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 남자는 내 약혼자를 죽인 용의자였다: Chapter 11 - Chapter 20

22 Chapters

[11] 조작된 소장품 대장

“원본 소장품 대장을 찾았습니다.”강무겸의 전화를 받은 나는 곧바로 노트북을 닫았다.“어디에 있었어요?”“서원미술관을 운영했던 재단의 기록 보관실입니다.”“그럼 오늘 볼 수 있어요?”“담당 형사가 자료 확인을 요청했고, 오후 2시에 방문하기로 했습니다.”나는 시계를 확인했다.오전 11시 30분.“제가 먼저 갈게요.”“점심은요?”“강무겸 씨.”“네.”“오늘은 제가 밥 사줄게요. 그러니까 빨리 와요.”수화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알겠습니다.”◇재단 기록 보관실은 도심의 오래된 건물 4층에 있었다.도착하자 무겸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일찍 오셨네요.”“강무겸 씨보다 먼저 오려고 했는데 실패했네요.”“다음에는 제가 늦게 오겠습니다.”“일부러 늦으면 반칙이죠.”우리는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담당 형사와 기록 관리 직원이 이미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책상 위에는 두꺼운 장부 3권이 놓여 있었다.“이게 서원미술관의 원본 소장품 대장입니다.”직원이 첫 번째 장부를 펼쳤다.나는 무겸과 나란히 앉았다.“SW-204-17부터 확인하겠습니다.”직원이 해당 페이지를 보여주었다.작품명은 '푸른 정원'.제작 연도와 크기, 최초 등록일이 적혀 있었다.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여기에는 붉은 방이라는 작품이 없네요?”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원래 등록된 작품은 풍경화였던 겁니다.”“그럼 제 초상화는요?”“나중에 등록 정보가 변경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직원이 컴퓨터를 켰다.“전자 대장 수정 이력을 확인해 보겠습니다.”잠시 후 화면에 기록이 나타났다.2025년 8월 22일.작품명 변경.'푸른 정원'에서 '거울 앞의 여자'로 수정.나는 화면을 가리켰다.“잠깐만요. 그럼 3년 전부터 그 그림이 있었다는 기록은 거짓이잖아요.”무겸이 대답했다.“과거 제작 연도를 그대로 둔 채 작품명만 바꾼 겁니다.”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내가 태광을 만나기도 전에 누군가 내 초상화를 그렸다는 생각 때문에 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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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죽은 사람의 서명

“이태광 씨가 사망한 다음 날 오전 9시 12분에 철회 처리가 됐습니다.”담당 형사의 설명을 듣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누가 태광이 이름을 사용했다는 거잖아요.”“그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습니다.”“접속한 사람은요?”“당시 사무실 출입 기록을 확보했습니다.”나는 강무겸을 바라봤다.그도 이미 외투를 챙기고 있었다.“경찰서로 가시죠.”◇오후 2시.담당 형사는 우리에게 서원미술관의 출입 기록을 보여주었다.이태광이 사망한 다음 날, 미술관에 들어간 사람은 총 4명이었다.경찰 관계자를 제외하면 재단 직원 2명과 시설 관리 직원 1명이었다.“이 중에 누가 사무실을 사용했는지 확인됐나요?”내 질문에 형사가 서류를 넘겼다.“운영팀장 오정민 씨가 오전 9시 3분에 출입했습니다.”“그 사람이 철회한 거예요?”“아직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해당 사무실의 컴퓨터를 사용한 사실은 인정했습니다.”강무겸이 물었다.“철회 처리를 한 이유는 뭐라고 합니까?”“이태광 씨가 생전에 요청했다고 주장합니다.”나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그럼 왜 죽은 다음 날 처리했대요?”“그 부분도 확인 중입니다.”형사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철회 요청서 사본이었다.하단에는 이태광의 이름과 서명이 있었다.나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잠깐만요.”“왜 그러십니까?”“이 서명, 태광이 글씨가 아니에요.”강무겸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확실합니까?”“네. 태광이는 자기 이름을 쓸 때 마지막 획을 길게 빼는 버릇이 있었어요.”나는 가방에서 오래된 서류를 꺼냈다.결혼 준비를 하면서 함께 작성했던 계약서였다.“여기 보세요.”두 서명을 나란히 놓자 차이가 보였다.형사도 자세히 살폈다.“필적 감정을 의뢰하겠습니다.”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그 사람을 직접 만나고 싶어요.”“참고인 조사가 먼저입니다.”“알아요. 하지만 태광이가 왜 이의를 제기했는지 그 사람은 알고 있을 거예요.”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추가 조사가 끝나면 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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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존재하지 않는 감정서

