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은 차갑게 말했다.[그 입 잘 단속해.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로 하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난 손을 써서 그 입 다물게 할 수도 있어.]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기사는 핸드폰을 들고 있는 채로 멍을 때렸는데, 등은 이미 흠뻑 젖었다....밤이 찾아오자, 도겸은 창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태양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하늘은 점차 어둠으로 뒤덮였고, 음침한 기운이 구석에서 솟아났다.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유리창에 남자의 훤칠한 모습이 비쳤다.이때 도겸은 갑자기 핸드폰을 들더니 번호를 입력했다.상대방은 아주 빨리 받았다.“재밌었어, 심현빈?”맞은편의 사람은 잠시 멈칫했다.[강도겸, 너 또 무슨 약을 잘못 먹은 거야?]도겸은 웃으며 말했다.“이성수가 너에게 전화하지 않았어?”이성수가 바로 그 기사의 이름이었다.현빈은 침묵에 잠겼다.“그럼 너에게 그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알려줬겠지?”현빈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정말 안타깝네. 이성수는 감옥에 들어갈까 봐 감히 그들을 죽이지 못했어. 이렇게 되면 난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니 네 계획도 물거품으로 된 거잖아.”현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넌 언제부터 알아차린 거야?]“허, 우리가 친구로 지낸지가 언젠데. 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역시 널 잘 알고 있어.”서영숙은 분명히 이순정 모자의 카드를 끊었고, 또 호텔로 하여금 두 사람을 쫓아내라고 했다.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잘 지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최고급 호텔로 바꾸며 매일 회사에 와서 도겸을 기다렸다.만약 뒤에 아무도 없었다면 그들은 지금까지 버틸 리가 없었다.현빈은 가볍게 웃었다.[내가 방심을 했군.]“왜?” 도겸은 핏줄이 불끈 솟아오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왜 이런 함정을 만든 거지?”그래도 절친이었지만, 현빈은 마음을 먹고 도겸을 감옥에 보내려 했다.만약 이성수가 정말 사람을 치어 죽인다면, 그는 바로 체포될 것이며, 처벌을 경감하기 위해 당연
“네가 정은을 위해 날 죽음으로 몰아넣을 줄은 정말 몰랐어.”‘심현빈에게 있어 정은이 뜻밖에도 이렇게 중요하다니.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계획을 짤 줄은 더욱 생각지도 못했어.’[계획?]현빈은 가볍게 웃었다.[그건 아니야. 다만 뒤에서 그 사람들을 조금 도왔을 뿐이니까.]도겸이 말한 것처럼, 이 계획에는 허점이 아주 많았다. 만약 현빈이 직접 나섰다면, 기필코 도겸을 감옥에 보냈을 것이다.[이렇게 간단한 함정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넌 콩밥을 먹어도 싸.]‘밑지지 않는 장사인 이상, 내가 왜 포기를 해야겠어?’성공하면 직접 도겸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도겸은 여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희를 책임져야 했다.‘실패해도 괜찮아, 난 강도겸 잘 사는 꼴 못 보니까.’“정말 비겁해!” 도겸은 이를 갈았다.“한 여자를 위해 날 구덩이로 밀어넣다니?”현빈은 감탄했다.[정은이는 일반 여자가 아니야...]그녀는 소정은이었다.도겸은 냉소를 지었다.“내 앞에서는 진지한 척할 필요가 없어.”[아니, 넌 몰라...]“허, 그래?” 도겸은 현빈을 비웃었다.“이기적인 네 마음을 모른다는 거야, 아니면 네 함정을 몰랐다는 거야? 심현빈, 넌 자신을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만약 네가 정말 정은이를 좋아했다면, 우리가 함께 한 그 6년 동안 왜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을까?”정은이 온갖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슬픔과 절망에 빠져 결국 가슴이 찢어지도록 내버려두었다.“친구의 여자친구라서 넘볼 수가 없었어? 너 같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었으니 어떻게 그런 감정을 느끼겠어? 넌 일부러 그랬던 거야!”도겸은 이성적으로 분석했다.“넌 일부러 정은이 나에게 상처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지켜봤어. 오직 이렇게 해야만 정은은 날 떠나기로 결심할 수 있고, 너도 기회를 가질 수 있으니까. 넌 정은이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고, 그러다 절망에 빠지고, 결국 널 설레게 하는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냉담하게 지켜보았어.
