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는 눈을 마주쳤다.‘드디어 우리와 협상을 하려는 건가?!’이순정은 바로 창가에서 내려왔다.창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아주 작은 창문이었는데, 심지어 위아래로 열리는 디자인이었다. 성인은 전혀 몸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말이 안 됐다.이순정이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일 뿐이며, 도겸과 담판을 하기 위해서였다.‘다행히 성공했어.’그러나 이순정이 철봉과 뒤뚱뒤뚱 도겸의 사무실로 걸어갈 때, 뒤에 있던 비서는 처량하고 어두운 눈빛으로 그들 모자를 바라보았다.그 속에는 심지어 동정이 깃들어 있었다....이순정과 철봉이 이 사무실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이곳이 화려하다고 느꼈다.이순정도 에두르지 않고 들어온 후 직접 가격을 제시했다.“10억.”도겸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전엔 100억이라고 원하지 않았어요?”이순정은 마음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나도 100억을 갖고 싶지만, 너희들이 줘야 말이지!’그동안 이순정은 부자에게 돈이 많지만 가끔은 정말 인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수십억을 들여 말을 한 마리 사거나 골프를 쳤으며, 심지어 카지노에서 수천억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 푼도 나눠주고 싶지 않았다.‘구두쇠야 뭐야! 돈이 그렇게 많으니 우리에게 좀 나눠주면 안 돼?!’그리고 이순정은 부자들이 허리를 굽힐 수도 있지만 동시에 매정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관건은 자신에게 이용가치가 있어야 했다.예를 들면, 서영숙은 처음에 돈으로 이순정 그들을 해결하려 할 때, 그야말로 엄청난 ‘성의’를 보였다.그러나 정말 화가 났다면, 전화조차 받지 않은 채 그들을 무시했다.그러니 진정한 부자들과 소통할 때, 억지를 부려도 소용없었다.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상대방을 화나게 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이순정은 들어온 후, 밖에 있을 때처럼 울고 보채지 않고 직접 가격을 불렀다.“요 며칠 나도 깨달
빌딩에서 나올 때, 이순정과 철봉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비록 100억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이순정이 평생 노력해서라도 벌 수 없는 돈이었다.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가려 했고, 이때 화물차 한 대가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처음에 그 화물차의 속도는 정상이어서 두 모자는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어차피 차가 먼저 양보할 테니까.그러나 쌍방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 때, 화물차가 갑자기 속도를 높이더니 두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엄마...”철봉은 놀라서 본능적으로 이순정을 불렀다.이순정은 반응이 빨라서 바로 아들을 잡아당기며 옆으로 피했다.“너 뭐야?! 사람 있는 거 못 봤어?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한 거야?! 눈이 먼 거야 아니면 뭘 잘못 먹은 거야? 지금 일부러 우릴 죽이려고 작정했어?! 배상해! 이건 반드시 돈으로 배상해야 된다고!”이순정은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길 중간에 서서 욕설을 퍼부었다.“이 일을 잘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로 떠날 생각하지 마! 방금 내가 반응이 빠르지 않았더라면 이미 저 멀리 날아갔을 거야. 우리 지금 당장 병원에 가서 모든 검사를 받을 거야.”“일단 어디 다쳤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상이 없어도 넌 여전히 책임을 져야 해. 우리가 너 때문에 충격을 받았으니까. 그러니 정신적 손해 배상금을 내야지...”철봉은 바로 바닥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기 시작했다.“엄마! 나 정말 깜짝 놀랐어! 너무 무서워! 나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지금은 낮이야 밤이야? 왜 내 눈앞이 이렇게 캄캄하지?”모자는 그야말로 천상의 호흡을 선보였다. 딱 봐도 전에 자주 이런 일을 한 게 분명했다.그러나 캡모자를 쓴 기사는 이 장면을 보고 차갑게 웃더니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이순정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철봉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커다란 창문 앞에서, 키가 훤칠한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도로에서 차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도겸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는데
