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제 79 화 : 성장이재호가 자란 도시에는 번듯한 이름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두 번 다시 파헤치고 싶지 않은 무덤과도 같았다.핏기 잃은 짐승처럼 지방 국도변에 위태롭게 기대어 선 낡고 병들어 가는 공단 도시.새벽마다 거대한 굴뚝에서는 폐부를 검게 찌르는 짙은 회색 연기가 토사물처럼 피어올랐고, 기름때에 절어 퇴근한 국적이 어디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공장 노동자들이 편의점 앞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아 맥주 캔을 따는 것이 그 도시의 유일하고도 비참한 황혼이었다.거리 어디를 걸어도 쇳가루와 썩은 오수가 뒤엉킨 눅진한 냄새가 끈적한 진물처럼 배어 있었다. 재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코끝을 맴도는 그 역겨운 냄새를 뼛속 깊이 혐오했다. 거창한 이유가 있다기 보단, 재호는 어린 짐승의 본능처럼 그저 직감했을 뿐이다.그것이 사람의 뼛속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하고도 지긋지긋한 가난의 냄새라는 것을.그리고 가난이란, 재호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조차 갖지 못하고 평생을 발밑에서 기어야 한다는 완벽한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어머니는 공단 인근의 허름한 함바집에서 일했다. 새벽이슬을 맞고 나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진흙탕에 구른 것처럼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어머니는 귀가할 때면 언제나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유령처럼 소리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재호가 방문을 열고 건조한 시선으로 내다보아도, 먼저 다가와 온기를 건네는 법이 없었다. 단순히 고된 노동으로 육체가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가난이라는 무거운 형벌에 짓눌려, 타인과 감정을 교류하는 언어 자체를 거세당한 사람이었다. 재호 역시 그 지독하게 메마른 무감각함만큼은 제 어미를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빼닮아 있었다.재호는 공부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단순히 잘하는 수준을 넘어, 일반 학생과 그 궤를 달리하는 압도적인 1등이었다.이유는 간단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가 이 세상의 목줄을 쥘 수 있는 무기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이 썩어가는 시궁창 같은 도시를 벗어날
Last Updated: 2026-05-17
Chapter: 제 78 화 : 재호펜트하우스의 육중한 현관문이 등 뒤로 닫히는 순간에도, 재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지하 주차장을 가로질러 대기 중인 차량의 뒷좌석에 오르기까지. 재호의 보폭은 일정한 리듬을 유지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흐트러짐도 묻어나지 않는 서늘한 움직임. 방금 전까지 자신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윤석호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내고서도, 이재호라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바깥이 먼저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덜컹-.두꺼운 차 문이 닫히고, 완벽에 가까운 방음이 외부의 소음을 단숨에 차단했다. 귓가를 맴도는 건 오직 재호 자신의 무거운 숨소리와 미세하게 빨라진 심장 박동뿐이었다.운전대를 잡은 기사는 그저 이 차의 일부에 불과했다.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그 독립적인 공간에서, 재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넥타이 매듭을 풀었다. 거칠게 잡아당기지 않았다. 한 올씩, 아주 정교하고 느릿하게. 팽팽하게 목을 조이고 있던 실크 천이 풀리며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풀어낸 넥타이를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던지지 않고 자신의 손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눅눅하게 젖어 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서울의 야경이 쏟아지는 봄비에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차창을 때렸다."어디로 모실까요."운전기사의 조심스러운 물음이 앞좌석에서 넘어왔다.재호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의 궤적을 서늘한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서로 다른 길을 타고 내리다 어느 지점에서 질척하게 엉겨 붙고, 이내 다시 갈라져 바닥으로 추락하는 빗물. 그것은 마치 방금 전 펜트하우스에서 목도했던, 얽히고설킨 기괴하고도 관능적인 관계성 같았다."블루."짧고 건조한 한마디. 기사는 당연하다는 듯 네비게이션 조작조차 없이 묵묵히 핸들을 꺾었다.창밖의 화려한 불빛들이 빗물에 번지며 붉고 푸른 궤적을 질질 끌며 흘러갔다. 재호는 푹신한 가죽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니, 정확
Last Updated: 2026-05-15