“강무겸 씨, 이 계약서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어요.”나는 노트북 화면을 확대했다.“매매대금은 3억 원인데, 경매 예상가는 8억 원이잖아요.”“네.”“그런데 작가도 공개하지 않은 그림에 누가 그렇게 큰돈을 내겠어요?”무겸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좋은 질문입니다.”“칭찬 말고 대답이요.”그가 작게 웃었다.“작품의 가치를 보증하는 자료가 있을 겁니다.”“감정서요?”“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나는 곧바로 경매장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붉은 방에 첨부된 감정 자료를 확인하고 싶습니다.”담당자는 잠시 망설였다.“작품 감정에 문제가 있으신가요?”“그림에 제 얼굴이 그려져 있고, 관련된 형사 사건도 있습니다.”나는 무겸을 바라봤다.“그리고 감정을 의뢰받았던 전문가가 지금 제 옆에 있어요.”잠시 후 담당자가 말했다.“그렇다면 감정사 본인 확인을 거쳐 관련 서류를 검토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오후 3시.경매장 자료실에서 우리는 작품의 출품 서류를 확인했다.계약서, 소장 이력, 작품 사진.그리고 마지막에 감정 확인서가 있었다.나는 서류를 펼쳤다.“여기 있네요.”무겸은 첫 장을 읽더니 움직임을 멈췄다.“이건 제가 작성한 게 아닙니다.”“네?”“제 이름이 도용됐습니다.”감정사 강무겸.감정 결과 진품.감정 금액 8억 원.서류 하단에는 서명까지 들어가 있었다.“정말 무겸 씨 서명이에요?”“제 서명을 흉내 낸 겁니다.”나는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그럼 누군가 당신 이름으로 가짜 감정서를 만들었다는 거네요?”“그렇습니다.”“이거 경찰에 제출해야겠어요.”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원본 보관 여부와 제출 경로부터 확인하죠.”나는 경매장 담당자를 불렀다.“이 서류, 누가 제출했나요?”담당자가 접수 기록을 확인했다.“위탁자인 세온아트컨설팅에서 제출했습니다.”박연호가 대표로 있는 회사였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박연호 씨는 자기가 그림을 운송만 했다고 했는데.”무겸이 서류를 가리켰다.“그보다 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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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믿고 싶은 남자

“이태광 씨는 죽기 전날 2억 원의 반환을 요구했습니다.”강무겸의 말을 듣고도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태광이 마지막으로 전화했던 밤이 떠올랐다.'오늘 끝내야 할 일이 있어.'나는 그 말을 단순한 회사 일이라고 생각했다.“태광이는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요.”“설주 씨.”“결혼하면 비밀 없이 살자고 했거든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전부 숨겼네요.”나는 애써 웃었다.“웃기죠? 이제 와서 죽은 사람한테 화를 내는 게.”무겸은 내 앞에 따뜻한 물을 내려놓았다.“화내셔도 됩니다.”“뭘 알고 그런 말을 해요?”생각보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그는 대답하지 않았다.“미안해요. 무겸 씨한테 화낼 일은 아닌데.”“괜찮습니다.”“자꾸 괜찮다고 하지 마요.”그가 나를 바라봤다.“난 하나도 안 괜찮으니까.”참고 있던 눈물이 결국 떨어졌다.태광이 죽은 뒤에도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그런데 이상하게 무겸 앞에서는 감정이 쉽게 무너졌다.그가 손수건을 내밀었다.“억지로 참지 마십시오.”나는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무겸 씨는 왜 이렇게 다정해요?”“다정한 사람은 아닙니다.”“그럼 왜 나한테만 그래요?”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시선이 마주쳤다.무겸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저도 그 이유를 생각하고 있습니다.”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나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잠시 후 무겸이 컴퓨터에서 오래된 이메일을 열었다.“설주 씨에게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뭔데요?”“세온아트컨설팅에서 보낸 감정 의뢰입니다.”나는 화면을 확인했다.발신일은 태광이 사망하기 6일 전이었다.메일에는 작품을 직접 확인하기 전에 감정 결과를 먼저 확정해 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었다.“이게 무슨 말이에요?”“진품이라는 확인서를 먼저 작성해 달라는 뜻입니다.”“그럼 그림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네요?”“적어도 정상적인 감정 절차는 아니었습니다.”나는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마지막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요청하신 별도 자문료는 지급 가능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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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당신을 믿고 싶은 이유

