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anda / 비엘 / 개였던 당신에게 / 제 77 화 :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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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7 화 : 시작

Penulis: 필루사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4-19 19:58:45
검은 수첩의 절반 가까이가 빼곡한 글자로 채워진 어느 날 밤, 석호는 처음으로 태성그룹 외부의 선에 연락을 취했다. 상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자였다. 태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에 몸담은 사람. 기업의 복잡한 재무 구조를 해체하고 치부를 발라내는 데 기계적인 정확성을 가진 전문가. 석호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패로 분류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제 검증은 끝났다.

통화는 짧았다.

"만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태성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상대는 놀라움을 소리로 내뱉는 대신 침묵으로 갈음했다. 이내 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언제가 좋겠습니까."

석호는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한겨울의 서울은 거대하고 차가운 불빛들의 군락이었다. 저 무수한 빛의 중심에 채은성이 존재했다.

시작이었다.

밤의 석호가 은성의 세계를 해체할 도면을 그리는 동안
필루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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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였던 당신에게   제 77 화 : 시작

    검은 수첩의 절반 가까이가 빼곡한 글자로 채워진 어느 날 밤, 석호는 처음으로 태성그룹 외부의 선에 연락을 취했다. 상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자였다. 태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에 몸담은 사람. 기업의 복잡한 재무 구조를 해체하고 치부를 발라내는 데 기계적인 정확성을 가진 전문가. 석호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패로 분류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제 검증은 끝났다.통화는 짧았다."만날 수 있겠습니까.""무슨 일입니까.""태성입니다."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상대는 놀라움을 소리로 내뱉는 대신 침묵으로 갈음했다. 이내 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왔다."언제가 좋겠습니까."석호는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한겨울의 서울은 거대하고 차가운 불빛들의 군락이었다. 저 무수한 빛의 중심에 채은성이 존재했다.시작이었다.밤의 석호가 은성의 세계를 해체할 도면을 그리는 동안, 낮의 석호는 변함없이 완벽하게 작동했다.아니, 오차율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제로에 수렴했다. 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과를 장악하는 일은 비서의 단순 업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몰아넣기 위한 경로 설계였다. 은성이 삼키는 물의 온도, 마주치는 임원들의 동선, 결재 서류가 올라가는 타이밍. 그 모든 것이 석호의 손끝에서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은성은 자신이 걷는 길이 석호가 깔아둔 레일 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호흡하는 공기의 성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석호는 무해하고 완벽한 공기가 되어 은성의 주변을 감쌌다.어느 날 저녁이었다.유독 야근이 길어졌다. 43층의 모든 인력이 빠져나가고, 은성의 집무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옅은 불빛만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채은성이었다. 맞춤형 재킷을 한 손에 든 채, 답답한 듯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내리며 걸어 나왔다. 석호는 소리 없이 다가가 미리 준비해 둔 코트를 내밀었다. 은성

  • 개였던 당신에게   제 76 화 : 수집

    아침의 햇살은 간밤의 어둠 속에서 내린 결론처럼 선명했다.43층 복도 끝, 석호는 자신의 책상 앞에 섰다.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한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 감정이 거세된 정갈한 몸가짐. 겉으로 보기에 윤석호라는 시스템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가동되고 있었다.하지만 그 견고한 시스템의 내부는 밤사이 완전히 다른, 단 하나의 명령어로 덮어씌워져 있었다.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정을 관리하고, 전화를 걸러내며, 문서를 검토하는 일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그것은 사냥감이 지나갈 길목을 파악하고, 사냥감의 호흡을 계산하며, 사냥감의 시야를 통제하는 정교한 조련의 과정이었다. 자신이 비서라는 위치를 핑계로 은성의 하루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은성이 먹는 것, 만나는 사람, 머무는 공간, 심지어 그가 마시는 차의 온도조차 석호의 손끝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오전 10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출근했다.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고개를 숙였다 드는 찰나의 순간, 석호의 시선이 은성의 전신을 핥듯 훑고 지나갔다. 흐트러진 은발, 미세하게 구겨진 셔츠의 깃, 나른함을 넘어 짜증이 묻어나는 발걸음. 예전 같았다면 '오늘의 기상도'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 수집에 불과했을 그 모든 디테일들이, 이제는 망막에 화인처럼 찍혀 뇌리로 직행했다.“오전 결재 서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은성은 언제나처럼 석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무심한 뒷모습을 보며 석호는 묘한 해갈을 느꼈다. 저 오만함이, 저 무관심이 언젠가 자신의 발밑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그 무렵부터 석호는 은성이 남기는 '파편'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충동에 가까운, 아주 사소한 일탈이었다. 어느 날 오후, 은성이 외부 임

