가까이 다가갔다.**《푸른 정원》 — 강도혁 컬렉션.**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소장자 이름이 잘못됐어.”“뭐가?”“내 그림이잖아.”그제야 도혁이 돌아보았다. 그는 아내의 얼굴보다 손목시계를 먼저 확인했다.“오늘 행사에 쓰려고 가져왔어.”“나한테 말도 안 하고?”“집에 걸어 두는 것보다 여기 전시하는 게 낫잖아.”“전시하는 것과 소장자를 바꾸는 건 다른 문제야.”도혁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유림아, 오늘만큼은 좀 협조해 주면 안 되겠어?”유림은 설명문을 다시 바라보았다.그림을 처음 발견했던 날이 떠올랐다. 오래된 개인 소장품 목록에서 작품의 존재를 확인하고, 작가의 유족에게 연락해 관련 자료를 구했던 시간. 소유 이력과 복원 기록을 대조하느라 몇 달을 보냈다.그림을 구입한 뒤에도 제대로 된 액자를 맞추기 위해 여러 작업실을 돌아다녔다.도혁은 그 모든 과정을 알고 있었다.결혼하고 처음 맞은 겨울, 직접 그림을 거실에 걸어 주기도 했다.*당신이 아끼는 거니까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 걸자.*그때의 남편은 적어도 그녀가 그 그림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었다.“설명문은 고쳐 줘. 소장자는 차유림이라고.”도혁은 대답 대신 전시장 입구를 바라보았다.그곳에서 한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오빠!”백나경이었다.몸에 꼭 맞는 금빛 드레스가 조명 아래 반짝였다. 그녀는 직원에게 꽃다발을 맡기자마자 도혁에게 다가갔다.“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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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당신은 집에 다른 그림도 많잖아.”유림은 입술을 다물었다.도혁은 그 침묵을 불만으로 받아들였는지 목소리를 낮췄다.“나경이가 좋아하는 작품이야. 오늘 분위기 망치지 마.”나경은 그림 앞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언니가 그렇게 아끼시는 줄은 몰랐어요.”그러더니 곧바로 덧붙였다.“그런데 오빠가 저한테 주신다고 약속하셨거든요.”약속.남편은 아내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여자에게 그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나경은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직원에게 물었다.“이거 제 방으로 옮길 때 액자도 같이 포장해 주시죠?”유림이 입을 열었다.“그 그림은 옮기지 마세요.”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멈췄다.나경의 미소도 잠시 굳었다.도혁이 유림의 팔꿈치를 잡았다.“잠깐 나 좀 봐.”그는 아내를 전시장 구석으로 데려갔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유림의 팔이 아팠다.“사람들 앞에서 왜 이래?”“내 물건을 다른 사람한테 준다는데 가만히 있어야 해?”“그림 하나 때문에?”유림은 남편을 올려다보았다.“당신은 내가 그 그림을 어떻게 구했는지 알잖아.”“알아. 그러니까 더 좋은 자리에서 빛을 보게 해 주겠다는 거야.”“그림이 아니라 나경 씨한테 주는 거잖아.”도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당신이 내 아내인데 그 정도도 못 해 줘?”그 한마디가 유림의 가슴을 후벼 팠다.아내라는 이유로 그녀의 물건은 남편의 것이 되었다. 남편의 사업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놓아야 했다.그런데 그 사업의 공동대표 자리는 다른 여자에게 돌아갔다.“난 허락하지 않았어.”“당신 허락이 꼭 필요한 일은 아니야.”도혁은 넥타이를 고쳐 맸다.“그리고 나경이 앞에서 창피하게 굴지 마. 이제 회사 공동대표야.”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유림이 무엇을 잃는지에는 관심조차 없는 얼굴이었다.***개관식이 시작되자 전시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미술계 관계자와 수집가, 기자들이 샴페인 잔을 들고 그림 앞을 오갔다.유림은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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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남편은 그림을 주었고, 내연녀는 그림을 알아본 사람의 공로까지 가져갔다.두 사람 모두 그녀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개관식이 끝난 뒤, 유림은 감정실로 향했다.컴퓨터를 켜자 공식 보고서 폴더에 새로운 파일이 올라와 있었다.`푸른정원_최종감정보고서_백나경`유림은 파일을 열었다.첫 장에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감정 책임자 — 백나경.**내용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였다.오래된 전시 도록을 비교한 부분도, 복원 기록의 공백을 설명한 문단도 그대로였다.그녀가 직접 촬영한 작품 뒷면 사진까지 첨부돼 있었다.달라진 것은 이름뿐이었다.유림은 원본 파일을 찾았다.자신이 작업하던 폴더에는 이전 버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공식 제출용 폴더에서는 차유림이라는 이름이 사라져 있었다.