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형빈의 첫사랑이 99번째로 두 사람의 은밀한 영상들을 보내왔을 때, 이연우는 더 이상 그 사람의 마음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힘들게 일궈온 가정을 이혼으로 날려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녀는 고고한 본처 따위가 아니었다. ‘왜 이혼하면 빈털터리로 나가야 하는가? 이혼하기 전에 몇 수백억은 뜯어내 보상받아야지.’ 이혼 후 그녀는 눈부시게 빛났고 수많은 구애자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는 질투심에 미쳐 날뛰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심형빈은 이연우의 집에 쳐들어와 무릎 꿇고 빌며 재결합을 애원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방현준이 서 있었다. 바로 그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는 남자였다. 그는 그녀를 뼛속까지 아꼈고 그녀 역시 그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만을 바라보던 사랑하는 사람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View More심형빈은 그 말을 듣자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했다.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차마 이연우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고 그의 눈빛에는 깊은 죄책감과 후회가 어려 있었다.“심형빈 씨, 당신이 이혼에 동의한다면 저 두 사람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을게요.”이연우는 심호흡하며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심형빈은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번쩍 들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연우야, 정말 나를 버리는 거야?”“그래요, 이제 당신은 필요 없어요!”이연우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안 돼, 난 절대 이혼 못 해. 난...”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렁차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나는 동의한다!”웅장한 목소리가 저택 입구에서 울려 퍼지며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를 뿜어냈다.사람들은 일제히 시선을 돌려 입구를 바라봤다. 말쑥한 검정 양복을 차려입은 심권석이 당당한 풍채를 뽐내며 힘찬 발걸음으로 정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심권석은 그동안 심씨 가문에 벌어진 이 끔찍한 일련의 사건들을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처음에 그는 심형빈이 성인으로서 자신의 감정과 가정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토록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수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심형빈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고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아버지...”짝!심권석은 망설임 없이 심형빈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뺨을 강타한 엄청난 힘에 심형빈의 고개가 옆으로 젖혀졌고 뺨에는 선명한 붉은 손자국이 새겨졌다.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실망감이 어린 눈으로 심권석은 고함을 질렀다.“심형빈, 제발 사내답게 굴어!”심권석은 심형빈이 그토록 우유부단하고 줏대 없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가 보기에 이미 잘못을 저질렀다면 용감하게 결과를 감수해야지 지금처럼 두 여자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심형빈이 우
임금영의 분노는 둑이 터진 홍수처럼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그녀는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고수영을 쏘아보며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짝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수영의 뺨을 후려쳤다.고수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돌아갔고 하얀 뺨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임금영은 손찌검하면서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악을 썼다.“네가 애를 들먹이며 협박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이연우를 납치할 생각조차 안 했을 거야! 이 모든 게 다 네 탓이야!”고수영은 갑작스러운 폭력에 정신이 멍해졌지만 이내 격렬한 분노에 휩싸였다.그녀는 임금영을 거칠게 밀쳐냈고 임금영은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간신히 균형을 잡은 고수영은 손가락으로 임금영의 코를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쳤다.“착한 척, 불쌍한 척은 집어치워! 이연우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건 바로 너잖아! 왜 나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워!”“천벌 받을 년, 너 이 못된 년아!”임금영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흉측하게 고래고래 악을 썼다.그러고는 다시 고수영에게 덤벼들었다.하지만 고수영은 젊고 힘이 좋을 뿐만 아니라 동작도 민첩하여 임금영의 공격을 손쉽게 피했다.