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7식사가 끝나고, 세 사람은 한정식집 현관 앞으로 나왔다.밤공기가 선선했다.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돌계단 아래로 수행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강두수 회장은 외투를 걸치며 유봄을 향해 몸을 돌렸다.“봄아.”이제는 이름도 자연스럽게 불렀다.“이제 편하게 우리 집에도 놀러 오너라.눈치 보지 말고.”그리고 옆에 서 있는 강민재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이놈이 열받게 하면 바로 나한테 연락하고.”지팡이로 바닥을 툭 치며 덧붙였다.“내가 이 녀석 혼꾸녕을 제대로 내줄테니.”강민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할아버지, 누구 편이세요?”강두수는 단호했다.“당연히 봄이 편이지.”유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님.”그러다 눈을 맞추며 덧붙였다.“건강 조심하세요. 무리하지 마시고요.”그러자 강두수가 껄껄 웃었다.“손주며느리가 유명한 의사인데 뭐가 걱정인가?”“이제 나는 든든해.”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만족이 어려 있었다.차 문이 열리고, 강두수는 타기 전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둘이 잘 어울린다.”짧은 한마디.그러고는 차에 올랐다.검은 세단이 천천히 출발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그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했다.차가 완전히 사라지자, 강민재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합격이네.”
Last Updated: 2026-09-20
Chapter: 96차창 밖으로 한정식집의 한옥 지붕이 보였다.잠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서 내렸다.이번에는 강민재가 먼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놓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한옥 안쪽 가장 깊은 별실.창밖으로 작은 정원이 보이고, 대청마루 너머로 은은한 조명이 비쳤다.잘 다려진 한지 메뉴판과 정갈하게 세팅된 놋그릇들.그 앞에 앉은 사람은 강두수 회장이었다.겉으로는 태연했다.지팡이를 옆에 세워두고 차를 한 모금 마시는 모습은 언제나처럼 묵직했다.하지만 잔을 내려놓는 손끝에 아주 미세한 긴장이 스며 있었다.몇 년 전부터였다.“여자친구 있습니다.”그 한마디만 남기고 한 번도 제대로 소개하지 않던 손주.그 고집 센 놈이 오늘에야 정식으로 인사를 시키겠다 했다.어떤 사람이기에.기업가 집안의 딸도 아니고, 정략적으로 얽힌 관계도 아니고, 손주가 저리도 단단히 마음을 준 여자라니.강두수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궁금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걱정은 없었다.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민재가 그렇게까지 아끼는 여자라면…’괜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손주놈은 일은 차갑게 해도 사람 보는 눈만큼은 정확했다.자신을 닮았으니까.문밖에서 직원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회장님, 손님 도착하셨습니다.”강두수는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심장이 아주 조금 빨리 뛰었다.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대기업 총수다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그래, 어디 한번 보자.’손주놈이 그토록 좋아한다는 여자.그 문이 열리는 순간을 조용히 기다
Last Updated: 2026-09-19
Chapter: 95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 층을 단독으로 쓰는 공간이 고요하게 펼쳐졌다.강민재의 펜트하우스는 처음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밤이 한눈에 들어왔다.한강과 도심의 불빛이 겹겹이 쌓여 마치 별이 땅으로 내려앉은 듯 반짝였다.80평이 넘는 넓은 공간, 절제된 인테리어, 그러나 차갑지 않은 온기.유봄은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서울… 참 예쁘네요.”유리창에 비친 불빛을 바라보며 아이처럼 미소 지었다.강민재는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다가왔다.“당신이 좋다면… 여기로 할까.”“뭘요?”유봄이 돌아보자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신혼집.”공기가 잠시 멈춘 듯 고요해졌다.“당신이 싫다고 하면 다른 데 알아볼게.더 넓은 곳이든, 한강이 더 가까운 곳이든.”유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강민재는 대답 대신 그녀의 뒤로 다가섰다.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함께 서울 야경을 향했다.그의 턱이 그녀의 어깨 위에 닿았다.“근데…”낮게 웃으며 속삭였다.“우리 애들 태어나면 흙 밟으면서 뛰어놀아야 하지 않겠어?”유봄의 숨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정원 있는 집이 좋겠다.잔디 깔고, 작은 그네도 놓고.”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그려온 미래처럼 자연스러운 말투였다.그의 품 안에서 유봄의 심장이 천천히 빨라졌다.이 남자는 현재만 말하지 않는다.항상, 자신과 함
Last Updated: 2026-09-18