“그 사람들이 왜 이태광 씨의 입을 막으려 했는지 알 수 있는 대화입니다.”강무겸의 말을 듣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나는 맞은편에 앉은 박연호를 바라봤다.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박연호 씨. 회의 영상 전체를 보여주세요.”“이미 보셨잖습니까.”“일부만 봤죠. 앞뒤 내용까지 확인하겠다는 거예요.”박연호의 미소가 사라졌다.“강무겸 씨한테 물어보시면 되겠네요.”“그럴 생각이에요. 하지만 이 영상도 경찰에 제출해 주세요.”나는 담당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박연호가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채설주 씨, 지금 저를 범인 취급하는 겁니까?”“아니요. 증거를 확인하자는 거예요.”“그 남자가 뭐라고 하든 믿겠다는 겁니까?”나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믿을지 말지는 제가 결정해요.”그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왔다.◇건물 밖에는 강무겸이 기다리고 있었다.나를 발견한 그가 다가왔다.“괜찮습니까?”“아니요.”나는 걸음을 멈췄다.“무겸 씨, 나한테 또 숨긴 게 있었잖아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맞습니다.”“어제 분명히 말했죠. 중요한 건 전부 알려 달라고.”“제가 잘못했습니다.”“왜 그랬어요?”“그 회의에서 오정민 씨와 박연호 씨가 제게 부당한 감정을 요구했습니다. 그 사실은 말씀드렸지만 직접 만났던 일까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렇게 잘해줬어요?”무겸이 잠시 말을 멈췄다.“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나한텐 별개가 아니에요.”목소리가 떨렸다.“태광이도 나한테 중요한 걸 숨겼어요. 난 그 사람을 믿었고요. 그런데 무겸 씨까지 그러니까…….”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무겸이 한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설주 씨를 속이려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신뢰를 깨뜨린 건 제 책임입니다.”나는 고개를 숙였다.화를 내고 싶은데 그의 사과가 마음을 흔들었다.“녹음 들려줘요.”“여기서요?”“네. 지금 확인하고 싶어요.”◇무겸의 차 안에서 녹음 파일을 재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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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흔들리는 마음의 경계

“오늘은 사건 이야기 안 하기로 했잖아요.”강무겸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딱 하나만 물어볼게요.”“벌써 세 번째입니다.”“그렇게 많았어요?”“네. 첫 번째는 감정서, 두 번째는 거래대금, 이번에는 뭡니까?”나는 멋쩍게 웃었다.“이태광이 처음부터 거래에 가담했을 가능성이요.”무겸이 나를 조용히 바라봤다.“설주 씨.”“네.”“지금 식사하는 남자가 누군지는 알고 계십니까?”“강무겸 씨잖아요.”“그런데 계속 다른 남자 이야기만 하시네요.”순간 젓가락을 쥔 손이 멈췄다.“질투해요?”그가 물잔을 내려놓았다.“조금은요.”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죽은 사람한테도 질투해요?”“그 사람이 설주 씨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압니다. 그래도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저도 조금은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차갑고 무서운 남자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은 그가 웃는 모습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렸다.“무겸 씨.”“네.”“나 아직 준비 안 됐어요.”그의 미소가 옅어졌다.“알고 있습니다.”“태광이가 죽은 지 1년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한테 설레는 게…….”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무겸은 재촉하지 않았다.“죄책감이 들어요.”“저 때문에요?”“무겸 씨 잘못은 아니에요.”나는 손가락으로 컵 가장자리를 문질렀다.“태광이를 사랑했던 마음이 진짜였는데, 무겸 씨한테 끌리는 마음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그의 시선이 깊어졌다.잠시 후 무겸이 말했다.“저는 태광 씨를 대신할 생각이 없습니다.”“…….”“설주 씨가 그 사람을 사랑했던 시간까지 지우고 싶지도 않고요.”가슴이 먹먹해졌다.“그럼 뭘 원하는데요?”“앞으로 설주 씨가 저와 함께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면 좋겠습니다.”나는 고개를 숙였다.이 남자는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흔드는 걸까.◇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우리는 차를 세워 둔 곳까지 천천히 걸었다.“무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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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랑과 의심 사이