임금영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곁에 있던 경찰들은 사태를 감지하고 즉시 달려들어 임금영과 고수영을 억지로 떼어놓고 폭력을 제지했다.경찰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힘껏 붙잡고 소리쳤다.“그만 하세요! 진정하십시오!”하지만 임금영과 고수영은 이미 분노에 휩싸여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고 멈추지 않고 몸부림치며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내뱉었다.심형빈은 눈 앞에 펼쳐진 아수라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머릿속에 수천 마리의 벌이 웅웅거리는 듯한 끔찍한 소음에 시달렸다.그의 안색은 걷잡을 수 없이 어두워졌고 눈빛은 극도의 피로와 깊은 절망감으로 가득 찼다.마침내 그는 더 이상 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참을 수 없어 손을 뻗어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집어 들고 온 힘을 다해 바닥에 내리쳤다.쨍하는 소리
“고수영 씨, 임금영 씨, 지금 당장 경찰서에 가서 조사에 협조해 주십시오.”경찰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무표정하게 말했다.아직까지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이들이 계속 저항한다면 강제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아들아, 나 좀 살려줘! 감옥에 가기 싫어. 정말 겁만 주려고 했던 거야.”임금영은 완전히 겁에 질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다.그녀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심형빈을 바라보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이제 모든 희망을 아들에게 걸고 그가 자신을 구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형빈아, 이건 모두 이연우가 꾸민 짓이야. 이연우와 방현준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봐. 분명히 둘이 짜고 벌인 짓일 거야!”고수영은 시선을 피하며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다급하게 외쳤다.지금 그녀는 이연우가 살아 돌아왔기에 살인 누명은 쉽게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심형빈이 이 모든 것이 이연우의 음모라고 믿게만 만들 수 있다면 해성에서의 그의 세력을 빌려 사건의 국면을 뒤집을 가능성도 있었다.임금영은 마치 구명줄이라도 잡은 듯 쉴 새 없이 맞장구를 쳤다.“맞아, 맞아, 아들아! 이연우가 지금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걸 봐. 걔가 혹시 전부터 저 방현준이랑 짜고 친 건지도 몰라! 절대 이연우한테 속아선 안 된다.”그녀는 말하는 동시에 온갖 험담을 늘어놓으며 이연우를 비난했다.심형빈은 그 말을 듣고 몸이 굳어지며 무의식적으로 이연우와 방현준을 바라봤다. 솔직히 이연우와 방현준이 함께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그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하지만 이연우를 잃을 뻔한 고통을 겪고 나니,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이연우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고수영 씨, 임 여사님, 두 분이야말로 진정한 모녀 관계가 아니신가 싶네요.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솜씨까지 똑 닮았을까요?”이연우는 짐짓 여유로운 태도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한때 바닷물에 젖어 고장 났던 휴대폰이었지만
해성 심씨 가문의 저택, 정원은 온통 하얀색으로 꾸며져 있었고 흰 휘장이 미풍에 나부꼈다.저택 거실 정중앙에는 이연우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주위는 새하얀 장미로 둘러싸여 있었다.심형빈은 이연우가 흰 장미를 좋아했기에 음침한 국화 대신 장미를 택했다.그는 수척한 얼굴에 퀭하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영정 사진 앞에 넋을 놓고 서 있었다.고수영은 굳은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고 두 손을 움켜쥐었다.그저 이연우 장례식일 뿐, 이 장례식이 끝나면 심형빈을 놓고 경쟁할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임금영은 가냘픈 몸에 창백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며 이연우의 사진을 볼 때마다 고통과 죄책감이 스치는 듯했다. 모두가 슬픔과 억눌림에 잠겨 있을 때, 저택의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모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향했다.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이연우가 당당하게 문 앞에 서 있었다.임금영은 이연우를 보는 순간 눈이 크게 떠지며 얼굴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고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더니 이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아, 귀신이다!”그 소리는 고요한 공기를 찢으며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심형빈은 이연우를 보는 순간 동공이 격렬하게 수축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달려가 두 팔을 벌려 이연우를 꽉 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연우야, 살아 있었구나!”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했고 이연우가 다시 사라질까 봐 팔에 힘을 주어 더욱 꽉 안았다.이연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경멸과 조롱의 감정을 드러냈다.그녀는 심형빈을 거칠게 밀쳐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연히 살아 있죠. 나를 이렇게 만든 당신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내가 먼저 죽을 리 없잖아요?”이연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방현준이 이끄는 경찰들이 저택 정원으로 들어섰다.경찰들이 제복
