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제70화 :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내일 점심의 살벌한 취조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 맹수 같은 팀장님의 '모의고사'를 빠져나가는 것이 루다에게는 훨씬 더 시급하고도 위험한 과제였다."티, 팀장님! 숨 막혀요! 좀 떨어져서 이야기해요!"루다가 양손으로 태준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태준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안경 너머로 시선을 날카롭게 빛냈다."방어율 0%입니다, 이루다 PM. 대답하십시오. 가상의 인물이라도, 그게 누굽니까."결국 루다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아, 그냥 소개팅남요! 주말에 엄마가 억지로 내보낸 선자리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할게요! 그럼 우리 팀이냐는 의심도 완벽하게 피할 수 있잖아요!"그럴싸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준의 미간에 깊은 계곡이 파였다."기각합니다." "네? 왜요? 완전 완벽한 핑계잖아요!""가상의 인물이라도 제 앞에서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상정하는 건, 제 감정 제어 시스템에 매우 치명적인 오류를 일으킵니다. 아주 불쾌한 워딩이군요."질투. 이건 명백하고도 노골적인 강 로봇의 질투였다. 루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지만,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아, 진짜 깐깐하시네! 그럼 도대체 뭐라고 방어해요!""거짓말의 기본은 진실을 10% 섞는 겁니다. 그래야 심박수와 동공 지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죠."태준이 마침내 뒤로 물러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내일 최지원 대리의 유도심문 패턴은 명확할 겁니다. 변화구 없이 팩트로 곧장 찌르겠죠. '너 어제 미팅룸 테이블 밑에, 강 팀장이랑 둘이 숨어있었지?' 라고요."태준의 정확한 예측에 루다는 소름이 돋아 양팔을 문질렀다."맞아요. 지원이라면 진짜 대놓고 그렇게 물어볼 애예요. 그럼 뭐라고 해요?""향수의 출처와, 당신이 숨어있던 이유를 완벽하게 분리하십시오. 향수 냄새는 '나 들어가기 직전까지 팀장님이 거기서 본부장님 보고 자료를 검토하고 나갔기 때문'이라고 하고, 당신이 굳이 불 꺼진 테이블 밑에 숨어있었던 이유는……."태준이 잠시 뜸
Last Updated: 2026-05-06
Chapter: 제69화 : 최지원 대비 모의고사루다는 애써 입꼬리를 꾹 내리눌렀지만, 결국 삐져나오는 부드러운 미소를 막지 못했다.'아, 진짜. 이 사람한테는 못 당하겠다니까.'루다가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몰래 웃음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투둑, 타닥.차창 위로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거센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퇴근길 정체에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까지 겹치자, 올림픽대로에 진입한 태준의 세단은 붉은 테일램프가 끝없이 이어진 도로 위에 완벽하게 갇혀버렸다."……예측하지 못한 기상 이변으로 트래픽 지표가 최악이군요. 도착 시간이 무기한 지연될 것 같습니다."태준이 와이퍼 속도를 조절하며 낮게 말했다. 건조한 말투였지만, 핸들을 쥔 그의 긴 손가락이 미세하게 가죽 커버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괜찮아요. 비 오는 날 차 막히는 건 팀장님 통제 밖의 변수잖아요."루다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던 그때였다.꼬르륵-.빗소리를 뚫고 좁은 차 안에 울려 퍼진 아주 작지만 명확한 마찰음. 루다의 배가 아니라, 운전석 쪽에서 난 소리였다.루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완벽주의자 얼음 마왕, 강태준 팀장의 몸에서 난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울림이었다."……방금 들은 건, 차량의 소음입니다. 엔진 점검을 받을 때가 된 것 같군요."태준이 안경을 쓱 치켜올리며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 말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지만, 그의 귀끝은 이미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엔진이 엄청 배고파 보이는데요, 팀장님?""제어 시스템에 일시적인 에너지 고갈 현상이 발생한 것뿐입니다."그 철두철미한 남자가 예상치 못한 생리현상에 뚝딱거리는 모습이, 루다는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루다가 네비게이션 화면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이 앞에서 빠지면 드라이브스루 햄버거집 있어요. 엔진 오일 대신 햄버거 세트 어때요? 저도 배고프거든요."결국 마케팅 1팀의 폭군 강태준 팀장은 방향 지시등을 켜고 조용히 차를 돌렸다.15분 뒤.태준의 세단은 한강이
Last Updated: 2026-05-05
