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오전 7시. 침실 암막 커튼 틈새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눈을 뜬 차도혁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머리가 거짓말처럼 맑았다.
지독한 편두통도, 눈을 찌르듯 욱신거리던 안압도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몇 시지?’
도혁은 반사적으로 협탁 위의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7시 5분]
순간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젯밤 11시 반에 침대에 누웠으니, 중간에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무려 7시간 35분을 내리 잔 것이었다.
수면제 한 알 없이 아침을 맞이한 것은 21세 이후 정확히 10년 만이었다. 도혁은 거대한 충격과 경이에 휩싸인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자, 은은한 최고급 원두 향과 함께 고소한 토스트 굽는 냄새가 코끝을 부드럽게 감쌌다. 주방 아일랜드 식탁 앞에는 흰 셔츠에 수수한 린넨 앞치마를 두른 시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샐러드 볼을 정갈하게 세팅하며 다른 손으로는 태블릿 화면을 훑고 있었다.
“……일어났습니까, 고용주님.”
시아는 고개를 돌려 도혁의 얼굴부터 살폈다. 눈 밑의 그늘이 옅어져 있었다. 그녀는 정확한 시간에 맞춰 따뜻한 아메리카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온도는 정확히 82도, 잔의 손잡이 방향은 도혁의 오른손잡이 각도에 맞춰 45도로 반듯하게 틀어져 있었다. 도혁의 목울대가 묵직하게 움직였다.
사흘도 못 버틸 거라던 어제의 말이 떠올랐는지 도혁의 귀 끝이 붉어졌다. 시아는 그 변화를 보고도 모른 척 샐러드 집게의 방향만 바로잡았다.
“당신…… 대체 내 방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먼지를 털고, 침구를 정돈하고, 실내 온도를 21.5도로 맞췄을 뿐입니다.”
시아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도혁은 헛기침을 삼키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산미와 부드러운 온도였다.
“……에이전시와의 계약 기간이 한 달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오늘부로 전담 계약으로 전환합니다. 기본급은 기존의 세 배로 올리고, 원한다면 전용 기사와 개인 법인 카드도 지급하지.”
이 여자가 나가면 다시 그 지옥 같은 불면증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혁의 눈빛에는 감추지 못할 절박함이 짙게 서려 있었다.
하지만 시아의 반응은 지극히 덤덤했다.
“기본급 인상은 계약서대로 처리해 주시고, 개인 카드는 필요 없습니다. 딱히 쓸 곳도 없으니까요.”
‘쓸 곳이 없다고?’
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27세의 나이에 값이 드러나지 않는 수수한 셔츠를 입고 남의 집 상주 하우스키퍼로 들어온 여자.
도혁에게는 그 거절이 검소함이 아니라 경계심처럼 보였다.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는 거군. 대놓고 도우면 동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
도혁은 혼자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는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방식으로 생활을 챙겨주겠다고.
그때, 현관 도어록이 요란하게 울리며 거실 문이 활짝 열렸다.
“도혁 씨! 나 왔어!”
짙은 명품 향수를 풍기며 들어선 여자는 유력 정치인 신태국의 외동딸, 신채린이었다. 도혁의 모친이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정략결혼 상대이자, 이미 태성가 안주인 행세를 하는 인물이었다.
채린은 거실에 단정히 서 있는 시아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누구야, 이 천박한 차림의 여자는?”
도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가로막아 섰다.
“새로 온 하우스키퍼입니다. 불쑥 찾아오는 버릇은 여전하군요.”
“어머, 내가 도혁 씨 집에 오는데 연락까지 해야 해? 그나저나 하우스키퍼를 왜 이렇게 젊고 반반한 애로 뽑았어?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야?”
채린은 시아를 노골적으로 훑어내렸다. 도혁의 집에 머무는 젊은 여자를 보는 채린의 눈동자에 날 선 질투와 독기가 어렸다.
도혁이 출근 준비를 위해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사이, 채린은 거실 장식장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장식장 위에는 3억 원을 호가한다고 알려진 프랑스 왕실풍 앤틱 백자 도자기가 놓여 있었다.
채린은 시아를 돌아보며 서늘하게 비웃었다.
“야, 너. 물 한 잔 떠와. 목마르니까 얼른.”
“네.”
시아가 쟁반에 얼음물을 받쳐 다가서는 순간, 채린은 슬쩍 발을 뻗어 장식장 하단을 툭 찼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도자기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요란한 굉음과 함께 박살 났다.
쨍그랑—!
날카로운 도자기 파편이 대리석 바닥 사방으로 하얗게 튀었다. 채린은 기다렸다는 듯 과장된 비명을 지르며 시아를 향해 사납게 삿대질을 했다.
