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 남자는 내 약혼자를 죽인 용의자였다: Chapter 1 - Chapter 10

20 Chapters

[01]사라진 그림

결혼식을 열흘 앞두고 약혼자가 살해당했다.그의 시신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그날 이후 내 시간은 결혼식 열흘 전, 그 밤에 멈춰 있었다.◇“설주야, 나 오늘 늦어.”오후 9시 17분. 이태광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낮았다.“또 야근이야? 내일 웨딩홀 같이 가기로 했잖아.”“알아. 오늘 중요한 사람만 만나고 갈게.”“누군데?”“만나고 나서 설명할게.”수화기 너머로 발소리가 들렸다. 이어 낯선 남자가 말했다.“이태광 씨, 준비됐습니다.”태광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통화였다.오후 11시 42분,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다.태광이 도시 외곽의 폐관한 미술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것이었다.미술관 앞에는 경찰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나는 출입 통제선을 붙잡고 외쳤다.“이태광 약혼녀예요! 어디 있어요?”형사는 태광이 2층 비공개 전시실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얼굴만이라도 보여 달라고 매달리던 순간, 전시실 문이 열렸다.경찰관 사이로 키 큰 남자가 걸어 나왔다.하늘색 셔츠에 검은 슬랙스. 걷어 올린 오른쪽 소매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저 사람 누구예요?”“현장에 함께 있던 분입니다. 조사 중이고요.”나는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당신이 태광이 죽였어요?”남자는 피 묻은 팔을 내려다보더니 나와 눈을 맞췄다.“죽이지 않았습니다.”“그럼 그 피는 뭔데요?”“살리려고 했습니다.”“그런데 왜 죽었는데!”경찰이 나를 말렸다. 남자는 끝내 변명하지 않았다.“이름이 뭐예요?”“강무겸입니다.”나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 새겼다.다시는 볼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언젠가 반드시 다시 찾아내겠다고 다짐했다.수사 과정에서 미술관의 CCTV가 20분간 꺼졌고, 전시실의 그림 한 점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무겸을 범인으로 단정할 증거는 없었다. 그는 풀려났고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정확히 1년 뒤, 발신인 없는 봉투가 내 사무실로 도착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Read more

[02]나를 그린 사람

“그림 속 여자가 저라고요?”나는 강무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지금 장난해요?”“사진을 자세히 보십시오.”그가 휴대전화를 내 쪽으로 돌렸다.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거울에 비친 얼굴은 분명 나와 닮아 있었다.하지만 이상했다.“잠깐만요.”나는 사진을 확대했다.여자의 왼쪽 손목에 얇은 흉터가 있었다.나에게도 같은 위치에 흉터가 있었다. 어린 시절 뜨거운 물에 데인 흔적이었다.“어떻게 이걸…….”“아는 사람이 그린 그림입니까?”“아니요. 전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한 적 없어요.”무겸이 사진을 내려놓았다.“그렇다면 누군가 채설주 씨 몰래 제작했다는 뜻이군요.”그때 휴대전화가 다시 진동했다.발신인은 이태광.‘아직도 그 남자랑 있어?’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돌아봤다.북카페에는 손님 4명이 있었다. 창가에 앉은 커플과 노트북을 보는 남자, 계산대 앞의 여자.누가 메시지를 보내는지 알 수 없었다.“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좋겠습니다.”예상 밖의 반응이었다.“말리지 않네요?”“말릴 이유가 없으니까요.”“당신도 조사받을 수 있어요.”“이미 1년 전에 충분히 받았습니다.”나는 그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정말 태광이를 죽이지 않았어요?”무겸의 표정이 굳었다.“그 질문에는 이미 대답했습니다.”“그럼 그날 왜 미술관에 있었어요?”그가 휴대전화를 꺼냈다.“이태광 씨가 저를 불렀습니다.”화면에는 1년 전 받은 이메일이 있었다.발신인은 이태광.제목은 '미술품 감정 의뢰'.“저는 미술품 감정 일을 합니다. 이태광 씨가 그림의 진위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그게 사라진 그림이에요?”“네.”“왜 하필 당신한테요?”“제게 감정을 의뢰했던 고객의 소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나는 이메일 내용을 읽었다.'원본을 직접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그림 때문에 만났다는 거네요.”“그렇습니다.”“그런데 왜 태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Read more