파일 속성에 표시된 마지막 수정자는 갤러리 운영관리 계정이었다.그 계정은 감정 보고서를 외부에 배포하기 전에 최종 파일을 등록할 때 사용됐다. 도혁과 운영팀 책임자가 승인한 자료만 그 계정으로 올라갔다.유림은 수정 시각과 저장 경로를 기록했다.개인 메일함도 열었다.몇 달 전 도혁에게 보냈던 초안이 있었다.*《푸른 정원》 감정 검토 자료 전달드립니다. — 차유림.*메일의 날짜와 첨부파일을 확인한 유림은 원본과 현재 보고서의 첫 장을 나란히 띄웠다.본문은 같았다.그런데 작성자 이름만 달랐다.그때 문이 열렸다.“아직 안 갔어?”도혁이었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남편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유림은 모니터를 돌려 보여 주었다.“이거 당신이 시켰어?”도혁은 화면을 보더니 별다른 반응 없이 말했다.“나경이 이름으로 정리하라고 했어.”“내가 쓴 보고서야.”“회사 자료잖아.”“회사 자료라고 작성자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야.”도혁은 귀찮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나경이가 공동대표로 나서려면 실적이 필요해.”유림은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그래서 내 실적을 준 거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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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녀는 자신의 노트를 펼쳤다.몇 달 동안 손때가 묻은 종이 위에 자신이 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그것만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유림은 원본 메일과 보고서의 저장 위치를 확인하고 개인 기록에 날짜를 남겼다.그날 밤, 집에 돌아왔을 때 거실 벽은 비어 있었다.《푸른 정원》이 걸려 있던 자리였다.그녀는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그림을 빼앗긴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그림이 사라진 자리를 남편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다음 날 오전, 유림은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어머니의 재활치료 지원 서류에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는 연락이었다.“이번 달 지원금은 정상 처리됐습니다. 다만 다음 심사에는 치료 계획서와 재단 확인서가 더 필요합니다.”유림은 메모지에 필요한 서류를 적었다.“네, 준비하겠습니다.”전화를 끊자마자 나경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언니, 제 대표실 정리하는데 잠깐 와 주실래요?*사진도 함께였다.《푸른 정원》이 나경의 대표실 벽에 걸려 있었다.그 아래에는 금빛 명패가 놓여 있었다.**백나경 공동대표.**유림은 사진을 확대했다.액자 오른쪽 아래의 작은 흠집이 보였다.자신이 직접 구입한 그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자국이었다.나경은 그것을 알 리 없었다.그런데도 사진 속에서 누구보다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유림은 답장하지 않았다.대신 가방을 챙겨 갤러리로 향했다.***서무원을 처음 본 것은 그날 오후였다.전시팀 직원이 감정실 문을 두드렸다.“사모님, 손님 한 분이 《푸른 정원》에 대해 문의하시는데요.”“어떤 문의인데요?”“제작 연도와 복원 이력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으시대요.”유림은 자료를 내려놓았다.전시장 중앙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짙은 회색 정장에 검은 구두. 키가 크고 자세가 반듯했다. 그는 그림보다 먼저 설명문을 읽고 있었다.유림이 다가가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이 작품 담당자십니까?”“감정 자료를 작성했습니다.”“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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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녀는 태블릿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가 잠시 후 다시 집어 들었다.호텔 이름과 체크인 시각이 보이도록 사진을 찍었다.그리고 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받지 않았다.두 번째도,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유림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보다 외투를 입었다.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밤 아홉 시가 조금 넘었다.로비에서는 잔잔한 피아노 연주가 흐르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가방을 끌고 지나갔고, 직원들은 평소처럼 손님을 맞이했다.유림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췄다.