“이 미친년이! 감히 3억짜리 도자기를 깨뜨려? 도혁 씨 꼬셔보려고 들어온 주제에 어디서 몸을 함부로 놀려!”
시아는 바닥의 파편과 채린의 발끝 각도를 차분하게 응시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분노에 눈이 뒤집힌 채린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무릎 꿇고 빌어. 이 더러운 하녀야!”
채린의 손바닥이 시아의 뺨을 향해 날아들었다.
연회장 사건 뒤, 신태국 일가에 대한 수사와 발할라의 특별 실사가 동시에 시작됐다. 감사팀은 몇 주에 걸쳐 태국홀딩스 계열사의 거래를 추적했다.예비 보고서에서 드러난 8,000억 원대 매출 부풀리기와 중복 담보는 시작에 불과했다. 해외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비자금 조성과 조세포탈 정황까지 확인되면서 신태국은 구속기소 됐다.신채린 역시 보석 절도 증거를 조작하고 시아에게 누명을 씌운 혐의, 불법 신원 조회를 지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사건 전에 출동 지령을 받아 체포 절차를 서두른 형사 반장과 관련 경찰관들은 감찰 조사를 받았고, 정치권의 부당한 개입 경로도 수사 대상에 올랐다. 이후 1심에서 두 사람에게 중형이 선고됐다.범죄수익은 추징·환수 절차에 들어갔고, 태국홀딩스는 채권자 관리 아래 정상 계열사와 부실 회사를 분리한 뒤 청산 수순을 밟았다. 시아는 끝까지 개인 감정으로 결론을 앞당기지 않았다.태성중공업 투자 건에서는 공식적으로 회피 상태를 유지했다. 그 사이 태성중공업은 발할라 캐피털의 독립 심의위원회로부터 정식 실사를 거쳐 3조 원 규모의 유상증자 투자를 전격 유치했다.투자 유치 뒤 태성중공업은 유동성 위기를 넘겼고, 차도혁은 이사회의 지지를 받아 태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가장 먼저 손본 것은 가족이 경영과 인사에 사적으로 개입하던 관행이었다.한명숙은 이사회와 도혁의 집에서 모두 한 발 물러났다. 시아에게는 변명 없이 사과문을 보냈고, 직접 만나고 싶다는 요청도 시아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렸다.시아는 사과를 받아들이되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다정한 고부 사이보다, 지켜야 할 선을 아는 가족에 가까워졌다.***그리고 1년 뒤, 5월의 화창한 봄날. 두 사람의 결혼식은 서울의 한 프라이빗 가든에서 열렸다.시아가 가장 오래 바라본 사람은 단상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도혁이었다. 도혁은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도 태연하던 사람답지 않게 손끝을 굳게 말아 쥐고 있었다.시아가 가까워지자 그가 아주 작게 물었다.
“나한테도 전부 거짓말이었습니까?”도혁의 물음이 텅 빈 대연회장에 낮게 울렸다. 배신감보다 더 큰 것은 자신이 시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가난한 하우스키퍼라 지레짐작해 명품 가방을 몰래 넣고, 월 2,000만 원이면 생활고를 덜어줄 수 있다고 믿었던 일이 차례로 떠올랐다. 시아가 그 모든 행동을 재미있는 구경거리로만 여겼을까 봐 견디기 어려웠다.도혁은 마른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당신 눈에는 내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10조를 가진 사람 앞에서 몇 푼으로 지켜주겠다고 나섰으니.”시아는 도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넓은 연회장에는 이미 두 사람뿐이었다.시아는 그의 정면에 서서 바로 답했다.“처음 시작은…… 거짓말이 맞았습니다.”시아의 낮고 맑은 음성이 도혁의 귓가에 닿았다. 도혁의 단단한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3년 동안 하루 2시간도 제대로 못 자며 일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먼저 계산부터 의심하게 됐고, 청소하고 물건을 정돈할 때만 머리가 조용해졌어요. 그래서 신분을 숨기고 당신 집에 들어갔습니다.”시아는 도혁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회장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건 거짓말이 맞아요. 하지만 이름과 나이도, 청소가 좋다는 말도, 당신 곁에서 편해졌다는 마음도 거짓이 아닙니다.”도혁의 눈꺼풀이 떨렸다.“나를 불쌍해서 받아준 겁니까?”“아니요.”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처음에는 고용주였고, 그다음에는 잠을 걱정하게 되는 사람이 됐고,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도혁은 한참 뒤에야 물었다.“그럼 왜 끝까지 말하지 않았습니까?”시아의 시선이 처음으로 조금 내려갔다.“당신이 내 직함을 알기 전의 강시아를 어떻게 대하는지 더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한 순간 지금의 관계가 끝날까 봐 겁났어요.”시아가 먼저 두려웠다고 인정한 것은 처음이었다.“그렇다고 당신의 선택권을 늦게 준 일이 정당해지는 건 아닙니다. 미안해요.”도혁은 곧바로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상처가 없던
