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가 나타나자 스티븐은 갑자기 에릭을 끌고 나가 버렸고 순식간에 거실에는 박한빈과 루나만 남게 되었다.하지만 이런 서투른 계략이야 뻔히 보이는 박한빈은 지독한 피로감과 염증만 느낄 뿐이었다.만약 에릭의 체면이 아니었다면 이미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지도 모른다.루나는 그의 표정 속에 담긴 불쾌함을 읽은 듯 먼저 입을 열었다.“결혼하셨다고 들었어요.”“네.”“그럼 아내분은요? 왜 함께 오지 않으셨어요?”아내 성유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박한빈의 마음은 더욱 답답해졌다.애초에 이곳에 그녀를 데리고 온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생각만 짙어졌고 차라리 아무도 자신들을 모르는 곳을 택했다면 훨씬 조용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후회막심했다.박한빈은 더 대꾸할 마음조차 없었지만 루나는 그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죄송합니다. 제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 같네요.”그제야 박한빈은 그녀를 흘끗 바라봤다.“죄송하지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루나가 황급히 다가와 서둘러 이런 말을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전 남의 가정을 깨뜨릴 생각 없습니다. 저도 알아요. 아버지는 저를 그저 도구처럼 대표님 곁에 앉히려는 것뿐이라는 걸요. 대표님이 국내에서 운영하시는 기업에 관심이 많으시거든요.”박한빈은 비웃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그래요?”“저 위로 언니가 넷이나 있어요.”루나는 박한빈의 표정을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었다.“사실 언니들도 다 똑같이 팔렸어요. 아내든, 애인이든...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으셨죠.”“제 바로 위에 있던 언니는 시집간 사람이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았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개의치 않으셨죠. 그 남자가 언니를 맞이하면서 섬 하나를 통째로 내놓았으니까요.”말하는 루나의 눈빛과 목소리는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저도 그렇게 팔려 가긴 싫어요.”그러나 박한빈의 인내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그는 그녀를 외면한 채 무심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
한편, 성유리와 셀레나는 무대극을 관람하고 있었다.사실 성유리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셀레나의 권유 덕분이었다.이 섬의 주인은 성유리와 같은 금성 사람이었지만 남편이 라온시에 있어 거주지를 옮긴 상태였다.그리고 이 섬 또한 그녀의 남편 소유지였다.남편은 아내가 연극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직접 배우들을 초청해 이 섬에서 공연을 열어준 것이었다.사실 성유리는 원래부터 보고 싶어 했던 작품이라 마음속으로 무척 반가웠다.다만 그 공연은 원래 국내에서 순회하지 않았기에 남편인 박한빈에게 괜히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을 뿐이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이곳에서 공연을 보게 됐다.비록 개인 극장이었지만 시설은 정교하고 완벽했으며 시야도 훌륭했고 배우들의 열연은 더욱 몰입감을 더했다.성유리는 하늘이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누구보다 집중해서 감상하고 있었다.아이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끝까지 보더니 막이 내린 후에는 무대 위로 올라가 배우들과 악수를 나누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감사합니다.”성유리가 극장의 주인에게 인사했다.“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지녔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별말씀을요.”그녀와 비교하면 셀레나는 훨씬 활기차 보였다.“아, 내가 말을 못 해줬네. 이분은 사실 솜사탕이야. 내가 전에도 언급했던 만화가, 알지?”“알고 있어.”여자는 대답하며 다시 성유리에게 시선을 돌렸다.“전에 뵌 적이 있어요.”“네? 저를요?”성유리가 놀라 물었다.“네. 사인회에서요. 그때는 마스크를 쓰고 계셨지만 인상이 깊어서 잊지 않았습니다.”“죄송해요. 저는 전혀 몰랐네요.”성유리가 말을 잇기도 전에 여자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끊었다.“그땐 제가 아직 결혼하기 전이라 단지 아르바이트로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에요.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아, 그렇군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공연도 끝났으니 이제 내려가시죠.”곧 여자가 말을 이