Chapter: 제 77 화 : 시작검은 수첩의 절반 가까이가 빼곡한 글자로 채워진 어느 날 밤, 석호는 처음으로 태성그룹 외부의 선에 연락을 취했다. 상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자였다. 태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에 몸담은 사람. 기업의 복잡한 재무 구조를 해체하고 치부를 발라내는 데 기계적인 정확성을 가진 전문가. 석호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패로 분류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제 검증은 끝났다.통화는 짧았다."만날 수 있겠습니까.""무슨 일입니까.""태성입니다."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상대는 놀라움을 소리로 내뱉는 대신 침묵으로 갈음했다. 이내 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왔다."언제가 좋겠습니까."석호는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한겨울의 서울은 거대하고 차가운 불빛들의 군락이었다. 저 무수한 빛의 중심에 채은성이 존재했다.시작이었다.밤의 석호가 은성의 세계를 해체할 도면을 그리는 동안, 낮의 석호는 변함없이 완벽하게 작동했다.아니, 오차율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제로에 수렴했다. 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과를 장악하는 일은 비서의 단순 업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몰아넣기 위한 경로 설계였다. 은성이 삼키는 물의 온도, 마주치는 임원들의 동선, 결재 서류가 올라가는 타이밍. 그 모든 것이 석호의 손끝에서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은성은 자신이 걷는 길이 석호가 깔아둔 레일 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호흡하는 공기의 성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석호는 무해하고 완벽한 공기가 되어 은성의 주변을 감쌌다.어느 날 저녁이었다.유독 야근이 길어졌다. 43층의 모든 인력이 빠져나가고, 은성의 집무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옅은 불빛만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채은성이었다. 맞춤형 재킷을 한 손에 든 채, 답답한 듯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내리며 걸어 나왔다. 석호는 소리 없이 다가가 미리 준비해 둔 코트를 내밀었다. 은성
Last Updated: 2026-04-19
Chapter: 제 76 화 : 수집아침의 햇살은 간밤의 어둠 속에서 내린 결론처럼 선명했다.43층 복도 끝, 석호는 자신의 책상 앞에 섰다.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한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 감정이 거세된 정갈한 몸가짐. 겉으로 보기에 윤석호라는 시스템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가동되고 있었다.하지만 그 견고한 시스템의 내부는 밤사이 완전히 다른, 단 하나의 명령어로 덮어씌워져 있었다.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정을 관리하고, 전화를 걸러내며, 문서를 검토하는 일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그것은 사냥감이 지나갈 길목을 파악하고, 사냥감의 호흡을 계산하며, 사냥감의 시야를 통제하는 정교한 조련의 과정이었다. 자신이 비서라는 위치를 핑계로 은성의 하루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은성이 먹는 것, 만나는 사람, 머무는 공간, 심지어 그가 마시는 차의 온도조차 석호의 손끝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오전 10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출근했다.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고개를 숙였다 드는 찰나의 순간, 석호의 시선이 은성의 전신을 핥듯 훑고 지나갔다. 흐트러진 은발, 미세하게 구겨진 셔츠의 깃, 나른함을 넘어 짜증이 묻어나는 발걸음. 예전 같았다면 '오늘의 기상도'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 수집에 불과했을 그 모든 디테일들이, 이제는 망막에 화인처럼 찍혀 뇌리로 직행했다.“오전 결재 서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은성은 언제나처럼 석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무심한 뒷모습을 보며 석호는 묘한 해갈을 느꼈다. 저 오만함이, 저 무관심이 언젠가 자신의 발밑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그 무렵부터 석호는 은성이 남기는 '파편'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충동에 가까운, 아주 사소한 일탈이었다. 어느 날 오후, 은성이 외부 임
Last Updated: 2026-04-19
Chapter: 제 75 화 : 이름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두 번째로 함께 맞는 여름이었다.석호는 여전히 매일 아침 정각 8시, 43층 복도 끝 자신의 책상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성의 일정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했고, 걸려온 전화를 분류했으며, 완벽한 온도의 차를 준비했다.마치 기계처럼, 완벽하게.달라진 것이 없다는 석호의 생각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었다. 은성을 볼 때 일어나는 이상한 감정. 석호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몰랐고, 자신이 정의하지 못한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어느 눈부신 오전이었다.은성이 평소보다 한참 늦게 출근했다. 전날 밤 요란한 파티가 있었다는 것을 석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석호가 은성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은성은 알지 못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43층으로 들어왔다. 실내인데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재킷도 걸치지 않은 채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걸음이 느렸다. 평소에도 은성의 걸음걸이는 느린 편이었지만, 그 속도보다 훨씬 더 느리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석호는 아무 말 없이 은성에게 시원한 물 한 잔과 미리 준비해 둔 숙취 해소제를 내밀었다.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석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성은 아무 말 없이 석호가 건넨 물과 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털썩,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아 약을 삼키고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어떻게 알았어?""어제 일정을 보고 짐작했습니다."은성은 낮고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쓸모는 있네."칭찬이 아니었다. 그저 도구의 효용 가치를 확인하고 읊조리는 건조한 언어였다. 은성에게 석호는 그저 도구였다. 아주 쓸모 있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석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물과 약을 내밀었던 석호의 손끝은, 그것을 받아쥐는 은성의 손을 찰나의 순간 동안 따라가고 있었다."감사합니다."은성이 피식, 짧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깊게 눈을 감았다.석호는 은성의