남편이 정말 이곳에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그때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오빠, 내일 아침에는 늦게 일어나요.”유림이 고개를 돌렸다.로비 안쪽 엘리베이터에서 도혁과 나경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나경은 남편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도혁의 넥타이 매듭은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두 사람은 유림을 발견하기 전까지 웃고 있었다.“강도혁.”유림이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도혁의 걸음이 멈췄다.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유림은 남편의 팔에 걸린 나경의 손을 바라보았다.나경은 손을 떼지 않았다.“지방 거래처에 간다며.”도혁이 주변을 살폈다.“업무 때문에 온 거야.”“호텔에서?”“여기서 미팅했어.”유림의 시선이 나경에게 옮겨 갔다.“둘이서?”나경이 입술을 달싹였다.“언니,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너한테 묻지 않았어.”나경의 얼굴이 굳었다.도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사람들 보는 데서 이러지 마.”그는 유림의 손목을 잡았다.“나가서 이야기해.”유림은 손을 빼냈다.“여기서 말해.”도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에는 당황보다 짜증이 먼저 떠올랐다.“그래.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야.”유림은 숨을 들이마셨다.가슴이 아파서가 아니라, 잠깐 숨 쉬는 방법을 잊은 것 같았다.“언제부터?”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나경이 고개를 숙였다.유림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내가 모르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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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유림은 손을 내렸다.손끝이 떨렸다.그녀는 손을 가방 끈에 묻었다.“내 보고서 원래대로 돌려놔.”도혁의 얼굴이 굳었다.“지금 무슨 소리야?”“내 이름으로 작성한 보고서야. 원래대로 돌려놔. 그림도.”도혁이 유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당신이 지금 나한테 조건을 거는 거야?”유림은 물러서지 않았다.“내 것을 돌려 달라는 거야.”도혁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어머니 재활 지원, 다음 심사 때도 계속될 거라고 생각해?”유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그걸 왜 여기서 꺼내?”“당신이 현실을 모르니까.”“어머니 치료비로 나를 협박하는 거야?”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더 잔인했다.나경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언니, 오빠가 지금까지 얼마나 도와주셨는데요. 너무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유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네가 그 말을 해?”나경이 입술을 다물었다.유림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남편과 내연녀.두 사람은 같은 편이었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상처를 입든 서로를 보호할 사람들이었다.유림은 휴대전화를 꺼냈다.호텔 예약 알림 사진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화면을 확인한 뒤 가방에 넣었다.“오늘 당신이 한 말, 잊지 않을게.”도혁이 그녀의 팔을 잡으려 했다.유림은 한 걸음 물러났다.“손대지 마.”그녀는 돌아섰다.호텔 자동문이 열리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하지만 차에 올라타 문을 닫자마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시동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몇 번이나 허공을 짚었다.유림은 결국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보다 더 오래 귓가에 남는 말이 있었다.*당신 어머니 재활 지원, 다음 심사 때도 계속될 거라고 생각해?*유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남편은 그녀가 어디를 찔리면 가장 아파하는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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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나경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오빠가 언니한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는 이미 오래전부터 같이 일해 왔어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언니만 모르셨던 거죠.”