Chapter: 제68화 : 지 켜 본 다. 이루다파티션 너머에서 루다의 다급한 메시지를 확인한 태준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각자 퇴근.'태준의 중앙제어장치가 그 불경한 단어를 무려 여섯 번이나 스캔하고 분석했다. 하지만 도출되는 처리 결과는 매번 동일했다.'거절.'그는 안경을 한 번 치켜올리며, 키보드가 부서져라 빠르게 답장을 쳐 내려갔다.[강태준 팀장: '각자 퇴근' 건은 이미 반려했습니다. 재검토는 없습니다.][강태준 팀장: 최지원 대리의 예상 행동 반경은 제가 별도로 통제하겠습니다.]숫자 '1'이 사라지자마자, 태준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미팅룸 A 쪽을 한 번 훑더니, 곧장 머리를 쥐어뜯으며 엑셀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서은호의 등짝으로 향했다.태준이 천천히, 그러나 위압적인 걸음으로 이동했다.오후 5시 40분.퇴근을 20분 앞두고 마케팅 1팀 사무실은 '칼퇴'를 위한 묘한 흥분감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팀원들이 슬그머니 저장 파일을 닫고 가방을 챙기는 시늉을 하던 바로 그때였다.태준이 서은호 수석의 책상 앞에 우뚝 멈춰 섰다."서 수석님.""네엡! 예산안 분석, 오늘 밤 안으로 반드시 마무리하겠습니다!"태준의 그림자에 놀란 서은호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태준은 처절한 몰골의 서 수석을 한 박자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 최지원 대리 데리고 재무팀 김 차장과 저녁 미팅 다녀오십시오. 이번 공동 프로젝트 예산안 건은 서 수석이 직접 대응하는게 효율적이겠더군요.""예? 오늘 저녁이요? 지금……요?"은호의 눈이 탁구공만 해졌다. 퇴근 20분 전에 떨어지는 갑작스러운 저녁 미팅 지시. 직장인에게 이보다 끔찍한 처형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태준의 한 마디가 판도를 완전히 뒤집었다."재무팀 김 차장과는 방금 제가 사전 조율 해뒀습니다. 7시에 을지로 쪽 식사 자리입니다. 식사 메뉴는 한우 투뿔입니다. 미팅 후 비용은…… 이 법인 카드로 처리하면 됩니다."태준의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서 영롱한 '법인 카드'가 빛을 발
Last Updated: 2026-05-04
Chapter: 제67화 : 수사반장, 최지원 대리"아휴, 죽겠네. 지원 씨, 아까 그 함수 말인데요……."회의실 테이블 위로 두꺼운 서류철이 툭 놓이는 소리와 함께 은호와 지원의 발이 바로 옆에서 움직였다.테이블 아래. 루다는 쪼그려 앉은 태준의 품에 쏙 안겨 있었다. 태준은 한 손으로 루다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막아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프라푸치노가 쏟아질까 봐 조심스레 들고 있는 루다의 뺨 위로, 태준의 규칙적이고도 거친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쿵쾅, 쿵쾅, 쿵쾅.'미쳤어, 미쳤어, 미쳤어……!'루다는 숨소리조차 새어 나갈까 봐 태준의 셔츠 깃을 생명줄처럼 꽉 틀어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근데 강 팀장님, 아까부터 안 보이시네. 루다는 또 어디로 간 거지?"테이블 위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감과, 어둠 속에서 완벽하게 밀착된 서로의 체온이 주는 짜릿함이 교차하며 텐션은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아, 맞다! 지원 씨, 아까 본부장님이 지시하신 수정 기안도 같이 확인해야 해요. 빨리 가죠!"은호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수석님, 근데 이 회의실 묘하게... 히터도 안 틀었는데 훈훈하지 않아요?""예산안 때문에 땀을 한 바가지 흘려서 그래요! 얼른 갑시다!"은호와 지원의 구두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철컥' 하며 묵직한 회의실 문이 닫혔다.완벽한 정적이 찾아왔지만, 테이블 밑의 두 사람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강태준이 루다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가신 것 같아요, 팀장님."루다가 귓가에 닿아 있는 태준의 가슴팍을 톡톡 밀어내며 작게 속삭였다. 그제야 태준이 굳게 닫혔던 입술을 떼고 몸을 살짝 뒤로 물렀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태준의 완벽했던 수트 바지는 테이블 다리에 쓸려 먼지가 묻어 있었고, 루다는 잔뜩 웅크린 탓에 다리가 저려왔다."아이고, 내 다리……. 쥐
Last Updated: 2026-04-30
Chapter: 제66화 : 아니, 또 서은호!?탕비실에서의 아찔했던 소동이 지나간 오후.마케팅 1팀 사무실은 겉보기엔 평화로웠지만, 파티션 곳곳에서는 각기 다른 이유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아아아악! 2024년도 3분기 예산 결산, 이거 숫자가 왜 안 맞아! 쥐꼬리만한 예산을 이렇게 버라이어티하게 쓰는게 말이 되냐고!"서은호 수석이 모니터를 부여잡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태준이 내린 '마케팅 본부 3년 치 예산 계획 비교 분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업무 폭탄을 정통으로 맞은 그는, 이미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엑셀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그 처참한 광경을 파티션 너머로 지켜보던 루다는 노트북 자판 위에 이마를 박고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다.'