시아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 위에 머물렀다. 신태국과 신채린은 숨이 멎을 듯한 공포 속에서 시아의 손끝만을 응시했다.승인 버튼을 누르면 기사회생이지만, 거절을 누르면 계열사 전체가 유동성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시아의 손가락은 승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화면을 밀어내며 비서실장을 향해 지시했다.“승인 보류.”신태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강 회장님, 오늘 일과 투자 판단은 별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그래서 거절하지 않은 겁니다.”시아의 목소리는 낮고 분명했다.“승인 보류. 발할라 국제 감사팀과 외부 회계법인을 투입해 태국홀딩스 전 계열사 특별 실사를 시작하세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신규 자금 집행은 중단합니다.”“다만 직원 급여와 정상 납품 대금은 별도 관리 계정으로 분리하세요. 대주주의 사적 인출만 막고 운영 자금까지 끊지는 않습니다.”그 아래에서 일하는 직원들까지 벌줄 생각은 없었다.“그건 사실상 사형 선고요! 감정적인 보복 아닙니까?”“발할라의 자금은 누군가의 정치적 방패가 아닙니다. 투자 가치가 있는지부터 원칙대로 검증하죠.”시아는 화면에 표시된 위험 항목을 하나씩 열었다.“실사는 신청 회사가 발할라와 체결한 약정에 포함돼 있습니다. 자료가 정상이라면 지원안은 다시 심사됩니다. 문제가 있다면 오늘 일이 없어도 자금을 받을 수 없고요.”신태국은 더 반박하지 못했다. 발할라는 차환 심사를 위해 태국홀딩스의 재무제표와 담보 자료를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자료는 실사 서버에 모였다. 1시간 뒤 나온 것은 확정 판결이 아니라 예비 보고였다.계열사 사이에서 반복된 매출 8,000억 원, 같은 부동산을 여러 차례 담보로 잡은 정황, 해외 페이퍼컴퍼니로 흘러간 자금. 제출 자료만 대조해도 설명되지 않는 구멍이 너무 컸다.비서실장이 연회장 한쪽에서 보고서를 읽었다.“허위 재무정보 제출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존 대출 1조 2천억 원도 약정 위반 여부를 심사해야 합니다.”시아는 곧바로 지시했다.“추가 인출
“회, 회장님……?”신채린은 입을 벌린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도둑으로 몰아세운 하우스키퍼 앞에 발할라 임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그 여자가 개인 자산 10조 4,000억 원을 보유한 발할라 캐피털의 최대주주이자 회장이었다. 연회장의 웅성임이 한순간 끊겼다.“저분이 얼굴을 공개하지 않기로 유명한 강시아 회장이었어?”“발할라 의결권 지분을 혼자 쥔 그 최대주주 말이야?”하객들의 휴대전화 화면에 발할라가 방금 배포한 신원 확인 보도자료가 떴다. 그동안 이니셜로만 알려졌던 최대주주의 실명, 강시아와 직함, 자산 규모가 처음으로 함께 공개돼 있었다.누군가 촬영 영상을 지우려 하자 시아가 법무팀에 말했다.“현장 영상은 증거가 될 수 있으니 강제로 삭제시키지 마세요. 제 얼굴을 상업적으로 유통할 때만 정식 절차로 대응하고요.”법무팀장이 고개를 숙였다. 형사 반장은 수갑을 집어넣고 증거 보존 절차부터 다시 지시했다.한명숙 여사는 충격과 공포로 호흡 곤란을 일으키며 비틀거리다 소파를 짚고 주저앉았다.“바, 발할라의 총수 강시아……? 그 10조 자산가가 왜 내 아들 집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어……!”시아는 한명숙의 질문에 시선을 돌렸다.“제 개인 일정입니다.”그 한마디로 설명은 끝이었다. 백지수표를 내밀며 얼마면 나가겠느냐고 묻던 사람이, 이제는 시아가 왜 자기 아들 집을 선택했는지조차 감히 캐묻지 못했다.한명숙은 자신이 수표에 적힌 ‘0원’을 조롱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가장 말을 잃은 사람은 차도혁이었다.도혁은 멍하니 눈앞의 시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활고에 시달린다고 지레짐작해 에르메스 가방과 다이아몬드 시계를 서랍에 넣고, 월 2,000만 원이면 마음을 놓을 거라 믿었던 여자였다.방탄 세단을 거절한 이유도, 법인 카드에 관심이 없던 이유도 이제야 너무 명확했다. 그런데 시아는 그 모든 오해를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준 가방을 선물이라는 이유로 받아줬다.그 사실까지 떠올리자 도혁의 얼굴이
