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남편은 호구랍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20 챕터

제11화. 내 애인 구경할래?

채아가 우혁의 손을 들어 올리자 태준의 무릎 위에 놓였던 코트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방금 아내는 남편 앞에서 다른 남자와 공개 연애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태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코트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는 것이었다.“우리 애기, 진짜 사람들이 다 아는 데서 만나려고?”“응. 왜, 창피해? 그럼 당신도 애인 하나 만들든가. 아, 안 되겠다. 당신은 나 없이 키스도 못 하잖아.”채아가 남편 턱을 손끝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태준은 그 손가락이 자기 입술에 닿을까 기다렸다가, 그녀가 손을 거두자 조용히 코트를 접었다. 우혁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태준을 노려봤다.“허락하신 거죠? 나중에 딴말하지 마십시오.”“허락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채아가 선택한 거니까요.”“우리 여보 착한 거 봐. 당신 얼굴로 태어나서 이렇게 호구짓하기도 쉽지 않은데.”채아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남편이 잡아 달라고 내밀었던 손으로 다른 남자 손을 잡고 있는데도 그는 따지지 않았다. 다만 코트 안감을 몇 번이나 펴는 걸 보니 서운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조금만 더 놀리면 드디어 질투 한마디쯤 들을 수 있겠지.민석은 휴대전화 메모장에 일정을 적다가 펜을 찾는 시늉만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진 유출 문제를 정리하던 자리였다. 상대가 돈을 거절하는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공개 데이트의 날짜와 장소를 자기 눈앞에서 정하게 될 줄은 몰랐다.“사모님, 이 관계가 언론에 노출되면 대표님뿐 아니라 회사 행사까지 영향을 받습니다.”“어머, 그러면 저도 연예인이야? 비서님, 내 기사 나오면 예쁜 사진으로 골라 줘.”“사진을 골라 드리는 일이 아닙니다.”“그럼 남편 사진 옆에 붙여 줘. 재벌은 내 남편이고, 남친은 내 남친이라고. 헷갈리지 않게.”민석이 길게 숨을 뱉었다. 태준은 그런 비서를 달래듯 어깨를 두드린 뒤 채아에게 물었다.“내일 몇 시에 나가? 아침에 비 온다는데.”“당신 마누라 데이트 시간표까지 외우려고? 여보, 진짜 나한테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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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회장님은 도시락 담당

“강우혁, 꺼. 내 얼굴로 방송하려면 출연료부터 내야지.”윤채아가 휴대전화를 낚아챘지만 화면에는 이미 낯선 사람들의 댓글이 쏟아지고 있었다. ‘진짜 차태준 대표 아내?’ ‘남편은 알고 있대?’ 웃는 얼굴로 시작한 공개 데이트가 고작 몇 초 만에 구경거리로 바뀌었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 서자 채아는 우혁의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엎어 놓았다.“공개 연애하자며.”“공개랑 생중계는 다르거든? 내 예쁜 얼굴을 공짜로 뿌려 놓고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우혁이 휴대전화를 다시 세웠다. 화면 속 채아의 표정이 그대로 송출되었다. 그녀는 화가 나면서도 카메라에 비친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정리했다. 남편에게 보낸 사진이 행사장에서 터졌을 때도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들진 않았다. 우혁은 제 옆에 채아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확인받고 싶은 얼굴이었다. 채아는 카메라 앞에 반지 없는 손을 내보였다. 접속자가 늘어날수록 목덜미가 근질거렸다.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저택의 기사가 보냉 가방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태준이 아침에 차에 실어 둔 물건이었다. 기사에게서 가방을 받은 채아는 리본 대신 단단히 묶인 손잡이를 내려다봤다. 지퍼 사이로 고소한 달걀 냄새가 새어 나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점심때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보온통도 안에 있습니다.”“와, 우리 여보. 남의 남자랑 데이트하러 나온 마누라 도시락까지 싸 줬어?”채아는 주변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뚜껑을 열었다. 반듯하게 썬 달걀말이, 간장에 조린 버섯, 한입 크기의 주먹밥이 칸칸이 담겨 있었다. 당근을 골라내는 아내를 위해 속재료까지 잘게 다져 넣었다. 밥 위에는 깨로 작은 하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채아가 웃으며 주먹밥을 집어 들자 우혁의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지금 나랑 있는 자리에서 그걸 먹겠다고?”“그럼 버려? 우리 여보 새벽부터 만들었을 텐데. 오빠도 하나 먹어 볼래? 돈 많은 남자가 손으로 뭉친 밥이야.”“나한테 모욕 주려고 가져온 거겠지.”“태준이는 그런 머리 못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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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마누라 사랑 공시