아아, 수석님, 죄송해요. 저랑 팀장님의 그 불건전한(?) 사내 연애 행각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선배님이 십자가를 지고 계시네요…….'그때였다. 의자 바퀴가 마찰하는 스르륵 소리와 함께, 루다의 옆자리로 최지원 대리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지원의 두 눈은 먹잇감을 포착한 매처럼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야, 이루다.""어, 어? 왜?""너 아까 탕비실에서 강 팀장님이랑 같이 있었지?"루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원은 루다의 흔들리는 동공을 놓치지 않고 바짝 추궁했다."아까 서 수석님이 탕비실 다녀오시더니, 갑자기 예산 폭탄 맞았다고 난리 치시잖아. 팀장님이 피자집 영수증 한 장에 저렇게까지 빡치실 리가 없는데. 너네 둘이 안에서 뭐 했어?""무, 무슨 소리야! 아까 서 수석님 들어오셨을 때 나 냉장고 정리하고 있었어!"루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쥐어짜 냈다."그리고 팀장님이랑은 그…… 커, 커피 머신! 그래, 커피 머신 효율 증가 매뉴얼에 대해 아주 심도 깊은 데이터 토론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야!""커피 머신 효율? 푸하하하, 너 귀 끝 빨개진 거 다 보이거든?"지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때마침 울린 거래처의 전화 덕분에 루다는 간신히 취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일단
Last Updated: 2026-04-30
Chapter: 제65화 : 또 서은호!?그렇게 한참을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이던 민호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간신히 숨을 골랐다."책, 책임님……. 방금 그 대사, 대체 어떤 곳에서 검색해 오신 겁니까?""출처는 영업 기밀입니다. 제 데이터 수집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시는 겁니까?""아니요! 완전 신뢰도 200%입니다. 아니, 진짜 미치겠네……."민호는 양손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빈틈없는 완벽주의자인 상사가, 고작 자신을 꼬셔보겠다고(?) 저런 말도 안 되는 대사를 진지하게 외워왔다는 사실이 귀여워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민호가 테이블 위로 상체를 훅 숙이며 유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책임님이 저한테 무기징역 선고하셨잖아요. 그럼 이제 저는 책임님 옆에 평생 수감되어야 하는 거네요?""……논리적 비약이 심하군요. 징역형의 집행은 국가 기관의 권한…….""국가 기관 말고, 책임님 전용 감옥이요."민호가 특유의 서글서글한 대형견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유진의 커피잔 옆으로 자신의 손을 슬며시 겹쳐왔다. 유진의 차가운 손등 위로 민호의 뜨거운 체온이 훅 끼쳐왔다."저 안 도망갈 테니까, 간수님이 꽉 잡고 계세요."징- 지이잉-! 이번엔 유진의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 워치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차유진 - 현재 심박수 : 162 BPM. 안정을 취하십시오.]유진은 화들짝 놀라며 손목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방금 전까지 플러팅 시뮬레이션을 완벽하게 가동했다고 자부했던 그녀의 차가운 이성 회로가, 연하남의 능구렁이 같은 역습 한 번에 처참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기, 기계 결함입니다. 이 스마트 워치의 심박수 센서가 주변 전파의 간섭을 받아서…….""에이, 기계는 거짓말 안 한다면서요. 간수님?"민호의 넉살 좋은 웃음소리가 카페를 채웠다. 텍스트로 배운 어설픈 플러팅이 쏘아 올린 나비효과는, 두 사람의 주말을 걷잡을 수 없이 달달한 핑크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그렇게 모두의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쳤던 폭풍 같은 주말이 지나가고.드디어
Last Updated: 2026-04-30
Chapter: 제 77 화 : 시작검은 수첩의 절반 가까이가 빼곡한 글자로 채워진 어느 날 밤, 석호는 처음으로 태성그룹 외부의 선에 연락을 취했다. 상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자였다. 태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에 몸담은 사람. 기업의 복잡한 재무 구조를 해체하고 치부를 발라내는 데 기계적인 정확성을 가진 전문가. 석호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패로 분류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제 검증은 끝났다.통화는 짧았다."만날 수 있겠습니까.""무슨 일입니까.""태성입니다."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상대는 놀라움을 소리로 내뱉는 대신 침묵으로 갈음했다. 이내 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왔다."