상대방은 차갑게 말했다.[그 입 잘 단속해.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로 하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난 손을 써서 그 입 다물게 할 수도 있어.]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기사는 핸드폰을 들고 있는 채로 멍을 때렸는데, 등은 이미 흠뻑 젖었다....밤이 찾아오자, 도겸은 창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태양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하늘은 점차 어둠으로 뒤덮였고, 음침한 기운이 구석에서 솟아났다.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유리창에 남자의 훤칠한 모습이 비쳤다.이때 도겸은 갑자기 핸드폰을 들더니 번호를 입력했다.상대방은 아주 빨리 받았다.“재밌었어, 심현빈?”맞은편의 사람은 잠시 멈칫했다.[강도겸, 너 또 무슨 약을 잘못 먹은 거야?]도겸은 웃으며 말했다.“이성수가 너에게 전화하지 않았어?”이성수가 바로 그 기사의 이름이었다.현빈은 침묵에 잠겼다.“그럼 너에게 그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알려줬겠지?”현빈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정말 안타깝네. 이성수는 감옥에 들어갈까 봐 감히 그들을 죽이지 못했어. 이렇게 되면 난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니 네 계획도 물거품으로 된 거잖아.”현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넌 언제부터 알아차린 거야?]“허, 우리가 친구로 지낸지가 언젠데. 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역시 널 잘 알고 있어.”서영숙은 분명히 이순정 모자의 카드를 끊었고, 또 호텔로 하여금 두 사람을 쫓아내라고 했다.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잘 지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최고급 호텔로 바꾸며 매일 회사에 와서 도겸을 기다렸다.만약 뒤에 아무도 없었다면 그들은 지금까지 버틸 리가 없었다.현빈은 가볍게 웃었다.[내가 방심을 했군.]“왜?” 도겸은 핏줄이 불끈 솟아오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왜 이런 함정을 만든 거지?”그래도 절친이었지만, 현빈은 마음을 먹고 도겸을 감옥에 보내려 했다.만약 이성수가 정말 사람을 치어 죽인다면, 그는 바로 체포될 것이며, 처벌을 경감하기 위해 당연
“네가 정은을 위해 날 죽음으로 몰아넣을 줄은 정말 몰랐어.”‘심현빈에게 있어 정은이 뜻밖에도 이렇게 중요하다니.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계획을 짤 줄은 더욱 생각지도 못했어.’[계획?]현빈은 가볍게 웃었다.[그건 아니야. 다만 뒤에서 그 사람들을 조금 도왔을 뿐이니까.]도겸이 말한 것처럼, 이 계획에는 허점이 아주 많았다. 만약 현빈이 직접 나섰다면, 기필코 도겸을 감옥에 보냈을 것이다.[이렇게 간단한 함정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넌 콩밥을 먹어도 싸.]‘밑지지 않는 장사인 이상, 내가 왜 포기를 해야겠어?’성공하면 직접 도겸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도겸은 여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희를 책임져야 했다.‘실패해도 괜찮아, 난 강도겸 잘 사는 꼴 못 보니까.’“정말 비겁해!” 도겸은 이를 갈았다.“한 여자를 위해 날 구덩이로 밀어넣다니?”현빈은 감탄했다.[정은이는 일반 여자가 아니야...]그녀는 소정은이었다.도겸은 냉소를 지었다.“내 앞에서는 진지한 척할 필요가 없어.”[아니, 넌 몰라...]“허, 그래?” 도겸은 현빈을 비웃었다.“이기적인 네 마음을 모른다는 거야, 아니면 네 함정을 몰랐다는 거야? 심현빈, 넌 자신을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만약 네가 정말 정은이를 좋아했다면, 우리가 함께 한 그 6년 동안 왜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을까?”정은이 온갖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슬픔과 절망에 빠져 결국 가슴이 찢어지도록 내버려두었다.“친구의 여자친구라서 넘볼 수가 없었어? 너 같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었으니 어떻게 그런 감정을 느끼겠어? 넌 일부러 그랬던 거야!”도겸은 이성적으로 분석했다.“넌 일부러 정은이 나에게 상처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지켜봤어. 오직 이렇게 해야만 정은은 날 떠나기로 결심할 수 있고, 너도 기회를 가질 수 있으니까. 넌 정은이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고, 그러다 절망에 빠지고, 결국 널 설레게 하는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냉담하게 지켜보았어.