“오정민 씨를 직접 만나려고요.”내 말을 들은 강무겸은 잠시 침묵했다.“약속은 잡으셨습니까?”“네. 오늘 오후 2시요.”“혼자 가실 생각이었습니까?”“처음에는요.”무겸의 표정이 굳어졌다.“왜 저한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어제 무겸 씨한테 화냈잖아요. 또 같이 가자고 하기가 좀 그랬어요.”“설주 씨.”“네?”“서운한 일과 사건 조사는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무겸 씨도 화났었어요?”“화보다는 속상했습니다.”솔직한 대답에 마음이 찔렸다.“미안해요.”“사과받으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그가 내 앞에 섰다.“함께 가도 되겠습니까?”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대신 오늘 질문은 제가 할게요.”무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하십시오.”◇오후 2시.오정민은 약속 장소인 재단 상담실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그는 우리를 보자 표정부터 굳혔다.“강 감정사님까지 오셨군요.”나는 맞은편에 앉았다.“제가 부탁했어요.”“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셨습니까?”나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이태광이 작성했다는 최초 확인서 때문이에요.”오정민의 시선이 서류에 머물렀다.“이미 경찰에 제출한 자료입니다.”“알아요. 그래서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요.”“무엇을 말입니까?”“태광이가 왜 작품 등록 정보 변경에 동의했는지요.”오정민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이태광 씨도 거래 당사자였습니다. 처음부터 내용을 알고 있었어요.”“어떤 내용이요?”“작품 3점을 묶어서 관리번호를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그럼 작품을 바꿔치기하는 것도 알고 있었나요?”그의 얼굴이 굳었다.“말을 조심하셔야겠습니다.”나는 물러서지 않았다.“가짜 감정서가 발견됐어요. 제 이름으로 작성된 동의서도 있었고요. 그게 정상적인 거래예요?”오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태광이는 사망하기 하루 전에 이의를 제기했어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죠?”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처음에는 단순한 등록 정리라고 생각했겠죠.”“그런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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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지우려던 이름

‘설주 이름은 빼.’나는 계약서 뒷면에 남은 글씨를 한참 바라봤다.이태광의 필체였다.3년 동안 함께하면서 수없이 봤던 글씨. 마지막 획을 길게 빼는 버릇까지 똑같았다.“태광이는 저를 지키려고 했던 걸까요?”강무겸이 내 옆에 앉았다.“적어도 설주 씨 이름이 거래에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그런데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을까요?”“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나는 계약서를 접었다.“정말 이상해요. 태광이를 미워해야 할지, 그리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무겸은 잠시 내 얼굴을 바라봤다.“둘 다 하셔도 됩니다.”“그렇게 간단해요?”“사람 마음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으니까요.”그의 말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나는 고개를 돌렸다.“무겸 씨는 너무 침착해서 가끔 얄미워요.”“그럼 앞으로 조금 덜 침착해 보겠습니다.”“그게 마음대로 돼요?”“설주 씨 앞에서는 이미 잘 안 됩니다.”나는 그를 돌아봤다.무겸이 웃고 있었다.그 미소를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 무겁던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우리는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태광이 남긴 메모 바로 위에는 초상화의 모델 동의에 관한 항목이 있었다.나는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었다.“여기요. 작품 판매에 모델이 동의했다는 부분.”“네.”“그럼 제 동의가 없으면 거래에 문제가 생기는 거죠?”“초상권 사용 범위와 계약 내용에 따라 다르지만, 서명이 위조됐다면 분명히 다툴 수 있습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경매장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할래요.”무겸도 일어났다.“제가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아니요. 이번에는 제가 직접 할게요.”그가 나를 바라봤다.“무겸 씨는 옆에서 확인만 해줘요. 내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니까.”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경매장에 도착한 나는 담당 직원에게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제 동의 없이 제작되고 거래에 이용된 초상화입니다. 서명 위조 정황도 경찰에 신고했어요.”직원은 자료를 확인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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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죽은 약혼자의 마지막 선택