“아내 불륜은 사생활이라면서, 도시락은 왜 전 국민한테 공개하셨습니까?”질문이 떨어지자 태성그룹 주주 간담회장에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차태준을 바라봤다. 벽면 화면에는 전날 생중계에서 퍼진 사진이 떠 있었다. 채아의 도시락 뚜껑 안쪽, 태준이 직접 쓴 쪽지까지 확대되어 있었다.‘다음엔 내 앞자리에도 앉아 줘. 사랑해.’태준은 그 문장을 끝까지 읽었다. 밤새 누군가 덧붙인 조롱 문구보다, 아내에게만 보여 주려고 쓴 글씨가 낯선 사람들 앞에 놓였다는 사실이 더 쓰라렸다. 그는 마이크를 바로 놓고 자료집을 덮었다.“제 아내에게 쓴 쪽지입니다. 제가 썼고요.”앞줄 주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행사장에는 카메라가 없었으나 참석자들의 휴대전화 화면이 여기저기 켜졌다.“대표님이 그 여자 뒤치다꺼리에 돈을 얼마나 쓰는지 아십니까? 100억 증여설까지 돕니다. 주주 돈으로 애인들 입막음하시는 건 아닙니까?”뒷줄에서 술렁임이 번졌다. 박민석은 준비해 온 자료를 태준 옆에 밀었다. 회사 예산과 대표 개인 재산의 지출을 구분한 확인서, 내부 승인 내역, 외부 검토를 요청한 기록이었다. 태준은 흔들리는 물컵을 한쪽으로 치운 뒤 차분히 입을 열었다.“아내에게 준 돈은 제 개인 재산입니다. 회사 자금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개인 증여에 따른 신고와 세금은 별도로 처리하고 있고, 확인이 필요한 사항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검증받겠습니다.”“그렇다고 대표님 평판이 회사하고 무관합니까?”“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사생활로 회사 업무에 지장이 생긴 점은 제가 설명드리고 책임지겠습니다. 다만 직원과 회사의 돈을 아내 문제에 쓰지는 않았습니다.”태준은 문장 하나도 대충 넘기지 않았다. 투자 사업의 실적을 묻는 질문에는 숫자로 답했고, 계약 일정에는 담당 부서와 기한을 제시했다. 누군가 ‘호구 남편’이라는 말로 다시 웃음을 끌어내려 해도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았다. 아내를 욕하는 목소리에만 종이 가장자리를 쥔 손가락이 조금 굳었다.마지막 질문자는 도시락 쪽지가 경영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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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제 발로 들어갑니다