언제가 좋겠습니까."석호는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한겨울의 서울은 거대하고 차가운 불빛들의 군락이었다. 저 무수한 빛의 중심에 채은성이 존재했다.시작이었다.밤의 석호가 은성의 세계를 해체할 도면을 그리는 동안, 낮의 석호는 변함없이 완벽하게 작동했다.아니, 오차율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제로에 수렴했다. 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과를 장악하는 일은 비서의 단순 업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몰아넣기 위한 경로 설계였다. 은성이 삼키는 물의 온도, 마주치는 임원들의 동선, 결재 서류가 올라가는 타이밍. 그 모든 것이 석호의 손끝에서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은성은 자신이 걷는 길이 석호가 깔아둔 레일 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호흡하는 공기의 성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석호는 무해하고 완벽한 공기가 되어 은성의 주변을 감쌌다.어느 날 저녁이었다.유독 야근이 길어졌다. 43층의 모든 인력이 빠져나가고, 은성의 집무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옅은 불빛만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채은성이었다. 맞춤형 재킷을 한 손에 든 채, 답답한 듯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내리며 걸어 나왔다. 석호는 소리 없이 다가가 미리 준비해 둔 코트를 내밀었다. 은성
Last Updated: 2026-04-19
Chapter: 제 76 화 : 수집아침의 햇살은 간밤의 어둠 속에서 내린 결론처럼 선명했다.43층 복도 끝, 석호는 자신의 책상 앞에 섰다.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한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 감정이 거세된 정갈한 몸가짐. 겉으로 보기에 윤석호라는 시스템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가동되고 있었다.하지만 그 견고한 시스템의 내부는 밤사이 완전히 다른, 단 하나의 명령어로 덮어씌워져 있었다.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정을 관리하고, 전화를 걸러내며, 문서를 검토하는 일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그것은 사냥감이 지나갈 길목을 파악하고, 사냥감의 호흡을 계산하며, 사냥감의 시야를 통제하는 정교한 조련의 과정이었다. 자신이 비서라는 위치를 핑계로 은성의 하루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은성이 먹는 것, 만나는 사람, 머무는 공간, 심지어 그가 마시는 차의 온도조차 석호의 손끝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오전 10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출근했다.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고개를 숙였다 드는 찰나의 순간, 석호의 시선이 은성의 전신을 핥듯 훑고 지나갔다. 흐트러진 은발, 미세하게 구겨진 셔츠의 깃, 나른함을 넘어 짜증이 묻어나는 발걸음. 예전 같았다면 '오늘의 기상도'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 수집에 불과했을 그 모든 디테일들이, 이제는 망막에 화인처럼 찍혀 뇌리로 직행했다.“오전 결재 서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은성은 언제나처럼 석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무심한 뒷모습을 보며 석호는 묘한 해갈을 느꼈다. 저 오만함이, 저 무관심이 언젠가 자신의 발밑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그 무렵부터 석호는 은성이 남기는 '파편'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충동에 가까운, 아주 사소한 일탈이었다. 어느 날 오후, 은성이 외부 임
Last Updated: 2026-04-19
Chapter: 제 75 화 : 이름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두 번째로 함께 맞는 여름이었다.석호는 여전히 매일 아침 정각 8시, 43층 복도 끝 자신의 책상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성의 일정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했고, 걸려온 전화를 분류했으며, 완벽한 온도의 차를 준비했다.마치 기계처럼, 완벽하게.달라진 것이 없다는 석호의 생각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었다. 은성을 볼 때 일어나는 이상한 감정. 석호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몰랐고, 자신이 정의하지 못한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어느 눈부신 오전이었다.은성이 평소보다 한참 늦게 출근했다. 전날 밤 요란한 파티가 있었다는 것을 석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석호가 은성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은성은 알지 못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43층으로 들어왔다. 