“그날 이태광이 왜 거래를 취소하려 했는지 알고 싶어요.”내 질문에 오정민의 표정이 굳어졌다.우리는 서원미술관 재단 상담실에서 다시 마주 앉아 있었다.“이미 경찰에 전부 설명했습니다.”“그럼 저한테도 설명해 주세요.”“채설주 씨, 이 사건에 너무 깊이 관여하시는 것 아닙니까?”나는 가방에서 계약서 사본을 꺼냈다.“제 이름으로 동의서를 위조한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오정민은 입을 다물었다.“태광이가 거래를 취소하려고 했던 이유, 정확히 뭐예요?”한참 뒤 그가 대답했다.“처음에는 이태광 씨도 동의했습니다. 작품 등록번호를 통합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으니까요.”“그런데요?”“실제 작품과 서류에 적힌 작품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그걸 누가 바꿨는데요?”“그건 저도 모릅니다.”“또 모른다고요?”목소리가 높아졌다.오정민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채설주 씨는 이태광 씨가 피해자라고만 생각하시겠죠.”“무슨 뜻이에요?”“그 사람도 처음에는 수수료를 받으려고 했습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알아요. 계약서 봤어요.”“그럼 왜 계속 저만 추궁합니까?”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태광이가 잘못했다면 그것도 밝혀야죠. 하지만 그렇다고 죽어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오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리고 그 사람이 죽은 다음 날, 이의신청을 철회한 사람은 당신이잖아요.”그의 손이 멈췄다.“왜 그랬어요?”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제가 처리했습니다.”나는 숨을 삼켰다.“태광이 이름으로요?”“재단이 문을 닫기 전에 거래를 정리해야 했습니다.”“사람이 죽었는데 서류부터 정리했다고요?”“그 일이 살인 사건으로 번질 줄은 몰랐습니다.”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적어도 당신이 뭘 숨겼는지는 알겠네요.”◇상담실을 나온 나는 강무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정민 만났어요.”“어떻게 됐습니까?”“이의신청을 자기가 철회했다고 인정했어요.”“중요한 진술이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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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진짜 그림, 진짜 마음

“설주 씨, 어제 일은 후회하지 않습니까?”강무겸의 질문에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그의 작업실에서 마주 앉은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얼굴이 뜨거워졌다.“어제 일이라면…….”“입맞춤 말입니다.”“그렇게 대놓고 말해야 해요?”무겸이 희미하게 웃었다.“다른 뜻으로 알아들으실까 봐요.”“후회 안 해요.”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런데 우리 관계가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아서 조금 무서워요.”“저도 조심스럽습니다.”“무겸 씨도요?”“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나는 괜히 책상 위 서류를 집어 들었다.“그럼 오늘은 그림부터 확인해요.”“또 도망가시는군요.”“도망 아니거든요.”무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우리는 이태광의 수첩과 '밤의 창' 감정 기록을 나란히 펼쳤다.“태광이가 원본은 팔지 않았다고 적었잖아요.”“네. 실제 작품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무겸은 과거 자신이 촬영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어두운 방 안에 창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창밖에는 희미한 달빛이 비쳤다.“생각보다 예쁘네요.”“제가 처음 감정했을 때도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그런데 왜 가짜를 만들었을까요?”“진품을 따로 보관한 채 복제품을 거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나는 사진을 확대했다.“잠깐만요. 여기 창문 아래에 작은 흠집이 있어요.”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존 상태 보고서에 기록된 손상입니다.”“그럼 이 흔적이 있으면 진짜인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겠네요.”“맞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요.”그때 무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담당 형사였다.운송업체 보관 창고에 남아 있던 작품 상자 3점을 확보했다는 연락이었다.무겸은 전화를 끊고 나를 바라봤다.“작품 확인을 요청받았습니다.”나는 바로 가방을 챙겼다.“그럼 가요.”“설주 씨도요?”“당연하죠. 태광이가 남긴 단서잖아요.”◇오후 2시.경찰의 입회 아래 보관 창고에서 작품 확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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