“3분? 교도소로 끌려갈 시간이라도 세는 거니?”신채린은 콧방귀를 뀌며 형사들에게 손짓했다.“반장님, 뭐 해요? 당장 체포하세요!”형사 반장이 도혁에게 비켜서라고 경고한 순간, 시아의 손목시계가 짧게 진동했다. 오후 7시.정지돼 있던 보안 채널이 열리고 현장 기록 전송 완료 표시가 떴다. 도혁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바깥에서 굵은 회전익 소리가 가까워졌다.두두두두—!성북동 저택의 통유리창이 낮게 떨렸다. 한명숙과 신채린, 하객들이 일제히 창밖을 돌아봤다.검은 헬기 한 대가 인근 전용 헬리포트로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동체에는 발할라 캐피털의 금빛 문장이 선명했다.“발할라 전용기……?”신태국 의원이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곧이어 검은 세단 6대가 정문 검색대를 통과해 대연회장 앞에 멈췄다.먼저 내린 발할라 보안팀이 태성가 경호 책임자에게 신원을 제시했고, 뒤이어 법무팀과 디지털 포렌식 담당자들이 들어왔다. 누구도 무기를 들거나 길을 막지 않았다. 대신 현장 책임 변호사가 형사 반장 앞에 증거 보존 요청서와 변호인 선임계를 내밀었다.“강시아 씨의 대리인입니다. 체포 절차를 진행하기 전에 새로 확보된 증거와 현장 훼손 정황부터 확인해 주십시오.”형사 반장이 서류를 받아드는 사이, 발할라 한국 지사 대표와 아시아 투자 총책임자, 비서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에 들어왔다. 비서실장은 손에 든 태블릿을 켜며 연회장 메인 스크린에 전송했다.첫 화면에는 역추적을 확인한 블랙오션 대표가 법무팀에 제출한 의뢰서와 결제 영수증, 전날 발할라 보안망에 접속한 기록이 떴다. 다음 화면에는 연회장 서비스 통로의 독립 백업 영상이 재생됐다.정전 직전, 채린의 수행비서가 보석 감정사에게 봉투를 건네고 비상 전원실로 들어가는 모습. 암전 중에는 같은 수행비서가 시아와 부딪친 뒤 열린 가방 안으로 목걸이를 밀어 넣는 장면이 적외선 카메라에 남아 있었다.시아의 손목시계가 기록한 충돌 시각과 영상의 타임코드도 일치했다. 마지막으로 경찰 출동 요청이 보석 분실 신
80억 원짜리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 ‘바다의 눈물’이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져 짧은 금속음을 냈다. 푸른 보석이 조명 아래서 번뜩이자 성북동 태성가 본가 대연회장이 일시에 조용해졌다.“저 여자 가방에서 나온 거 맞지?”“세상에, 80억짜리를…….”경악과 멸시가 뒤섞인 수군거림이 연회장에 번졌다. 신채린은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빼도 박도 못할 현장 물증이 나왔어요! 저 천박한 도둑년이 태성가의 고가 보석을 훔친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고요!”한명숙 여사 역시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삿대질을 해댔다.“천하의 더러운 손버릇을 가진 계집 같으니! 감히 태성가 자선 연회에서 80억짜리 보석을 훔쳐? 당장 경찰 불러! 수갑 채워서 끌고 가!”연회장 정문이 열리며 인근에서 대기하던 형사와 경찰관 6명이 들어왔다. 신태국 의원실 신고는 분실 확인 전에 접수돼 있었다.형사 반장은 현장 보존이나 목격자 분리보다 수갑부터 꺼내 들고 시아에게 다가왔다. 정전이 끝난 뒤 경찰이 연회장에 들어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2분 43초였다.성북동 관할 순찰차가 신고를 받고 출동해 도착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았다. 시아는 천장 카메라와 형사 반장의 보디캠을 차례로 확인했다.“출동 지령 접수 시각을 말씀해 주시죠.”반장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피의자가 따질 일이 아닙니다.”“그럼 지금 답변도 기록에 남겠군요.”하객들이 휴대전화를 들어 촬영하자 반장은 입술을 굳혔다. 채린은 체포를 재촉했다.“강시아 씨, 고가 보석 절도 혐의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묵비권을—”시아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가방은 제가 독점 관리하지 않았고, 강제 수색 전에 사진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쇼케이스와 비상 전원 기록부터 보존하세요.”“그건 조사실에서 말하십시오.”반장의 대답은 지나치게 빨랐다. 시아의 시계는 그 목소리까지 기록했다.“그 더러운 손 치워!”연회장 입구를 가르고 벼락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숨을 헐떡이며 들이닥친 차도혁이 인파를 거