  • 개였던 당신에게   제 75 화 : 이름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두 번째로 함께 맞는 여름이었다.석호는 여전히 매일 아침 정각 8시, 43층 복도 끝 자신의 책상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성의 일정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했고, 걸려온 전화를 분류했으며, 완벽한 온도의 차를 준비했다.마치 기계처럼, 완벽하게.달라진 것이 없다는 석호의 생각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었다. 은성을 볼 때 일어나는 이상한 감정. 석호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몰랐고, 자신이 정의하지 못한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어느 눈부신 오전이었다.은성이 평소보다 한참 늦게 출근했다. 전날 밤 요란한 파티가 있었다는 것을 석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석호가 은성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은성은 알지 못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43층으로 들어왔다. 실내인데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재킷도 걸치지 않은 채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걸음이 느렸다. 평소에도 은성의 걸음걸이는 느린 편이었지만, 그 속도보다 훨씬 더 느리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석호는 아무 말 없이 은성에게 시원한 물 한 잔과 미리 준비해 둔 숙취 해소제를 내밀었다.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석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성은 아무 말 없이 석호가 건넨 물과 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털썩,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아 약을 삼키고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어떻게 알았어?""어제 일정을 보고 짐작했습니다."은성은 낮고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쓸모는 있네."칭찬이 아니었다. 그저 도구의 효용 가치를 확인하고 읊조리는 건조한 언어였다. 은성에게 석호는 그저 도구였다. 아주 쓸모 있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석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물과 약을 내밀었던 석호의 손끝은, 그것을 받아쥐는 은성의 손을 찰나의 순간 동안 따라가고 있었다."감사합니다."은성이 피식, 짧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깊게 눈을 감았다.석호는 은성의

  • 개였던 당신에게   제 74 화 : 잔상

    석 달이 지났다.석호는 매일 아침 정각 8시,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43층 복도 끝에서 업무를 시작했다.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성실함이라기보다 잘 세팅된 기계의 작동 방식에 가까웠다.석호는 은성의 모든 일정을 조율했고, 쏟아지는 전화를 걸러냈으며,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제된 요약본으로 탈바꿈시켰다. 은성이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차를 내놓았고,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원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배치했다.감정이 거세된 행동, 말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석호 역시 스스로 업무 능력에 오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내왔으니까. 하지만 칭찬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밑바닥부터 결벽에 가까운 실력과 절제로 살아온 석호에게 이런 완벽함은 그저 기본값이었다. 당연한 것에는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세상에서의 진리였다.실제로 채은성은 단 한 번도 석호를 칭찬하지 않았다. 고마워하지도, 그 유능함을 특별히 인정하지도 않았다. 마치 공기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석호는 그 당연함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무색무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여기에서 살아남기에는 훨씬 수월했으니까.어느 오후였다.예정된 회의가 두 시간을 훌쩍 넘기며 길어졌다. 복도에는 정적과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감돌았지만, 석호는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필요할 때 곁에 없는 것보다, 필요하지 않을 때조차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석호만의 방식이었다.마침내,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은성이 나타났다. 석호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태를 읽어냈다. 복도를 딛는 구두 소리의 날카로운 강도, 미세하게 굳은 미간의 각도. 예측하지 못하면 통제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석호의 무능을 의미했다."차 가져와.""준비되어 있습니다."은성은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석호 쪽으로 흘리듯 던졌다. 석호는 그것을 공중에서 낚아채듯 받아냈다. 자연스