이순정과 철봉은 화물차에 치여 죽지 않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다.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머리가 터졌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긁혔다.화물차가 다가올 때, 철봉은 아직도 땅바닥에서 뒹굴며 소란을 피웠기에 반응을 할 때 이미 늦었다. 그는 손발이 나른해져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나지도 못했다.그렇게 철봉은 화물차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엄마!”철봉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이번에 정말 죽을 줄 알았지만, 화물차는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순식간에 그와 스쳤다.철봉은 놀라서 제자리에 앉아 멍을 때렸다.정신을 차린 후, 그는 자신의 바짓가랑이가 젖었다는 것을 발견했다.방향을 바꾼 화물차는 다시 이순정을 향해 돌진했다.이순정은 본능적으로 도망쳤지만, 화물차는 마치 쥐를 잡는 고양이처럼 그녀를 쫓아갔다.죽일 생각은 없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이렇게 계속 이순정에게 겁을 주었다.이순정은 도망치고 피하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이미 지쳐서 기진맥진했지만, 생존 본능 때문에 그녀는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이때 이순정은 나무에 머리를 박더니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기사는 마침내 공격을 멈추며 화물차를 몰고 훌쩍 떠났다.“엄마... 엄마, 괜찮아?” 철봉은 땅에서 일어나 오줌을 지리며 이순정에게 달려갔다.이순정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있었다. 이마에 엄청난 상처가 생겨 지금 밖으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철봉은 손으로 피를 막으려 했지만, 자신이 방금 바짓가랑이를 만져 손에 오줌이 묻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엄마! 정신 차려!”한참 동안 이순정을 흔들며 부르자, 그녀는 마침내 두 눈을 떴다.“내가 왜 바닥에 쓰러졌지?” 이순정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제야 무엇을 떠올린 듯 이순정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온몸을 떨었고 이를 갈았다.마치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가자...”이순정은 철봉의 손을 덥석 잡으며 힘껏
“다 너 때문이잖아! 어디서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고 있어! 너만 아니었으면 나와 철봉이가 어떻게 강도겸을 찾아갔겠어?”돈을 얻을 수 없게 되자, 이순정도 자애로운 척하고 싶지 않았다.철봉이 맞장구를 쳤다.“그 강도겸이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왜 진작에 말하지 않은 거야? 오늘 나와 엄마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지금 일부러 우리를 해치려고 그런 거지? 그리고 그 6억을 독차지하려고!”연희는 다급히 반박했다.“그런 적 없어! 내가 왜 엄마와 널 해치려 했겠어? 나도 도겸 씨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고!”이순정은 냉소를 지었다.“넌 강도겸의 곁을 그렇게 오래 따라다녔는데,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그래! 이 상처들도 정말 많은 돈을 썼는데, 지금 강도겸 쪽은 한 푼도 주려 하지 않잖아. 그러니 누나가 돈 배상해! 돈 없다고 발뺌하지 마. 강도겸은 너에게 6억을 준 적이 있다고 말했어!”이 일을 말하자, 이순정은 바로 화가 났다. ‘분명히 돈이 있는데도 일부러 숨기다니. 나와 철봉이를 팔아먹은 것과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돈을 받으면 되고. 양심도 없는 계집애!’연희는 시선을 피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나한테도 지금 돈이 얼마 없어. 4백만 원 정도밖에 줄 수 없단 말이야...”“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아? 카드는?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면 여기에 있는 거야?”이순정은 연희가 자신의 성격과 똑같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 계집애 지금 틀림없이 돈을 어디에 숨겨놓았을 거야!’그녀는 울부짖고 있는 연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사방을 뒤지기 시작했다.연희는 마지막 남은 돈까지 빼앗길까 봐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철봉이 가로막았다.“가만히 있어! 나와 엄마는 누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한 줄 알아? 하마터면 차에 치여 죽을 뻔했는데, 사례비를 좀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이순정은 책상과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가방에서 은행카드 한 장을 찾았다.“철봉아! 빨리 와!