이순정과 철봉은 화물차에 치여 죽지 않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다.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머리가 터졌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긁혔다.화물차가 다가올 때, 철봉은 아직도 땅바닥에서 뒹굴며 소란을 피웠기에 반응을 할 때 이미 늦었다. 그는 손발이 나른해져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나지도 못했다.그렇게 철봉은 화물차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엄마!”철봉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이번에 정말 죽을 줄 알았지만, 화물차는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순식간에 그와 스쳤다.철봉은 놀라서 제자리에 앉아 멍을 때렸다.정신을 차린 후, 그는 자신의 바짓가랑이가 젖었다는 것을 발견했다.방향을 바꾼 화물차는 다시 이순정을 향해 돌진했다.이순정은 본능적으로 도망쳤지만, 화물차는 마치 쥐를 잡는 고양이처럼 그녀를 쫓아갔다.죽일 생각은 없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이렇게 계속 이순정에게 겁을 주었다.이순정은 도망치고 피하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이미 지쳐서 기진맥진했지만, 생존 본능 때문에 그녀는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이때 이순정은 나무에 머리를 박더니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기사는 마침내 공격을 멈추며 화물차를 몰고 훌쩍 떠났다.“엄마... 엄마, 괜찮아?” 철봉은 땅에서 일어나 오줌을 지리며 이순정에게 달려갔다.이순정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있었다. 이마에 엄청난 상처가 생겨 지금 밖으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철봉은 손으로 피를 막으려 했지만, 자신이 방금 바짓가랑이를 만져 손에 오줌이 묻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엄마! 정신 차려!”한참 동안 이순정을 흔들며 부르자, 그녀는 마침내 두 눈을 떴다.“내가 왜 바닥에 쓰러졌지?” 이순정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제야 무엇을 떠올린 듯 이순정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온몸을 떨었고 이를 갈았다.마치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가자...”이순정은 철봉의 손을 덥석 잡으며 힘껏
“다 너 때문이잖아! 어디서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고 있어! 너만 아니었으면 나와 철봉이가 어떻게 강도겸을 찾아갔겠어?”돈을 얻을 수 없게 되자, 이순정도 자애로운 척하고 싶지 않았다.철봉이 맞장구를 쳤다.“그 강도겸이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왜 진작에 말하지 않은 거야? 오늘 나와 엄마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지금 일부러 우리를 해치려고 그런 거지? 그리고 그 6억을 독차지하려고!”연희는 다급히 반박했다.“그런 적 없어! 내가 왜 엄마와 널 해치려 했겠어? 나도 도겸 씨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고!”이순정은 냉소를 지었다.“넌 강도겸의 곁을 그렇게 오래 따라다녔는데,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그래! 이 상처들도 정말 많은 돈을 썼는데, 지금 강도겸 쪽은 한 푼도 주려 하지 않잖아. 그러니 누나가 돈 배상해! 돈 없다고 발뺌하지 마. 강도겸은 너에게 6억을 준 적이 있다고 말했어!”이 일을 말하자, 이순정은 바로 화가 났다. ‘분명히 돈이 있는데도 일부러 숨기다니. 나와 철봉이를 팔아먹은 것과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돈을 받으면 되고. 양심도 없는 계집애!’연희는 시선을 피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나한테도 지금 돈이 얼마 없어. 4백만 원 정도밖에 줄 수 없단 말이야...”“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아? 카드는?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면 여기에 있는 거야?”이순정은 연희가 자신의 성격과 똑같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 계집애 지금 틀림없이 돈을 어디에 숨겨놓았을 거야!’그녀는 울부짖고 있는 연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사방을 뒤지기 시작했다.연희는 마지막 남은 돈까지 빼앗길까 봐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철봉이 가로막았다.“가만히 있어! 나와 엄마는 누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한 줄 알아? 하마터면 차에 치여 죽을 뻔했는데, 사례비를 좀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이순정은 책상과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가방에서 은행카드 한 장을 찾았다.“철봉아! 빨리 와!