Last Updated: 2026-04-19
Chapter: 제 74 화 : 잔상석 달이 지났다.석호는 매일 아침 정각 8시,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43층 복도 끝에서 업무를 시작했다.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성실함이라기보다 잘 세팅된 기계의 작동 방식에 가까웠다.석호는 은성의 모든 일정을 조율했고, 쏟아지는 전화를 걸러냈으며,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제된 요약본으로 탈바꿈시켰다. 은성이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차를 내놓았고,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원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배치했다.감정이 거세된 행동, 말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석호 역시 스스로 업무 능력에 오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내왔으니까. 하지만 칭찬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밑바닥부터 결벽에 가까운 실력과 절제로 살아온 석호에게 이런 완벽함은 그저 기본값이었다. 당연한 것에는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세상에서의 진리였다.실제로 채은성은 단 한 번도 석호를 칭찬하지 않았다. 고마워하지도, 그 유능함을 특별히 인정하지도 않았다. 마치 공기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석호는 그 당연함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무색무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여기에서 살아남기에는 훨씬 수월했으니까.어느 오후였다.예정된 회의가 두 시간을 훌쩍 넘기며 길어졌다. 복도에는 정적과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감돌았지만, 석호는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필요할 때 곁에 없는 것보다, 필요하지 않을 때조차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석호만의 방식이었다.마침내,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은성이 나타났다. 석호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태를 읽어냈다. 복도를 딛는 구두 소리의 날카로운 강도, 미세하게 굳은 미간의 각도. 예측하지 못하면 통제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석호의 무능을 의미했다."차 가져와.""준비되어 있습니다."은성은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석호 쪽으로 흘리듯 던졌다. 석호는 그것을 공중에서 낚아채듯 받아냈다. 자연스
Last Updated: 2026-04-19
Chapter: 제94화 : 태준의 자리루다가 태준의 가슴을 손끝으로 밀어내며 말했다.“진짜 이제 밥 해야 해요.”“알겠습니다.”태준은 순순히 대답했지만, 허리를 감고 있던 그의 팔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루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알겠다는 사람 팔이 왜 그대로예요?”태준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마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별도의 장치라도 발견한 얼굴이었다.“명령 전달에 약간의 지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그럼 제가 강제로 종료할까요?”루다가 부엌칼을 들며 말했다.“그건 곤란합니다.”태준은 그제야 아쉬움을 숨기지 못한 채 한 걸음 물러났다.겨우 풀려난 루다가 숨을 고르며 냉장고 앞으로 돌아섰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기를 꺼냈지만, 입술에는 좀처럼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도와드리겠습니다.”“손님은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시죠?”“방금 전까지 저녁 준비를 방해했습니다. 손실 시간을 만회해야 합니다.”루다는 손에 든 칼을 건네며 말했다. “그러면 양파 좀 썰어주세요. 결대로 적당히, 너무 얇지 않게.”“너무 얇지 않게의 기준은 몇 밀리미터입니까?”“그냥 적당히요.”“적당히의 수치화가 필요합니다.”“태준 씨.”“네.”“돼지고기로 맞아 본 적 있어요?”“있을 리가요?”대답과 함께 태준은 잠시 칼과 양파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자신의 판단대로 칼질을 시작했다.도마 위로 일정한 소리가 이어졌다.탁, 탁, 탁, 탁.루다는 고추장을 뜨다 말고 태준을 바라봤다.양파 조각들이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폭으로 늘어서고 있었다. 반듯하다 못해 자를 대고 검사해도 될 것 같은 모양이었다.“……몇 밀리예요?”“평균 6밀리미터입니다. 오차는 1밀리미터 이내로 통제했습니다.”“푸하하하하-”“원하신 기준과 다릅니까?”“아뇨. 너무 완벽해서 양파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요.”태준은 그 말을 농담으로 처리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었다.루다는 웃으며 양념장에 설탕을 넣었다. 숟가락 위로 수북하게 올라온 설탕을 본 태준이 바로 물었다.“몇 그램입니까?”“한 숟갈.”