“병원비를 납부하라고?” 연희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줄곧 도겸 씨의 계좌에서 돈을 긁지 않았어?”“죄송하지만 그 계좌는 이미 사용금지가 된 상태라서요.”“사용금지?! 왜?!”“이건 대표님께서 직접 신청하신 거예요.”‘도겸 씨가 직접 신청했다니...’“하하하... 강도겸, 당신 정말 너무 독하구나!”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던 연희는 이날 마침내 퇴원했다.그녀는 맑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보면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도겸은 오늘 일찍 퇴근했다.차에 찬 후, 그는 기사에게 분부했다.“별장으로 가.”“네, 대표님.”도중에 도겸은 눈을 잠깐 붙이다가, 창밖을 휙휙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떴다.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침울한 날씨는 곧 비라도 내릴 것만 같았다.매년 장마철이 되면 눅눅하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도겸은 혐오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차는 평온하게 별장 구역으로 들어갔다.이때 기사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끼익.도겸의 몸은 관성으로 인해 앞으로 기울어졌는데, 안전벨트가 없었다면 지금쯤 이미 앞좌석에 부딪혔을 것이다.“어떻게 된 거야?” 그는 말투가 좋지 않았고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죄송합니다.”기사는 재빨리 사과했다.“한 여자가 갑자기 뛰쳐나와서 저도 얼른 브레이크를 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도겸은 고개를 들었다.밖에는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차 앞에 서 있었고, 몸은 이미 푹 젖었다. 머리카락은 목에 달라붙었으며 얼굴은 핏기가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연희는 생얼에 하얀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때 빗물에 젖은 옷감은 그녀의 몸에 딱 달라붙었는데, 여자의 아름다운 몸매를 그대로 그려냈다.마치 폭우 속의 꽃처럼 애처롭게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며 떨어질 듯 말 듯했다.기사조차도 마음이 약해졌다.그러나 도겸은 냉담하게 시선을 거두며 눈빛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이곳의 치안이 언제 이렇게 나빠졌지? 아무나 안으로 들여보내다니. 경비원에게 통지해서 이 여자 끌
연희는 경호원에 의해 길가에 버려졌다.“스스로 가라고 할 때는 가지 않더니, 꼭 남에게 끌려 나가야 속이 시원한 거예요? 빨리 꺼져요!”비가 많이 오는 날, 그들도 나와서 비를 맞고 싶지 않았다.‘모두 이 미친 여자 때문이야.’...비가 그치자, 연희는 넋을 잃은 채로 거리를 서성였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자신의 대학에 도착했다.드나드는 학생들이 웃고 떠들며 생기발랄한 것을 보고 연희는 마음이 씁쓸했다. ‘한때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는데.’이 순간, 연희는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나미야.”연희는 돌진하여 장나미의 팔을 잡았는데,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과 같았다.나미는 깜짝 놀랐다.그녀의 곁에 있던 두 여학생은 연희를 훑어보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나미야, 우리 먼저 안에 가서 기다릴게.”“좋아.” 나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연희를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복잡해졌다. “너... 너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한 달 전 병문안 하러 갔을 때, 연희의 안색은 좀 창백했지만 그래도 고급스러운 음식만 먹었는데.’지금의 연희는 치마가 젖었고 머리카락이 흩어져 마치 처녀귀신과 같았다.“나미야...”연희는 입을 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내 아이가 없어졌어. 그리고 그 사람도 날 버렸고.”나미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연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나 이제 갈 곳이 없어. 그러니 기숙사로 돌아가게 도와줄 순 없어?”나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넌 이미 퇴학을 신청했으니 규정에 따라 기숙사에서 지낼 수 없어. 그리고 내가 너를 돕고 싶어도 어쩔 수 없거든. 네 침대는 지금 다른 학생이 쓰고 있어. 그래서...”연희는 입술이 떨렸고 불쌍한 눈빛으로 애원했다.“나미야, 나 좀 도와줘. 나 정말 갈 곳이 없단 말이야.”나미는 난처함을 느꼈다.“아니면, 돈 좀 빌려줄래? 내가 돈이 생기면 꼭 갚을게!”나미는 한