Chapter: 94강민재는 잠시 휴대폰을 확인했다.그리고 고개를 들었다.“미안합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짧고 단정한 거절.핑계도, 애매한 여지도 없었다.이미연은 순간 아쉬움이 스쳤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아, 그러시구나. 그럼 다음에 뵈어요.”“네. 다음 주 회의 때 뵙겠습니다.”그는 정중하게 인사하고자신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망설임 없이.이미연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사업 이야기 외에는 단 한 발짝도 곁을 허락하지 않는 남자.함부로 웃지도 않고, 의미 없는 기대를 주지도 않는다.그래서 더 어려웠고, 그래서 더 끌렸다.‘저 사람…’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차 문을 열기 전, 강민재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이미연의 시선이 가늘어졌다.일할 때와 전혀 다른 톤.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그녀의 승부욕을 자극했다.사업은 계산으로 따낼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다르다.이미연은 천천히 차에 올라타며 생각했다.‘그래요, 강민재 대표님.’사업 파트너로는 충분히 곁에 섰다.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조급하게 들이대지 않는다.대신 자연스럽게, 그의 일상 안으로 스며들 것이다.그가 쉽게 허락하지 않을수록 그의 곁은 더 가치 있어 보였다.그리고 이미연은 도전적인 것을 포기해 본 적이 없었다.공항을 빠져나온 차량이 올림픽대로에 올라섰다.창밖으로 한강이 스쳐 지나갔다.이미연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아까 본 장면이 계속
Last Updated: 2026-09-17
Chapter: 93미드웨스트 병원의 수술실.최재성은 늘 그렇듯 완벽했다.로봇 암이 그의 손끝처럼 움직였고, 출혈은 거의 없었다.수술이 끝나자 스태프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그는 담담히 장갑을 벗을 뿐이었다.그의 머릿속에는, 문득 몇 년 전 기억이 스쳤다.캐나다 학회장에서였다.산부인과 로봇수술 세션에서 발표하던 한국인 의사.차분하지만 단단한 목소리.질문이 쏟아졌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받아치던 태도.유봄.그는 객석 뒤편에서 그녀를 지켜봤었다.끝나고 악수를 나누며 “인상 깊었습니다”라고 짧게 말했을 때, 유봄은 예의 바르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그 미소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얼마 뒤, 그녀가 한국의 대한병원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잠시 아쉬움을 느꼈다.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그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었으니까.그리고 오늘, 한 통의 제안서가 도착했다.서울 한양병원.로봇센터장 직함.전폭적 지원.파격 연봉.센터 운영 독립권 보장.조건은 과감했고, 메시지는 분명했다.― 대한병원에 맞설 카드가 되어달라.최재성은 파일을 천천히 읽다가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재밌겠네.”대한병원.그리고 그곳에 있는 유봄.망설임은 없었다.그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제안 수락합니다. 일정 조율하시죠.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서울 의료계의 균형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그의 결정에는 야망도 있었고, 승부욕도 있었고,그리고 아주 약간, 다시 한 번 그녀를 보고 싶다는 마음도 섞여 있었다.인천공항 VIP 게이트 앞.한양병원 전략기획실장과 홍보팀장이 직접 마중 나와 있었다.기자 몇 명이 멀찍이 대기하고 있었고, 플래시가 터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검은 코트를 걸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최재성.짧은 악수, 간결한 인사.“멀리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교수님.”“서울이라면 올 가치가 있죠.”담백한 대답.그러나 눈빛은 이미 계산을 끝낸 사람의 것이었다.한양병원 이사회실.이사장은 직접 자
Last Updated: 2026-09-16
Chapter: 92경포 바닷가에 인접한 호텔 주차장에 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심지호는 시동을 끄자마자 옆자리에 앉은 유지원을 힐끗 보며 낮게 웃었다.“처음도 아닌데 왜 그렇게 굳어 있어.”유지원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바다 위로 호텔 불빛이 길게 번지고 있었다.그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척하며 그녀를 재촉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조차 그의 시선은 노골적이었다.객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오늘은 유난히 예쁘네.”그의 손이 어깨에 닿자 유지원은 본능처럼 한 발 물러섰다.“교수님… 저 아직 씻지도 않았어요.”그녀는 자연스럽게 욕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잠시라도 거리를 두고 싶다는 듯.심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상관없어.”짧은 한마디였다.방 안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유지원의 표정은 더 이상 설렘도, 긴장도 아니었다. 계산과 피로가 뒤섞인 얼굴.이 관계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창밖에서는 파도 소리가 낮게 밀려오고 있었다.서울 본가 저녁 식탁.김지숙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한숨부터 내쉬었다.“여보, 우리 지원이는 언제까지 강릉에만 둘 거예요?”유재원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아꼈다.“아직은 더 배워야지.”“더 배워야 한다니요. 거기 간 지도 벌써 3년이 넘었어요. 분원에서 할 만큼 했잖아요. 이제 본원으로 불러야죠.”김지숙의 목소리는 점점 날이 섰다.“봄이는 오자마자 교수로 자리 잡고, 지원이는 아직도 분원이라니… 체면도 생각해야죠.”그 말에 유재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사실 그는 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강릉에서의 시간은 나쁘지 않다.본원에 오면 비교는 더 노골적이 될 것이다.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이쯤이면… 조금은 나아졌겠지.’아버지로서의 기대였다.어쩌면 바람에 가까운.유재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인사 때 한번 검토해보지.”김지숙의 얼굴이 그제야 풀렸다.
Last Updated: 2026-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