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이번에는 돌이 더 크고, 눈도 훨씬 두꺼운 데다가 폭설 예보까지 겹쳐서, 위에서 작업 중단 명령이 내려왔다. 하지만 송지원은 명령을 거부하고 수십 대의 굴착기를 이끌고 강제로 남았다.구조 작업은 애초에 규정을 어겼는데, 이젠 상부의 지시까지 거부하고 있었다. 위에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왔지만, 송지원은 전부 무시했다.이제 송지원은 오직 임정아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살아 있으면 사람을, 죽었으면 시신이라도 꼭 찾아야 한다는 심정이었다.셋째 날, 황금 구조 시간이 이미 지나 버리자, 모두가 의기소침해졌고, 구조 작업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유강후는 앞에 있는 굴착기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서 저 사람 끌어내. 벌써 삼 일째 한숨도 안 잤어. 이대로 두면 큰일 나.”봉현수는 고개를 저었다.“기절시키지 않는 이상 절대 끌어낼 수 없을 거야.”유강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상부에서 사람을 시켜 강제로 끌고 갈 거야. 이렇게 큰 소동을 벌였으니 어르신이라도 해도 지원이를 지킬 수 없을지 몰라.”봉현수는 심장이 철렁해 낮은 소리로 물었다.“옷을 벗기는 거야?”“옷을 벗는 게 대수겠어? 지원이가 돈이 없어 뭐가 없어. 일이야 그만두면 되지만...”유강후는 잠시 뜸을 들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지금 지원이 상대 진영에서 이걸 문제 삼고 있는 중인 것 같아. 법을 어겼다고 몰아붙이면서 아예 감옥에 넣으려고 작정한 것 같아...”봉현수의 얼굴도 순식간에 굳어졌다.“안되면 당분간 해외에 보내면 되잖아.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해외로 돌려.”유강후는 고개를 저었다.“이미 늦었어. 벌써 블랙 리스트에 올랐으니, 출국할 수 없을 거야. 어쩌면 공항에서 바로 구속될지도 모르고 아예 구속 영장을 발급받았을 수도 있어.”그때, 유강후의 핸드폰이 울렸다.연락을 받은 유강후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아버지 연락인데 벌써 지원의 업무와 권한을 중단시키고, 경원시로 압송해 임시로 구금하기
유강후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너희 할아버지 동의를 구한 거야?”송지원은 눈밭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눈치챈 유강후가 버럭 화를 냈다.“너 정말 미쳤어? 그러다가 진짜 큰일 난다고!”송지원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지금 나 눈앞에 뵈는 게 없어요. 고작 하루 이틀 먼저 이곳으로 보낸 건데 문제가 생기면 내가 다 책임지면 돼요.”주변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낙석은 멈추지 않았다. 송지원은 절망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강후 씨 사람이나 잘 지켜요. 난 멈출 생각 없으니 괜히 여기 휘말리지 마요.”송지원에게 있어 임정아를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그리고 구조 작업은 이토록 위험한 상황에서도 강행이 되었고 이따금 시체들이 실려 나왔다.점심시간이 되고 양 비서가 휘청이며 달려왔다.“시장님, 저쪽에서...”송지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양 비서를 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아까 겨우 구출해 낸 버스에 생존자는 세 명뿐이었고 윤정희가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미 코마 상태에 빠져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그리고 함께 발견된 건, 임정아의 또 다른 매니저였는데 돌 아래에 깔려 몸이 벌써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임정아가 이 차량에 없다는 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배우가 대기 차량이 아니면 촬영 장소에 있을 가능성이 컸고 그렇다면 더 큰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른다.임시로 지은 세트장이 낙석과 눈사태를 견뎌낼 리가 없었고 그렇다면 그 안의 사람들은 벌써 쥐도 새도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양 비서가 허겁지겁 달려오자 송지원은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겨우 숨을 내쉬며 상황을 물었다.“새로 발견된 게 있어?”양 비서는 울먹이며 대답했다.“미소 씨 시체를 발견했습니다...”“미소 씨는 사모님과 늘 붙어 다니던 매니저입니다.”송지원은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고 입안에는 피 맛이 돌았다.임정아와 늘 함께이던 미소가 잘못됐다면 임정아도 피해 가지 못했을