Last Updated: 2026-09-09
Chapter: 제93화 : 루다의 초대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루다의 웃음은 멎지 않았다.“진짜 억울하셨겠다. 본인 차라는데 아무도 안 믿어줘서.”“루다 씨까지 웃으실 줄은 몰랐습니다.”“저는 요트 때문에 웃은 거예요.”“그 대답도 별로 위로가 되지는 않는군요.”진지하게 서운해하는 얼굴에 루다는 또 웃고 말았다.차는 퇴근길 차량들 사이로 부드럽게 들어섰다. 버스가 바로 옆을 지나가는데도 안쪽은 고요했다. 천장의 작은 별들이 차창에 비쳐 저녁 풍경 위로 겹쳤다.“이 차는 평소에 언제 타요?”“멀리 이동할 때 가끔 탑니다.”“그럼 오늘은 멀리 가요?”“루다 씨 집으로 갑니다.”“겨우 삼십 분 타려고 이걸 가져오신 거예요?”태준이 앞을 보며 대답했다.“그 삼십 분 동안 루다 씨가 타니까요.”루다는 안전벨트를 만지던 손을 멈췄다.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태준의 대답이 루다의 마음을 자꾸 간지럽혔다. “……나 편하게 태워주려고요?”“그랬는데, 자꾸 몸을 굳히고 계셔서. 차를 잘못 골랐나 싶었습니다.”“좋기는 해요. 엄청.”태준의 입가가 풀리자 루다가 슬쩍 덧붙였다.“내릴 때 요금만 안 뜨면요.”“별도로 청구하지 않습니다.”“정말요?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예요.”루다는 웃으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그저 좋은 차에 자신을 태워주고 싶었던 걸까.그러기에는 그의 집과 블랙카드, 어제의 시계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루다는 운전하는 옆얼굴을 바라보다 질문을 조금 더 품어두기로 했다.집 근처 마트가 보였을 때, 루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저기서 내려주세요.”“집 앞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장을 좀 보려고요. 오늘 저녁은…… 제가 차려드리고 싶어서.”태준이 잠깐 그녀를 봤다.대답이 늦어지자 루다가 괜히 덧붙였다.“저 밥 할 줄 알아요. 맨날 배달만 시키는 거 아니거든요.”“그걸 걱정한 게 아닙니다.”마트 주차장으로 방향을 틀며 태준이 말했다.“좋아서, 메뉴도 못 물어봤습니다.”루다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초대해놓고 이제 와 얼굴이 더워졌다
Last Updated: 2026-09-08
Chapter: 제92화 : 허언증 환자 강태준화요일, 퇴근 무렵루다는 모니터 오른쪽 하단의 숫자가 6시를 넘긴 후에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어제 검색한 7억 2천만 원짜리 시계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기사를 열어볼수록 태준의 말이 맞다는 증거만 늘었다. 국내 단 한 점. 브랜드를 통한 직접 인도. 구매자 신원 비공개.그런데 진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태준이 더 멀게 느껴졌다.'당장 묻고 싶지만…….'루다는 태준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태준은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표정으로 결재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오른쪽 손목은 다시 깨끗했다. 수억 원짜리 시계는 하루 만에 자취를 감춘 뒤였다.'기다려 달라고 했으니까.'루다는 어제와 다른 결론을 내렸다.'그래. 묻지 말고 좀 더 보자.'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태준 씨 : 지하 2층에서 기다리겠습니다.]루다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가,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고개를 들자, 태준이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지하 2층 주차장으로 내려간 루다는 두리번거리며 태준의 차를 찾았다.팀장 지정 주차구역에는 차가 한 대뿐이었다. 그런데 평소의 세단 대신, 유난히 눈에 띄는 차가 서 있었다.깊은 밤색의 차체는 주차장의 형광등 아래서도 물결처럼 빛났다. 엠블럼은 루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차 안에 있던 태준이 내리고, 조수석 문을 열며 루다에게 말했다."