유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경은 그 침묵을 즐기는 듯 천천히 감정실을 둘러보았다.“오빠가 그러셨어요. 언니는 이제 좀 쉬는 게 좋겠다고.”유림의 손이 노트 표지를 움켜쥐었다.“그 말도 당신한테 했어?”“네.”나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앞으로는 제가 오빠 옆에서 갤러리를 키울 거예요.”그녀는 문 쪽을 가리켰다.“그러니까 저것부터 바꿔 주세요.”직원이 고개를 돌렸다.문 옆에 작은 은색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차유림 / 미술품 감정사.**결혼 후 도혁이 직접 주문해 달아 준 이름표였다.유림은 그것을 바라보았다.그날 도혁은 그녀에게 말했다.*이제 당신 이름 걸고 마음껏 일해.*그녀는 그 말을 믿었다.그래서 밤늦게까지 보고서를 작성했고, 남편의 갤러리에 들어오는 작품이라면 자신의 평판을 걸고 검토했다.그런데 이제 그 이름표를 떼어 내겠다고 했다.유림이 직원에게 말했다.“잠깐만요.”직원의 손이 멈췄다.나경이 팔짱을 꼈다.“언니, 또 왜 그러세요?”유림은 휴대전화를 꺼냈다.이름표를 촬영했다.문 전체와 감정실 내부도 사진에 담았다.나경의 눈빛이 흔들렸다.“그걸 왜 찍어요?”“기록하려고.”“뭘요?”“내가 여기서 일했다는 사실.”유림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리고 누가 내 이름을 떼어 냈는지도.”나경의 얼굴이 굳었다.그러나 직원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유림은 문 앞에서 물러섰다.“떼세요.”직원이 드라이버를 들었다.금속을 긁는 소리가 났다.첫 번째 나사가 풀렸다.두 번째 나사가 바닥에 떨어졌다.이름표가 문에서 떨어져 나왔다.나경이 손을 내밀었다.“그건 저 주세요.”직원이 이름표를 건넸다.나경은 손바닥 위에 놓인 글자를 내려다보았다.차유림.그녀는 이름표를 뒤집었다.“이런 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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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현관에 선 유림은 신발을 벗다 말고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분명 닫아 두었던 안방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가구를 옮기는 소리까지 들렸다.“오빠, 이쪽에 두면 안 돼요?”백나경이었다.유림은 벗어 놓은 신발을 정리할 생각도 못 한 채 복도를 걸었다.안방 문 앞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 두 개가 놓여 있었으며, 침대에는 처음 보는 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화장대 위에 늘어서 있던 유림의 화장품은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그 자리를 낯선 향수와 화장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그 한가운데서 나경은 유림의 실크 잠옷을 손에 들고 있었다.“이건 어디에 넣어요?”도혁이 옷장을 가리켰다.“안 쓰는 방에 갖다 놔.”유림은 문턱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지금 뭐 하는 거야?”그제야 돌아본 도혁은 놀라기는커녕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왔어?”나경도 잠옷을 든 채 웃었다.“언니,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유림은 대답하지 못했다.눈앞의 광경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남편의 내연녀가 자신의 침실에 들어와 있었고, 남편은 그 여자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아내의 물건을 치우고 있었다.“저 짐은 뭐야?”“나경이가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야.”“여기서?”“집에 문제가 좀 생겼대. 빈방도 많잖아.”유림은 침대 위에 펼쳐진 새 이불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왜 안방에 짐을 풀고 있어?”도혁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당신이 쓰던 방이 넓잖아. 나경이가 당분간 쓰면 돼.”그제야 유림은 남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했다.“내가 쓰던 방?”“당신은 옆방으로 옮겨.”나경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언니, 제가 원한 건 아니에요. 오빠가 여기 쓰라고 하셔서…….”그러면서도 그녀는 유림의 잠옷을 내려놓지 않았다.유림은 손을 내밀었다.“그거 줘.”“네?”“내 잠옷.”나경은 잠시 도혁의 눈치를 살피더니 잠옷을 건넸다.유림이 받아 든 실크에서는 낯선 향수 냄새가 났다.결혼기념일에 도혁이 선물했던 잠옷이었다. 그날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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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림도 빼앗기고, 보고서에서 이름도 지워졌다.