[03]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우리가 처음 만난 날도 내가 정한 거야.’나는 휴대전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죽은 이태광의 번호로 도착한 문자.그것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누군가 계획했다는 내용이었다.“채설주 씨.”강무겸이 나를 불렀다.“그 문자, 답장하지 마십시오.”“왜요?”“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줄 필요는 없습니다.”나는 곧바로 메시지를 캡처했다.“답장은 안 해요. 대신 경찰에 제출할 거예요.”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확인할 게 있어요.”나는 사진 속 그림을 가리켰다.“이 그림이 태광이와 만나기 전에 제작됐다면, 태광이는 처음부터 저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잖아요.”“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그럼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부터 확인해야겠네요.”나는 가방을 챙겼다.무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디였습니까?”“액자 수리점이요.”◇태광을 처음 만난 건 3년 전이었다.당시 나는 오래된 가족사진의 액자가 깨져 수리점을 찾았다.그곳에서 태광은 내 옆에 서 있었다.“이 사진, 오래됐네요.”처음 건넨 말이었다.나는 낯선 남자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짧게 대답했다.“네.”그런데 수리점 주인이 액자를 고치는 동안 태광은 계속 말을 걸었다.“혹시 근처에 사세요?”“왜요?”“저도 이 동네에 처음 왔거든요.”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커피 한 잔으로 이어졌다.그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태광이가 일부러 거기 왔을 수도 있어요.”차에 올라타며 내가 말했다.무겸은 안전벨트를 매고 대답했다.“그렇다면 누가 두 사람의 만남을 준비했는지 확인해야겠죠.”“태광이가 직접 했을 수도 있잖아요.”“맞습니다. 아직 어느 쪽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태광과 함께했던 시간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그가 먼저 고백했던 날.결혼하자고 청혼했던 날.행복하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전부 의심스러워졌다.◇수리점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어서 오세요.”카운터에 앉아 있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Read more

[04] 내 이름으로 된 동의서

'대상자 관찰 기록용.'나는 종이에 적힌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이게 무슨 뜻이에요?”강무겸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누군가 채설주 씨를 관찰하기 위해 그림을 제작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그럼 태광이가 저를 감시했다는 거예요?”“아직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나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그 사람은 3년 동안 제 옆에 있었어요. 결혼까지 약속했다고요.”함께 밥을 먹고, 여행을 가고, 미래를 이야기했다.그런데 그 모든 시간이 누군가의 계획이었다면?“설주 씨.”무겸이 처음으로 내 이름을 짧게 불렀다.“지금은 감정보다 증거가 먼저입니다.”“당신은 쉽겠죠.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니까.”내 말에 그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그는 종이의 오른쪽 아래를 가리켰다.작은 관리번호가 인쇄되어 있었다.SW-204-17.“서원미술관에서 사용하던 작품 관리번호와 형식이 같습니다.”“확실해요?”“감정 의뢰를 받았을 때 관련 자료를 확인했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그럼 당시 자료도 가지고 있겠네요?”“일부는요.”“보여줘요.”무겸은 잠시 망설이다 휴대전화를 꺼냈다.◇그가 보여준 것은 이태광에게 받았던 감정 의뢰서였다.작품명은 '거울 앞의 여자'.의뢰 목적은 진품 여부 확인.그리고 의뢰서 하단에는 이상한 문장이 있었다.'작품 소유권 관련 분쟁으로 모델의 신원 확인이 필요함.'“소유권 분쟁이요?”“그림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2명 있었습니다.”“누구였는데요?”“이태광 씨와 신원을 밝히지 않은 다른 사람입니다.”나는 화면을 확대했다.“그 사람 이름도 몰라요?”“태광 씨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그런데 감정 의뢰를 받아줬다고요?”“그림 자체를 확인하는 일과 소유권 분쟁은 별개니까요.”그의 설명은 차분했다.나는 다시 액자를 바라봤다.평범한 가족사진이라고 생각했던 물건이었다.그런데 뒷면에는 미술관 관리번호가 붙어 있었고, 안쪽에는 나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Read more