“내 입을 막겠다고? 어머, 이사회 양반들 나한테 반했어?”윤채아는 태준의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박민석의 말을 끝까지 듣고도 웃었다. 대외 활동을 제한하겠다는 요구라니, 남편의 애인을 공개적으로 만나지 말라는 소리였다. 거실에는 저녁으로 차린 수프가 식어 가고 있었고, 태준은 수저도 들지 못한 채 아내의 반응부터 살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긴급 안건이라는 붉은 글자가 떠 있었다. 채아는 그 아래 적힌 제 이름에 손가락을 얹었다. 회사를 경영하지도 않는 아내를 두고 이사들이 회의까지 연다는 게 우스웠다.“채아야, 이사회는 회사에 영향이 생기는 걸 걱정하는 거야. 자기를 집에 가두겠다는 뜻은 아닐 거야.”“그럼 나한테 직접 말하라고 해. 남의 남편 뒤에 숨어서 마누라 입단속시키지 말고.”채아는 민석에게 내일 회의 시간을 물었다. 민석은 사모님이 참석할 자리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벌써 옷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문을 열자 태준이 골라 준 드레스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붉은 원피스를 꺼내 몸에 대자 거울 뒤로 남편이 따라 들어왔다.“우리 애기, 거기 가면 속상한 말 많이 들을 텐데.”“그럼 당신이 옆에서 안아 줘. 나 울면 화장 고칠 시간도 주고.”“응. 그런데 억지로 사과할 필요는 없어. 자기가 잘못한 건 자기가 결정해서 책임지면 돼.”채아는 거울 속 남편을 바라봤다. 저렇게 순한 사람이 회사에서는 수많은 사람의 생계를 결정한다는 사실이 가끔 낯설었다. 그는 원피스 어깨에 묻은 실밥을 떼어 주고, 회의실이 추울까 봐 얇은 겉옷까지 챙겼다. 채아는 그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춘 뒤 씩 웃었다.“여보, 나 오늘 당신 팔아도 돼? 이렇게 착한 남편 자랑 좀 하게.”다음 날 태성그룹 본사 회의층은 정장 차림의 임원들로 분주했다. 채아가 굽 소리를 울리며 복도를 걸어오자 안내 직원이 당황해 몸을 굳혔다. 민석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를 막아섰다. 복도에 깔린 짙은 융단이 구두 소리를 삼켰다. 벽에 걸린 역대 회장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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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불륜 사진 경매

“의장님, 이 사진도 회사 자산으로 잡으실 거예요? 제 남편 망신값은 제가 받아야 하는데.”채아가 호텔 사진을 회의 탁자에 밀어 놓자, 이사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였다. 흐트러진 이불 위에 채아와 강우혁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누군가는 헛기침을 했고, 오혜진은 사진을 뒤집었다. 회의실 끝에 앉은 태준은 아내가 입고 온 얇은 원피스 어깨만 바라봤다. 냉방이 지나치게 셌다.“윤채아 씨, 이건 이사회에서 판단할 자료가 아닙니다.”“저 때문에 회의를 여셨잖아요. 그런데 당사자가 증거까지 가져오니까 싫으세요? 어머, 심사위원님들 눈이 아주 귀하네.”의장이 수행 직원에게 사진을 치우라고 손짓했다. 채아는 재빨리 사진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태준이 다가와 어깨에 겉옷을 걸쳐 주자 그녀는 사람들이 보란 듯 남편의 넥타이를 당겼다.“우리 여보, 이 사람들 앞에서도 나 예뻐?”“응. 근데 사진은 함부로 보여 주지 마. 자기 얼굴 모르는 사람 손에 넘어가는 거 싫어.”“바람피운 마누라보다 사진 뺏길까 봐 걱정하는 거야? 아주 사랑에 미쳤네.”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태준은 따라 웃지 않았다. 사진 속에서 아내가 웃는 이유를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채아는 그 얼굴을 보자 괜히 그의 손을 더 꼭 잡았다.오혜진은 흩어진 서류를 가지런히 모았다. 그녀는 태준의 경영 실적을 따로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채아가 이사회에 불륜 사진을 들고 온 행동까지 감싸지는 않았다. 채아는 그 말을 듣고도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을 꾸짖는 건 좋았다. 남편까지 싸잡아 무능하다고 부르는 것만 아니면 됐다.회의가 중단되자 민석이 두 사람을 옆 응접실로 안내했다. 민석은 복도로 나오자마자 보안 담당자에게 이사회에서 꺼낸 사진이 추가로 촬영되지 않았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휴대전화 두 대를 번갈아 붙잡고 있는 사이, 태준은 아내가 벗어 놓은 외투를 주워 팔에 걸었다.그곳에는 뜻밖에도 우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채아가 사진을 들고 본사에 왔다는 연락을 듣고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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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그날 밤의 빈방