타시죠."루다는 시트보다 태준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우리 오늘 뭐 촬영해요?""촬영 일정은 없습니다.""그런데 이 차는 뭐예요? 신차 론칭 이벤트용 콘셉트카?"루다는 묻는 동안 태준의 눈을 지켜봤다.그가 머뭇거리는지, 눈동자가 흔들리지는 않는지.태준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콘셉트카가 아닙니다.""그럼요?""제가 사적으로 이용하는 차량입니다. 평소에는 따로 보관했습니다.""차를요? 따로 보관했다고요?""시선을 이끄는 차라서 잘 끌고 다니지 않습니다.""그러니까…… 팀장님 차라는 거네요?""정확히는 법인 명의
Last Updated: 2026-09-07
Chapter: 제91화 : 시계는 진짜, 남자친구는 미확인월요일, 오전 8시 50분.마케팅 1팀 사무실로 들어서는 이루다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어젯밤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 때문이었다.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던 압구정의 아파트. 루다가 팔았던 닌텐도 64를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던 남자. 그리고 책장 끝의 오래된 사진 한 장.광활한 정원 한가운데서 꼿꼿하게 카메라를 바라보던 어린 강태준.'아파트야 그렇다 쳐. 직책자 이상한테만 지급했던, 스톡옵션에 영끌까지 하면…… 아니, 그래도 좀 무리인가?'루다는 밤새 몇 번이나 뒤집었던 계산을 다시 해보았다.'그런데 고향집 정원은 뭐였지? 무슨 시골집 마당이 수목원만 해.'그때 정갈한 우디 향이 코끝을 스쳤다.자리에 앉아 있던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목 끝까지 단정하게 채운 흰 셔츠와 각 잡힌 네이비 수트. 무테안경 너머로 루다를 확인한 태준은 다른 팀원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만큼만 입꼬리를 움직였다.루다도 작게 웃어 보였다.겉보기에는 지극히 평온한 월요일 아침이었다.하지만 태준의 머릿속 중앙제어장치는 출근 전부터 하나의 과업만을 처리하고 있었다.'1단계, 사적 공간 공개는 완료됐다.'그는 검토 중인 보고서 위로 오른팔을 올려놓았다. 평소보다 셔츠 소매가 조금 짧게 당겨지며 묵직한 은빛 시계가 모습을 드러냈다.'오늘부터 2단계. 사적 소지품의 자연스러운 노출.'정교한 기계장치가 훤히 보이는 스켈레톤 다이얼. 푸른색으로 가공된 투르비용 케이지가 초침 아래에서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국내에 단 한 점만 정식 배정된 하이엔드 워치였다.그리고 왼쪽 손목에는 평소의 스마트워치가 그대로 채워져 있었다.재벌가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과 실시간 심박수 데이터를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태준은 양쪽 손목에 하나씩 차는 것으로 두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판단했다.'고가의 물건에 차례로 익숙해지면, 최종 정보 공개 시 충격값을 최소화할 수 있다.'태준이 오른손으로 만년필을 집었다. 시계가 잘 보이도록 손목의
Last Updated: 2026-09-06
Chapter: 제90화 : 서서히 드러나는 태준의 진짜 모습"……와."평소 강태준의 무미건조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은은한 보라색과 호박색 조명이 천장에서 부드럽게 내려앉고,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레트로 게임기와 피규어들.그 옆으로는 색깔별로 단정하게 정리된 책장과, 안쪽 깊숙이 놓인 가죽 리클라이너 한 대.먼지 한 톨 없이 정갈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다."……여기, 진짜 팀장님이 좋아하시는 거 다 모아 두신 거구나."루다가 작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태준은 그녀의 한 걸음 뒤에서, 평소답지 않은 조용한 미소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이루다 씨.""네?""