[05] 경매장에 걸린 얼굴

“동의서에 적힌 번호가 제 번호입니다.”강무겸의 말을 듣는 순간 걸음이 멈췄다.“그게 무슨 뜻이에요?”“3년 전에도 사용하던 번호입니다.”“그때는 태광이를 몰랐다면서요.”“몰랐습니다.”“그런데 왜 제 동의서에 당신 번호가 있어요?”무겸은 잠시 침묵했다.“당시 서원미술관의 작품 목록을 검토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담당자에게 연락처를 남겼습니다.”“그럼 미술관과 관련이 있었던 거네요?”“네. 하지만 이태광 씨와는 별개입니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이상하네요. 당신은 계속 사건과 관련된 곳에 있었는데 정작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잖아요.”“의심하셔도 됩니다.”“당연히 의심하죠.”“대신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뭘요?”“사라진 그림이 경매에 나왔습니다.”◇오후 4시.나는 무겸과 함께 서울의 한 미술품 경매장을 찾았다.전시장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유리문 너머로 수십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작품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이런 곳은 처음이에요.”“불편하시면 말씀하십시오.”“불편한 건 아니에요. 그림 하나 사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게 신기해서요.”무겸이 희미하게 웃었다.“그림을 보러 오는 사람도 있고, 돈을 보러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강무겸 씨는요?”“저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보러 옵니다.”“직업병이네요.”“그런 편입니다.”처음이었다.이 남자와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나눈 것은.나는 괜히 어색해져 앞쪽으로 걸었다.“그림은 어디 있어요?”“안쪽 전시실입니다.”무겸은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따라왔다.전시실 끝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거울 앞에 서 있는 모습.분명 사진에서 봤던 그림이었다.“저거예요.”나는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작품명은 '붉은 방'.기존에 확인했던 '거울 앞의 여자'와 달랐다.“제목이 바뀌었네요?”“경매에 출품하면서 바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그런 것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요?”“소유자가 변경한 제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Read more

[06] 그림 밑에 숨겨진 것

“위탁자를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강무겸이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뭐래요?”“내일 오전 11시에 경매장 상담실로 오랍니다.”나는 곧바로 휴대전화 일정에 시간을 적었다.“잘됐네요. 그 사람이 태광이에게 그림을 팔았다면 제작 과정도 알겠죠.”“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왜요?”“미술품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칩니다. 판매자가 작품의 제작 과정까지 아는 경우는 드뭅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강무겸 씨는 꼭 기대하려고 하면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하네요.”그가 잠시 웃었다.“괜한 기대를 드리고 싶지 않아서요.”“그래도 가능성은 있잖아요.”“있습니다.”“그럼 그거면 됐어요.”무겸은 내 앞에 놓인 식사를 가리켰다.“일단 드십시오. 다 식겠습니다.”그제야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강무겸 씨도 먹어요.”“저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왜요?”“혼자 먹기 미안해서요.”나는 뜻밖의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사건 이야기를 하면서 웃게 될 줄은 몰랐다.◇다음 날 오전 11시.경매장 상담실에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그는 자신을 개인 미술품 중개인이라고 소개했다.“이태광 씨와 거래하신 분이 맞습니까?”내 질문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2023년에 작품 하나를 팔았습니다.”“그림 제목이 뭐였죠?”“푸른 정원입니다.”나는 무겸과 눈을 마주쳤다.“붉은 방이 아니고요?”“그건 처음 듣는 제목인데요.”남자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당시 거래 명세서와 작품 사진입니다.”사진에는 파란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풍경화가 담겨 있었다.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이게 태광 씨에게 팔았던 그림이라고요?”“틀림없습니다.”무겸이 사진을 자세히 살폈다.“캔버스 크기가 같습니다.”“맞아요. 그런데 그림은 완전히 다르잖아요.”중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경매 목록을 보고 놀랐습니다. 작품 관리번호는 같은데 그림이 바뀌어 있었거든요.”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작품번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Read more