“오후 4시 17분? 내가 아침에 보낸 불륜 사진에 왜 오후 시간이 찍혀 있어?”채아는 민석의 휴대전화를 빼앗듯 받아 들었다. 화면 속 디지털 시계는 분명 16:17을 가리켰다. 호텔 침대에 기대 웃고 있는 자신과 우혁의 얼굴은 익숙했지만, 사진을 찍었던 순간만큼은 선명하지 않았다. 전날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두 사람은 같은 객실에 있었고, 채아는 가장 남편을 약 올릴 만한 사진을 골라 보냈을 뿐이었다.“사모님, 사진을 전송한 시각과 촬영한 시각은 다릅니다. 우선 호텔 기록부터 확인해야 합니다.”“그럼 내 기억력이 나쁘다는 거야? 비서님, 내가 예쁘다고 머리까지 장식품인 줄 알아?”“그런 뜻 아닙니다. 그리고 사진을 확보한 경로도 확인해야 합니다.”우혁은 응접실 끝에 서서 팔짱을 꼈다. 조금 전까지 사진을 내놓으라며 채아를 몰아붙이던 남자가 시계 숫자 앞에서는 말을 아꼈다. 채아는 일부러 그에게 휴대전화를 들이밀었다.“오빠, 우리 오후에도 사진 찍었어? 나랑 놀기 바빠서 시간 가는 줄 몰랐나 봐?”“내가 그날 날짜까지 외워야 해?”“어머, 연애는 해 놓고 기억은 남편한테 외주 줬어?”태준은 채아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가 흔들리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그는 시계보다 사진 가장자리를 오래 살폈다. 아내가 실제로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자기에게 보낸 사적인 사진이 행사장 화면까지 흘러간 과정에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자기야, 그 사진 직접 보낸 건 맞지?”“맞아. 다른 남자랑 잔 것도 맞고. 나 그거 거짓말한 적 없어. 그런데 왜 당신은 자꾸 내가 억울한 일 당했는지만 걱정해?”“자기가 한 선택이랑 남이 사진 퍼뜨린 건 다른 일이니까.”태준은 아내를 바라보다 손끝으로 사진에 묻은 지문을 닦았다. 채아가 웃고 있는 얼굴 옆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속상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사진을 몰래 퍼뜨릴 수 있다면 다음에는 무엇을 빼앗길지 몰랐다. 태준은 화가 나도 아내에게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을 삼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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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내 돈으로 혼나줘

“여보, 나 좀 혼내 봐. 당신 마누라가 딴 남자랑 호텔에 갔는데 방에 누가 더 있었는지도 모른대.”채아가 서재 책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민석이 확대해 놓은 사진에는 장식장 유리에 비친 손과 휴대전화 모서리가 남아 있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자신인데 정작 촬영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혁은 객실에 둘만 있었다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전화를 받겠다며 나갔고, 돌아오지 않았다.“태준 씨, 호텔 측 회신이 오기 전까지 자료를 보존하겠습니다. 상대방 신원은 추측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민석이 태블릿을 챙겼다. 태준은 아내가 보고 있던 사진을 가린 뒤 서류를 건넸다. 민석은 호텔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우혁과 주고받은 연락도 그대로 보관해 달라고 요청했다. 채아는 제 연애 기록까지 증거가 되는 게 우스워 투덜댔지만, 태준이 원본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자 휴대전화에서 손을 뗐다. 잠시 후 문이 닫히자 서재에는 오래된 시계가 움직이는 소리만 남았다. 채아는 굳은 얼굴의 남편을 내려다봤다. 이번만큼은 그가 화를 낼 것 같았다.“왜, 드디어 질투 나? 나한테 소리라도 질러 봐. 내가 얼마나 예쁜 죄인인지 재판해 보라고.”“자기가 위험한 상황에 있었을지도 모르잖아.”“그 얘기 말고! 내가 바람피운 거. 그걸로 혼내 달라고.”태준은 책상 모서리에 걸쳐 있던 아내의 구두를 바닥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발을 내딛기 좋도록 코앞에 돌려놓는 손길이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채아는 일부러 구두를 신지 않았다. 남편이 자기를 붙들어 줄 이유 하나쯤 남겨 두고 싶었다.“내가 우혁 오빠랑 또 만난다고 하면?”“싫어.”이번에는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채아는 눈을 깜빡였다.“어머, 우리 호구 고장 났네. 한 번 더 해 봐.”“싫어, 채아야. 자기가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걸 보면 속상해. 사진이 퍼졌을 때는 무섭기도 했어.”태준은 말을 마치고 입술을 다물었다. 아내가 웃어넘길까 봐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채아는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기려다 멈췄다. 장난을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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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열두 통의 전화

