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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Author: 송언희
손상된 영상을 떠올린 나태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배준우에게 물었다.

“고 비서가 사모님 측근일 가능성은요?”

하필이면 고은영이 CCTV를 조회한 뒤에 그날 밤 영상만 손상되었다는 게 어쩐지 의심스러웠다.

나태웅의 질문에 배준우는 코웃음쳤다.

“겁이 많아서 그런 짓을 저지를 여자는 아니야.”

나태웅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고은영은 수상할 정도로 배준우를 두려워했다. 배준우의 계모처럼 계산적인 사람이 저런 허술한 상대를 측근으로 골랐을 리 없었다.

“그럼 고 비서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회사 내부에는 잠시 비밀로 해!”

나태웅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결혼 자체가 계획의 일부인데 숨기는 게 당연했다.

모든 게 끝나면 배준우야 타격이 없겠지만 고은영의 입장은 많이 난처해질 것이다.

나태웅은 자신의 상사가 그래도 양심은 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비록 고은영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이혼한 뒤의 그녀의 처지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한편, 자리에 돌아온 고은영이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나태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 사무실로 잠깐 와봐!”

“네, 실장님.”

고은영은 또 혼나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일부러 분위기 깬 것도 아니고… 누가 신성한 회사에서 결혼 얘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래?’

그녀는 투덜거리며 나태웅의 사무실로 향했다.

“실장님, 저 왔어요.”

“문 닫아.”

나태웅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은영은 순순히 문을 닫고 지시를 기다렸다.

나태웅은 그녀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내일 출근할 때 가족관계증명서 챙겨서 와. 고은영 씨는 내일 배 대표님이랑 혼인신고 할 거야.”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고은영은 너무 당황해서 또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

나태웅은 실성한 것 같은 그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상사의 이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 순간 의심이 갔다.

하지만 이렇게 허술한 사람이었기에 이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의심을 치워버렸다.

고은영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휑하니 자리를 떠 버렸다!

예전에는 상사들에게 불려 다니는 자리가 부담스러웠다면 지금은 그냥 충격 그 자체였다.

나태웅은 그녀가 멘탈을 조금 더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휴게실로 달려간 고은영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루에 연속 두 번이나 사레가 들려서 목안이 따끔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항상 매사에 진중하고 철저하던 나태웅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지 않은가?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야….’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휴게실을 나왔다. 나태웅의 비서가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본 비서가 말했다.

“나 실장님은 지금 대표님 사무실에 계십니다. 고 비서님도 자리에 돌아오는 대로 대표님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아까 들은 게 진짜라고?

아니, 왜?

매사에 철저하던 사람들이 오늘따라 왜 자꾸 황당한 소리만 늘어놓는 거지?

고은영은 안지영에게 문자해서 조언을 구하고 싶었지만 앞에 사람이 있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배준우의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배준우와 나태웅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고은영은 애써 자세를 바로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부르셨어요?”

배준우가 담배를 비벼 끄더니 말했다.

“나 실장한테 얘기 들었지?”

“네? 뭐를요?”

고은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이 제시한 요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배준우가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쓰자 나태웅이 다급히 말했다.

“내일 대표님이랑 혼인신고 하라고!”

“그건 안 돼요!”

고은영은 거의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그래도 무거웠던 분위기가 그녀의 거절로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배준우는 서늘한 표정으로 고은영을 노려보며 물었다.

“싫어?”

고은영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결혼은 장난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게임 룰 정하듯이 결혼을 결정하는 게 어딨어!’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그녀에게 한 말이 있었다. 외모는 보지 말고 꼭 자상한 사람을 만나라고 했던 말.

배준우는 그 요구와 정반대인 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원래 출신부터 다른 세상 사람들이었다.

나태웅은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고 비서가 미쳤나? 어떻게 대표님 앞에서 저렇게 당차게 거절하지? 설마 이 결혼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점점 굳어가는 배준우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급히 말했다.

“제가 설명을 제대로 못했네요!”

“고 비서, 따라와!”

‘역시 눈치가 없는 애들은 피곤해!’

고은영은 나태웅이 일을 가르쳤던 비서들 중에 가장 힘든 상대였다.

그녀는 멀뚱멀뚱 나태웅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그를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서기 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배준우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나랑 결혼하든가, 아니면 강성을 떠나든가 알아서 선택해!”

고은영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숨이 막혔다.

그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나태웅을 바라보았다.

‘대표님 자존심이 많이 상하셨군.’

비록 허울뿐인 결혼이라고 해도 모든 여자들이 꿈꾸던 자리 아닌가?

이렇게 대놓고 거절당한 건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는 고은영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 제가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나태웅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사실 고은영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나태웅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 실장님, 이건 아니잖아요….”

고은영이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밤 배준우와 거하게 사고를 친 뒤로 그녀는 모든 상황이 버겁고 혼란스러웠다.

나태웅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두를 뗐다.

“일단 결혼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위장 결혼이야. 서류 상으로만 부부라는 뜻이지.”

“위장 결혼이요?”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나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부터 배씨 가문의 누가 와서 그날 밤 일에 대해서 물으면 고 비서는 그날 대표님이랑 같이 있은 사람이 자신이라고 얘기해야 해.”

고은영은 멍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나태웅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날 대표님 방에 누가 들어갔는지 고 비서 정말 몰라?”

“모… 몰라요!”

고은영은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제 명에 못살 것 같았다.

왜 이런 상황이 자꾸만 벌어지는 거지?

나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지금부터 그날 밤 여자는 고 비서야.”

“하지만 저는 아닌걸요!”

고은영이 울먹이며 말했다.

물론 맞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나태웅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고 비서 맞아!”

명령이었다.

그는 고은영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누가 와서 물으면 그렇게 대답해야 해.”

“왜 그래야 하는데요?”

“이게 고 비서가 해야 할 일이니까?”

‘저기요? 저는 비서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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