  • 개였던 당신에게   제 73 화 : 첫날

    면접은 짧았다.다섯 가지의 질문과 대답 다섯번, 그것으로 면접은 끝이 났다. 면접관이 서류를 덮고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합격입니다. 축하해요. 오늘 중으로 인사팀에서 연락이 갈 예정입니다."석호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저 익힌 대로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복도로 나오자 태성그룹 본사 43층의 광활한 풍경이 석호를 압도하듯 펼쳐졌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통유리창 너머로 온세상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였다.석호는 잠시 그 풍경 앞에 멈춰 서서 자신이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 보낸 무수한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특별한 감회 같은 것은 없었다. 오직 다음 할 일만 머릿속에 있었다. 감회는 나중에 느끼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치품이라고 생각했다.목적이 뚜렷한 삶에는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아주 미세한 흔들림조차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흔들리지 않는 강철처럼 단련해왔다. 그것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석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정적만이 감돌던 복도 끝에서 낯선 인기척이 일었다. 석호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고, 복도 끝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석호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남자. 은빛에 가까운 머리칼이 복도의 조명 아래서 이질적으로 빛났다. 남자의 걸음은 느릿했고, 태도는 지나치게 나른했다. 마치 이 거대한 빌딩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인 양,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오만함이 그 걸음걸이에 배어 있었다.그건 단순히 배워서 흉내 낼 수 있는 종류의 태도가 아닌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공간을 걸어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몸으로 익힌 우아함은 마음으로 애써 꾸며낸 가식과는 달랐다.남자는 서류 봉투를 쥔 채 창밖의 세상을 건조하게 바라보며 걸었다. 세상 모든 것이 시시해 죽겠다는 듯한, 혹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 개였던 당신에게   제 72 화 : 완결

    어제 하루 종일 내리던 굵은 비가 씻어내린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높고 맑았다. 이 거대한 펜트하우스에서 눈을 뜨는 것이 오늘로 마지막일지, 아니면 다시 반복될 일상일지. 은성은 밤을 지새우고도 끝내 그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은성은 바닥에 쏟아진 눈부신 햇살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을 틀어 얼굴을 씻어냈다. 수도꼭지를 트는 것도 손에 물을 받아 얼굴에 대는 것도 아무런 감정도, 감각도 없는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였다.거울 속에 물기가 뚝뚝 떨어지며 창백하게 가라앉은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은성은 그 낯선 얼굴을 오래도록 살펴 보았다. 처음 이 펜트하우스로 오게 되던 날 밤의 얼굴과 지금 거울 너머로 자신을 마주 보는 얼굴, 무엇이 달라졌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은성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시선이 목 위에서 걸렸다. 물기에 젖은 하얀 목덜미 위에서 백금 초커가 차갑게 빛을 튕겨냈고, 그 자리에서 번진 빛이 은성의 눈에 조용히 와 박혔다. 석호가 깊은 배수구 속으로 그 열쇠를 던져버리던 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작은 열쇠가 어두운 배관을 타고 끝없이 추락하며 부딪히던 소리, 그 소리는 작고 짧았지만 은성의 귀 속에는 유난히 오래, 그리고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은성은 석호의 구속이 영원하고 세상과의 완전한 단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소름 끼치게도, 도망칠 곳이 사라졌다는 그 사실에 오히려 깊이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었다. 그 안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는 끝까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여전히, 끝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지금의 나는 어떤가'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은성은 끝내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수건을 들어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 거울 속 자신을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걸어 나가자, 낯익은 넓은 등판이 보였다. 석호가 서 있었다.석호는 익숙한 동작으로 커피를 두 잔 내리고 있었다. 주름 하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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