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제90화 : 서서히 드러나는 태준의 진짜 모습"……와."평소 강태준의 무미건조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은은한 보라색과 호박색 조명이 천장에서 부드럽게 내려앉고,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레트로 게임기와 피규어들.그 옆으로는 색깔별로 단정하게 정리된 책장과, 안쪽 깊숙이 놓인 가죽 리클라이너 한 대.먼지 한 톨 없이 정갈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다."……여기, 진짜 팀장님이 좋아하시는 거 다 모아 두신 거구나."루다가 작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태준은 그녀의 한 걸음 뒤에서, 평소답지 않은 조용한 미소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이루다 씨.""네?""이 방에 정식으로 누군가를 들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루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정말로요?""사실 친구가 한 명 있긴 한데, 들인 게 아니라 비밀번호를 알고 알아서 침입하는 겁니다. 물론 남자입니다."쩔쩔매는 태준의 모습에 루다가 결국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팀장님답네요."웃음 끝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그 짧은 정적 안에서,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쳐져 있던 어떤 견고한 막 하나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루다는 자연스럽게 게임기 진열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벽면 가득 놓인 컬렉션.패미컴, 슈퍼 패미컴, 메가 드라이브, 닌텐도 64.그리고 각각에 어울리는 컨트롤러와 카트리지들이 라벨까지 단정하게 붙여진 채 완벽한 오와 열을 맞추고 있었다.루다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어?"루다가 진열장 가까이 다가가 한쪽 칸을 유심히 응시했다.투명한 케이스 안에는 익숙한 모양의 닌텐도 64 본체와, 그 위에 곱게 놓인 카트리지들이 있었다.너무나 익숙한 보존 상태.본체 모서리의 아주 작은 흠집과, 컨트롤러 선에 희미하게 남은 스티커 끈끈이 자국까지.루다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태준을 돌아보았다."이거…… 제가 팔았던 그거 맞죠?"태준이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그렇습니다.""
最終更新日: 2026-06-09
Chapter: 제89화 : 이건 첫번째 스텝 - 사는 곳 공개하기토요일 오전 11시.평소라면 한 주를 정리하며, 다음 주 계획과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 태준은 그러지 못했다.신사동 골목 안쪽, 인동이 잡아둔 한적한 카페.마주 앉은 인동이 평소의 장난기를 싹 지운 채, 두꺼운 노트와 만년필을 꺼내 들고 있었다."자, 강파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짜자. 마음 단단히 먹어.""…….""내가 너 같은 케이스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야.""한번 무너지면 다 무너져.""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단계가 핵심이다, 차근차근 해보자고."태준이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평소엔 자신이 시나리오의 전문가였는데, 오늘만큼은 그야말로 P의 화신인 인동이 모든 판을 지휘하고 있었다."좋다. 어떤 스텝으로 가는 거지?""총 5단계.""너무 적으면 충격을 받고, 너무 많으면 피로해져.""다섯 단계가 딱 황금비율이야."인동이 노트를 펼쳐 굵게 줄을 그었다."1단계."태준이 시선을 노트로 내렸다."먼저 네 사적인 공간을 공개해.""너희 집 말이야. 지금껏 한 번도 데려간 적 없지?""……한번 있기는 한데, 정식으로 초대한 건 아니었어.""그러면 정식으로 초대하고, 네가 평소에 진짜로 어떻게 사는지 보여줘.""첫인상이 한 번 묵직하게 박혀야 다음 단계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너무 빨리 드러내면 그쪽이 진짜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기겁할지도 몰라.""…….""2단계. 너의 사적인 차, 시계, 옷.""회사용 위장막 말고 진짜 네 일상의 것들을 서서히 노출해.""평범한 회사원이 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시각적으로 먼저 익숙해지게 만드는 거지."만년필이 종이 위를 사각거렸다."3단계. 이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야.""가족 이야기를 꺼내.""처음부터 '재벌 3세'라고 까지는 절대 마.""'집안이 좀 복잡하다', '아버지가 사업하신다' 정도로 정보를 조각조각 흘려.""4단계.""본가 방문이나 가족과의 식사.""진짜 현실과 직접 마주하게 하는 거다.""……그리고 마지막 5단계."인동
最終更新日: 2026-06-08