“병원비를 납부하라고?” 연희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줄곧 도겸 씨의 계좌에서 돈을 긁지 않았어?”“죄송하지만 그 계좌는 이미 사용금지가 된 상태라서요.”“사용금지?! 왜?!”“이건 대표님께서 직접 신청하신 거예요.”‘도겸 씨가 직접 신청했다니...’“하하하... 강도겸, 당신 정말 너무 독하구나!”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던 연희는 이날 마침내 퇴원했다.그녀는 맑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보면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도겸은 오늘 일찍 퇴근했다.차에 찬 후, 그는 기사에게 분부했다.“별장으로 가.”“네, 대표님.”도중에 도겸은 눈을 잠깐 붙이다가, 창밖을 휙휙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떴다.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침울한 날씨는 곧 비라도 내릴 것만 같았다.매년 장마철이 되면 눅눅하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도겸은 혐오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차는 평온하게 별장 구역으로 들어갔다.이때 기사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끼익.도겸의 몸은 관성으로 인해 앞으로 기울어졌는데, 안전벨트가 없었다면 지금쯤 이미 앞좌석에 부딪혔을 것이다.“어떻게 된 거야?” 그는 말투가 좋지 않았고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죄송합니다.”기사는 재빨리 사과했다.“한 여자가 갑자기 뛰쳐나와서 저도 얼른 브레이크를 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도겸은 고개를 들었다.밖에는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차 앞에 서 있었고, 몸은 이미 푹 젖었다. 머리카락은 목에 달라붙었으며 얼굴은 핏기가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연희는 생얼에 하얀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때 빗물에 젖은 옷감은 그녀의 몸에 딱 달라붙었는데, 여자의 아름다운 몸매를 그대로 그려냈다.마치 폭우 속의 꽃처럼 애처롭게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며 떨어질 듯 말 듯했다.기사조차도 마음이 약해졌다.그러나 도겸은 냉담하게 시선을 거두며 눈빛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이곳의 치안이 언제 이렇게 나빠졌지? 아무나 안으로 들여보내다니. 경비원에게 통지해서 이 여자 끌
연희는 경호원에 의해 길가에 버려졌다.“스스로 가라고 할 때는 가지 않더니, 꼭 남에게 끌려 나가야 속이 시원한 거예요? 빨리 꺼져요!”비가 많이 오는 날, 그들도 나와서 비를 맞고 싶지 않았다.‘모두 이 미친 여자 때문이야.’...비가 그치자, 연희는 넋을 잃은 채로 거리를 서성였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자신의 대학에 도착했다.드나드는 학생들이 웃고 떠들며 생기발랄한 것을 보고 연희는 마음이 씁쓸했다. ‘한때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는데.’이 순간, 연희는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나미야.”연희는 돌진하여 장나미의 팔을 잡았는데,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과 같았다.나미는 깜짝 놀랐다.그녀의 곁에 있던 두 여학생은 연희를 훑어보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나미야, 우리 먼저 안에 가서 기다릴게.”“좋아.” 나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연희를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복잡해졌다. “너... 너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한 달 전 병문안 하러 갔을 때, 연희의 안색은 좀 창백했지만 그래도 고급스러운 음식만 먹었는데.’지금의 연희는 치마가 젖었고 머리카락이 흩어져 마치 처녀귀신과 같았다.“나미야...”연희는 입을 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내 아이가 없어졌어. 그리고 그 사람도 날 버렸고.”나미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연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나 이제 갈 곳이 없어. 그러니 기숙사로 돌아가게 도와줄 순 없어?”나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넌 이미 퇴학을 신청했으니 규정에 따라 기숙사에서 지낼 수 없어. 그리고 내가 너를 돕고 싶어도 어쩔 수 없거든. 네 침대는 지금 다른 학생이 쓰고 있어. 그래서...”연희는 입술이 떨렸고 불쌍한 눈빛으로 애원했다.“나미야, 나 좀 도와줘. 나 정말 갈 곳이 없단 말이야.”나미는 난처함을 느꼈다.“아니면, 돈 좀 빌려줄래? 내가 돈이 생기면 꼭 갚을게!”나미는 한