실내인데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재킷도 걸치지 않은 채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걸음이 느렸다. 평소에도 은성의 걸음걸이는 느린 편이었지만, 그 속도보다 훨씬 더 느리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석호는 아무 말 없이 은성에게 시원한 물 한 잔과 미리 준비해 둔 숙취 해소제를 내밀었다.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석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성은 아무 말 없이 석호가 건넨 물과 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털썩,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아 약을 삼키고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어떻게 알았어?""어제 일정을 보고 짐작했습니다."은성은 낮고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쓸모는 있네."칭찬이 아니었다. 그저 도구의 효용 가치를 확인하고 읊조리는 건조한 언어였다. 은성에게 석호는 그저 도구였다. 아주 쓸모 있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석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물과 약을 내밀었던 석호의 손끝은, 그것을 받아쥐는 은성의 손을 찰나의 순간 동안 따라가고 있었다."감사합니다."은성이 피식, 짧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깊게 눈을 감았다.석호는 은성의
Last Updated: 2026-04-19
Chapter: 제 74 화 : 잔상석 달이 지났다.석호는 매일 아침 정각 8시,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43층 복도 끝에서 업무를 시작했다.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성실함이라기보다 잘 세팅된 기계의 작동 방식에 가까웠다.석호는 은성의 모든 일정을 조율했고, 쏟아지는 전화를 걸러냈으며,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제된 요약본으로 탈바꿈시켰다. 은성이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차를 내놓았고,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원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배치했다.감정이 거세된 행동, 말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석호 역시 스스로 업무 능력에 오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내왔으니까. 하지만 칭찬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밑바닥부터 결벽에 가까운 실력과 절제로 살아온 석호에게 이런 완벽함은 그저 기본값이었다. 당연한 것에는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세상에서의 진리였다.실제로 채은성은 단 한 번도 석호를 칭찬하지 않았다. 고마워하지도, 그 유능함을 특별히 인정하지도 않았다. 마치 공기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석호는 그 당연함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무색무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여기에서 살아남기에는 훨씬 수월했으니까.어느 오후였다.예정된 회의가 두 시간을 훌쩍 넘기며 길어졌다. 복도에는 정적과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감돌았지만, 석호는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필요할 때 곁에 없는 것보다, 필요하지 않을 때조차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석호만의 방식이었다.마침내,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은성이 나타났다. 석호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태를 읽어냈다. 복도를 딛는 구두 소리의 날카로운 강도, 미세하게 굳은 미간의 각도. 예측하지 못하면 통제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석호의 무능을 의미했다."차 가져와.""준비되어 있습니다."은성은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석호 쪽으로 흘리듯 던졌다. 석호는 그것을 공중에서 낚아채듯 받아냈다. 자연스
Last Updated: 2026-04-19