Chapter: 제88화 : 태준의 결심금요일 오전 9시.마케팅 1팀 사무실에는 어제 폭심지를 함께 경험한 동맹 네 사람의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차유진 책임은 어제와 다름없는 완벽한 칼정장 차림이었다.다만 평소보다 10분 일찍 출근해서, 괜히 책상 위를 세번이나 반복해서 닦고 있었다.그리고 김민호 사원은, 평소의 헐렁한 후드티 같은 복장 대신 위아래로 완벽하게 각을 잡은 짙은 네이비 수트를 빼입고 출근했다.심지어 머리에는 왁스까지 발라 깔끔하게 포마드로 빗어 넘긴 폼이, 멀리서 봐도 '나 오늘 중대 발표 합니다'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했다.루다는 그 두 사람의 비장한 뒷모습을 흘긋 바라보며 키보드 위에서 손을 멈췄다.'후, 오늘 드디어...'그때, 키보드 옆 스마트폰에서 사내 메신저 알림이 조용히 떴다.[강태준 팀장: 차유진 책임이 오전 중 공개 선언 예정입니다. 1팀 인원의 적절한 호응 유도와 사후 케어 부탁드립니다.]루다는 답장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심장이 묘하게 두근거렸다.자신의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손끝이 떨려왔다.오전 10시.월말 정산으로 바쁜 타자 소리만 울리던 와중, 차유진 책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사무실 한가운데로 나서며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키보드 소리가 일제히 멎었다."잠시만 시간 좀 빌리겠습니다."유진의 목소리에는 어젯밤 카페에서 봤던 떨림이나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어딘지 모르게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그녀가 옆자리의 민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민호 씨, 일어나요."수트를 쫙 빼입은 민호가 뻣뻣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긴장한 탓에 바지 재봉선을 꽉 쥔 두 손은 땀에 젖어 있었지만, 시선만큼은 흔들리지 않은 채 유진을 향해 있었다.유진이 깊이 숨을 고르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 차유진은…… 김민호 사원과 사귀고 있습니다."순간, 사무실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듯한 정적이 흘렀다."만난 지 두 달째고요.""어젯밤 회식 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일부 분들께 먼저 알려진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
最終更新日: 2026-06-07
Chapter: 제87화 : 비상상황입니다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우대갈비 한쪽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차유진 책임이었다.천장을 뚫고 승천하던 영혼을 강제 회수한 그녀가, 침착하게 민호의 양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민호 씨, 술 너무 많이 마셨네요.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책임님 어제도 저랑 전화하셨잖아여…….""민호 씨.""왜 자꾸 안 그런 척하시는 거예요오……."유진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는 소리가, 루다에게는 또렷이 들렸다.서은호 수석의 동공이 팝핀 댄스를 추기 시작했고, 주변 팀원들의 귀가 일제히 이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안 돼! 여기서 걸리면 다 끝장이야!'순간, 루다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쭉 뻗어 맞은편에 앉은 태준의 정강이를 퍽! 하고 걷어찼다."흑……!"갑작스러운 타격에 태준의 무테안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루다는 눈으로 미친 듯이 모스 부호처럼 깜빡이며 입모양으로 뻐끔거렸다.'빨리! 뭐라도 해봐요!'그 절박한 SOS를 순식간에 해독한 태준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그리고 평소 회의실에서 기획안을 반려할 때보다 훨씬 더 서늘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비상 상황입니다."테이블에 쏠려 있던 시선이 일제히 태준에게 집중되었다."방금 본사 서버 모니터링 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픈 예정인 팝업스토어 사전 예약 페이지 트래픽에 치명적인 에러가 발생했습니다.""네?! 에러요?!""지금 당장 실무진의 수동 복구가 필요합니다. 이루다 대리, 노트북 챙기십시오."태준의 시선이 유진을 향했다.유진 역시 그 기가 막힌 임기응변을 0.1초 만에 파악하고는 칼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1팀 협업 라인도 즉시 합류하겠습니다. 김민호 사원, 일어나세요.""어어? 저, 저도 갈까요 팀장님?"서은호 수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나려 하자, 태준이 단호하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서 수석님은 여기 남아주십시오.""네? 저는 왜요?""본부장님을 전담 마크하여 이 자리를 끝까지 사수하는 것
最終更新日: 2026-06-06