아침 일찍, 정은은 알람도 없이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몸이 먼저 하루를 시작하려는 듯 움직였다. 그녀는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머리를 정리했다.오늘 오전 수업은 조금 늦게 있어서, 평소와 달리 부엌부터 들렀다. 전날 밤부터 저온 조리기에 찬물로 불려둔 죽이 잘 끓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뚜껑을 여는 순간, 뜨겁게 올라오는 김이 정은의 얼굴을 감쌌다. 쌀과 잡곡이 어우러진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정은은 숟가락으로 조심스레 한 입 떠먹어봤다. ‘음... 달지도 않고, 너무 퍼지지도 않았어. 딱 좋아.’ 이어서 전원을 끄고, 불도 내렸다. 그리고 집에 밀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기에, 이번엔 자기만의 전병을 해보기로 했다. 정은은 먼저 매콤한 양념장을 만들었다. 양파랑 마늘은 잘게 다지고, 된장에 고추장, 그리고 약간의 물을 넣어 자글자글 볶았다. 거기에 설탕 조금과 굴 소스, 그리고 향신료를 살짝 넣어 풍미를 더했다. 양념장은 따로 식힌 정은이 밀가루 봉지를 꺼냈다. 약 500그램을 큰 그릇에 덜고, 소금을 약간 넣어 섞은 후, 젓가락으로 가운데를 십자로 그어 가르듯 나누었다. 한쪽엔 찬물, 다른 쪽엔 끓는 물을 부어가며 각각 섞어줬다. ‘반죽이 식어도 딱딱해지지 않는 비결. 할머니가 알려준 방식이지.’ 섞은 반죽은 5분 정도 숙성시킨 후, 손으로 부드럽게 치댔다.반죽은 금세 매끈하고 끈적이지 않게 변했다. 15분 정도 덮어두고 반죽을 숙성시키는 사이, 정은은 기름장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숙성된 반죽은 전기 팬 크기에 맞게 밀대로 펴고, 표면에 기름장을 바른 후, 피자처럼 8조각으로 칼집을 냈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접어가며 둥글게 뭉친 후, 5분간 더 숙성. 그걸 다시 눌러 납작하게 만들었고, 한 번 더 밀대로 펴줬다. 이제 팬 위에 올릴 차례. 양면이 노릇하게 구워지면, 양념장을 바르고 대파를 송송, 참깨를 솔솔. 정은은 전병을 두 장 부쳐서 작게 잘랐다. 한 끼
재석이 문득 물었다. “내가 왜 웃는지 몰라서 그래?” 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알아야 해요?” “우리 여자 친구랑 관련된 건데,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남자의 눈을 마주했을 때, 그 안에 담긴 사랑이 넘칠 듯 차오르고 있었다. ‘저 눈은 반칙이야.’ “재석 씨, 우리... 질문 게임할래요?” 재석이 눈썹을 올렸다. “어떻게 하는 건데?”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질문 하나씩 해요. 빠르게 묻고, 빠르게 답하기... 거짓말은 금지...” “좋아, 네가 먼저.” 정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몇 번째 여자예요?” 시작부터 강수였다. 하지만 재석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첫 번째. 첫사랑.” ‘첫사랑...’ 그 말이 재석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낮고 묵직한 울림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섹시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톤.이미 예상한 대답이었지만, 막상 재석의 입으로 직접 듣고 나니 조금 놀라기도,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진짜... 한 번도 안 사귀어 봤다고?’ 재석이 질문을 이어갔다. “근데, 왜 그걸 물어본 거야? 그렇게 신경 쓰였어?”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질문이 두 개잖아요.” “그럼 두 번에 나눠서 대답을 들어야겠네.” “좋아요, 우선 ‘왜 물어봤냐’에 대한 대답부터 할게요.” 정은은 살짝 숨을 고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그전까진 재석 씨의 연애사에 관해 물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적인 영역이니까, 굳이 파고들지 않았고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연인이니까...”“그런 건,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쌓아갈지에 대한 기준이 될 수도 있잖아요.” 재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 여자 친구 차례.” 정은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언제부터 날 좋아했어요?” 재석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몇 초간 고민했다. “왜 망설여요?” 그러자 그가 정은의 말을 따라 하듯 장난스럽게 말