도우미가 성노을을 뒤뜰로 데리고 가 놀아주는 사이, 박한빈과 다른 사람들은 거실에 남아 이야기를 나눴다.스티븐은 늘 라온시 쪽에 있었지만 지난 2년 동안 국내 경제가 꽤 괜찮게 발전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이날 그는 박한빈과 바로 그 점에 대해 상담하고 있었다.최근 몇 년간 지화 그룹의 발전 속도는 너무 빨랐으니 박한빈이 중간에서 다리를 놓을 수 있다면 일은 훨씬 수월해질 수 있었다.하지만 사실 박한빈은 굳이 끼고 싶지 않았다.스티븐 같은 외부인이 국내에 들어와 돈을 벌고자 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사실 그들은 국내 문화를 존중하지 않았다.박한빈은 열혈 애국자는 아니었지만 자기 영역만큼은 지키는 사람이었다.자신이야 상관없지만 남이 함부로 짓밟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티를 내지 않고 옅은 웃음을 띤 얼굴로 스티븐에게 국내 시장을 분석해 주었다.“솔직히 그렇게 낙관적이진 않습니다.”“지화 그룹과 외국 기업과의 협력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고 지금 다른 길을 열 계획은 없어요.”“국내에 여행을 오시고 싶다면 언제든 환영합니다.”박한빈의 말은 매끄러웠다.스티븐은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지만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웃으면서 받아들였다.에릭은 곧 주제를 바꾸어 회사의 다음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스티븐도 주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회사 운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그럼에도 그는 에릭이 말을 꺼내자 귀 기울여 들었다.박한빈은 잠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뒤를 쓱 돌아봤고 성노을은 여전히 정원 쪽에 있었다.잠시 생각한 끝에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정원에 다가가기도 전에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와 말다툼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옆에 있는 성노을은 태연했다.아이는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손에 든 큐브만 만지고 있었다.성노을의 손은 매우 빨라 몇 초 만에 큐브를 완성하고 다시 섞었다.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걸 느낀 제이크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는 성노을 손에서 큐브를 빼앗으려 다가갔지만 아이는 발을 뻗어 제이크의
박한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성유리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럼 저희 갈게요.”그는 제자리에 서서 미묘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런 반응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성유리와 셀레나는 고작 어제 처음 만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친밀해져서는 심지어 박한빈을 두고 떠나버렸다.두 사람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박한빈은 무표정하게 돌아섰다.그때 에릭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여기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너 시간 있어?”평소 같으면 바로 거절했겠지만 이번엔 박한빈이 바로 대답했다.“있어.”어차피 성유리도 나갔으니 자기도 나가서 즐기면 그만이라고, 고작 하룻밤 집에 안 들어온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박한빈은 문득 떠올렸다.성노을이 아직 위에서 곤히 자고 있다는 것을....“네 아내는?”박한빈이 아이만 데리고 나타난 걸 본 에릭이 의아해하며 묻더니 뒤를 계속 살폈다.“안 왔어.”곧 박한빈이 담담히 대답했다.“두 사람 섬에서 돌아왔다던데?”“응. 그런데 다시 나갔어.”그 말에 에릭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러니 네가 시간 있다고 하지.”“꼭 그렇게 말해야 속이 후련해?”날 선 박한빈의 대꾸에도 에릭은 웃어넘겼다.그때 저택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짧은 금발에 오십에서 예순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표정은 다소 엄격했다.에릭이 곧 웃음을 거두고 소개했다.“내가 소개하지. 이분은 스티븐 씨야.”“안녕하세요.”박한빈이 곧장 손을 내밀었다.그러자 스티븐 또한 악수를 받으며 말했다.“에릭이 당신 얘길 많이 했습니다. 에릭이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겠죠.”“과찬이십니다.”박한빈은 손을 거두며 옆에 있는 성노을을 살짝 끌어당겼다.“이 아이는 로얀 씨 아들인가요?”스티븐의 시선이 금세 성노을로 향했고 박한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이번엔 따로 가르칠 필요도 없이 성노을은 이내 스스로 또박또박 대답했다.“안녕하세