“저도 잘 모르지만 여기 아주 중요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어떻게 구조대보다도 더 먼저 와 있는 거죠? 땅을 판 건 얼마나 됐어요?”“보아하니 새벽도 전에 온 것 같은데, 우리도 산사태가 멈추지 않아 날이 밝길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 저건 너무 무모한 짓이에요.”그때, 산꼭대기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산체가 흔들리고 또 여러 돌이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기겁하며 도망갔고 굴착기도 멈춘 채 도망가기에 바빴다.그리고 몇 초 사이에, 몇 시간 공을 들여 겨우 파낸 구역에 돌이 가득 쌓이고 차량 입구마저 완전히 막혀버렸다.강제로 다른 곳에 끌려갔던 송지원이 그 광경에 미친 듯이 달려와 바로 굴착기를 작동해 돌을 파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크고 작은 돌들이 무서운 속도로 굴러떨어지고 있는데 말이다.양 비서도 마음이 급해 다른 굴착기로 달려가려는데 다른 사람이 막아섰다.“양 비서님, 너무 위험해요. 가면 안 돼요.”양 비서는 조급한 나머지 눈물이 다 나왔다.“이러다가 시장님께서 탈이 생기면 제가 무슨 얼굴로 어르신을 보겠어요?”“빨리 시장님 좀 막아주세요. 이러다가 정말 문제 생기겠어요!”그때, 머리 위로 헬기 소리가 들려오고 다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여러 대 대형 헬기가 서서히 가까워졌고 양 비서는 이에 참지 못하고 외쳤다.“유 대표님이에요! 대표님께서 직접 오신 거예요!”얼마 지나지 않아 헬기에 로프가 내려오고 무장된 인력이 빠르게 도착했다.이어 유강후와 봉현수의 얼굴도 보였고 양 비서는 유강후를 보고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듯 달려갔다.“대표님, 아직 낙석이 멈추지도 않았는데 시장님이 이성을 잃고 직접 굴착기를 작동하고 계세요.”유강후는 검은색 아웃도어 재킷을 입었는데 온통 눈밭에서 유난히 돋보였다. 그리고 유강후의 등장에 다들 구원자를 찾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유강후는 헬기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굴착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이곳은 산사태 위험 지역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전한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지력에 문제가 생겨 우리한테 책임을 물으면 어떡해요?”할아버지가 덤덤하게 대답했다.“여보, 드라마 좀 그만 보세. 기억 상실이며 지력에 문제가 생기는 확률이 실제로 얼마나 있다고 그러는가. 그저 돌에 머리를 부딪혀 생긴 문제니, 며칠만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걸세. 저 정도면 다행이지, 옆에 있던 아가씨는...”“배가 고픈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물어보게나. 지금으로서는 복통이 가장 큰 문제이네. 전기도 없고 핸드폰도 배터리가 없는데 배에 문제가 생기면 이 눈밭에 어딜 가서 의사를 데리고 오겠는가?”할머니는 서둘러 임정아에게 물었다.“아가씨, 배는 괜찮아? 아이를 가진 것 같은데 몇 개월 됐는지 기억해?”임정아는 머리가 너무 아파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배는 아프지 않은데 머리가 너무 아파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고요...”할머니는 한숨을 푹 내쉬고 할아버지더러 따뜻한 국을 내오라고 눈짓했다.“배가 멀쩡하다면 다행이네.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으니 눈이 어느 정도 그치면 사람을 찾든 구조요청을 해볼 거야. 아가씨도 운이 좋았고 뱃속 아이도 참 행운이야. 그렇게 큰 돌을 피해 그저 머리만 다쳤으니 천운이지. 게다가 우릴 만나 이렇게 추위도 피하고 그 옆에 아가씨는...”할머니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국을 임정아에게 건넸다.“일단 따뜻한 국으로 몸을 녹이게나. 다른 음식은 없이 이것뿐이지만 좀 들이키게.”임정아는 두통이 점점 심해지고 자신이 아주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도저히 입맛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배가 고프지 않아 괜찮아요.”할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안돼.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살아. 그렇지 않으면 뱃속 아이도 힘들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몸이 견디지 못할 거야.”임정아는 어쩔 수 없이 따뜻한 국을 쭉 들이켰다.그리고 조금 티가 나게 부푼 제 배를 어루만지며 더 오리무중에 빠졌다.대체 밖엔 무슨 일이