Chapter: 제86화 : 핵폭탄 투하다시 평범한 회사의 일상이 돌아왔다. 화요일 아침 사무실에서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깍듯한 '팀장'과 '팀원'으로 돌아가 있었다. 태준은 평소처럼 루다의 기획안 품의를 빨간 펜으로 난도질했고, 루다는 평소처럼 깨지면서도 묵묵히 수정본을 올렸다. 다만 반려 사유 끝에 '단, 3페이지 도입부 방향성은 우수함'이라는 한 줄이 슬쩍 붙어 있었다. 회사에서 그가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애정 표현이었다.수요일 오후.이날도 루다의 기획안을 어김없이 반려당했다."타깃 분석에 근거가 부족합니다. 재검토."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반려였지만, 루다는 더 이상 예전처럼 어깨가 움츠러들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철저히 남남처럼, 그러나 그 남남 사이를 흐르는 온도만큼은 두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으니까. 다만, 그 미묘한 온도를 자꾸만 곁눈질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야, 이루다." 오후 무렵, 최지원 대리가 슬쩍 의자를 굴려 다가와 속삭였다. "너 요즘 강 팀장님한테 안 까이는 날이 없는데, 표정은 왜 이렇게 좋냐?" "음……까여도 월급은 나오니까?" 루다가 능청을 떨자 지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지만, 결정적 증거 또한 잡히지 않은 루다였다. 바로 그때, 사무실에 청천벽력 같은 공지가 떨어졌다. "내일 저녁, 마케팅 본부 전체 회식 있겠습니다. 6시 30분, 강남 '우대갈비'입니다. 본부장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자리이니, 전원 참석입니다." 태준의 건조한 한마디에 사무실이 술렁였다. 마케팅 본부 전체 회식. 1팀, 2팀, 기획팀까지 수십 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자리였다. 게다가 평소 코빼기도 안 비치던 본부장이 직접 마련한 자리라니. "우대갈비?! 본부장님이 웬일이래?" 서은호 수석이 신난 목소리로 최지원 대리에게 물었다. 회식이라면 일단 좋아하고 보는 인간이었다. "이번에 1분기 본부 실적이 굉장히 좋았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거 때문 아닐까요?" "아 진짜? 이야 그럼 내년에 성과급 좀 기대해
最終更新日: 2026-05-24
Chapter: 제85화 : 한도 무제한, 신뢰도 한도초과낭만적인 밤은 계산서가 나오기 전까지였다.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선 두 사람이 카운터로 향했다.루다가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려 하자, 태준이 한발 앞서 손을 들었다."제가 하겠습니다.""매번 팀장님께서 사주셨는데,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아닙니다. 데이트 신청은 제가 했으니까요. 다음에 기회를 드리겠습니다."태준의 반대에 루다가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14만 5천 원입니다."직원의 안내에 태준이 지갑을 펼쳤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양초 불빛 아래에서 몽글몽글하게 녹아 있던 그의 중앙제어장치가, 바로 그 순간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평소 회사 직원들과 함께 있을 때 쓰던 평범한 신용카드. 그 옆에 무심코 꽂혀 있던, 지난달 본가에 들렀다 무심코 챙겨 나온 카드 한 장.태준의 손가락이, 하필이면 후자를 집어 들었다.매트한 광택을 머금은, 묵직한 무게감의 새까만 카드. 한도 무제한, 최상위 0.1%만이 발급받을 수 있다는 그 물건이 직원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카드를 받아 든 직원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그 짧은 머뭇거림이, 영수증을 받으려 다가오던 루다의 시선을 정확히 그 카드로 끌어당겼다."어? 팀장님!"루다의 부름에 태준은 자신이 카드를 잘못 꺼냈음을 알아차렸다.태준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식은땀 한 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그 카드……."태준의 중앙제어장치가 비상 경보를 울리며 풀가동되기 시작했다."얼마 전에 인터넷 기사에서 봤는데."루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연회비만 수천만 원이라는, 그 재벌들 전용 카드랑 똑같이 생겼네요?"방금 전까지 '어설프더라도 진짜인 사람이 좋다'는 루다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긴 그 심장이, 입으로 튀어 나올 듯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조금 전 식사를 마칠 무렵 인동과의 통화는 종료되었고 무선 이어폰은 이미 꺼져 있었다. 위기의 순간 태준을 구해줄 아군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아…… 이건."태준의 반응이 찰나동안 멈추는
最終更新日: 2026-05-21