[07] 복원가가 숨긴 진실

“복원 작업을 맡았던 분과 연락이 닿았습니다.”경매장 직원의 말에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만날 수 있대요?”“오늘 오후 3시 이후에 가능하다고 합니다.”“주소 알려주세요.”강무겸이 옆에서 물었다.“복원가가 직접 만나겠다고 했습니까?”“네. 다만 작품 관련 자료를 가져오라고 하셨어요.”나는 가방에 넣어 둔 서류를 확인했다.“충분하겠네요.”경매장을 나서자 무겸이 차 열쇠를 꺼냈다.“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점심부터 드시겠습니까?”“또 밥부터 먹자고요?”“아침도 안 드셨잖습니까.”나는 그를 돌아봤다.“그걸 어떻게 알아요?”“아까 배에서 소리가 났습니다.”“강무겸 씨!”그가 웃음을 참으며 차 문을 열었다.“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나는 민망해서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이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와 분위기가 꽤 달랐다.차갑고 무표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끔 이렇게 능청스럽게 굴었다.◇점심을 먹은 뒤 도착한 곳은 오래된 상가 건물이었다.3층에 있는 작은 복원 공방에는 캔버스와 액자가 가득했다.“경매장에서 연락받고 오셨죠?”작업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 우리를 맞았다.나는 먼저 명함을 건넸다.“채설주입니다. 서원미술관 작품 때문에 왔어요.”여자는 강무겸을 알아봤다.“강 감정사님이시네요.”“오랜만입니다.”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자 조금 의아했다.“서로 아는 사이예요?”“전에 복원 작업을 함께한 적 있습니다.”무겸이 설명했다.여자는 우리를 작업대 앞으로 안내했다.“어떤 작품인지 보여주시겠어요?”나는 사진과 거래 명세서를 꺼냈다.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안경을 고쳐 썼다.“이 그림이 왜 경매에 나왔죠?”“아시는 작품인가요?”“제가 작업했던 액자예요.”“그림은요?”여자가 고개를 저었다.“그림은 다릅니다.”나는 무겸과 눈을 마주쳤다.“무슨 뜻이에요?”여자는 서랍에서 작업 기록을 꺼냈다.“2025년 8월에 이태광 씨 이름으로 의뢰가 들어왔어요. 오래된 풍경화의 액자를 수리해 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Read more

[08] 장례식에 찾아온 남자

“이 사람…… 저 만난 적 있어요.”강무겸이 내 휴대전화를 바라봤다.“언제입니까?”“태광이 장례식장에서요.”나는 사진 속 남자의 왼손을 확대했다.손등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분명 기억하고 있었다.장례식 마지막 날, 낯선 남자가 찾아왔었다.그는 영정사진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조문을 마친 뒤 내게 악수를 청했는데, 그때 손등의 흉터를 보았다.“태광 씨와 함께 일했던 사람입니다.”그가 했던 말이었다.“이름은 기억하십니까?”“잠깐만요.”나는 휴대전화 사진첩을 열었다.장례식을 마치고 보관해 둔 조문객 명단이 있었다.화면을 넘기던 손가락이 멈췄다.“찾았어요.”박연호.미술품 운송업체를 운영한다는 남자였다.무겸이 복원 공방에서 받은 인수증을 꺼냈다.수령인 역시 박연호였다.“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군요.”“가능성이 아니라 그 사람이에요. 직접 만나서 확인할 거예요.”나는 곧바로 인수증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다음 날 오전.박연호의 사무실은 작은 물류창고 옆에 있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나는 단번에 알아봤다.“박연호 씨 맞으시죠?”“네. 누구신데요?”“채설주입니다. 이태광 약혼녀요.”남자의 얼굴이 굳었다.“아…… 장례식장에서 뵀죠.”그는 강무겸에게도 시선을 옮겼다.“두 분이 같이 오실 줄은 몰랐네요.”무겸이 명함을 건넸다.“서원미술관 작품 운송 건으로 확인할 사항이 있습니다.”박연호는 한숨을 내쉬었다.“그 일은 경찰한테도 다 말했습니다.”나는 준비한 사진을 책상에 올렸다.“이 그림을 운송하셨죠?”“네. 제가 가져왔습니다.”“그런데 왜 태광이 시계를 차고 있었어요?”남자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봤다.지금은 다른 시계를 착용하고 있었다.“그건…….”“제가 선물한 시계예요. 뒷면에 이니셜까지 새겨져 있어요.”박연호는 잠시 망설였다.“태광 씨가 저한테 준 겁니다.”“왜요?”“운송비 대신 받았습니다.”나는 눈살을 찌푸렸다.“태광이가 돈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Read more