피를 토하는 송지원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어쩔 바를 몰라 했다.사방이 소란스러운데 송지원은 정신을 차리고 그 많은 인파를 뚫고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지진이 지나간 인평군은 큰바람이 불고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하룻밤 사이에 사방은 눈으로 덮였고 기온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었다.갑작스러운 자연재해에 다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임시로 지은 텐트에서 밤을 새웠다. 하지만 날이 너무 추운 탓에 나뭇가지를 주어 텐트가 아닌 길거리에 불을 피우며 구조대를 기다렸다.인평군의 읍내에는 그나마 사람의 흔적이 보였지만 눈사태가 생겼던 그 마을은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임정아가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처음 보는 낯선 집이었다. 허름한 집안에는 작은 화로의 나무 장작이 타고 있었고 나이가 60세 남짓한 노부부가 대화하고 있었다.“여보, 어제 같은 지진이 또 일어나진 않겠죠?”“그런 일은 없을 걸세. 생긴다고 해도 강도가 미미한 여진만 있을 테니.”“아이고 하느님, 드디어 끝이군요.”“그래도 안심할 순 없어. 눈사태 때문에 또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르지. 지반이 흔들리다 산사태가 생길 수도 있고 눈이 하룻밤 꼬박 내렸으니 집 밖으론 외출도 불가능하지 않은가.”“우리 이 단칸방은 그해 당신이 나무로 지은 집인데 오늘날 또 이렇게 쓸모가 있네요. 산 아래 사람들은 집도 없이 텐트에서 지낼 텐데 거기에 비하면 다행이죠.”“여긴 당신이 사냥을 위해 지은 집이라 위치가 아주 구석인데 구조대가 언제 우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우릴 찾을 테니 걱정 마 세. 지금 집에 있는 음식으로 보름은 버틸 수 있고 밖에 내린 눈을 녹이면 식수도 해결할 수 있어. 게다가 장작도 있으니 얼어 죽을 일도 없으니 말이야.”“하지만 저 아가씨는 크게 다친 게 아닌지 걱정이에요. 밖에 구조요청이라도 해야 하나...”“굴러떨어진 돌에 머리를 다친 것 같은데, 머리 외에는 타박상도 보이지 않으니, 집에 있는 약으로 큰 문제가 없어 보여.”“저 아가씨도
순식간에 임정아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한 단어가 떠올랐다.‘지진.’동시에 멀리 있던 미소가 필사적으로 그녀를 향해 달려왔지만 불과 몇 걸음 남기고 여러 번 넘어졌다.“지진이에요. 지진. 정아 언니, 거기서 움직이지 마세요. 나무를 잡고 가만히 있어요.”그러나 다음 순간 미소의 목소리는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속에 묻혔다.희미한 빛 속에서 멀리 임시로 설치된 촬영장이 뒤편 산에서 쏟아져 내린 거대한 눈덩이에 덮이는 모습이 보였다.방어벽 역할을 하던 산은 어느새 저승사자의 낫이 되어 있었다.임정아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이쪽으로 거세게 밀려오는 거대한 눈사태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미소야, 빨리 도망가. 산사태에 산이 무너지고 있어. 얼른 도망쳐.”그 말과 함께 그녀는 배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미소의 손을 붙잡고 숲속으로 달려들었다.하지만 여전히 땅은 요동쳤고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묵직한 굉음은 마치 사신처럼 두 사람의 숨통을 조여왔다.지진은 1~2분 동안 이어졌고 마침내 굉음도 멎었다.앞서 달리던 미소는 뒤에서 들리지 않는 발소리에 돌아보았고 임정아가 눈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임정아에게 매달렸다.“정아 언니.”...밤 9시 송지원은 회의 중이었다.갑자기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고 동시에 회의장에 있던 모두의 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지진?”“세상에 7.1 규모 지진이에요.”“인평군에서 7.1 지진 발생했어요.”그는 휴대전화를 들기도 전에 회의장 아래에서 올라오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인평군?’머릿속이 윙 하고 울리며 온 세상이 정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인평군은 오늘 수아가 촬영하러 간 곳이잖아.’함께 간 사람들 말로는 오늘 촬영을 마치고 돌아올 예정이었고 내일은 그가 직접 그녀를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하지만 왜 갑자기 지진이 난 거지? 혹시 내가 아직 꿈꾸고 있는 걸까?’갑자기 그의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리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서둘러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