이제는 침실까지 빼앗겼는데, 자신은 블라우스 단추 하나를 걱정하고 있었다.유림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그때 열린 문틈으로 나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침대가 너무 딱딱한데요?”“바꿔 줄게.”“정말요?”“당신이 편해야지.”유림은 손바닥 위의 단추를 움켜쥐었다.*당신이 편해야지.*남편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했던 때가 언제였을까.어머니의 재활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녀온 날에도 도혁은 집안일이 밀렸다는 말부터 했고, 밤새 감정 보고서를 작성한 다음 날에는 왜 아침 식사를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그녀가 아프다고 말하면 남편은 피곤하다는 얼굴을 했고, 힘들다고 하면 다들 그렇게 산다고 했다.그런 남자가 나경에게는 침대까지 바꿔 주겠다고 했다.유림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잠시 뒤 도혁이 들어왔다.“짐은 다 옮겼어?”“아직.”“오늘 안에 정리해.”유림은 블라우스를 접어 서랍에 넣다가 남편을 돌아보았다.“내가 왜 이 방으로 옮겨야 하는지 설명해 봐.”도혁은 벽에 기대선 채 눈살을 찌푸렸다.“또 시작이야?”“내 집이기도 하잖아.”“명의는 내 거야.”유림의 손이 멈췄다.도혁은 그녀의 얼굴이 굳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내가 산 집이고, 내가 유지하는 집이야. 당신은 그동안 여기서 편하게 살았잖아.”“당신 갤러리에서 일한 건?”“그 대가로 생활비도 쓰고, 어머니 치료비도 지원받았지.”유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내가 감정한 작품으로 당신이 얼마나 벌었는지 알아?”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서 이제 돈 계산까지 하겠다는 거야?”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침대 위에 놓인 가방을 가리켰다.“나경이 불편하게 하지 마. 지금 예민한 상태야.”“나는?”도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왔다.“나는 안 불편할 것 같아?”남편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짧게 대답했다.“당신은 원래 강하잖아.”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유림은 닫힌 문을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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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명숙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유림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그럼 어쩌라는 거니? 나경이가 갈 데가 없다잖아.”“제 안방에서 지내고 있어요.”“방이 한두 개니?”유림이 입술을 다무는 사이, 명숙은 나경에게 반찬을 건네며 다정하게 말했다.“넌 많이 먹어. 얼굴이 반쪽이 됐다.”“감사해요, 어머니.”그 호칭에 유림의 눈길이 멈췄다.나경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웃었다.“아, 제가 이렇게 불러도 되죠?”명숙은 손을 내저었다.“편하게 불러.”유림은 식탁 가장자리를 붙잡았다.“어머니.”“왜?”“저 사람은 도혁이 내연녀예요.”순간 식탁에 정적이 내려앉았다.나경은 고개를 숙였지만 명숙은 오히려 유림을 노려보았다.“아침부터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사실이에요.”“남자가 밖에서 마음 둘 곳 좀 찾았다고 그렇게 난리를 쳐야겠니?”유림은 귀를 의심했다.“뭐라고 하셨어요?”명숙은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네가 남편 마음을 못 잡은 것도 생각해야지. 맨날 그림만 붙들고 있으니 도혁이가 얼마나 외로웠겠어.”유림은 식탁 위에 놓인 물컵을 바라보았다.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차마 잡을 수 없었다. 손끝이 떨려 컵을 제대로 쥘 자신조차 없었다.나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니, 언니한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명숙은 기다렸다는 듯 나경의 손등을 토닥였다.“넌 가만히 있어. 네가 무슨 잘못이니.”유림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이미 많은 이야기가 오간 듯했다.그녀만 모르는 사이 이 집에는 새로운 질서가 생겨 있었고, 그 안에서 유림은 남편을 외롭게 만든 아내가 되어 있었다.명숙이 턱으로 부엌을 가리켰다.“가서 죽 좀 끓여 와. 나경이가 속이 안 좋다잖아.”유림은 움직이지 않았다.“못 하겠어요.”명숙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뭐?”“나경 씨 밥까지 제가 차릴 이유는 없어요.”명숙은 의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집에서 먹고사는 사람이 말대꾸는.”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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