“여보, 열두 번이나 전화하면 내 몸에 위치추적기라도 달리는 줄 알아?”윤채아는 울리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열두 번째 부재중 전화였다. 강우혁이 알려 준 약속 장소는 강변의 작은 라운지였고, 창밖에는 늦은 비가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우혁은 나타나지 않았다. 호텔 사진에 비친 세 번째 사람 이야기를 해 주겠다더니, 답장도 없었다. 라운지 입구에는 늦은 손님을 기다리는 직원 하나만 남아 있었다. 채아는 잔에 남은 얼음을 포크로 건드렸다.처음 전화가 왔을 때는 태준이 걱정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다섯 번째에는 자신이 얼마나 보고 싶은지 궁금했고, 열 번째쯤에는 이쯤 했으면 남편이 화라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화면에 쌓인 메시지는 하나같이 싱거웠다.‘자기야, 어디야? 데리러 갈게.’‘비 많이 와. 운전하지 말고.’‘혼내는 거 아니야. 무사한지만 알려 줘.’채아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입술을 삐죽였다. 겨우 약속 하나 어겼다고 저렇게 애걸하는 남자가 또 있을까. 오늘 아침에도 구두끈을 매 주며 자기 발목만 걱정하던 사람이었다.“아유, 이 호구. 나한테 화내랬지 누가 사랑 고백 열두 번 하랬어?”그 시각 태준은 운전대를 잡고 도심을 돌고 있었다. 아내가 집을 나설 때 입었던 옷과 구두를 기억하고, 평소 들르던 카페부터 우혁과 만났던 호텔 앞까지 확인했다. 기사가 쉬는 시간이어서 직접 차를 몰았다. 와이퍼가 빗물을 밀어 낼 때마다 신호등 불빛이 길게 번졌다.민석의 전화가 차량 스피커로 울렸다.“대표님, 사모님 성인이십니다. 연락이 안 된다고 무작정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어디 계신지만 확인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알아요. 그런데 채아가 오늘 우혁 씨한테 사진 얘기를 들으러 간다고 했어요. 누가 그 방에 있었는지도 모르잖아요.”“그렇다고 대표님이 위험해지시면요?”태준은 대답 대신 속도를 줄였다. 채아가 연락 한 번만 해 줬으면 곧장 돌아갈 생각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내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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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울지 마, 여보