“음... 내가 틀린 말 했어요?”정은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재석의 이마에 살짝 핏줄이 떠올랐다. 정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장은혁 씨한테 그렇게 말한 건, 화를 내거나 따지지 않고 먼저 날 걱정부터 했기 때문이에요. 그건 기본적으로 사람 됨됨이가 괜찮다는 뜻이니까요.” “그 뒤로 계속 들이대지 않고 물러난 것도, 자존심 있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죠...”“그리고 일 방면에서는... 솔직히 소재 분야에선 장은혁 씨가 겪어온 게 많아요. 그런 경험이 아니었으면, Z시 공장장이 그렇게까지 대우 안 해줬을걸요?” ‘하아... 진짜...’ 재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운전대가 삐걱하고 미세하게 흔들릴 정도로.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서...”하지만 그 말은 정은의 장난기 어린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여자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으며, 눈빛에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설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뿐인데요? 일부러라니요?”“흠흠...” 재석이 괜히 헛기침했다.“그럼, 우리 여자 친구가 보기에... 나랑 장은혁 중에 누가 더 나아? 일로든, 사람 됨됨이로든.”정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푸흐하하하하...”웃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터져 나왔다. 눈매가 접히고, 어깨가 들썩이고, 결국은 배까지 움켜쥐며 웃기 시작했다.“아 진짜... 그런 걸 물어요? 재석 씨, 그런 거 묻는 사람 아니잖아요! 근데 진짜 묻네요?! 아 너무 웃겨요...”재석은 억울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봐, 일부러 그런 거 맞네. 스스로 실토한 셈이지?”“푸하하하...”“아직도 웃어?” 재석은 눈을 찌푸리며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정은은 눈물까지 맺힌 얼굴로 말했다. “웃으면 안 돼요? 웃긴 걸 어떡해요? 아, 우리 남자 친구 진짜 귀엽다니까요...”‘이 사람, 질투하면서도 날 내
정은은 바로 정색하고 ‘남자 친구’에게 물었다.“몇 시에 도착했어요? 솔직히 말해봐요.”재석은 ‘10분 전’이라고 말하려다, 입술이 굳어졌다. 결국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음... 한 시간 전.”“왜 그렇게 일찍 온 거예요? 비행편도 다 보냈잖아요.”“그냥... 널 빨리 보고 싶었어.”두 사람의 시선이 딱 맞닿았다.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난 고작 3일밖에 안 비웠는데요?”재석이 바로 대답했다.“나한텐, 3일이 3년 같았거든.”“재석 씨...” 정은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진짜... 말 너무 잘하네, 이 사람.’“생각보다 말 잘하네요. 그런 거 잘 못할 줄 알았는데요...”재석은 장난기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거짓말 아니고, 그냥 진심을 말한 거야.”정은의 가슴이 너무나 설렜다.‘이렇게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하니까 더 심쿵하잖아.’‘진짜 반칙이다, 조재석.’이런 다정한 장면이, 멀리서 바라보는 은혁의 눈에는 그야말로 심장을 후벼 파는 칼날과 같았다. ‘조재석...? 그 조재석이라고?’‘병원에서 봤을 땐, 서로 어색하기 그지없던 두 사람이었는데...’ ‘분명히 그땐... 전혀 사귀는 것 같지 않았는데...’은혁의 표정이 굳어지고,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설마... 이거 다 연기인 건가? 날 거절하려고, 연극까지 짠 거야?’점점 차오르는 분노에 못 이긴 은혁은 두 사람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정은 씨!”정은은 좀 놀랐다.“네?”재석도 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은혁은 정은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나를 거절하는 건 괜찮아요. 근데 이런 식으로 거짓말까지 하면서, 스스로를 망가뜨릴 필요는 없잖아요.”‘스킨십까지... 괜히 헛소문만 나면 손해 보는 건 여자 쪽이라고...’은혁은 이번엔 재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정은 씨가 무슨 이유로 이런 유치한 연극에 합을 맞춰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행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