연희가 물었다.“먹을 거 있어요?”여자는 작은 소리로 웃으며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았다.“들어와요.”연희는 네온사인으로 된 간판을 쳐다보았다.[텔미나오클럽.]그녀는 들어가면 무엇을 직면하게 될지 알고 있었지만, 배고픔과 피곤함, 그리고 명품에 대한 동경 때문에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여자를 따라 그 문에 발을 들여놓았다.‘난 살아야 해. 살아야만 강도겸과 소정은에게 복수를 할 수 있어!’...그러나 현실은 또다시 연희에게 타격을 입혔다.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돈을 벌 수가 없었던 것이다.연희는 아름다운 외모로 즉석에서 채용되었고, 클럽은 그녀에게 무료 음식과 숙소를 제공했다. 그날 밤, 연희는 마침내 편하게 잘 수 있었다.다음날 밤이 되자, 연희는 노출된 미니스커트로 갈아입고 ‘매니저’를 따라 한 룸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자, 아주 좋은 방음 효과로 안의 동정이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문이 다시 열릴 때, 연희는 비틀비틀 안에서 걸어 나왔다.치마는 이미 찢어졌고, 하이힐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의 몸에 지금 속옷밖에 없었다.가슴, 허벅지, 허리, 목에 모두 색깔이 다른 키스자국이 있었는데, 어떤 것은 심지어 핏방울까지 배어있었다.연희는 울어서 두 눈이 부었고 목까지 쉬었다. 그녀는 품에 있는 수표를 꼭 잡았.두 시간에 천만 원.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마치 큰 구멍이 뚫린 듯 찬바람이 안으로 몰려왔다.연희는 사흘이나 버텼다.만신창이가 되어서 4억을 벌 수 있었다.그녀는 탐내지 않고 바로 이곳을 떠나려 했다.그러나 사장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떠나? 이곳이 무슨 마트인 줄 알아?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게? 매일 수천만 원 벌 수 있는데, 좋지 않아? 왜 가려는 거지?”연희는 여전히 떠나려 했다.‘4억이면 충분해. 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사장은 연희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았다.“가도 되지만 위약금부터
연희는 웃음을 지었다.이때, 창고 문이 밖에서 열리더니 한 남자가 들어왔다.그 바람에 불빛이 이곳을 밝게 비추었다.“젠장, 이 여자 지금 손목을 베었잖아? 너희들은 사람을 어떻게 지켜본 거야?!” 사장은 두 경비에게 욕설을 퍼붓더니 다시 허리를 굽혀 앞장선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죄송합니다, 임 사장님. 다 제 잘못입니다.”“얼른 지혈해줘.” 남자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고작 이런 상처로 죽을 리가 없으니까.”“네...”피가 멈추자, 사장은 또 연희의 얼굴에 차가운 맥주를 뿌렸다.연희는 그제야 유유히 깨어났다.남자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신발로 연희의 턱을 들어올렸다.“허, 만약 정말 죽고 싶었다면, 넌 손목이 아니라 목을 베었어야 했어.”연희는 갑자기 찾아온 사람을 보며 아직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당, 당신은...”연희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그를 쳐다보았다.불빛 아래에서 남자는 악마처럼 웃고 있었다.“당신이죠! 당신 맞죠?!”연희는 갑자기 흥분해지더니, 아직도 피가 흐르는 손목을 무시하고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덥석 잡았다.연희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그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사장은 안색이 변하더니 얼른 여자를 걷어차려 했지만, 임시호는 그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서 연희와 마주했다.“날 알아본 거야?”“정말 당신이었어요! 그때 강도겸이 날 버려서 당신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왜 받지 않은 거죠?! 왜 예전처럼 날 도와줄 수 없었던 거냐고요?! 나 지금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우선 난 계속 너를 도울 의무가 없어. 둘째, 넌 이미 자신의 앞길을 망쳤으니 나더러 어떻게 도와주라는 거지?”시호는 연희의 손목을 바라보았다.“죽을 용기가 있는 이상, 왜 살아서 복수할 용기가 없는 거야?”‘복수? 그래, 난 소정은이 싫어 그리고 강도겸은 더욱 싫어. 난 복수를 해야 해!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