Chapter: 제 79 화 : 성장이재호가 자란 도시에는 번듯한 이름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두 번 다시 파헤치고 싶지 않은 무덤과도 같았다.핏기 잃은 짐승처럼 지방 국도변에 위태롭게 기대어 선 낡고 병들어 가는 공단 도시.새벽마다 거대한 굴뚝에서는 폐부를 검게 찌르는 짙은 회색 연기가 토사물처럼 피어올랐고, 기름때에 절어 퇴근한 국적이 어디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공장 노동자들이 편의점 앞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아 맥주 캔을 따는 것이 그 도시의 유일하고도 비참한 황혼이었다.거리 어디를 걸어도 쇳가루와 썩은 오수가 뒤엉킨 눅진한 냄새가 끈적한 진물처럼 배어 있었다. 재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코끝을 맴도는 그 역겨운 냄새를 뼛속 깊이 혐오했다. 거창한 이유가 있다기 보단, 재호는 어린 짐승의 본능처럼 그저 직감했을 뿐이다.그것이 사람의 뼛속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하고도 지긋지긋한 가난의 냄새라는 것을.그리고 가난이란, 재호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조차 갖지 못하고 평생을 발밑에서 기어야 한다는 완벽한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어머니는 공단 인근의 허름한 함바집에서 일했다. 새벽이슬을 맞고 나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진흙탕에 구른 것처럼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어머니는 귀가할 때면 언제나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유령처럼 소리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재호가 방문을 열고 건조한 시선으로 내다보아도, 먼저 다가와 온기를 건네는 법이 없었다. 단순히 고된 노동으로 육체가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가난이라는 무거운 형벌에 짓눌려, 타인과 감정을 교류하는 언어 자체를 거세당한 사람이었다. 재호 역시 그 지독하게 메마른 무감각함만큼은 제 어미를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빼닮아 있었다.재호는 공부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단순히 잘하는 수준을 넘어, 일반 학생과 그 궤를 달리하는 압도적인 1등이었다.이유는 간단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가 이 세상의 목줄을 쥘 수 있는 무기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이 썩어가는 시궁창 같은 도시를 벗어날
最終更新日: 2026-05-17
Chapter: 제 78 화 : 재호펜트하우스의 육중한 현관문이 등 뒤로 닫히는 순간에도, 재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지하 주차장을 가로질러 대기 중인 차량의 뒷좌석에 오르기까지. 재호의 보폭은 일정한 리듬을 유지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흐트러짐도 묻어나지 않는 서늘한 움직임. 방금 전까지 자신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윤석호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내고서도, 이재호라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바깥이 먼저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덜컹-.두꺼운 차 문이 닫히고, 완벽에 가까운 방음이 외부의 소음을 단숨에 차단했다. 귓가를 맴도는 건 오직 재호 자신의 무거운 숨소리와 미세하게 빨라진 심장 박동뿐이었다.운전대를 잡은 기사는 그저 이 차의 일부에 불과했다.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그 독립적인 공간에서, 재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넥타이 매듭을 풀었다. 거칠게 잡아당기지 않았다. 한 올씩, 아주 정교하고 느릿하게. 팽팽하게 목을 조이고 있던 실크 천이 풀리며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풀어낸 넥타이를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던지지 않고 자신의 손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눅눅하게 젖어 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서울의 야경이 쏟아지는 봄비에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차창을 때렸다."어디로 모실까요."운전기사의 조심스러운 물음이 앞좌석에서 넘어왔다.재호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의 궤적을 서늘한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서로 다른 길을 타고 내리다 어느 지점에서 질척하게 엉겨 붙고, 이내 다시 갈라져 바닥으로 추락하는 빗물. 그것은 마치 방금 전 펜트하우스에서 목도했던, 얽히고설킨 기괴하고도 관능적인 관계성 같았다."블루."짧고 건조한 한마디. 기사는 당연하다는 듯 네비게이션 조작조차 없이 묵묵히 핸들을 꺾었다.창밖의 화려한 불빛들이 빗물에 번지며 붉고 푸른 궤적을 질질 끌며 흘러갔다. 재호는 푹신한 가죽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니, 정확
最終更新日: 2026-05-15