Chapter: 제 73 화 : 첫날면접은 짧았다.다섯 가지의 질문과 대답 다섯번, 그것으로 면접은 끝이 났다. 면접관이 서류를 덮고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합격입니다. 축하해요. 오늘 중으로 인사팀에서 연락이 갈 예정입니다."석호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저 익힌 대로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복도로 나오자 태성그룹 본사 43층의 광활한 풍경이 석호를 압도하듯 펼쳐졌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통유리창 너머로 온세상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였다.석호는 잠시 그 풍경 앞에 멈춰 서서 자신이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 보낸 무수한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특별한 감회 같은 것은 없었다. 오직 다음 할 일만 머릿속에 있었다. 감회는 나중에 느끼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치품이라고 생각했다.목적이 뚜렷한 삶에는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아주 미세한 흔들림조차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흔들리지 않는 강철처럼 단련해왔다. 그것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석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정적만이 감돌던 복도 끝에서 낯선 인기척이 일었다. 석호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고, 복도 끝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석호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남자. 은빛에 가까운 머리칼이 복도의 조명 아래서 이질적으로 빛났다. 남자의 걸음은 느릿했고, 태도는 지나치게 나른했다. 마치 이 거대한 빌딩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인 양,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오만함이 그 걸음걸이에 배어 있었다.그건 단순히 배워서 흉내 낼 수 있는 종류의 태도가 아닌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공간을 걸어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몸으로 익힌 우아함은 마음으로 애써 꾸며낸 가식과는 달랐다.남자는 서류 봉투를 쥔 채 창밖의 세상을 건조하게 바라보며 걸었다. 세상 모든 것이 시시해 죽겠다는 듯한, 혹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Last Updated: 2026-04-19
Chapter: 제 72 화 : 완결어제 하루 종일 내리던 굵은 비가 씻어내린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높고 맑았다. 이 거대한 펜트하우스에서 눈을 뜨는 것이 오늘로 마지막일지, 아니면 다시 반복될 일상일지. 은성은 밤을 지새우고도 끝내 그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은성은 바닥에 쏟아진 눈부신 햇살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을 틀어 얼굴을 씻어냈다. 수도꼭지를 트는 것도 손에 물을 받아 얼굴에 대는 것도 아무런 감정도, 감각도 없는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였다.거울 속에 물기가 뚝뚝 떨어지며 창백하게 가라앉은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은성은 그 낯선 얼굴을 오래도록 살펴 보았다. 처음 이 펜트하우스로 오게 되던 날 밤의 얼굴과 지금 거울 너머로 자신을 마주 보는 얼굴, 무엇이 달라졌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은성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시선이 목 위에서 걸렸다. 물기에 젖은 하얀 목덜미 위에서 백금 초커가 차갑게 빛을 튕겨냈고, 그 자리에서 번진 빛이 은성의 눈에 조용히 와 박혔다. 석호가 깊은 배수구 속으로 그 열쇠를 던져버리던 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작은 열쇠가 어두운 배관을 타고 끝없이 추락하며 부딪히던 소리, 그 소리는 작고 짧았지만 은성의 귀 속에는 유난히 오래, 그리고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은성은 석호의 구속이 영원하고 세상과의 완전한 단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소름 끼치게도, 도망칠 곳이 사라졌다는 그 사실에 오히려 깊이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었다. 그 안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는 끝까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여전히, 끝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지금의 나는 어떤가'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은성은 끝내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수건을 들어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 거울 속 자신을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걸어 나가자, 낯익은 넓은 등판이 보였다. 석호가 서 있었다.석호는 익숙한 동작으로 커피를 두 잔 내리고 있었다. 주름 하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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