[09] 지하 수장고의 비밀

“서원미술관 출입 허가가 나왔습니다.”강무겸의 전화를 받은 건 다음 날 오전이었다.“정말요?”“담당 형사도 동행하기로 했습니다.”“그럼 바로 갈게요.”“설주 씨.”“네?”“아침은 드셨습니까?”나는 냉장고를 열다 말고 웃었다.“강무겸 씨는 제 식사 담당이에요?”“요즘 계속 거르시는 것 같아서요.”“먹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사실 커피 한 잔이 전부였다.하지만 오늘만큼은 밥보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이태광이 죽은 미술관.그곳에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그림이었다.◇오전 11시.1년 만에 다시 찾은 서원미술관은 여전히 을씨년스러웠다.무겸은 하늘색 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태광이 죽던 날과 비슷한 차림이었다.“설주 씨?”무겸이 나를 바라봤다.“괜찮습니까?”“그날 생각이 나서요.”그는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봤다.“옷 때문입니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무겸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그날 저도 무서웠습니다.”“당신도요?”“사람이 죽어 가는 걸 처음 봤으니까요.”나는 그를 올려다봤다.“그동안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했잖아요.”“변명처럼 들릴까 봐요.”그의 대답에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잠시 후 담당 형사가 도착했다.“지하 수장고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작품은 발견해도 직접 만지지 마세요.”우리는 안내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지하 수장고는 생각보다 넓었다.철제 선반마다 작품 보관 상자가 놓여 있었다.무겸은 손전등으로 선반 번호를 확인했다.“B-15, B-16…… 찾았습니다.”B-17.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형사가 관리 담당자에게 확인을 요청한 뒤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보호지로 감싼 캔버스가 들어 있었다.포장을 조심스럽게 걷어 내자 푸른색 풍경화가 모습을 드러냈다.“푸른 정원…….”나는 무겸을 바라봤다.“우리가 찾던 그림 맞죠?”“사진과 구도는 일치합니다.”무겸은 작품 뒷면을 살폈다.“서원미술관 소장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Read more

[10] 사라진 20분

“박연호 씨 차량이 사건 당일 미술관에 들어온 건 맞습니다.”담당 형사의 말에 나는 운송 기록을 다시 내려다봤다.“그럼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을까요?”“본인에게 확인해야죠. 출석 요청을 했습니다.”강무겸이 옆에서 물었다.“차량이 나간 시간도 확인됐습니까?”“오후 10시 29분입니다.”나는 시간을 계산했다.미술관 CCTV가 꺼진 시각은 오후 10시 6분.다시 작동한 시각은 10시 26분이었다.박연호의 차량은 그 20분 동안 미술관에 있었다.“그 사람이 뭔가 가져갔을 수도 있겠네요.”“그래서 적재 기록을 확보하려고 합니다.”형사는 장부를 챙겨 일어났다.“오늘은 여기까지 확인하시죠.”나는 쉽게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1년 동안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던 사건이었다.그런데 이제야 태광이 죽던 밤의 흔적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었다.◇경찰서를 나온 뒤 무겸과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나는 노트북을 펼쳐 그동안 확보한 자료를 정리했다.“뭐 하십니까?”“사건 순서 정리요.”“형사들도 하고 있을 텐데요.”“그 사람들한테만 맡기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나는 날짜별로 표를 만들었다.8월 21일. 그림 2점 미술관 반입.10월 24일. 이태광 사망.같은 날 오후 10시 4분. 박연호 차량 진입.오후 10시 6분. CCTV 녹화 중단.무겸이 맞은편에서 화면을 살폈다.“설주 씨.”“네?”“작품이 경매에 나온 날짜도 넣으십시오.”“아, 맞다.”나는 마지막 줄을 추가했다.“이렇게 보니까 그림이 계속 이동했네요.”“그래서 출처 기록이 중요합니다.”“강무겸 씨는 원래 이런 사건도 조사해요?”“미술품 위작 사건에 관여한 적은 있습니다.”“그럼 경험이 많겠네요.”“사람이 죽은 사건은 이번이 처음입니다.”그가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노트북에서 눈을 들었다.“그날 이후 많이 힘들었겠어요.”무겸은 잠시 나를 바라봤다.“설주 씨만큼은 아니었겠죠.”“힘든 걸 비교할 필요는 없잖아요.”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렇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Read more
PREV
12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