Chapter: 제 77 화 : 시작검은 수첩의 절반 가까이가 빼곡한 글자로 채워진 어느 날 밤, 석호는 처음으로 태성그룹 외부의 선에 연락을 취했다. 상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자였다. 태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에 몸담은 사람. 기업의 복잡한 재무 구조를 해체하고 치부를 발라내는 데 기계적인 정확성을 가진 전문가. 석호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패로 분류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제 검증은 끝났다.통화는 짧았다."만날 수 있겠습니까.""무슨 일입니까.""태성입니다."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상대는 놀라움을 소리로 내뱉는 대신 침묵으로 갈음했다. 이내 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왔다."언제가 좋겠습니까."석호는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한겨울의 서울은 거대하고 차가운 불빛들의 군락이었다. 저 무수한 빛의 중심에 채은성이 존재했다.시작이었다.밤의 석호가 은성의 세계를 해체할 도면을 그리는 동안, 낮의 석호는 변함없이 완벽하게 작동했다.아니, 오차율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제로에 수렴했다. 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과를 장악하는 일은 비서의 단순 업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몰아넣기 위한 경로 설계였다. 은성이 삼키는 물의 온도, 마주치는 임원들의 동선, 결재 서류가 올라가는 타이밍. 그 모든 것이 석호의 손끝에서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은성은 자신이 걷는 길이 석호가 깔아둔 레일 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호흡하는 공기의 성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석호는 무해하고 완벽한 공기가 되어 은성의 주변을 감쌌다.어느 날 저녁이었다.유독 야근이 길어졌다. 43층의 모든 인력이 빠져나가고, 은성의 집무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옅은 불빛만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채은성이었다. 맞춤형 재킷을 한 손에 든 채, 답답한 듯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내리며 걸어 나왔다. 석호는 소리 없이 다가가 미리 준비해 둔 코트를 내밀었다. 은성
最終更新日: 2026-04-19
Chapter: 제 76 화 : 수집아침의 햇살은 간밤의 어둠 속에서 내린 결론처럼 선명했다.43층 복도 끝, 석호는 자신의 책상 앞에 섰다.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한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 감정이 거세된 정갈한 몸가짐. 겉으로 보기에 윤석호라는 시스템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가동되고 있었다.하지만 그 견고한 시스템의 내부는 밤사이 완전히 다른, 단 하나의 명령어로 덮어씌워져 있었다.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정을 관리하고, 전화를 걸러내며, 문서를 검토하는 일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그것은 사냥감이 지나갈 길목을 파악하고, 사냥감의 호흡을 계산하며, 사냥감의 시야를 통제하는 정교한 조련의 과정이었다. 자신이 비서라는 위치를 핑계로 은성의 하루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은성이 먹는 것, 만나는 사람, 머무는 공간, 심지어 그가 마시는 차의 온도조차 석호의 손끝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오전 10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출근했다.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고개를 숙였다 드는 찰나의 순간, 석호의 시선이 은성의 전신을 핥듯 훑고 지나갔다. 흐트러진 은발, 미세하게 구겨진 셔츠의 깃, 나른함을 넘어 짜증이 묻어나는 발걸음. 예전 같았다면 '오늘의 기상도'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 수집에 불과했을 그 모든 디테일들이, 이제는 망막에 화인처럼 찍혀 뇌리로 직행했다.“오전 결재 서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은성은 언제나처럼 석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무심한 뒷모습을 보며 석호는 묘한 해갈을 느꼈다. 저 오만함이, 저 무관심이 언젠가 자신의 발밑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그 무렵부터 석호는 은성이 남기는 '파편'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충동에 가까운, 아주 사소한 일탈이었다. 어느 날 오후, 은성이 외부 임
最終更新日: 2026-04-19
Chapter: 제 75 화 : 이름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두 번째로 함께 맞는 여름이었다.석호는 여전히 매일 아침 정각 8시, 43층 복도 끝 자신의 책상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성의 일정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했고, 걸려온 전화를 분류했으며, 완벽한 온도의 차를 준비했다.마치 기계처럼, 완벽하게.달라진 것이 없다는 석호의 생각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었다. 은성을 볼 때 일어나는 이상한 감정. 석호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몰랐고, 자신이 정의하지 못한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어느 눈부신 오전이었다.