“강우혁, 네가 왜 내 남편 침대 옆에 있어?”채아는 응급실 문을 밀어젖힌 채 멈춰 섰다. 흰 커튼 사이로 소독약 냄새가 번졌고, 침상에 앉은 태준의 이마에는 거즈가 붙어 있었다. 오른쪽 손목까지 붕대로 감긴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아까까지 목에 걸렸던 욕설이 사라졌다. 열두 통의 전화를 거절한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다친 건 태준이었다.우혁은 침상 곁에서 휴대전화를 내렸다. 채아가 어디서 소식을 들었느냐고 따지자 그는 자신도 사고 소식을 듣고 왔다는 말만 했다. 사진 속 세 번째 사람에 관한 약속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채아는 그를 더 추궁하려다 침대 위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태준이 몸을 일으켰다. 침대 아래 놓인 슬리퍼를 찾다가 다친 손을 짚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우리 애기, 왔어? 비 맞았어?”“지금 그게 중요해? 당신 손은 왜 저래!”채아가 다가가자 태준은 멀쩡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젖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손바닥을 펼쳐 보더니 가방 끈에 눌려 붉어진 손가락을 하나씩 만졌다. 간호사가 확인해 준 자신의 상처보다 아내의 작은 자국에 더 놀란 표정이었다.“손이 이렇게 차가운데 장갑은? 넘어지진 않았어?”“차태준, 당신 지금 환자야. 누굴 검사해!”“자기 손부터 보고 싶었어. 많이 놀랐지?”채아는 대꾸하지 못했다. 이마의 거즈 가장자리에 마른 핏자국이 보였다. 눈앞에 멀쩡히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도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빼내 태준의 어깨를 한 대 때릴 시늉만 했다.“씨, 진짜! 마누라 전화 안 받으면 집에서 기다려야지. 재벌이 운전기사도 없냐? 당신 죽으면 내 구두는 누가 사 줘?”태준은 웃다가 손목을 움츠렸다. 채아는 그 움직임에 놀라 얼른 팔을 받쳤다. 곧 손을 뗐지만 이미 눈가가 뜨거워져 있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우혁이 보고 있는 앞에서라면 더더욱.“미안해. 전화하다 사고 난 건 아니야. 길에서 오토바이를 피하다가 그랬어. 다른 사람은 안 다쳤고, 검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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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다시 바람날 거야

“언제까지 시험할 거냐고? 내 남편이 날 그만 사랑할 때까지. 그런데 그날은 안 올걸?”윤채아는 강우혁의 휴대전화 화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응급실 복도 끝에는 밤새 켜 둔 형광등이 희미하게 떨렸고, 열린 문틈으로는 소독약 냄새가 흘러나왔다. 사진 속 자신은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얼굴을 남편도 봤을까 싶어 우혁에게 더 심술이 났다.“그 사진 지워. 내 우는 얼굴은 남편한테만 보여 줄 거야.”“그렇게 아끼는 남편 두고 왜 나를 만나?”“오빠가 나 꼬셨잖아. 이제 와서 양심 있는 척하면 내가 감동할 줄 알아?”우혁이 웃음을 거두자 채아는 돌아섰다. 커튼 안에서 태준이 일어나려는 모습이 보였다. 채아는 달려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붕대에서 풍기는 약 냄새와 셔츠에 밴 익숙한 향이 섞여 있었다. 다치지 않은 팔이 조심스럽게 등을 감싸자, 그제야 밤새 목구멍에 걸려 있던 숨이 내려갔다.“우리 애기, 왜 그래? 많이 놀랐어?”“입 다물어. 당신 또 운전하다 다치면 진짜 이혼이야. 그럼 내 평생 호구는 누가 해?”태준은 그녀의 머리칼만 쓰다듬었다. 채아는 더 안겨 있고 싶었지만 우혁이 지켜보는 게 싫어 먼저 몸을 뗐다. 남편이 아프다는 사실 앞에서 자신까지 달라졌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저택에 돌아왔을 때에는 새벽빛이 커튼 가장자리에 스며 있었다. 태준은 손목 때문에 단추를 채우기 힘들어했고, 채아는 투덜거리며 잠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그가 고맙다며 입맞춤을 청하자 그녀는 일부러 두 번이나 볼을 내밀었다. 그러나 태준이 잠들자 침대 옆에 놓인 열두 통의 부재중 기록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을 쓰다듬다가 결국 지워 버린 건 남편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었다.아침 식탁에는 태준이 좋아하는 따뜻한 국이 차려졌다. 그는 다친 손을 식탁 아래에 두고 수저를 들다가 채아가 현관으로 걸어가는 걸 봤다. 어제 입었던 옷 대신 짧은 원피스와 새 구두를 신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아내의 얼굴에는 밤새 응급실을 뛰어다니던 흔적이 거의 없었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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