이 방에 정식으로 누군가를 들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루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정말로요?""사실 친구가 한 명 있긴 한데, 들인 게 아니라 비밀번호를 알고 알아서 침입하는 겁니다. 물론 남자입니다."쩔쩔매는 태준의 모습에 루다가 결국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팀장님답네요."웃음 끝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그 짧은 정적 안에서,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쳐져 있던 어떤 견고한 막 하나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루다는 자연스럽게 게임기 진열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벽면 가득 놓인 컬렉션.패미컴, 슈퍼 패미컴, 메가 드라이브, 닌텐도 64.그리고 각각에 어울리는 컨트롤러와 카트리지들이 라벨까지 단정하게 붙여진 채 완벽한 오와 열을 맞추고 있었다.루다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어?"루다가 진열장 가까이 다가가 한쪽 칸을 유심히 응시했다.투명한 케이스 안에는 익숙한 모양의 닌텐도 64 본체와, 그 위에 곱게 놓인 카트리지들이 있었다.너무나 익숙한 보존 상태.본체 모서리의 아주 작은 흠집과, 컨트롤러 선에 희미하게 남은 스티커 끈끈이 자국까지.루다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태준을 돌아보았다."이거…… 제가 팔았던 그거 맞죠?"태준이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그렇습니다.""
Last Updated: 2026-06-09
Chapter: 제89화 : 이건 첫번째 스텝 - 사는 곳 공개하기토요일 오전 11시.평소라면 한 주를 정리하며, 다음 주 계획과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 태준은 그러지 못했다.신사동 골목 안쪽, 인동이 잡아둔 한적한 카페.마주 앉은 인동이 평소의 장난기를 싹 지운 채, 두꺼운 노트와 만년필을 꺼내 들고 있었다."자, 강파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짜자. 마음 단단히 먹어.""…….""내가 너 같은 케이스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야.""한번 무너지면 다 무너져.""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단계가 핵심이다, 차근차근 해보자고."태준이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평소엔 자신이 시나리오의 전문가였는데, 오늘만큼은 그야말로 P의 화신인 인동이 모든 판을 지휘하고 있었다."좋다. 어떤 스텝으로 가는 거지?""총 5단계.""너무 적으면 충격을 받고, 너무 많으면 피로해져.""다섯 단계가 딱 황금비율이야."인동이 노트를 펼쳐 굵게 줄을 그었다."1단계."태준이 시선을 노트로 내렸다."먼저 네 사적인 공간을 공개해.""너희 집 말이야. 지금껏 한 번도 데려간 적 없지?""……한번 있기는 한데, 정식으로 초대한 건 아니었어.""그러면 정식으로 초대하고, 네가 평소에 진짜로 어떻게 사는지 보여줘.""첫인상이 한 번 묵직하게 박혀야 다음 단계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너무 빨리 드러내면 그쪽이 진짜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기겁할지도 몰라.""…….""2단계. 너의 사적인 차, 시계, 옷.""회사용 위장막 말고 진짜 네 일상의 것들을 서서히 노출해.""평범한 회사원이 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시각적으로 먼저 익숙해지게 만드는 거지."만년필이 종이 위를 사각거렸다."3단계. 이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야.""가족 이야기를 꺼내.""처음부터 '재벌 3세'라고 까지는 절대 마.""'집안이 좀 복잡하다', '아버지가 사업하신다' 정도로 정보를 조각조각 흘려.""4단계.""본가 방문이나 가족과의 식사.""진짜 현실과 직접 마주하게 하는 거다.""……그리고 마지막 5단계."인동
Last Updated: 2026-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