은성이 평소보다 한참 늦게 출근했다. 전날 밤 요란한 파티가 있었다는 것을 석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석호가 은성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은성은 알지 못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43층으로 들어왔다. 실내인데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재킷도 걸치지 않은 채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걸음이 느렸다. 평소에도 은성의 걸음걸이는 느린 편이었지만, 그 속도보다 훨씬 더 느리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석호는 아무 말 없이 은성에게 시원한 물 한 잔과 미리 준비해 둔 숙취 해소제를 내밀었다.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석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성은 아무 말 없이 석호가 건넨 물과 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털썩,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아 약을 삼키고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어떻게 알았어?""어제 일정을 보고 짐작했습니다."은성은 낮고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쓸모는 있네."칭찬이 아니었다. 그저 도구의 효용 가치를 확인하고 읊조리는 건조한 언어였다. 은성에게 석호는 그저 도구였다. 아주 쓸모 있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석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물과 약을 내밀었던 석호의 손끝은, 그것을 받아쥐는 은성의 손을 찰나의 순간 동안 따라가고 있었다."감사합니다."은성이 피식, 짧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깊게 눈을 감았다.석호는 은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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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 74 화 : 잔상석 달이 지났다.석호는 매일 아침 정각 8시,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43층 복도 끝에서 업무를 시작했다.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성실함이라기보다 잘 세팅된 기계의 작동 방식에 가까웠다.석호는 은성의 모든 일정을 조율했고, 쏟아지는 전화를 걸러냈으며,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제된 요약본으로 탈바꿈시켰다. 은성이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차를 내놓았고,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원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배치했다.감정이 거세된 행동, 말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석호 역시 스스로 업무 능력에 오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내왔으니까. 하지만 칭찬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밑바닥부터 결벽에 가까운 실력과 절제로 살아온 석호에게 이런 완벽함은 그저 기본값이었다. 당연한 것에는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세상에서의 진리였다.실제로 채은성은 단 한 번도 석호를 칭찬하지 않았다. 고마워하지도, 그 유능함을 특별히 인정하지도 않았다. 마치 공기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석호는 그 당연함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무색무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여기에서 살아남기에는 훨씬 수월했으니까.어느 오후였다.예정된 회의가 두 시간을 훌쩍 넘기며 길어졌다. 복도에는 정적과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감돌았지만, 석호는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필요할 때 곁에 없는 것보다, 필요하지 않을 때조차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석호만의 방식이었다.마침내,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은성이 나타났다. 석호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태를 읽어냈다. 복도를 딛는 구두 소리의 날카로운 강도, 미세하게 굳은 미간의 각도. 예측하지 못하면 통제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석호의 무능을 의미했다."차 가져와.""준비되어 있습니다."은성은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석호 쪽으로 흘리듯 던졌다. 석호는 그것을 공중에서 낚아채듯 받아냈다. 자연스
最終更新日: 2026-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