방현준은 진지한 고백 분위기에 젖어 이연우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쭈니’라는 말에 분위기가 깨져 버렸다.방현준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그러고는 밖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강문수, 이 비서를 당장 바다에 던져서 물고기 밥으로 줘 버려!”문 앞에서 엿듣고 있던 강문수는 이미 진동하는 휴대폰처럼 떨면서 웃고 있다가 방현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망쳤다.‘이 비서님을 바다에 던지라고? 던지는 순간 방 대표님도 따라 뛰어내릴 텐데.’이연우는 방현준의 얼굴이 굳어지자 깜짝 놀라 움츠러들더니 놀란 토끼처럼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덮어 버렸다.그 순간, 머리 위로 무언가가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무엇인가가 끼워진 듯했다.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레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을 들어 머리 위를 더듬었다.손끝에 걸린 것을 떼어내 보니, 귀여운 딸기 모양 머리핀이었다. 핀에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몇 개 박혀 있어 반짝거렸다.이연우가 머리핀이 어디서 났는지 궁금해하는 사이, 방현준은 주머니에서 딸기 브로치를 꺼내 자신의 옷깃에 달았다.브로치는 이연우의 머리핀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딸기의 모양, 색깔, 심지어 다이아몬드까지 똑같았다.누가 봐도 커플 아이템이었다.‘설마 방현준이 특별히 나에게 선물하려고 골라온 커플템이란 말인가!’“방 대표님,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이연우는 고개를 들어 눈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잘 간직해 두고 꼭 몸에 지니고 다니세요. 그렇지 않으면...”방현준은 눈을 약간 가늘게 뜨고 이연우를 쏘아보며 알 수 없는 협박 조로 말했다.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그 뒷말은 마치 이연우의 머리 위에 매달린 칼처럼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는 방현준이 만약 그녀가 이 딸기 머리핀을 함부로 버리기라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이연우는 망설였다. ‘멀쩡한 사람에게 이렇게 애매한
“그래요. 잘못을 알면 됐어요!”방현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며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났다.그는 부드럽게 손을 뻗어 이연우의 이불을 살짝 걷어 올렸다.이연우의 다리에 있는 끔찍한 상처를 보자 방현준의 눈썹이 순간 굳어졌다.긁힌 상처와 멍 자국이 그녀의 하얀 피부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던 것이다.그날 밤, 너무 어두워서 이연우가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아파요?”방현준은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보물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연우는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이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겠어요?’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방현준은 그 모습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고 그녀를 아프게 할까 봐 조심스럽게 상처 위에 부드럽게 입김을 불었다.따뜻한 숨결이 상처 위를 스치자 간지럽고 아릿한 느낌이 들면서 이연우는 정말로 상처의 고통이 덜어지는 것 같았다.순간 이연우는 얼굴에 열기가 확 올라오는 것을 느꼈고 얼굴은 순식간에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그녀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이 재빨리 다리를 움츠렸다. 당황한 듯한 몸짓과 눈빛에는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가득했다.“방 대표님, 상처가 너무 흉해서 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이불로 다친 다리와 발을 덮었다.“연우 씨...”방현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 다정한 부름은 마치 깃털처럼 이연우의 심금을 울렸다.이연우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방현준의 눈을 바라봤다.그 친밀한 호칭을 듣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자신을 그렇게 불렀던 것이 집에서 라면을 먹을 때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그 호칭을 들으니 그녀는 이유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이번에 돌아가시면 심형빈과 이혼하세요!”그녀의 반응을 낱낱이 포착하려는 듯 방현준은 이연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이연우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당연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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