“빨리해요. 저희 시간 없어요.”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셀레나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어디 가는데?”그러자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에게 물었다.그제야 셀레나는 그를 힐끗 보았다.“왜 이렇게 질문이 많으세요? 제가 심심하면 알리 찾아가시라고 말했잖아요. 저희는 저희끼리 놀 거라고요.”셀레나는 말을 마치고 성유리를 쳐다봤다.그러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박한빈에게 이런 말을 내뱉었다.“셀레나 씨가 근처 섬에 놀러 가자고 하네요.”“방금도 개인 섬에서 놀다가 돌아온 거잖아?”“네. 그런데 이번엔 친구분이 저희를 초대했대요.”“안 돼. 절대 안 돼.”박한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러면서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살짝 끌어당기고 셀레나 앞을 가로막았다.“제 아내는 당신이랑 갈 시간이 없습니다.”“왜 이렇게 독단적이세요?”셀레나가 미간을 찌푸렸다.“유리 씨는 사람이지 로얀 씨 소유물이 아니에요. 스스로 어디 갈지 결정할 자유가 있다고요.”“저희는 부부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지낼지에 대해서는 당신이 가르칠 자격 없습니다.”박한빈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고 곧 옆 사람을 향해 말했다.“손님 내보내세요.”“그러는 당신은 뭔데 막 결정하는 거죠? 성유리 씨 의견은 묻지도 않고!”셀레나는 짜증이 나 이를 살짝 악물었다.이내 박한빈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앞으로 나섰다.“그럼 같이 갈까요?”박한빈은 전혀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너 정말 가고 싶어?”“흥, 이번 선물 챙겨서 가려고 했어요. 당연히 가고 싶지... 물어볼 필요가 있나요?”셀레나는 성가신 듯 대꾸했지만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난 안 가.”몇 초 후, 들려오는 그의 대답은 짧았다.“그럼 저 혼자 가요?”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지켜보던 성유리는 조심스레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그러자 하늘이가 그녀 손을 덥석 잡았다.“엄마, 나도 갈래.”성유리는 대답 대신 셀레나를 보았다.아이에게는 원래 조금 불편한 기색을 보이던 셀레나였지만 성유리의 아이란
“하지만...”“누구예요?”성유리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셀레나가 물었다.“남편이요.”“남편이라고요? 성유리 씨한테는 왜 전화했는데요?”“저 데리러 온대요.”“네? 성유리 씨 혼자 집에 못 가요?”셀레나의 목소리엔 노골적인 경계심과 의아함이 묻어났다.그러고는 대뜸 말했다.“남편한테 말해요. 오늘 밤은 여기서 잘 테니까 걱정 마시라고. 내일 제가 직접 잘 모셔다드린다고 전해요.”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수화기 너머 박한빈에게 말했다.“들으셨죠? 저는 굳이 반복 안 할게요.”“안 돼.”박한빈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거기서 밤새우면 위험해.”성유리가 뭔가 반박하려 했지만 셀레나는 그녀의 휴대폰을 낚아채서 대신 말했다.“저랑 유리 씨는 할 일이 많아요. 심심하시면 알리한테 가 보세요. 거기 파티 중이니까. 저희는 신경 안 쓸 테니까 제발 저희한테서 신경 꺼주세요.”말을 마친 셀레나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박한빈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다.이내 다시 알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에릭이 받았다.“알리 씨는?”“왜?”곧 에릭이 뭔가를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아무 반응 없네. 취한 것 같아. 무슨 일인데?”“셀레나 씨가 소유하고 있는 섬이 어디야?”“그걸 왜 물어? 설마 두 사람... 밀회라도 하려는 거야?”에릭이 낄낄 웃었지만 박한빈은 이게 장난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러나 박한빈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셀레나 씨가 내 아내를 데려갔어.”“뭐라고?”에릭은 여전히 침착했다.“그럴 리가 없잖아. 너희 사이에 별 갈등도 없는데 데려가서 뭐 하겠어? 그냥 친구 사귀려는 거겠지. 걱정 안 해도 돼.”“네 아내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계속 말했다.“위치만 알려 줘.”“나도 몰라. 알리가 취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너 지금 어디야?”이번엔 에릭이 순순히 주소를 불러줬고 박한빈은 전화를 끊자마자 밖으로 향했다.그런데 그 뒤로 ‘’꼬리’가 따라붙었다.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